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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신경림

또다시 길을 떠나며

또다시 길을 떠나며

일흔을 넘긴 늙은 시인은 또다시 길을 떠날 채비를 한다. 칠십 평생 수많은 길을 떠나 왔지만, 그 길들은 언제나 세상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고, 그 누군가를 스치게끔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번 길은 그가 떠나온 그 수많은 길과는 다른 길이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깨닫고 그것을 관조할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되자, 시인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었다. 젊었을 때의 그 혈기왕성한 힘과 날카로움, 그리고 세상을 향한 분노가 사그러들었지만, 시인은 조용한 안식을 얻었다. 삶은 그렇게 공평한 것이었다.

세상은 전혀 평화로와지지 않았지만, 역설적으로 시인은 그 악다구니 속에서도 평화를 보았다. 아니 그는 자기가 떠나야 할 시간을 알고는 더 이상 그 팍팍한 삶에 간섭하지 않으려는지도 모른다. 기쁨도, 슬픔도, 고통도 이제는 던져버리고 그는 그 원초적 기원으로 떠날 것이다.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있는 그 순수의 세계로.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 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신경림, 낙타>

한 평생 살고 나서 이런 시를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상을 제대로 살아냈음을 이 보다 더 잘 표현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런 시는 신경림만이 쓸 수 있는 시다.

아버지의 그늘

아버지의 그늘

어릴 적 나는 아버지가 무서웠다. 아버지는 젊었고, 사소한 잘못도 용서하지 않았다. 야단을 맞을 때 아버지가 미웠고, 아버지가 집에 안 들어왔으면 할 때도 있었다. 어린 나에게 아버지는 두려움이었고 다가가기 힘든 존재였다. “내가 커서 아버지처럼 되지는 않으리라.” 아버지는 나에게 반면교사였다. 지금 나는 그때 아버지의 나이가 되었다. 거울을 보면서 문득 나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놀란다. 아이를 야단 치면서 내가 어릴 적 싫어하던 아버지처럼 나도 소리지른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다. 아버지는 이미 내 안에 들어있다. 철이 들기 시작할 무렵부터 아버지는 더 이상 야단을 치지 않으셨다. 물론 내가 어릴 때처럼 야단 맞을 짓을 하지도 않았지만 그것은 아버지가 점점 늙어간다는 또다른 증거였다. 아버지가 되어보니 알겠다. 아버지만큼 아버지 노릇 하기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어릴 때에는 아버지처럼 되지 않겠다고 작심한 내가 지금은 제발 아버지만큼만 되어도 소원이 없겠다로 변했다. 아버지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리고 사랑하고 계신지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아버지보다는 친절한 아버지가 되었지만, 내 아이를 얼마나 잘 키울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아버지가 내게 해 주신 것만큼 나도 내 아이에게 해 줄 수 있을까? 제발, 제발, 그렇게만 되어도 더 바랄 것이 없겠다.
툭하면 아버지는 오밤중에 취해서 널브러진 색시를 업고 들어왔다 어머니는 입을 꾹 다문 채 술국을 끓이고 할머니는 집안이 망했다고 종주먹질을 해댔지만, 며칠이고 집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값싼 향수내가 나는 싫었다 아버지는 종종 장바닥에서 품삯을 못 받은 광부들한테 멱살을 잡히기도 하고, 그들과 어울려 핫바지춤을 추기도 했다 빚 받으러 와 사랑방에 죽치고 앉아 내게 술과 담배 심부름을 시키는 화약장수도 있었다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나는 자랐다 아버지가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노라고, 이것이 내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나는 빚을 질 일을 하지 않았다, 취한 색시를 업고 다니지 않았고, 노름으로 밤을 지새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이 오히려 장했고 나는 기고만장했다, 그리고 이제 나도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진 나이를 넘었지만 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일생을 아들의 반면교사로 산 아버지를 가엾다고 생각한 일도 없다, 그래서 나는 늘 당당하고 떳떳했는데 문득 거울을 보다가 놀란다, 나는 간 곳이 없고 나약하고 소심해진 아버지만이 있어서 취한 색시를 안고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고, 호기 있게 광산에서 돈을 뿌리던 아버지 대신, 그 거울 속에는 인사동에서도 종로에서도 제대로 기 한번 못 펴고 큰소리 한번 못 치는 늙고 초라한 아버지만이 있다 <신경림, 아버지의 그늘>
당신의 은혜를 갚는다는 부질없는 약속은 하지 않으렵니다. 그냥 아버지처럼 저도 제 자식을 사랑하렵니다. 그것이 아버지가 더 바라는 일일테니까요. 아버지!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