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보다 더 나은 부패? 그런 게 어디있나

무능보다 더 나은 부패? 그런 게 어디있나

언제부턴가 쓰레기 언론들과 수구 정당 한나라당은 “무능보다 부패가 낫다”라는 논리를 줄기차게 떠들기 시작했다. 별 생각과 고민이 없는 국민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마치 주술에 걸린 듯 유능한(?) 부패의 원조들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부패와 부도덕의 대명사들이 신문지상에서 50% 이상의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참담한 일이다. 도대체 어떤 부패가 무능보다 나은지 내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내가 너무 과문한 탓일까? 아니면 무능보다 나은 부패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이상한 것일까?

한나라당과 쓰레기 언론들은 틈만 나면 “무능한 좌파 정권 10년”이라는 노래를 부르고 다니는데, 우리 현대사에 무능한 좌파 정권이 있기나 했는지 되묻고 싶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중도우파 보수 정권이다. 그리고, 그들은 부패하고 무능한 친일, 독재, 극우 세력들이 지난 50년간 싸질러놓은 쓰레기들을 치우느라고 지난 10년의 세월을 보냈다. 도대체 그들이 말하는 무능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부패에 무능하다는 말인가?

아무리 부도덕하고 몰상식하고 파렴치한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무능보다 부패가 낫다”라는 말을 함부로 할 수 없을 것인데, 이런 이야기들이 공공연히 언론을 통해 흘러 나온다. 자식들에게 정말 부끄럽지도 않은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뭐라 가르칠 것인가. 공부를 잘 못하는 아이들에게 부정행위를 해서라도 1등을 하라고 가르칠 것인가? 도둑질을 해서라도 잘 살라고 할 것인가? 거짓말을 해서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세하라고 얘기할 것인가?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도덕과 가치를 얘기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정말 알고 싶다. 무능보다 나은 부패가 있기나 한 것인지, 있다면 과연 어떤 것인지, 부패한 한나라당은 정말 유능한 것인지, 나라를 IMF의 수렁으로 몰아넣었던 한나라당 정권은 정말 얼마나 유능했는지, 그들이 다시 정권을 잡으면 우리나라는 부패하면서 잘 사는 나라가 될 수 있는 것인지. 누구 아는 사람 있으면 알려줬으면 좋겠다.

부패의 대명사 이명박을 잡기 위해 또 다른 부패의 대명사 이회창이 나서는 이 초현실적인 상황이 집집마다 초고속 인터넷이 깔린 21세기 정보기술 강국 대한민국에서 정말 일어나야 할 상황인지. 아이들 볼 면목이 없다.

언제까지 이런 모욕을 참으며 살 것인가. 정신 좀 챙겨야 하지 않겠는가.

전쟁같은 사랑

전쟁같은 사랑

임재범의 목소리에는 가슴을 울리는 뭔가가 있다. 천상의 음악처럼 맑고 아름다운 소리는 아니지만, 고통과 절망에서 울려나오는 듯한 그의 거친 절규가 오히려 듣는 이들의 가슴을 후비고 영혼을 흔든다. 매력적인 허스키와 갈라지는 고음은 아름답고 슬픈 사랑이 아닌 “전쟁같은 사랑”을 부르기에 정말 충분하지 않은가.

노래를 잘 하는 가수들이 꽤 있지만, 임재범 만큼의 울림을 주는 이는 흔치 않다. 오랜만에 그의 노래 “너를 위해”를 듣는다. 이 노래 가사 중에 “전쟁같은 사랑”이란 부분에서 나는 그냥 꽂혀버리고 말았다. 전쟁같은 사랑은 도대체 어떤 사랑일까? 이것은 임재범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인것 같다.

어쩜 우린 복잡한 인연에 서로 엉켜있는 사람인가 봐
나는 매일 네게 갚지도 못할만큼 많은 빚을 지고 있어
연인처럼 때론 남남처럼 계속 살아가도 괜찮은 걸까
그렇게도 많은 잘못과 잦은 이별에도 항상 거기 있는 너

날 세상에서 제대로 살게해 줄 유일한 사람이 너란걸 알아
나 후회없이 살아가기 위해 너를 붙잡아야 할테지만
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너
그건 아마도 전쟁같은 사랑 난 위험하니까 사랑하니까
너에게서 떠나줄꺼야

너를 위해 떠날거야

<임재범, 너를 위해>

누가 이회창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누가 이회창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차떼기 정치의 대명사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대선 3수에 도전했다. 이회창 출마설이 나오자마자 그의 지지율이 20%를 훌쩍 넘어 대통합신당의 정동영 후보를 크게 앞질렀고, 부동의 1위인 이명박 후보를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 전 세계를 통틀어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아주 진귀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70이 넘은 그것도 두 번의 대선에서 실패하고 아주 치욕스럽게 은퇴한 노정객이 자신이 속한 당을 탈당한 후 세번 째 대선에 도전한다. 그리고 나오자마자 1위를 달리는 후보를 위협하는 존재로 급부상한다. 상황이야 어찌되었든 판이 재미있게 되었다. 한나라당 이명박에 줄을 섰던 언론들이 난리가 났다. 노욕이라느니, 노망이라느니, 명분이 없다느니 하면서 이회창을 몰아붙인다. 5년전, 10년전에 이회창에 줄을 섰던 이들이 이젠 예전의 주인을 사정없이 깍아내리고 있다. 일반 국민들의 여론도 이회창에 호의적인 것은 아닌 것 같다. 수구 보수 세력들이야 이회창의 출마를 환영하고 지지를 하겠지만, 이회창의 출마는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누가 이회창에게 돌을 던질수 있단 말인가. 이회창 출마의 빌미를 제공한 것은 이명박 후보 본인과 한나라당이다. (걸어다니는 비리 백과사전이라 불리는) 이명박 같은 인물이 제 1 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는 것 자체가 사실 이회창의 출마 선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이고, 이명박 같은 인물이 50%의 지지율로 부동의 1위를 달리고 있다는 사실이 더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 아니었던가. 더군다나 BBK 주가조작 문제로 김경준과 함께 검찰의 수사를 받을 인물이 아니던가. 한나라당은 대선 후보 유고시 대선을 연기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것은 이명박이 받고 있는 의혹과 혐의가 어느 정도 사실이라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알고 있는 이회창이 출마를 하지 않으면 더 이상한 것 아닌가. 두번 째로 빌미를 제공한 것은 정동영 후보와 대통합신당이다. 대통합신당에 책임이 있는 것은 누구와 붙어서도 질 수 밖에 없는 정동영 같은 후보를 대선 주자로 내세웠기 때문이고, 정동영은 자기가 안 된다는 것을 알고도 박스떼기를 동원하여 후보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지탄받아야 한다. 설령 반칙으로 신당의 후보가 되었다 하더라도 만약 정동영이 어느 정도의 가능성을 보였다면 이회창은 함부로 출마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명박이 50%의 지지율을 받을 때, 정동영이 거의 30%의 지지를 유지했다면 이회창이 끼어들 자리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이회창이 출마하자마자 정동영이는 3위로 처져버렸다. 이런 상황이라면 내가 이회창이라고 해도 출마한다. 한나라당이 분열되어 정권교체를 할 수 없을 거라는 비난을 받을 여지가 훨씬 줄어들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이회창이 수구 꼴통이라고 비난하지만 그것은 이명박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건, 이회창이 대통령이 되건 우리 역사가 퇴보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회창보다 이명박을 더 저질로 치는 이유는 그가 훨씬 더 기회주의적이기 때문이다. 내가 최악으로 보는 정치 군상들은 이재오, 김문수 같은 종자들이다. 차라리 이회창처럼 일관적인 수구 꼴통이 저런 기회주의자들보다는 (아주 조금이나마) 낫다. 결정적으로 이회창보다 이명박이 더 위험한 이유는 이명박의 경부운하 공약 때문이다. 이것은 완전 나라를 망치는 일이고,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재앙을 불러 일으키는 일이다. 이회창은 적어도 강에다 시멘트를 쳐바르겠다고 하지는 않았다. 이명박 같은 인물을 끌어내리기 위해 이회창이 나설 수 밖에 없는 이 상황이 우리 모두의 슬픈 자화상이다. 이런 상황으로 이끈 일등 공신은 누가 뭐래도 우리나라의 쓰레기 언론들이다. 물론 그 전통은 친일파를 제거하지 못하고, 독재잔재를 제거하지 못한 우리 역사에서 기인하는 것이지만. 그런 쓰레기 언론에 놀아나고 있는 우리 국민들도 책임을 져야 한다. IMF를 맞고 지난 10년 동안 그렇게 고생을 하고도, 쓰레기 언론들에게 속아 합리적인 판단을 못하는 우리 국민들. “경제를 살려야 한다”며 경제 파탄의 주범들을 50% 이상 지지해 주는 국민들. “집값을 내려달라”고 아우성치면서 부동산 투기의 원조를 지지하는 국민들. “무능보다 부패가 낫다”라는 말도 안되는 치욕적인 거짓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국민들. 한심하고 불쌍하지만, 이제 이들을 동정할 사람들은 없다. 그러면서 이회창의 출마를 비난한다? 이회창은 속으로 국민들을 비웃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번에 정권을 이명박이든, 이회창이든 이 땅의 수구 기득권 세력에게 넘기면 다시 찾아오기는 정말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제 김대중이나 노무현 같은 걸출한 정치인들이 없기 때문이며, 지난 10년간 권력을 잃고 공황에 빠진 기득권 세력들이 어떤 짓을 해서든지 정권을 지키려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언론독재의 세월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 것인가.
삼성의 미래가 어두운 이유

삼성의 미래가 어두운 이유

우리나라 최고 기업이라는 불리는 삼성의 차세대 주자는 알려진대로 이건희 회장의 외아들 이재용이다. 이건희 회장이 물러난 이후 이재용이 대를 이어 삼성의 경영권을 승계할 것이다. 물론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과정에서 불거진 불법, 편법 행위로 재판을 받고는 있지만, 삼성의 관리를 받아온 한국의 판검사들이 이 문제를 법대로 처리할 거라 생각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그렇다면 삼성의 미래는 이재용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신문에서 본 이재용의 얼굴은 미끈하고 잘 생긴 얼굴이었다. 전혀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표정이었다. 우리나라 최고의 부잣집에서 자란 그가 무엇이 부족했겠는가. 옛날 왕이나 세자들이 누릴 법한 그런 대우를 받고 자라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게다가 한겨레가 전한 바에 의하면 그는 예의바른 젊은이라고 한다.

삼성전자의 김광태 전 홍보전무는 “삼성은 운이 좋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이 암시하듯 삼성 안에서 이 전무에 대한 평은 “겸손하다” “예의바르다” “반듯하다” 등등 칭찬 일색이다. 익명을 요청한 한 임원은 “사장단회의에 들어와서도 듣기만 하고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면서 “회식자리에서 손수 폭탄주를 만들어 직원들에게 돌리는 소탈한 모습들을 보면 교육을 제대로 받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한 간부는 “이 전무가 언론 대응 관련 교육을 받은 적이 있는데 교육비가 너무 비싼 것 같다며 깎았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해 놀란 적이 있다”면서 “이병철 회장이 생전에 휴지 한장도 아껴썼다는 일화가 떠올랐다”고 말했다.

<삼성 경영승계 물위로 ②이재용 자격론, 한겨레>

개인적으로 이재용 전무를 만난 적은 없지만, 만나 보면 참으로 겸손하고 예의바르고 잘생긴 젊은이라 생각할 것 같다. 이재용 개인적으로야 흠잡을데 없는 젊은이이겠지. 그런데 문제는 이재용 개인의 됨됨이가 아니고 이재용의 사회적 됨됨이다. 사회를 바라보는 안목과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 그리고 도덕성 등이 삼성을 이끌어 나가는데 더 큰 역할을 하지 않을까. 더군다나 삼성이 우리나라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그의 사회적 품격은 삼성의 미래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경제의 미래에도 큰 영향을 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사회적 품격은 어떨까. 알려진 것이 많지 않지만 최근 김용철 변호사의 말을 들으면 조금 실마리가 잡힐 것도 같다.

이재용(이건희 회장의 장남)이 한번 이런 얘기를 하더라. 단둘이 있을 때다. “비자금, 차명계좌 공공연한 일인데, 왜 내게만 문제 삼냐.” 그래서 길거리에 횡행하는 범죄도 증거가 잡히면 처벌된다고 말했다. 삼성그룹의 차기 총수가 될 사람이 국법 질서에 대한 느낌이 없다. 그런 교육을 안 한 거지.

<김용철 변호사 “내가 구속되면 끝이 나겠지”, 한겨레21>

자신의 경우만 문제삼아서 이재용은 정말 억울할까? 이 말이 사실이라면 이재용의 사회적 품격에 대한 기대는 접는 것이 좋을것 같다. 그리고 그가 이끄는 차세대 삼성도 현재의 삼성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할것 같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하버드까지 가서 공부한 사람의 준법 정신이 저 정도라면 삼성의 미래는 그다지 밝지 않다. 왜 그렇게 좋은 교육을 시켰으면서 사회를 바라보는 올바른 시각을 전해주지 못했을까? 아버지 이건희도 그런 의식이 없어서 그랬을까?

결국 삼성이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삼성과 이건희, 이재용 부자의 소유관계를 분리하는 수 밖에 없어 보인다. 하지만 지난 번에도 얘기했지만 이것이 우리나라 상황에서 불가능해 보인다는 것이 문제다. 결국 삼성이 변하기는 정말 쉽지 않을것 같다. 삼성의 미래에 대한 기대는 그다지 하지 않는 것이 좋을것 같다. 안타깝지만 어쩌겠는가.

가을날의 행복

가을날의 행복

가을의 햇살이 정말 따사로웠다. 아파트 초입에 늘어선 여러 나무들이 저마다 다른 색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은행나무는 노란색으로, 단풍나무는 붉은색으로, 메타 세콰이어는 오렌지색으로 물들었고, 소나무는 변함없는 푸른색을 자랑하고 있었다. 하늘은 맑았고, 구름 몇 점이 떠 있었다. 바람은 서늘하게 가을을 재촉했다. 놀이터에 아이들 몇이 재잘대며 흙장난을 하고 있었다. 평화로웠다.

불현듯 내 가슴에 행복이 밀려들었다. 이 얼마나 감사한 풍경이란 말인가.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아이들의 웃음소리, 푸른 하늘, 맑은 공기. 모든 것이 제 자리에 있었다. 내가 이 지구라는 별에 와서 이렇듯 많은 것을 누릴 수 있었다니. 눈물이 나올만큼 감사하고 행복한 순간이었다.

생각해보니 나는 누리고 있는 것이 너무 많았다. 나에게는 사랑하는 아내와 딸이 있고, 존경하는 부모님이 계시고, 동생들이 있고, 친구들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고, 내가 쉴 수 있는 집이 있고,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고,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고, 시를 보고, 영화를 보고, 때때로 운동을 할 수가 있는 여유가 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아름답고 평화로운 자연 속에서 욕심내지 않고 자족할 수 있는 가난한 마음을 갖게 해 준 신께 감사한다. 따스한 가을날의 햇볕 속에서, 아름다운 나무와 풀들 속에서, 아이들의 재잘거림 속에서 나는 한없는 행복을 누렸다. 이 나의 행복을 살아있는 모든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다.

인간으로부터 도망친 별

인간으로부터 도망친 별

밤하늘에 별들이 그야말로 쏟아져 내렸다. 내가 좋아하는 오리온 별자리가 또렷하게 내 얼굴로 내려왔다. 대학교 때 강화도로 엠티를 갔었을 때도 그랬었다. 평상에 누워 밤하늘을 쳐다보는데 밤하늘은 셀 수 없는 별들로 출렁거렸다. 옛 사람들이 왜 미리내라고 불렀는지 알 것도 같았다. 별똥별도 여러개 떨어졌고, 나는 여러 가지 소원을 떨어지는 별동별과 함께 마음 속 깊이 간직했다. 밤공기는 바삭바삭했다. 그 바삭거리는 공기가 내 가슴 속을 훑고 지나갔다. 조각배 같은, 아니 아리따운 여인의 눈썹 같은 그믐달이 별들 사이로 헤엄쳐 갔다.

밤하늘에 저 별들이 없다면 얼마나 적막할 것인가. 하지만 도시의 밤하늘엔 별들이 떠난지 이미 오래다. 도시의 인간들은 밤하늘을 올려다 보지도 않을 뿐더러 별들이 이미 떠난지도 모르고 지내고 있다. 별들이 떠난 밤하늘 아래 살고 있는 이들은 네온싸인들만이 번쩍이는 거리를 배회하고 있다. 인간들이 만든 불빛은 별빛보다 밝았지만 별빛보다 한없이 추해 보였다. 그 번쩍거리는 불빛을 뒤로 하고 별들은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슬픈 일이었지만 인간들은 그 슬픔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럴 겨를이 없었다.

20여년 만에 찾은 대둔산에서 도시로부터 그리고 인간으로부터 도망친 별들을 다시 볼 수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인간들이 별들로부터 도망친 거겠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 별들이 그리 멀리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말 오랜만에 별빛에 취해 하염없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행복했다.

한겨레, 소중하지만 참 어이없는

한겨레, 소중하지만 참 어이없는

몇달 전 한겨레신문 어느 지방 영업부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한겨레21을 구독해 달라는 부탁 전화였다. 예전 같았으면 기꺼이는 아니었겠지만, 도와주는 차원에서라도 구독을 했을 것이다. 대학시절, 그 용돈 궁하던 시절에도 “말”지를 몇년씩 보았던 내가 한겨레의 부탁을 거절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번에는 한겨레가 초심을 잃고, 그 논조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구독하지 않겠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언제부턴가 한겨레는 “가재는 게편”이라고 조중동의 가재 노릇을 하고 있었다. 논조는 민노당에 가까웠지만, 언론 밥그릇 문제만 나오면 가재가 되어버렸다. 대통령의 말투를 문제삼기 시작했고, 몇몇 얼치기 진보들을 끌어다가 참여정부 공격에 열을 올렸다. 그런 한겨레가 조중동보다도 더 어이없을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만약 당신이 단 하나의 신문을 꼭 봐야 한다고 한다면, 아직까지도 나는 주저없이 한겨레를 택할 것이다. 한겨레에 대한 비판을 많이 했지만 그래도 조중동문 같은 쓰레기 신문들과는 다를 거라는 일말의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최소한의 기대는 남아 있다.

한겨레는 이번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 비자금 폭로 사건을 거의 유일하게 제대로 보도하고 있다. 다른 모든 언론들과 포털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지금, 한겨레만이 이 사건에 대해 심층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이런 경우 한겨레는 한국 언론의 유일한 희망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겨레의 노력이 삼성 비자금 사건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줄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우리의 숨통을 틔워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소중하다. 칭찬해 주고 싶다.

하지만, 한겨레의 몇몇 기사를 보면 여전히 어이없기는 매한가지다. 여현호 논설위원의 “이명박이 무너지지 않는 까닭”이라는 칼럼을 보면, 정말 몰라서 이렇게 쓰는 건지, 아니면 알고도 일부러 이렇게 쓰는 건지 분간하기 힘들다.

그보다는 ‘이명박의 반대편’에서 이유를 찾는 게 빠를 것 같다. 단순화하면, 문제가 많다는 이 후보가 여전히 압도적 지지를 받는 것은, 그에 대한 불신과 불안보다 그 ‘반대편’에 대한 반대와 혐오가 더 크기 때문일 것이다. 선거란 게 애초 차악(次惡)이 누군지를 찾는 일인 탓이다.

정말 우리나라 국민들이 이명박보다 이명박 반대편에 대해 더 혐오할까. 모든 사실이 제대로 보도되고 국민들이 이명박에 대해 신정아보다 더 많이 알게 되었는데도 이명박을 지지한다면 그건 이명박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국민들에게 더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우리나라 언론들이 이명박의 의혹과 비리에 대해 신정아 보도의 10분의 1만 했더라도 이명박은 벌써 낙마했을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 이명박이 차악인가? 객관적으로 이명박은 최악의 후보다. 이명박은 이회창보다도 훨씬 질이 낮은 후보다.

여현호 논설위원이 이런 글을 쓰기 2주 전쯤, 나도 이명박의 지지율이 저렇게 높은 이유라는 글을 블로그에 올렸다. 내 글이라서 하는 얘기는 아니지만, 적어도 여현호 논설위원의 글보다는 핵심을 짚었다고 생각한다. 한겨레의 논설위원이 일개 블로거보다도 분석 능력이나 문제 파악 능력이 떨어진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명박에 대한 심층 취재와 보도는 언론의 의무다. 대통령을 하겠다고 나온 사람에 대해 언론이 검증을 하지 않는다면 누가 할 수 있단 말인가. 나같은 블로거가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한겨레는 진작 이명박의 의혹에 대해 사운을 걸고 취재를 했어야 했다. 적어도 한겨레가 조중동처럼 이명박에 줄을 서지 않았다면 말이다.

지금 한겨레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와 순발력이다. 늦은 감은 있지만 이명박에 대해 철저히 취재하고 검증하길 바란다. 이명박의 지지가 높은 이유는 한겨레 같은 언론이 제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겨레의 분발을 촉구한다.

삼성을 단죄할 수 있을까?

삼성을 단죄할 수 있을까?

삼성그룹의 전 법무팀장이었던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의 비리에 대해 폭로했다. 삼성에서 모든 혜택을 누리던 그가 왜 그랬을까 그 동기가 석연치 않지만, 그의 용기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그의 폭로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다들 삼성이 어떤 기업인지 안다. 그들이 돈으로 이 사회를, 이 사회의 지도층들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아는 사람들은 다들 안다. 지난번 삼성 X파일 사건도 빙산의 일각이 아니었던가. 김 변호사는 삼성이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만한 거악”이라고까지 했다. 죽음을 무릎쓸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삼성을 상대로 싸우기 위해서는 죽음을 각오해야 하기는 할 거 같다.

삼성의 비자금 관리와 비리야 공공연한 비밀이기는 하지만, 과연 우리 사회가 삼성을 단죄할 수 있을까? 답은 지극히 부정적이다. 물론 대한민국은 법치 국가요, 모든 사람들은 법 앞에 평등하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물적 증거가 나와도 삼성을 단죄할 수 없다. 국민들이 아무리 단죄하고 싶어도 방법이 없다. 일단 삼성의 비리가 포착이 되면 검찰이 수사를 해야 하는데, 정부보다도 삼성의 관리를 받고 있는 우리나라 검찰이 삼성을 제대로 수사하기를 기대한다면 그것은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대한민국 검찰은 삼성을 수사하지도 않을 뿐더러 한다해도 그냥 시늉만할 뿐이며, 몇몇 곁가지만 쳐낼 뿐이다. 거악에 본류에 닿지 않는다.

검찰이 못하면 특검으로 가야 하는데, 과연 특검법이 국회를 통과할수 있을 것인가. 통과할수 없다. 삼성 회장의 국회 증인 출석도 저지시키는 국회의원들이 과반을 훨씬 넘는 상황에서 삼성을 수사하기 위한 특검법은 찻잔 속의 태풍이나 다름 없다. 검찰이 수사를 제대로 못하고, 특검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삼성의 비리를 수사할 만한 조직은 없다. 특검을 한다 해도 상황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특검에 임명될 사람도 전직 검찰이나 법조인일텐데, 그런 사람치고 삼성의 관리를 받지 않은 사람이 없다.

국민들의 여론이 삼성을 질타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것도 일시적일 뿐이다. 여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언론들이 삼성에 관한 일을 제대로 보도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모든 언론의 가장 큰 광고주인 삼성을 거스릴 수 있는 언론 사주와 편집장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시사저널 사태가 어떻게 결말났는지 다들 알지 않는가. 그 사건이야말로 자본이 어떻게 언론을 탄압하고 통제하는지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지만, 거의 모든 언론사는 그저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삼성은 언론과 입법과 사법을 거의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이 아무리 거악이고, 비리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그들의 불법을 단죄할 수 있는 방법이 아무 것도 없다.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는 명목상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대통령이겠지만, 대한민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은 삼성이라 봐도 과장된 것이 아니다. 게다가 삼성은 다른 재벌들과도 혈연과 혼맥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가. 삼성 권력은 이미 국가 권력을 넘어섰다고 봐도 무리는 아닌 듯 하다.

그렇다면 삼성이 어떤 짓을 해도 가만두고 봐야 한단 말인가. 김용철 변호사는 한낱 돈키호테로 전락할 것인가.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그럴 확률이 지극히 높아 보인다. 삼성을 변화시키려면 삼성의 지배구조부터 바꿔야 한다. 이건희 일가로부터 삼성을 분리시켜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가능할 지는 모르겠다. 이건희보다 더 큰 재력가가 나타나 이건희 일가의 소유구조를 청산하지 않고서는 끝날 일이 아니다. 그것이 가능할 때까지는 달걀로 계속 바위를 때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리 이건희를 구속시키고 삼성을 단죄하라고 목소리를 높여도 공허한 메아리가 될 것이다.

대한민국은 개발독재와 성장위주 정책으로 재벌이라는 괴물을 만들어냈다. 삼성은 그것들 중 가장 강력한 괴물임에 틀림없다. 어쩌겠는가. 인과응보인 것을. 참으로 답답한 노릇 아닌가.

좋은 남자 고르는 법

좋은 남자 고르는 법

나리 님의 블로그에서 우리는 왜 나쁜 남자에게 빠질까?라는 신선하고 재미있는 글을 읽었다. 남녀관계는 어떤 경우든 다 각각 그 이유와 상황이 다르기에 일반적인 경향으로 정리하는 것이 큰 도움이 안 되고 때론 위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류가 시작되고 인류가 멸망하는 날까지 인간들 사이에 가장 많이 회자되고 갈구하게 되는 것은 역시 남녀 간의 사랑과 이별이야기이기에 이것은 아주 중요하고 흥미로운 주제이기도 하다.

경험에 비추어 내가 발견한 몇 가지 사실을 여자들에게 전한다. 물론 이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에 일반화하기 곤란하고, 동의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냥 재미삼아 몇자 적어본다.

생물학적으로 남자들은 여자들에 비해 열등하다. 신체적인 완력은 남자들이 강하지만, 그 이외에 거의 모든 부분에서 남자들은 여자들을 당해낼 수 없다. 남자들은 대개 새로운 환경에 적응력이 약하고 극한 상황을 잘 참지 못한다. 남자들은 대개 즉자적이며 호전적이다. 결정적으로 남자들은 아이를 낳지 못한다. 인류의 생존을 위해 남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정자를 제공하는것 밖에는 없다. 이것은 남자들이 여자들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원초적 열등의식이다. 여자들은 남자들의 정자를 빌어와 아이를 만들 수 있지만, 남자들은 아무리 여자들의 난자를 빌어온다 하더라도 아이를 품을 수 없다. (물론, 남자들의 몸에 자궁을 넣을수 있는 기술이 생긴다면 얘기가 조금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원시사회는 우리가 알다시피 모계 중심 사회였다. 종족의 보존과 번성이 사회의 주요 임무이었기에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자들이 대접받고 권력을 잡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이후 남자들은 피비린내나는 전쟁을 통해 권력을 쟁취하게 되고, 남성 중심의 사회 제도를 만들기 시작했고, 그 전통은 수천년을 지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 사회가 많이 변하고는 있지만 아직도 봉건적인 모습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 대한민국은 남성 중심 사회이다. 하지만, 나는 대부분의 대한민국 남자들은 이미 여자들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 엄마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성인이 되어서는 여자친구의 입김에서, 그리고 결혼을 해서는 아내의 지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겉보기는 지극히 남자 중심으로 보이는 사회지만, 그 속은 이미 여자들이 점령했고, 이제는 겉에 보이는 사회 구조까지 여자들에게 넘어가고 있는 추세다. 머지 않아 인류는 모계 중심 사회로 되돌아갈 것으로 보인다. (사실 남자들은 이런 사실에 대해 몹시 두려워하면서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일종의 방어기제다.)

이런 상황을 전제로 지금까지 관찰한 몇 가지 사실을 얘기해 보면, 우선 열등한 남자들이 여자들을 행복하게해 주는 경우는 몹시 드물다는 것이다. 한다 하더라도 그건은 아주 일시적인 것이고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그런 물질적, 정신적 행복을 바라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백마를 타고 오는 왕자님은 없을 뿐더러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백설공주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지 일반 여자들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다는 것이다.

여자들의 행복은 남자들로부터 전해지는 것이 아니고 여자들 스스로 만들고 찾아가는 것이다. 남자들의 선물이나 근사한 프로포즈를 기대하지 말고, 마음에 드는 녀석들을 적극적으로 골라라. 그리고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남자들에게 종속되지 말고, 남자들을 지배하라. 그럴려면 우선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것이 필수다.

여자들에게 선물 공세와 사탕발림을 하는 남자들은 대개 별 볼일 없는 남자들이다. 그런 남자와 결혼한 여자일수록 결혼 후에 변하는 남자들의 행동에 분개하고 실망하기 마련이다. 연애할 때 일방적으로 잘하는 남자들은 사실 좀 위험하다. 그들은 결혼 후에 그런 일방적인 행위에 대한 보상을 요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선녀와 나무꾼”에 나오는 나무꾼 증후군이라고나 할까. 기본적으로 관계는 상호적이어야 한다.

좋은 남자는 말이 통하는 남자다. 잘생긴 남자도, 돈이 많은 남자도 아니고, 커뮤니케이션이 되는 남자다. 살아온 경험이 비슷하고, 지향이 비슷하고, 취미가 비슷하면 말이 통할 확률이 높다. 이 남자와 내가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 앞으로 얼마나 많이 맞춰갈수 있을지 가늠해 보라.

무엇보다는 남자를 알려면 여러 남자들을 만나봐야 한다. 사랑도 해보고, 배신도 당해보고, 이별도 해보면서 알아가야 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리고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사람도 변하고, 사랑도 변하고, 나 자신도 변한다. 남자이기 이전에 같은 인간으로서 신뢰를 쌓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보라. 세상 경험을 많이 하게 되고, 나이를 먹다 보면 사람에 대해 그런 면면이 보이기 시작한다.

산전수전 겪다보면 이제 당신은 나쁜 남자를 판단할 수 있는 눈이 생기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혜안을 갖게 되었을 때 이미 당신은 예전의 그 파릇파릇하고 싱그러운 여자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랴, 그것이 인생인 것을.

태어나서 지금껏 만난 여자들(어머니와 아내를 포함하여)은 대개 남자들보다도 훨씬 뛰어나거나 사려깊은 이들이었다. 그런 행운에 감사하며, 그런 사려 깊은 여자들을 존경한다. 세상을 여자들이 지배하기 시작하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나은 살만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하여 나는 새로운 모계 중심 사회를 꿈꿔 본다.

세월은 아무도 비껴가지 않는다

세월은 아무도 비껴가지 않는다

20년만에 친구들을 만났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더러는 머리숱이 적어져 있었고, 더러는 반백이 되어 있었다. 얼굴마다 지난 세월의 흔적을 제각기 지니고 있었다. 반갑기도 했고 어색하기도 했다.

20년 전에 찧고 까불고 풋풋한 청소년기를 같이 보냈던 녀석들인데, 이제는 거의 모두 가정을 이루고 있었고, 삶이 주는 무게에 피곤한 모습들이었다. 아내들이 있었고, 하나 둘 자식들이 있었으며 그 가정을 꾸려가야할 책임 앞에 힘겨워했다.

돈을 많이 번 녀석들도 있었고, 빚을 많이 진 녀석들도 있었으며, 이혼한 녀석들도 있었고, 들리는 바에 의하면 자살한 녀석들도 있었다. 20년의 시간은 각자의 인생을 수십 갈래로 나누어 놓고 말았다.

술 한 잔에 먹고 사는 얘기, 재산을 불리는 얘기, 자식 교육 얘기들이 나왔고, 나는 녀석들이 피워대는 담배 연기 속에서 묵묵히 그 얘기들을 주워담고 있었다. 20년 전보다 삶은 더 고되지고 있었다.

각자가 견뎌야 할 삶의 몫은 달랐지만, 그 종류는 대개 비슷했다. 산다는 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 같은 종류의 문제와 고민과 맞닥드리는 것이다. 녀석들과 좀 더 자주 만나면 예전의 편안함이 다시 살아날까?

내가 인정하는 몇 안되는 진리 중 하나, 세월은 아무도 비껴가지 않는다는 것. 20년만에 만난 친구들의 얼굴마다 그 진리는 또렷히 되살아 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