사려니 숲

사려니 숲

사려니 숲에
갔었지

사각거리는 붉은 송이 밟으며
안개가 스며드는 길을 따라
숲으로 들어갔지

사방은 고요하고
숲은 침묵에 잠겨 있었지
졸참나무, 서어나무, 때죽나무 무성한 숲 속
노루 한 마리
시간과 함께 침묵 속에 멈춰 있었지

그곳은
차마 사람의 발길이 닿지 말아야 했을
완전한 세상
속세로부터 이어지던 숲길이
점점 사라지고 말았지

사려니 숲에 다시
갈 수 없었지

<소요유, 2013년 7월>

어제도 사막 모래언덕을 넘었구나 싶은 날
내 말을 가만히 웃으며 들어주는 이와
오래 걷고 싶은 길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보다 다섯 배 열 배나 큰 나무들이
몇 시간씩 우리를 가려주는 길
종처럼 생긴 때죽나무 꽃들이
오리 십리 줄지어 서서
조그맣고 짙은 향기의 종소리를 울리는 길
이제 그만 초록으로 돌아오라고 우리를 부르는
산길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것들을 주체하기 어려운 날
마음도 건천이 된 지 오래인 날
쏟아진 빗줄기가 순식간에 천미천 같은 개울을 이루고
우리도 환호작약하며 물줄기를 따라가는 질
나도 그대도 단풍드는 날이 오리라는 걸
받아들이게 하는 가을 서어나무 길
길을 끊어 놓은 폭설이
오늘 하루의 속도를 늦추게 해준 걸
고맙게 받아들인 삼나무 숲길
문득 짐을 싸서 그곳으로 가고 싶은
길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한라산 중간산
신역(神域)으로 뻗어 있는 사려니 숲길 같은

<도종환, 사려니 숲길>

나무의 시

나무의 시

나무에 대한 시를 쓰려면 먼저
눈을 감고
나무가 되어야지
너의 전생애가 나무처럼 흔들려야지
해질녘 나무의 노래를
나무 위에 날아와 앉는
세상의 모든 새를
너 자신처럼 느껴야지
네가 외로울 때마다
이 세상 어딘가에
너의 나무가 서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지
그리하여 외로움이 너의 그림자만큼 길어질 때
해질녘 너의 그림자가 그 나무에 가 닿을 때
넌 비로소 나무에 대해 말해야지
그러나 언제나 삶에 대해 말해야지
그 어떤 것도 말고

<류시화, 나무의 시>

이 시는 류시화가 아들 미륵이에게 주는 시였는데, 아내는 이 시를 읽으며 내가 생각난다고 했다. 아내는 나를 아들처럼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전생애가 흔들릴 때, 내가 외로울 때, 이 세상 어딘가에 (아니 정확히 얘기하면 내 옆에) 서 있는 나무가 바로 아내다. 항상 고맙고 사랑하는 나의 나무가 아내다. 나도 그의 나무가 될 수 있을까.

행복한 사내

행복한 사내

생일을 맞아, 아내와 딸한테 이런 축하를 받는 사내는 참으로 행복할 것이다. 세상을 아니 우주를 움직이는 궁극적인 힘은 사랑임을 믿는다.

아내의 생일카드

딸의 생일카드

행복하게 사는 비법

행복하게 사는 비법

몇해 전 처음으로 했던 결혼식 축사의 일부다. 이 축사와 별 관련은 없겠지만, 여하튼 그 신랑 신부는 슬기롭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전략>

언젠가 두 사람이 사귄다는 소식을 듣고는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차분하고 똑똑하고 착한 신랑에, 활발하고 사교적이며 아름다운 신부. 이것이 바로 우리가 생각하던 이상적인 신랑 신부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전혀 모르던 남녀가 만나서 결혼을 하고, 한평생을 같이 산다는 것은 보통 인연이 아닙니다. 게다가 서로를 보듬어 주고 보완해 줄 수 있는 인연은 하늘이 내리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남녀 간의 사랑과 결혼에 관한 한 운명론자입니다.

이렇게 운명적으로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는 신랑 신부에게 제가 알고 있는 “행복하게 사는 비법” 세 가지를 전하고자 합니다.

우리들은 흔히 인생의 목표를 행복이라 말합니다. 우리들은 미래의 행복을 위해 지금 이 순간을 희생하려 합니다. 하지만, 어느 성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먼 훗날 달성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인간의 마음은 행복을 찾아 늘 과거나 미래로 달려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자신을 불행하게 여기게 됩니다. 행복은 미래의 목표가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선택입니다. 지금 이 순간 행복하기로 선택한다면, 우리들은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복을 미래의 목표로 삼으면서, 지금 이 순간 행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는 것입니다. 따라서 행복의 첫 번째 비법은 행복을 미래의 목표로 삼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행복하지 않으면 영원히 행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행복의 두 번째 비법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 것입니다. 남편의 연봉을 비교하지 말고, 아내의 외모를 비교하지 말고, 아이들의 성적을 비교하지 마십시오. 행복은 자기 자신과 가족에게 아무 부족함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신랑에게는 신부가, 그리고 신부에게는 신랑이 이 세상에서 선택할 수 있는 최고의 반려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비교와 경쟁은 행복의 가장 큰 적입니다.

마지막으로, 행복은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혼자만 잘 살고, 혼자만 행복한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자신의 행복은 사랑하는 사람과 다른 사람들의 행복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행복은 언제나 우리 마음 속에 있는 파랑새입니다. 찾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오늘 결혼하는 신랑 신부는 지금 이 순간 무한히 행복할 것이며, 이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참석해주신 하객 여러분들도 이 아름다운 신랑 신부를 보면서 행복하실 겁니다. 이렇게 축사를 하는 저도 가슴 깊이 행복을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결혼에 관한 시 한 편을 낭송하며, 이 축사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두 사람은 비를 맞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지붕이 되어 줄 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춥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따뜻함이 될 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더 이상 외롭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동행이 될 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두 개의 몸이지만
두 사람 앞에는 오직
하나의 인생만이 있으리라
이제 그대들의 집으로 들어가라
함께 있는 날들 속으로 들어가라
이 대지 위에서 그대들은
오랫동안 행복하리라.

신랑 신부가 늘 건강하고 평안하고 행복하길 축원합니다. 고맙습니다.

개미약

개미약

건물관리인이 개미약을 놓으면서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개미약에는 유인물질이 들어있어 개미들은 먹이인 줄 압니다. 개미들이 이 약을 물고 집으로 들어가 모두 나누어 먹게 되면, 개미집에 있는 모든 개미들은 죽게 되지요.”

개미들이 하나씩 둘씩 개미약을 나르기 시작했다. 그것이 자기 종족을 몰살시키는 독약인지도 모든 채, 본능으로 내재된 근면성 하나로 부지런히 개미약을 물고 집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밤새 죽어간 개미의 시체들이 바닥에 널려 있었다. 몇몇은 아직도 고통의 몸부림을 치고 있었고, 몇몇은 여전히 개미약을 물고 집으로 들어갔다.

독약을 먹고 밤새 몸부림쳤을 개미들을 생각해본다. 그 고통을 깨닫지 못하고, 본능대로 독약을 먹이인 줄 알고 집으로 물고 들어가는 개미들이 처연하다. 죽음에 다다르기가 이렇게 어렵고 고통스러울 줄이야.

어차피 죽일 개미였다면, 고통없이 단숨에 죽여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개미약은 여전히 미완성이다.

세 가지 메세지

세 가지 메세지

이븐 알렉산더가 죽음 너머의 세계에서 가져온 세 가지 메세지는 다음과 같다.

“그대는 진실로 사랑받고 있고 소중히 여겨지고 있어요, 영원히.”

“그대가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대가 저지를 수 있는 잘못은 없어요.”

<이븐 알렉산더, 나는 천국을 보았다, p. 60>

세상을 지배하고 지탱하는 본질은 오직 “사랑”이라는 이 메세지는 이 세상 모든 이들을 안도하게 한다. 욕망과 공포가 떠나가고 오직 사랑으로 존재할 수 있다면 죽음 너머 세계뿐만 아니라 죽음 이전의 세계도 천국이 될 것이다.

오늘도 딸아이는 전화기에 대고 말한다. “아빠, 사랑해.” 그 한마디가 세상을 천국으로 만든다.

노빠로 산다는 것

노빠로 산다는 것

노빠로 산다는 것은
가슴에 주홍글씨 새기는 것
상식과 원칙을 부여잡고
사람 사는 세상 만들겠다는 죄 아닌 죄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 되어
돌팔매를 맞는 것

노빠로 산다는 것은
바람개비 하나 가슴에 품는 것
바람이 불면
행여 그가 왔을까
그리움이 눈물 되고 강물 되어
바다로 나아가는 것

노빠로 산다는 것은
어둠이 빛을 가리고
희망이 절망을 뛰어 넘지 못하는
탐욕과 공포의 벼랑 끝에서
노란 풍선 하나
푸른 하늘에 날리는 것

<소요유, 2013년 5월>

벌써 4년. 5월은 어김없이 찾아오고, 올해도 당신을 생각하며 눈시울을 붉힙니다. 누가 알았겠습니까. 당신을 좋아하고 사랑했다는 죄가 이런 천형 같은 끝없는 그리움이 될 줄.

“세상을 바꾸었다고 생각했는데 물을 가르고 온 것만 같다”는 당신의 말이 귀에서 울립니다. 애초에 세상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지도 아니 너무 오래 걸리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너무 빨리 세상에 왔고,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났습니다. 멀리서나마 당신을 볼 수 있었던 그 순간이 꿈만 같습니다.

갈 길 잃은 노빠는 올해도 풍선을 날리고, 바람개비를 돌리며 당신을 생각합니다. 편히 쉬시길 기도합니다.

악(惡)이 존재하는 이유

악(惡)이 존재하는 이유

이븐 알렉산더는 잘 나가는 뇌과학자이자 신경외과 의사였다. 그는 (성인 천만명 당 한 명 꼴로 발병할 수 있는) 원인모를 박테리아성 뇌막염으로 7일간 뇌사 상태에 빠졌다가 죽음 이후의 세계를 경험하고 돌아온다.

존재의 근원이 들려준 악(惡)이 불가피한 이유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증거하였다.

악이 불가피한 이유는, 악이 없으면 자유의지가 불가능해지고 자유의지가 없으면 우리가 성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고 신이 염원하는 그런 모습으로 되어갈 기회가 없게 된다. 우리의 세계에서 때로는 악이 끔찍하고 매우 강력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더 큰 그림에서 본다면 사랑이 지배적이고 궁극적으로 승리를 거둘 것이다.

<이븐 알렉산더, 나는 천국을 보았다, p. 71>

이러한 설명은 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 박사의 말과 맥이 닿아 있다. 증거는 계속 쌓여가고 있고, 첨단 과학자의 입을 통해 전달되고 있다.

전기 나간 날

전기 나간 날

아침에 출근하니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는 멈췄고, 사무실 형광등은 빛을 발하지 않았다. 컴퓨터에 전원 공급이 끊겼고, 인터넷도 연결되지 않았다.

사방이 고요한 침묵이었다.

창문을 활짝 열고 책상 앞에 앉아 묵혀 둔 책을 꺼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니, 모처럼 여유가 생겼다. 하루 종일 그 여유를 즐기고 싶었다.

여직원에게 제발 시설팀에 전화하지 말라고 부탁했지만, 여직원은 피식 웃으면서 시설팀에 전화를 걸어 닥달했다. 그리고 한 시간 후쯤 세상은 다시 소음 속으로 되돌아갔다.

일주일에 한나절 쯤은 전기없는 세상에서 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따사로운 봄볕 아래 책을 보든지, 동료들과 도란도란 얘기꽃을 피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때로는 침묵 속의 여유를 누리는 것도 필요한 법이다.

프리지아

프리지아

아름답고 따사로운 봄날이었다. 오랜 겨울의 추위를 이겨내고 매화나무가 꽃을 피우던 그런 날이었다.

싱그러운 젊은 아가씨가 노란 프리지아 한 다발을 들고 왔다. 평소에 안면만 있을 뿐이었고, 그녀의 이름도 알지 못했는데, 그녀는 배시시 웃으면서 프리지아를 건넸다. 난데없는 꽃다발에 이유를 물었더니 그녀는 그냥 그러고 싶어서라고 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봄날에 특별한 이유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프리지아 향기가 그윽하게 퍼졌다.

프리지아의 꽃말은 순진, 천진난만, 깨끗한 향기이다. 그녀는 프리지아처럼 청초하고 천진난만했다. 살다 보면 예기치 못한 소소한 행복이 찾아오기도 한다. 봄날의 노란 프리지아처럼 말이다.

프리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