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장미 같은 정치인, 이정희

6월의 장미 같은 정치인, 이정희

정치를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기 과시와 명예욕에 사로잡힌 열등한 족속들이다.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막장 국회를 한 번 보라. 제대로 된 인간이 도대체 몇 명이나 될 것 같은가. 한나라당은 말할 필요도 없고, 민주당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

희망없는 18대 국회에 그나마 숨통을 틔워주고 있는 강달프 강기갑과 더불어 내가 작년부터 지켜보고 있는 정치인은 바로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이정희다. 이런 사람들이 진짜배기다. 감히 단언하건데, 이정희 의원은 18대 국회에서 가장 성실하고 능력있는 정치인일뿐만 아니라 가장 주목받아야 하는 정치인이다.

그는 논리적이고 총명할 뿐만 아니라 용기있는 정치인이다. 게다가 그에게는 단심이 보인다. 진정성이 보인다. 이런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다. 더군다나 정치판에서 이런 사람을 보기는 정말 쉽지 않다.

이정희 의원이 이명박 정부에 맞서 단식에 들어갔다. 전직 대통령까지 서슴없이 죽일 수 있는 이명박 정부이니, 우리같은 일반 서민이나 노동자는 아마 땅에 기어다니는 개미만도 못한 존재로 여기는 정부일게다. 용산참사로 죽은 사람들은 다섯 달이 지나도록 장례도 못치르고 있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거리로 내몰리고 있다. 언론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가 이미 사라졌다. 삼천리 강산은 온통 포크레인 삽질로 몸살을 앓고 있다. 나이 어린 초보 정치인 이정희는 이런 정부의 행태를 더이상 참지 못하고 분연히 일어섰다.

제가 시작하는 단식이 우리 뒷덜미를 잡아당기는 머뭇거림을 없애는 단초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처구니없이 빼앗겨버린 자유, 말할 자유, 모일 자유를 조금이라도 빨리 되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께서 마음으로, 말로, 행동으로 함께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이정희, 머뭇거리지 맙시다. 독선과 강압, 이제는 바꿉시다]

이정희 의원의 용기에 감사하며, 그의 투쟁을 전폭 지지한다. 그의 바람대로 그가 이 터무니없는 사기 정부를 끝낼 수 있는 단초가 되길 바란다.

노무현이 떠난 빈 자리를 유시민, 한명숙, 이해찬과 더불어 이정희, 강기갑 같은 사람들이 손을 잡고 함께 채워나갈 수 있다면, 우리는 절망의 나락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쓰레기통에서 핀 6월의 장미 같이 아름다운 정치인, 이정희. 당신의 건강과 안녕을 위해 기도한다.

덧. 그의 투쟁을 지지하신다면 그에게 따뜻한 격려 한마디 해주시고, 후원도 해주시면 어떨까요? 우리는 이런 정치인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이정희 의원 홈페이지 바로 가기

가장 혁명적인 것

가장 혁명적인 것

김규항의 <예수전>을 보다가 깊이 공감하는 한 구절을 발견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예수는 정치적인 혁명가가 아니었다’는 상투적인 견해에 대해 묵상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정치적인 혁명성이 ‘주장’되는 게 아니라 지배체제에 의해 ‘증명’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겉보기엔 제아무리 혁명적이라 해도 지배체제가 별다른 위협을 느끼지 못한다면 드건 더 이상 혁명적인 게 아니다. 학술적, 문화적 차원에 머무는 혁명 이론 따위가 그렇다. 반대로 겉보기엔 그다지 혁명적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데 지배체제가 어떤 과격하고 급진적인 혁명운동보다 더 위협을 느끼고 적대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혁명적인 것이다. 예수는 비폭력주의자였고 국가권력을 접수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건 다 안다. 그런데 왜 지배체제는 폭력을 사용하고 국가권력 접수를 목표로 싸운 바라빠보다 예수에게서 더 큰 위협을 느끼는가? 예수의 정치성에 대해 말하려면 먼저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김규항, 예수전, p.248>

지배세력이 가장 위협을 느낀다면 그것은 혁명적인 것이다. 우리나라 지배세력이 가장 위협을 느끼고 두려워했던 인물은 누구일까? 나는 노무현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노무현보다도 위대하고 훌륭한 인물은 종종 있었지만, 노무현만큼 지배세력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인물은 없었다. 결국 지배세력의 공포와 열등감이 노무현을 제거하려 했고, 노무현은 자신의 목숨을 버림으로해서 그들의 시도를 원천봉쇄했다.

80년 광주가 우리나라 민주화의 젖줄이었던 시대가 있었다. 한 세대가 흐르고, 이제 노무현이 광주의 뒤를 이어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상징이 될 것이다. 광주는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었고, 노무현은 자신의 목숨까지도 버리면서 광주의 정신을 계승했다.

노무현 정부가 이념적으로는 중도보수의 길을 걸었지만, 노무현의 가치는 가장 혁명적인 것이었다. 김규항의 정의대로 지배세력을 가장 위협했고, 지배세력으로부터 끊임없는 정치적 탄압을 받았기 때문이다.

김규항은 <예수전>에서 위선자인 바리새인들을 혁명의 가장 걸림돌로 지목하면서, 노무현과 지향이 같은 세력을 바리새인으로 폄하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김규항과 같은 좌파들이 참여정부를 오히려 한나라당이나 이명박보다도 더 증오했던 것이다. 노무현을 인정하지 않았던 그들이 오히려 더 바리새인들이 아니었을까? 이 땅의 지배세력은 자칭 좌파라 하는 그들에게 어떠한 위협도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규항의 <예수전>은 예쁜 책이지만, 그의 예수에 대한 묵상과 천착은 아직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신종플루 혹은 돼지독감에 대한 호들갑

신종플루 혹은 돼지독감에 대한 호들갑

어느 날 갑자기 난데없이 언론들이 어떤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호들갑을 떨 때, 우리는 한걸음 뒤로 물러나 냉정하게 주시할 필요가 있다. 돼지독감이라 불렸던 신종플루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4월말 쯤 멕시코에서 돼지독감으로 수십명의 사람들이 죽었다고 보도가 나왔고, 전세계 언론과 세계보건기구가 앞다투어 이 바이러스의 심각성에 대해 경고하면서 사람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물론 1919년 스페인 독감으로 5천만명의 사람들이 죽었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새로운 바이러스에 대해 경계를 해야 하겠지만, 이미 두달이 지난 시점으로 봤을 때 이번 사건은 지난 조류독감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언론과 세계보건기구의 지나친 “오버”가 음모론만을 낳고 있는 실정이다.

신종플루가 일반 계절성 독감보다 더 위험하다는 증거도 없고, 이 바이러스가 스페인 독감처럼 세계적 유행병(Pandemic)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번 바이러스로 전세계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이 현재까지 100여명 정도다. 물론 적은 숫자는 아니지만, 독감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들은 늘 존재해왔다.

미국에서만 한해에 계절성 독감으로 죽는 사람이 약 36,000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니 신종플루가 일반 독감보다 더 독성이 강하다고 보기 어렵고 그 전염성도 일반 독감에 비해 훨씬 강력하다고 할 수도 없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이번 신종플루에 대한 보도와 세계보건기구의 호들갑을 “사기”라고 보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

1976년 미국 포드 대통령 때 돼지독감 때문에 전국민을 상대로 예방접종을 실시한 적이 있었다. 많은 정치인들이 우매한 국민들을 상대로 이런 장난을 친다. 정치적인 위기를 이런 식으로 돌파하려 하는 것이다. 이때 독감 바이러스로 죽은 사람이 1명 있었지만, 25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백신 주사를 맞고 숨졌다.

2년 전 조류독감으로 아우성을 칠 때, 타미플루를 개발한 Gilead Sciences의 주주들은 돈벼락을 맞았다. 도널드 럼스펠드와 미국의 네오콘들이 이 회사의 대주주들이었다. 이번 신종플루의 경우도 타미플루가 치료약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이들은 또한번의 돈벼락을 맞게 된다. 미국의 네오콘들이라면 이런 장난으로 주머니를 불릴만한 족속들이라는 것은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사실이다.

음모론을 전적으로 믿을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언론과 세계보건기구의 호들갑에 같이 장단을 맞출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런 사건들은 냉정한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다음과 같은 비디오는 냉정한 시각을 갖는데 도움을 준다.

신종플루가 걱정된다면, 손발을 깨끗이 씻으면 된다. 그것이 타미플루나 독감백신보다도 훨씬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누가 정치보복이라 하는가

누가 정치보복이라 하는가

노무현은 “사람 사는 세상”을 꿈꿨다. 탐욕과 이기주의와 무관심이 판치는 세상에서 그는 “사람 사는 세상”을 꿈꿨다. 그것은 애초부터 실현 불가능한 꿈이었고, 불온한 꿈이었다. 그는 정의를 얘기했고, 상식과 원칙을 부르짖었다.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다. 그의 출신성분을 들먹였고, 그의 말투를 조롱했다.

그가 대통령이 되었던 것은 기적이었거나 아니면 신이 이 땅에 주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주류들은 당황했지만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노무현은 그들에게 너무나 위험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그에게 열광했던 사람들도 그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사면초가였다.

그는 단 한순간도 타협하지 않았다. 사방이 적이었고 지지자가 떠나갔지만, 그는 단 한순간도 굴복하지 않았고, 그가 부여잡은 가치를 포기하지 않았다. 마치 그렇게 살아야만 되는 숙명을 지니고 태어난 사람처럼 말이다. 그는 그 숱한 고난과 역경 그리고 온갖 방해와 비난을 물리치고 성공적으로 대통령의 임무를 마치지만, 사람들은 그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았다. 노무현의 시대가 이 천박한 땅에서 얼마나 감사해야할 역사인지를 알지 못했다. 어리석고 어리석었다.

사람들은 그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했다. 그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있을 때는 알지 못했다. 어리석고 탐욕에 찌든 이들이 야만의 권력을 탄생시켰다. 그 야만의 권력과 쓰레기 언론들이 협잡하여 노무현을 죽였다. 그것은 정치보복이 아니고 살인이었다. 노무현을 인정하지 않은 자들이, 아니 인정할 수 없었던 자들이 노무현을 죽였다.

그들의 무능력과 열등감이 검찰과 언론이라는 후안무치한 권력을 등에 업고 노무현을 죽였다. 그들은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사악했다. 죄의식도 부끄러움도 몰랐다. 짐승만도 못한 자들이란 바로 그런 자들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누가 감히 정치보복이라 하는가. 그것은 백번을 양보해도 “포괄”적 살인이었다.

한때 진보라 불렸던 몇몇 신문들은 노무현이 죽자 그를 팔아 장사 밑천을 삼았다. 물론 이들도 노무현 죽이기에 가담한 공범이었다.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알리바이만을 만들려고 했다. 간악했다.

이제 그가 세상을 떠나자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다. 있을 때는 그의 소중함을 제대로 모르던 사람들도 슬퍼했고 미안해 했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노무현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 땅에 더이상 노무현은 없다. 아무리 슬퍼하고 눈물을 흘려도 노무현은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신은 그렇게 공평했다. 노무현이라는 걸출하고 위대한 인물을 내려 주었는데도 그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고마워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을 보냈다. 그리고 신은 노무현을 다시 거두어갔다.

이제 이 나라는 그 어리석음과 탐욕과 이기심에 대한 댓가를 톡톡히 치를 것이다. 아니 노무현이 물러난 다음부터 이미 그 댓가를 치르고 있다.

노무현은 그의 말처럼 정치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는 이 나라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너무 과분한 사람이었다.

그가 너무 보고 싶다…

깊고 깊은 슬픔

깊고 깊은 슬픔

슬픔이 깊고도 깊었다. 슬픔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캄캄한 심연으로 나를 침잠시켰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밥 숟가락을 들어도, 화장실 변기에 앉아도 눈물이 흘렀다. 시간이 멈췄다.

노무현이 떠났다. 내가 사랑했던 정치인, 내가 존경했던 대통령, 내가 최후의 지지자가 되겠다고 말했던 그가 떠났다. 나는 그를 지키지 못했다. 아무도 그를 지키지 못했다.

그는 역사 앞에 그렇게 홀로 서서 역사와 맞섰다. 그리고 그는 초연히 떠났다. 그가 감당했던, 그리고 감당해야할 역사의 몫이 너무도 컸다.

운명이었다. 정의를 가지고 역사와 맞서겠다던 사람의 운명이었다. 원칙과 상식으로 비루한 역사를 다시 세워보겠다던 사람이 맞닥드려야했던 운명이었다. 아무도 그의 짐을 나누어 질 수 없었다. 서럽디 서럽도록 숭고하고 위대하지만, 나는 목이 메이고 가슴이 메여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영원히 사는 길을 택했다. 그는 역사 속에서 부활하여 신화가 될 것이다. 하지만 보잘 것 없는 나는 그가 사무치게 그리워 목놓아 울 뿐이다.

이제 그의 장난기 어린 말투도, 그의 사자후 같은 연설도, 그의 잔잔하고 따뜻한 미소도 이 세상에는 없다. 그와 같은 하늘 아래에서 숨을 쉰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었는데, 이제 그가 떠났다.

그를 어떻게 놓아 드려야 할지, 그를 어떻게 떠나 보내야 할지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되었건만, 나는 여전히 그를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 생을 떠난 그가 진실로 진실로 안식하길 기도하지만, 이 부조리하고 비루하고 빌어먹을 역사는 끊임없이 그를 불러낼 것이다. 그는 죽어서도 죽지 못할 것 같아 안타깝고도 안타까울 뿐이다.

내가 사랑했던, 그리고 사랑하는 노무현 대통령 님, 다음 생에서 당신을 만난다면 그때도 잊지 않고 당신을 사랑했었노라고, 당신의 최후의 지지자였었노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부디 편히 쉬십시오. 당신이 편히 쉴 수 있는 세상이 되길 기도합니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노무현 대통령 유서 중에서>

내 삶의 비법

내 삶의 비법

우리 시대 위대한 영적 스승 중 하나인 크리슈나무르티는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삶의 비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걱정하지 않습니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나의 수준으로 이 말의 진의를 깨닫기는 무리지만, 집착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삶이 그런 것이 아닐까 짐작만 해 본다.

나는 이 말을 들으면서 아내가 떠올랐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아내와 나는 억겁의 카르마로 연결된 인연으로 이 생에서 부부의 연을 맺었고, 우리는 서로를 아끼며, 사랑하며, 존경하며 살아왔다.

지금 이 순간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내가 걱정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나의 아내 때문이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언제부턴가 내 속에 그가 들어와 있음을 알았다. 그는 멀리 있어도 내 안에 있었고, 그의 영혼과 나의 의식은 교감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지금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이제 십 년도 훨씬 지난 일이 되어버렸는데,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느 날, 아내가 내 앞에 나타났다. 아내와의 첫 만남은 다른 여자들과의 만남과는 달랐다. 그는 억겁의 인연에 따라 신이 내게 보내준 나의 분신이었다. 그때는 그 다른 느낌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이제와 생각해 보면 그로 인해 나의 삶이 완성될 것이란 일종의 계시와 같은 것이었다.

그 인연은 빗나가지 않았고, 우리는 결혼을 하여 십여 년을 부부로 지냈다. 아내는 나와의 결혼을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고, 다시 태어나도 나와 결혼한다고 말했다. 나는 아내를 내게 보내준 신과 억겁의 인연에 감사했다. 나의 영혼은 사랑으로 충만해졌다.

오늘은 아내의 생일이다.

그가 세상에 옴으로 해서 내 존재가 세상에 올 수 있었고, 그가 나에게 옴으로 해서 나의 삶은 비로소 완성되었다. 언젠가 있을지도 모르는 그의 부재에 대한 슬픔으로 눈물을 흘렸던 적이 있지만, 지금은 그 경지를 넘어선 것 같다. 설령 어떤 이유로 인해 이 생에서 그와 헤어져야 한다 해도 걱정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 내 안에 들어와 있고 우리는 언제나 같이 있기 때문에 또 다른 생에서 만날 수 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걱정하지 않는다.

내 삶의 비법은 바로 나의 아내이기 때문에.

축하해 그리고 사랑해.

예수도 울고 갈 이명박의 힘에 놀라다

예수도 울고 갈 이명박의 힘에 놀라다

지난 대선을 앞둔 2007년 12월, 재야세력과 종교단체들은 부패세력의 집권을 저지해야 한다며 비상시국회의를 결성하고 민주세력의 단일화를 요구했었다. 비상시국회의를 주도했던 인물 중 하나가 바로 황석영이었고, 그는 선언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우리 국민이 거짓말쟁이 지도자, 부패 지도자에게 국정을 농단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임을 굳게 믿는다. 우리는 보다 나은 삶을 바라는 국민의 열망을 모아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려는 대다수 국민의 의지를 모아 이 몰상식한 선거판을 바로잡을 것이다. 이에 우리는 부패한 정치세력, 위장과 거짓말을 반복하는 정치세력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부패정치세력 집권저지와 민주대연합을 위한 비상시국회의’의 결성을 선언하는 바이다.

[“단일화 안하면 거짓 민주화세력 규정”, 오마이뉴스]

비상시국회의의 황석영이 언급한 부패한 정치세력은 바로 한나라당의 후보 이명박이었다. 그때 시국선언문을 낭독한 황석영의 모습에서 자못 숙연함이 느껴진다.


출처 : “단일화 안하면 거짓 민주화세력 규정” – 오마이뉴스

그로부터 1년 6개월이 흘렀다. 부패세력의 집권을 저지하겠다고 하던 황석영이 그 부패세력과 손을 잡고 부패세력의 성공을 위해 큰틀에서 협력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명박과 함께 우즈베키스탄으로 날아가 비단길의 옛 중심지 사마르칸트에서 멋진 사진을 한장 박아주셨다.

자신의 집권저지에 앞장섰던 인물을 끌어들인 이명박에게는 분명 뭔가가 있다. 이명박의 삶의 궤적으로 보았을 때 한 나라의 대통령은 커녕 면사무소 서기도 되기 어려운, 아니 되어서는 안되는 인물이지만, 이 자는 사람들의 탐욕을 자극하고 꿰뚫어보고 그것을 발현하도록 하는 능력이 있다.

주가 5000 시대, 747 공약 등 말도 안되는 사기를 쳤지만, 결국 아파트 한채 뜯어먹고 살겠다는 국민들의 탐욕을 일깨워 대통령이 되었다. 황석영에게도 문화부 장관 또는 노벨상 수상 지원 등의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들을 했을 것이다. 물론 그 약속이 지켜진다는 보장은 없다. 이명박에게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회한 황석영의 탐욕과 위선이 번득이는 이명박의 본능에 걸린 것이겠지만, 결과적으로 황석영은 그동안 자기의 재능과 위선으로 쌓아올린 업적을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이명박과 손을 잡은 이들의 말로를 황석영은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명박의 비서였던 김유찬, 동업자였던 김경준, 이명박에게 기도를 해주었다던 추부길, 그리고 이명박과 호형호제한다는 천신일까지. 이제 황석영도 그들과 유사한 말로를 따를 것이다.

예수도 자기가 반석이라는 이름을 붙혀준 수제자 베드로에게 새벽 닭이 울기 전 세 번의 배신을 당했다. 예수를 따르겠다는 기독교의 장로인 이명박은 자기를 앞장서 반대했던 인물을 자기 편으로 끌어드렸다. 이명박의 힘이 참으로 놀라워 보이긴 하다. 결과적으로 이명박과 황석영은 서로 반대의 길을 걸어왔지만, 결국 하나의 지향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황석영의 속내를 까발려준 이명박에게 처음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이명박이 아니었으면 황석영의 위선에 속아 아직도 그의 책을 뒤적이고 있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황석영이 노벨상을 타게 된다면, 그것은 죽은 노벨이 다시 살아서 다이나마이트를 터뜨릴 일이다.

황석영보다 차라리 이문열이 낫다

황석영보다 차라리 이문열이 낫다

며칠 전 이명박의 해외순방에 황석영이 따라갔다는 기사를 보고 석연치 않았는데, 오늘 그의 속내를 드러낸 보도를 보고 나는 뒷통수를 맞은 듯 멍하니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개”같은 세상이라지만, 천하의 황석영의 입에서 저런 “개”같은 소리를 들어야한다는 사실이 무척 초현실적이었다.

그는 ‘용산참사’에 대해서는 “현 정부의 실책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는 광주사태가 우리만 있는 줄 알았는데, 70년대 영국 대처정부 당시 시위 군중에 발포해서 30-40명의 광부가 죽었고 프랑스도 마찬가지”며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사회가 가는 것이고, 큰 틀에서 어떻게 가야 할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광주사태라고 말했고,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사회가 가는 것이라 말했다. 이것이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책을 써서 광주민주항쟁의 본질을 고발한 작가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내가 대학에 처음 들어갔을 때, 광주의 진실을 말해주었던 작가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아직도 그 수많은 영혼들의 상처가 아물지도 않았는데,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을 며칠 남지도 않았는데 천하의 황석영이 저런 망언을 일삼았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어떻게 칠십년 가까이 살아온 사람이 하루 아침에 자기의 삶을 송두리째 시궁창에 쳐박을 수 있는지, 아니면 원래 그런 인간이었는데 나같은 놈이 그런 인간을 못알아본 것인지. 도대체 누가 잘못한 것일까? 이명박이 중도라서 큰틀에서 협력하겠다구? 이명박은 중도인데, 한국의 좌파들은 좌파가 아니라구? 이거 정말 미친거 아니야?

내가 제일 혐오하는 인간들이 “변절”을 일삼는 자들이다. 나는 내 주위에서 수많은 변절을 보아왔다. 그리하여 나는 사람들의 이념을 별로 믿지 않는다. 특히, 함부로 강하게 자기 이념의 선명성을 드러내려고 하는 자들을 경계한다. 내가 이명박보다 더 싫어하는 자들이 바로 김문수나 이재오 같은 부류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 극좌들이 하루 아침에 극우로 돌변하는 상황을 심심치않게 보아왔기 때문이다.

이제 황석영도 그 변절의 대열에 앞장섰다. 그의 말같지도 않은 합리화를 보려하니 차라리 이문열이 더 순수해 보인다. 어차피 그럴 거였으면 애초부터 이문열처럼 담백한 극우로 살지 왜 그런 “개”고생을 했을까? 이명박 치하에서 완장차고 문화부 장관이라도 한자리 해보고 싶었던 것일까? 참으로 대한민국은 “개”같은 나라의 전형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 3대 문장으로 조정래, 황석영, 김훈이 일컬어졌는데, 이제 조정래 하나 남았구나. 참으로 슬픈 5월의 푸르른 아침이다.

아인슈타인 그리고 불교

아인슈타인 그리고 불교

20세기 가장 위대한 과학자 한 사람을 고르라고 한다면, 많은 이들이 주저없이 아인슈타인을 꼽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단지 뛰어난 과학자가 아닌 “위대한” 과학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소위 상대성 이론이라 불리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과학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과 종교에 대한 깊은 천착이 있었던 완성된 영혼이었다.

그 위대한 과학자 아인슈타인이 불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The religion of the future will be a cosmic religion. It should transcend personal God and avoid dogma and theology. Covering both the natural and the spiritual, it should be based on a religious sense arising from the experience of all things natural and spiritual as a meaningful unity. Buddhism answers this description. If there is any religion that could cope with modern scientific needs it would be Buddhism.

미래의 종교는 우주적인 종교가 될 것이다. 그것은 인간적인 하느님을 초월하고, 교리나 신학을 넘어서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자연의 세계와 정신적인 세계를 모두 포함하면서, 자연과 정신 모두의 경험에서 나오는 종교적인 감각에 기초를 둔 것이어야 한다. 불교가 이런 요구를 만족시키는 대답이다. 만일 현대 과학의 요구에 부합하는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곧 불교가 될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불교는 가장 과학적인 종교라 할 수 있다. 2500여년 전에 붓다에 의해 말씀되어진 이 진리들은 시간에 구애됨이 없이 여전히 진보적이고 새롭다. 참된 진리이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이 참으로 위대한 사람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A human being is part of the whole called by us universe, a part limited in time and space. We experience ourselves, our thoughts and feelings as something separate from the rest. A kind of optical delusion of consciousness. This delusion is a kind of prison for us, restricting us to our personal desires and to affection for a few persons nearest to us. Our task must be to free ourselves from the prison by widening our circle of compassion to embrace all living creatures and the whole of nature in its beauty. The true value of a human being is determined by the measure and the sense in which they have obtained liberation from the self. We shall require a substantially new manner of thinking if humanity is to survive.

참된 진리와 가르침은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하나로 맞닿아 있다. 예수를 닮고자 하는 것과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하는 것은 결국 하나인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이야기와 간디의 이야기가 하나로 이어져 있고, 호킨스의 주장과 상통하고 있다.

그리하여 인류는 이미 구원되어 있다고 이야기하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것을 깨우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부처님 오신날, 비가 내렸다

부처님 오신날, 비가 내렸다

부처님 오신날 비가 내렸다. 붓다의 가르침처럼 하염없이 비가 내렸다. 비는 대지를 적시고, 나무를 적시고, 내 방 창문을 무시로 두드리며 흘렀다. 그 비를 타고 붓다의 자비가 나에게도 흘렀다. 마치 어머니의 자궁 안에 있는 것처럼 고요와 평화가 나를 감쌌다. 적막했고 편안했다.

부처님 오신날 내리는 비가 나를 충만하게 하였다. 자연은 그렇게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었다. 자연이 바로 붓다였다. 부족한 것도 넘치는 것도 없었다. 필요한 것도 없었고, 욕망도 없었고, 탐욕도 없었다. 봄이 되면 새 잎이 돋고 꽃이 피고 비가 내렸다. 자연은 그렇게 스스로 존재했다.

인간들은 언제나 갈구했다. 어떤 이들은 물질을 갈구했으며, 어떤 이들은 진리에 목말라했다. 부질없었다. 모든 것은 이미 존재했고 충족되어 있었다. 인간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인간들의 원죄는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무지. 인간들은 스스로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삶의 고통은 그 무지에서 시작되었다.

욕망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길은 욕망을 버리는 것이었다. 원한은 복수에 의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버리고 비울 때만이 인간들은 자유로울 수 있었다. 인간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붓다가 오신지 2500여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인간들은 어리석었고 고통에서 몸부림쳤다.

그리하여 부처님 오신날 비가 내렸다. 무지로부터 생긴 고통을 알리기 위해 비가 내렸다. 무지하기에 죄를 짓는 인간들은 그 무지를 깨닫게 되면 용서받을 수 있었다. 진리는 단순했지만, 깨닫기는 어려웠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려고 오셨습니다.

모든 것은 본래부터 완벽했다. 그것이 신의 본성이었고, 자연의 본성이었다. 부처님 오신날 내린 비는 그것을 깨우쳐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