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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소요유

행복한 국민

행복한 국민

<꾸뻬 씨의 행복 여행> 중 한 구절.

좋지 않은 사람에 의해 통치되는 나라에서는 행복한 삶을 살기가 어렵다.

바꾸어 말하면, 좋은 사람이 리더인 나라의 국민은 행복하다.

오늘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 100일 기자회견을 보면서 가슴 벅찬 행복을 느꼈다. 가장 훌륭하고 선한 사람이 리더인 이 나라가, 세계 최강이라는 미국이나 중국보다 훨씬 행복하고 자랑스러운 나라가 될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노무현 대통령이 그토록 바라고 원했던 사람사는 세상이 문재인에 의해 열리고 있다. 단 한 가지 가슴 아픈 것은 그렇게 공정하고 정의로운 노무현의 시대에 노무현이 없다는 사실이다.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으로 이어지는 민주공화국의 역사를 함께 했다는 것만으로도 여한은 없다. 노무현과 문재인. 그 어떤 영화나 소설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두 사람의 운명이 이 나라를 구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사무치게 그립지만, 그래도 우리 곁에는 문재인이 있다. 하늘이 이 나라를, 이 민족을 버리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궁극의 깨달음

궁극의 깨달음

당신이 ‘주시자’의 상태로 직접 들어가 봄으로써만 알 수 있겠지요. 즉 순수하게 주시하고 있는 인식 속에 그냥 조용히 안식하는 것이지요. 당신은 보여질 수 있는 어떤 대상이 아니고, 즉 자연도 아니고 신체도 아니고 상념도 아니고, 오직 그와 같이 주시하며 깨어 있는 순수한 알아차림 속에 조용히 안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그러한 주시하며 깨어 있는 인식에 대한 어떤 “감(感)” – 자유감, 해방감, 거대한 팽창감 – 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그러한 상태 속에서 안식하고 있으면서 이 ‘주시자’를 거대한 팽창감으로 “감지하고” 있는 동안, 만약 그때 예컨대 당신이 산을 바라본다면 당신은 ‘주시자’에 대한 감과 산에 대한 감이 동일한 감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시작할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자신의 순수한 ‘자기’를 “느끼고” 당신이 산을 “느낄 때” 그 둘은 절대로 동일한 느낌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현실세계는 당신에게 – 하나는 저 밖에, 하나는 이 안에 – 이중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략]

그러한 양상으로 당신이 현재의 체험 속으로 녹아든다면 분리된 자기감은 느슨하게 풀릴 것이고, 당신은 삶에서 뒤로 주춤 물러서는 것을 멈출 것입니다. 당신이 체험을 하게 되는 게 아니고 갑작스레 당신이 곧 모든 체험이 될 것입니다. 당신은 그저 “저 밖을” 바라보며 “이 안에” 있게 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 안과 저 밖은 하나이고, 그래서 당신은 더 이상 “이 안에” 갇혀 있는 게 아닙니다.

그리하여 돌연히, 당신은 심신 속에 있지 않습니다. 돌연히 심신이 탈락되어 버립니다. 돌연히 바람이 당신에게 불어오지 않고, 그것은 당신을 통하여 당신 안에서 붑니다. 당신이 산을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니라 당신이 곧 산입니다. 당신이 곧 그것이고 그래서 당신이란 존재는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순간순간 자발적으로 생겨나는 이러한 전체의 찬란한 현시일 뿐입니다. 분리된 자기는 아무 곳에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켄 윌버, 모든 것의 역사, 김영사, 2015, pp. 418-419>

마음의 역할

마음의 역할

마음은 몸과 영을 이어주는 고리이다. 산스크리트어로는 마음 또는 지성을 붓디(Buddhi)라고 하는데, 거기서 모든 붓다(Buddhas)가 출현한다. 마음이 몸과 영을 하나로 묶는다. 마음은 영에서 직접 발출된다. 마음은 영의 첫 번째 자기표현이며, 영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마음은 몸과 영 사이에서, 영이 몸에 정착하게 하고 몸을 영으로 끌어올린다. 영으로 하여금 물질 차원에 뿌리를 내리게 하며, 몸이 영적인 차원을 향해 나아가도록 그 방향을 부여한다. 이런 마음의 작용이 없다면, 육체만으로는 어떤 감각이나 시각이나 느낌도 갖지 못한다. 영적인 성장이라는 것은 오직 자기만을 느낄 수 있는 자기중심의 육체적인 느낌에서, 마음 곧 다른 사람의 역할을 이해하고 에고를 넘어 확장하는 단계로, 그리고 세계중심의 영적인 포용의 단계로 발전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은 인식 작용이고 마음의 작용이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느끼는지를 느껴보기 위해서는 마음이 필요하다. 마음은 자기중심적인 느낌의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는 자각을 가져다주며, 온 우주를 껴안는 길로 엄청나게 확장해 나갈 수 있는 출발점을 만들어 준다. 느낌과 생각과 명료한 의식(깸), 몸과 마음과 영. 여기에서 마음은 잃어버린 연결고리이다. <켄 윌버, 통합 비전, 물병자리, 2008, pp. 178-179>
영원히 사는 방법

영원히 사는 방법

우주의 모든 생명체에게 죽음은 숙명이다. 태어난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죽게 되어 있다. 오직 인간들만이 그 죽음을 피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중국 진시황은 영생을 위해 불로초를 찾으려 했고, 현대 과학은 생명 연장을 위해 냉동인간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모두 부질없는 짓이다.

영원히 산다는 것은 시간 속에서 영속적으로 존재하는 삶이 아니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고 주어진 순간 순간을 최대한 충실히 사는 삶이다. 다른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If we take eternity to mean not infinite temporal duration but timelessness, then eternal life belongs to those who live in the present.

우리가 만약 영원을 시간이 무한히 지속된다는 뜻이 아니라 무시간성으로 받아들인다면, 영원한 삶은 현재를 사는 사람들의 몫이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영(Spirit)이란 무엇인가

영(Spirit)이란 무엇인가

영(Spirit)을 의식의 최상위 단계로 정의한다면, 그것은 다른 말로 진정한 신성 또는 궁극적인 존재의 근거라 할 수 있다. 깨달은 이들은 일관되게 그런 것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들(깨달은 이들)은 궁극적인 존재의 근거를 마법적인 개념이나 신화적인 용어로 표현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세계 밖에 있는, 또는 단순히 이 세계를 초월해 있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들은 궁극적인 존재의 근거를 이 세계의 ‘그러함(Suchness)’이나 ‘이러함(Thusness)’ 등으로 묘사한다. 또는 모든 것이 출현하는 자궁과 같은 공(空)으로까지 표현하기도 한다.

때로는 궁극적인 지성이나 현존하는 자각 또는 무한한 의식을 암시하는 용어로 묘사하기도 한다. 그것은 존재를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그냥 아는 존재 자체로서의 지성이며, 동시에 존재를 출현시키는 지성이다. 이 지성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참 자아이다. 그래서 앎과 존재, 또는 주체와 객체가 비이원적인 현존 상태에서 하나로 존재하는 그런 지성이다.

그것을 ‘주체(a subject)’라고 한다면, 광대하게 열려 있는 목격자(또는 주시자), 절대적인 주관성, 대상을 공평하고 동등하게 노력 없이 자발적으로 비추는 거울 같은 마음, 모든 것을 끝없이 품으면서 지금 그리고 여기에 충만하게 현존하는 큰 마음 등으로 표현해 볼 수는 있겠지만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어떠한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주체이다.

그것을 ‘존재(Being)’라는 용어로 묘사하는 경우에는 존재론적인 실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모든 개념과 느낌과 생각과 이미지에 앞서 존재하는, 그러나 존재하고 있는 단순한 느낌으로서 지금 여기에서 쉽게 접촉할 수 있는, 무엇의 그저 ‘그러함(Suchness or Is-ness)’을 의미한다.

그것을 인격적인 개념으로 묘사할 경우에는 모든 신 너머에 있는 ‘신성’, 이 순간 만물이 거기에서 출현해 나오는 ‘심연-지성(Intelligence-Abyss)’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영원하다. 여기서 영원하다는 것은 영구히 지속된다는 뜻이 아니라, 시간이 없는 현재로서 언제나 현존하고 있는 무엇이라는 뜻이다.

<켄 윌버, 통합 비전, 물병자리, 2008, pp. 153-154>

양아치와의 협상은 가능한가

양아치와의 협상은 가능한가

양아치는 원래 동냥아치에서 나온 말이지만, 요즘에는 인성이나 행실이 몹시 불량한 기회주의자들을 일컫는다. 이들에게 신의나 의리 따위는 없다. 따라서 이들을 정상적인 사람들로 대우하면 안 된다. 이런 인간말종들과의 협상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하지만 혹시라면 이런 류의 인간들과 말을 섞어야 한다면 이런 자들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어서는 안 된다.

영화 대부에서 말론 브란도가 한 말을 되새겨 보라.

I’m gonna make him an offer he can’t refuse.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는 것만이 양아치들을 다루는 유일한 방법이다.

헬조선, 과연 누구 책임인가

헬조선, 과연 누구 책임인가

유명 대학 교수들이 페이스북에서 헬조선에 대한 논쟁을 벌인 모양이다. 한 교수는 이 나라를 헬조선이라고 빈정대는 청년 세대를 철이 없다고 꾸짖었고, 다른 교수는 청년 세대의 절망을 이해하지 못하는 기성 세대의 오만이라고 맞받았다. 하지만, 헬조선 문제를 세대 대결로 치환하는 것은 논점이 벗어난 것일 뿐만 아니라 문제 해결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헬조선은 세대의 문제가 아니고, 계급의 문제이고 사회 구조의 문제임을 알아야 이 논쟁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

우선 청년들이 주장하는 대로 이 나라는 헬조선인가? 이 땅의 대다수 청년들은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 나라는 정의롭지 못하다. 열심히 일한 사람들이 잘살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대다수 청년들에게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개인의 노력으로 넘을 수 없는 견고한 벽이 있다. 헌법 상으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한 민주공화국이지만, 사실은 신분제나 계급제 국가라고 봐야 한다. 그래도 이전 세대에서는 어느 정도의 신분 상승이 허용되었으나, 이미 개천에서 용나는 시대는 지났다. 희망이 없는 사회, 청년이 신음하는 사회, 아이 낳기를 꺼리는 사회는 분명 헬조선에 가깝다.

왜 이렇게 되었나? 해방 이후 첫단추를 잘못 꿰었다. 단죄되어야 할 친일파들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모든 일이 꼬였다. 그 이후 수십 년간 (소위 산업화 세력이라 불리는) 군부 독재가 들어서면서 친일파와 독재 부역 세력이 명실상부한 지배 세력이 되었다. 이들이 재벌, 언론과 결탁하여 반칙과 특권으로 자신들의 계급을 만들어갔다. 이들은 보수세력이 아니다. 이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눈앞의 이익만을 좇는 기회주의 세력일 뿐이다. 이 나라에서는 당연히 상식과 원칙이 통하지 않았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탄압을 받거나 죽임을 당했다. 대다수 국민들은 개, 돼지 취급을 당했다.

청년들은 자신의 부모 세대나 할아버지 세대를 비난하지 않는다. 설령 그들이 기성 세대를 욕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오히려 기성 세대는 청년들에게 미안해 해야 한다. 한 줌도 안 되는 친일과 독재 부역 세력들이 자신들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 이 나라를 헬조선으로 만들었다. 기성 세대의 잘못은 이런 기회주의 지배 계급을 타파하지 못하고 그들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세뇌당한 것이다. 따라서 계급의 틀은 나날이 공공해진다. 성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 연대나 협력은 개나 줘버려야 한다. 중고등학교에서는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 대학에서는 좋은 직장을 잡기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한다. 그런 인간들만이 지배 계급에 들어갈 자격이 생긴다.

그렇다면 정말 희망이 없는 것인가? 두 번의 정권 교체를 경험하면서 일말의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노무현의 가치가 문재인 정부로 이어지면서 조금씩 정의로운 나라에 다가서고 있다. 헬조선을 만든 건 기성 세대지만,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은 청년들의 몫이 되었다. 청년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면 그 희망은 점점 커질 것이다.

지배 계급은 몹시 견고하다. 행정부만을 제외하고 이 나라의 거의 모든 상부구조를 장악하고 있다. 이 구조를 타파하지 않고는 해피조선은 가능하지 않다. 시간이 꽤 걸리겠지만, 불가능하지 않다. 청년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그리고 그 청년들이 기성 세대가 되었을 때 자식들에게 자랑스럽게 얘기하라. 예전에는 헬조선이었지만, 지금은 해피조선이라고. 청년들의 건투를 빈다.

대통령을 가장 잘할 사람

대통령을 가장 잘할 사람

현재 우리나라 정치인 중 대통령을 가장 잘할 사람은 누구일까? 정답 문재인. 가장 대통령을 잘할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아 놓았으니 당분간 이 나라의 걱정거리는 많이 줄었다.

오늘 국정운영 100대 과제 발표를 보면서, 문재인 정부가 전 세계에서 가장 유능한 정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발표의 내용과 형식이 최고 수준이고, 지난 2달 동안 이 일을 진행한 사람들의 면면이 훌륭하다. 믿음직스럽다.

문재인 대통령은 참여정부 시절, 노무현 대통령을 보좌하면서 5년간 국정을 경험했다. 경험으로 봐도 그를 따라올 사람이 없다. 그는 명석한 두뇌와 따뜻한 가슴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우월한 외모까지 겸비했다. 그의 유일한 약점은 권력의지가 없다는 것이었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후 노무현의 운명을 본인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공과 사의 구분이 명확하고, 원칙을 끝까지 지키며, 리더로서의 무한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다. 늘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하며, 우리 사회 약자 편에 서서 일을 한다. 품성으로 봐도 그를 따라올 사람이 없다.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은 이 나라의 복이다.

10년 전쯤 노무현 대통령은 오늘 발표와 비슷한 형식의 연설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노무현 대통령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하던 때였다. 사방이 적이었고, 노무현은 너무나 많은 오해와 핍박을 받던 시절이었다. 연설의 달인이었던 노무현조차 버거워했던 연설이었다.

오늘 문재인 정부는 정말 세련되고 근사했다. 그리고 여유로웠다. 10년 전의 당황하던 노무현이 있었기에 오늘 이렇게 유능한 문재인 정부가 탄생한 것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민주 세력이 집권 경험을 쌓아 가면서 이제는 도덕성뿐만 아니라 능력으로도 기회주의 세력을 압도하고 있다. 내년 지방 선거, 그 이후 총선을 통해 지방 권력과 의회 권력마저 가져온다면, 이 나라의 미래를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오늘 문재인 정부의 국정운영 발표를 보았다면, “이야, 기분 좋다!”고 했을 것 같다. 그가 많이 보고 싶다.

샤오미 미밴드 효과

샤오미 미밴드 효과

주위에 스마트 밴드나 스마트 시계를 차고 다니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되는데, 이런 종류의 기기에 대해 큰 기대는 없었다. 귀찮게 그런 걸 차고 다니나 그런 정도의 생각이었다.

6월 말에 샤오미 미밴드2를 샀다. 샤오미 미밴드를 사게 된 이유는 우선 저렴하고, 하루에 몇 걸음을 걸었는지 측정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예상과는 다르게 샤오미 미밴드가 의외의 효과를 가져왔다. 매일 몇 걸음을 걸었는지가 기록이 되기 때문에 오늘 10,000보를 꼭 걸어야겠다는 동기부여가 되었다. 이런 동기부여 효과를 “샤오미 미밴드 효과”라고 부르고 싶다.

아침에 일어나면 어떤 때는 피곤하거나 귀찮기 때문에 아침 운동을 거르기도 하는데, 미밴드가 생기고 난 다음에는 귀찮아도 아침 운동을 꼭 하게 된다. 왜? 10,000보 이상을 걸어야 하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야 하기 때문에.

지난 12일 동안 하루 평균 13,000보, 거리로는 10Km 정도를 걸었다. 건강에 큰 도움이 되었다. 무엇이든 성과를 내려면 우선 현재 상태를 알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 상태를 측정하여 데이터로 남겨야 한다. 샤오미 미밴드를 사용하면서 다시 확인한 깨달음이다.

어느 화가의 유언

어느 화가의 유언

“예술은 본능”이며, “예술에서의 이론은 의사의 처방전 같아서 그것을 믿는 사람들은 환자”라고 일갈한 프랑스 야수파 화가 모리스 드 블라맹크(Maurce de Vlaminck)는 죽기 전 마지막 글에서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삶은 내게 모든 것을 주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했으며, 내가 본 것을 그렸다.

Je n’ai jamais rien demandé, la vie m’a tout donné. J’ai fait ce que j’ai pu, j’ai peint ce que j’ai vu.

삶을 충만하게 살다 간 사람들은 모두 같은 말을 남긴다. 삶은 그 자체로 완벽하기 때문에 무엇을 바라거나 원할 필요가 없다. 다만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내면 된다. 그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그것을 깨닫기까지 반백년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