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이 있었다. 예수의 제자 야고보의 유해가 별들의 들판에 묻혀 있다는. 그 전설에 의해 길이 열렸고, 그 길을 따라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산티아고로 향했다. 그들은 순례자라 불렸다.
길은 피레네산맥을 넘고 나바라와 메세타 평원을 거쳐 갈리시아에 닿아 있었다. 그 길을 떠나는 사람들은 자기만의 이유가 있었다. 어떤 이들은 신께 더 가까이 가기 위해 길을 떠났고, 다른 이들은 진리를 찾아 떠났다. 기적을 믿는 이들도 있었고, 치유가 필요한 이들도 있었다.
길은 그곳에 있었고, 그 길은 꿈 꾸는 자가 보아야 할 것을 보여주고, 필요한 것을 내주었다. 길의 법칙을 가르쳐 주었고,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깨닫게 해 주었다. 탐욕의 폐해를 알게 해 주었고, 겸손이 무엇인지, 열정이 무엇인지, 인내가 왜 필요한지 가르쳐 주었다.
길은 공평하였다. 걸은 만큼 알게 해 주었고, 사람들은 걸은 만큼 성장하였다. 그 길 위의 사람들은 동료가 되었고, 친구가 되었고, 가족이 되었다. 기쁨을 같이하고 슬픔과 고통을 나누며 함께 걸었다. 산티아고라는 목표가 있었지만, 그곳에 정말 성 야고보의 유해가 묻혀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성 야고보는 상징일 뿐이었다. 그것이 가리키는 것은 사랑이었다. 그들은 마침내 그 사랑이 산티아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순례길의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곳에 존재했다. 산티아고 순례길뿐만 아니라 모든 길에 있다는 사실도, 그 모든 길 위에서 걷고 있는 모든 존재가 사랑임을 알게 되었다. 결국, 순례는 사랑을 찾아 떠나는 것이며, 그 사랑이 모든 존재임을 깨닫는 여정이다. 길은 그 진리를 가르쳐 주었다.
생장의 스페인문, 드디어 출발
저멀리 양떼
Honto 이정표
오리송 가는길
길가의 말들
오리송 산장
생장에서 오리송까지는 약 10Km. 아내는 오리송 산장에서 꼭 하룻밤을 묵어야 한다고 우겼다. 성수기인 여름에 여기에서 묵으려면 미리 예약을 해야 한다. 눈 앞에 펼쳐진 피레네의 멋진 풍광과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이곳을 지상낙원으로 만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저 아래 풀을 뜯고 있는 양들과 말들을 바라보았다.
한국에서 온 신부님 일행과 인사를 나누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산장에 묵는 40여명의 사람들과 자기 소개를 하며 인사했다. 우연으로 보이지만 운명으로 만난 이들이었다. 시끌벅적 저녁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카미노에서의 첫날밤, 모두들 평화롭게 잠에 취했다.
덧.
<야고보의 전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된 후, 예수의 제자였던 야고보가 스페인 북부 지방까지 복음을 전하러 왔다. 그 후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순교하고, 그의 유해가 돌배에 실려 스페인 북부 해안에 떠내려오게 된다. 야고보의 유해가 스페인 북부에 묻히게 되고 그 이야기는 시간이 흐르면서 잊혀진다.
세월이 한참 흐른 후, 9세기에 별들의 들판이라 불리는 곳의 한 무덤이 별의 계시에 따라 야곱의 무덤으로 밝혀진다. 왕은 그곳에 성당을 짓고 성 야고보를 추모한다. 그 후 사람들의 순례가 시작되었고, 중세에는 교황이 예루살렘, 로마와 더불어 산티아고데캄포스텔라를 3대 성지로 선포하였다.
계획하지도 않았고 별 기대도 없었지만, 설레임과 호기심으로 일찍 잠을 깼다. 아직 시차 적응이 안 되어 일찍 일어난 건지도 모를 일이지만.
멀리서 동이 트기 시작했다. 숙소에서 아침을 챙겨먹고 강가에 나가 산책을 했다. 강물이 유유히 흐른다. 저 유장한 강물은 어디에서 바다를 만날 것인가. 바욘역에서 생장피에드포르 가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Saint-Esprit 다리바욘역생장 가는 열차
생장의 순례자 사무실에서 세 명의 한국 젊은이들을 만났다. 젊음은 생장에서 더욱 빛났다. 그들은 론세스바예스로 서둘러 떠났고, 남겨진 자는 생장의 낡은 성곽을 둘러 보았다. 돌틈의 이끼가 시간의 두께를 말해주고 있었다.
하늘은 드높고, 독수리 같이 보이는 새 서너 마리가 공중을 빙빙 돌고 있었다. 저 앞에 보이는 피레네 산맥의 어느 봉우리에 하얀 구름모자가 멋스럽게 걸렸고, 바닥에는 산티아고의 방향을 가리키는 금속 표식이 번들거렸다.
계획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은 뜻밖의 여정에 순례자가 되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남겨진 자에게는 이 길을 걸어야하는 숙명 같은 임무가 있었다. 그는 그 임무를 입 밖에 내서는 안 된다. 성당에 들러 이번 여행의 안녕과 모든 이의 행복을 위해 기도했다. 상쾌한 출발이었다.
성곽에서 바라본 생장의 전경생장의 풍경피레네 산맥에 걸린 구름모자산티아고 방향을 가리키는 바닥 표식노틀담 뒤퐁 성당
삶은 대개 계획대로 전개되지 않는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모든 여행이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불과 두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순례길을 끝까지 걸을 수는 없지만, 이번 여행은 사람의 의지와는 상관 없는 일종의 ‘부름’이었고, ‘선물’이었다.
새벽 3시 반, 휴대전화 알람을 맞춰 놓고 잠이 들었지만 전화기는 울리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부름’으로 눈을 떴다. 역시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루가 시작되었다. 공항가는 버스 좌석을 예매하지 않았는데, 새벽에 사람이 그렇게 많을 줄 몰랐다. 표 파는 아저씨가 마지막 한자리가 남았다고 귀뜸해 주었다. 누군가가 계속 지켜보면서 도와주는 기분이 들었다.
인천공항은 예상대로 몹시 붐볐다. 방학을 맞은 젊은이들과 중국에서 온 관광객들로 공항은 북새통이었다. 에어프랑스 기장들의 파업 때문인지 파리로 가는 비행기의 도착이 지연되었다. 비행기에 탄 젊은이들의 얼굴에는 호기심과 설레임이 가득했다. 비행기에서 주는 두 번의 밥을 꼬박 챙겨먹고, 몇편의 영화를 보다가 잠이 들었다.
나이가 들면서, 오랜 비행이 주는 피로를 쉽게 견디지 못했다. 늘 계획없이 사는 자의 운명인지 모르겠지만, 뜻밖의 여행이라도 큰 기대는 없었다.
하버드 대학 MBA 출신의 성공한 미국 사업가가 멕시코의 한적한 바닷가에 휴가를 갔다. 그곳에서 한 젊은 어부를 만났는데, 그 사업가의 눈에는 이 어부가 한심해 보였나 보다. 너무나 적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을 낭비하는 듯한 어부에게 사업가는 물었다. “나머지 시간에는 도대체 무얼 합니까?”
어부는 대답했다. “아침에 천천히 일어나고, 낚시를 좀 하고, 아이들과 놀고, 아내와 낮잠을 좀 자고, 저녁에는 산책을 가는데, 와인을 조금 마시면서 친구들과 기타를 치며 놉니다. 좀 바쁘죠.”
사업가는 어부에게 자기가 도와주면 더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고, 더 많은 배를 가질 수 있으며, 한 20년 후에는 백만장자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어부가 물었다. “백만장자가 되고 난 다음에는요?”
사업가가 대답했다. “은퇴하고 이런 바닷가에 와서 사는 거지요. 아침에는 천천히 일어나고, 낚시를 좀 하고, 아이들과 놀고, 아내와 낮잠을 좀 자고, 저녁에는 산책을 가는데, 와인을 조금 마시면서 친구들과 기타를 치며 노는 겁니다.”
나향욱 교육부 정책기획관이 “99%의 민중은 개, 돼지”라는 영화 <내부자>의 대사를 인용하여 파장을 일으켰다. 그는 경향신문 기자와의 식사 자리에서 신분제를 공고화해야 한다는 본인의 평소 소신을 용기있게 드러낸 모양이다. 그것이 보도되자 그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인이 되어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발언에 분노하여 그를 당장 파면해야 한다고 아우성이지만, 사실 나향욱은 그 업계(그가 말하는 1% 지배계급) 사람치고는 무척 순진하고 용기있는 사람이다. 그에 의해 개, 돼지 취급을 받은 99%의 민중들이 아무리 난리를 쳐도 그가 파면되거나 중징계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 나라 1% 지배계급에 드는 인간들은 나머지 국민들을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이것은 상식이다. 이 나라 지배계급은 친일파와 독재의 후예들이라 볼 수 있는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언론, 교육, 행정, 사법, 군부 할 것 없이 이 나라 지배에 필요한 거의 모든 권력 기구를 움켜쥐고 있다. 그들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민중을 개, 돼지 또는 노예로 취급한다.
나향욱은 순진하게도 또는 용감하게도 기자와의 식사 자리에서 그런 지배계급의 상식을 드러낸 것뿐이다. 나향욱 같은 고위 교육 관료가 해야 하는 일은 교육을 통해 국민들을 세뇌시키는 것이고, 노예로 길들이는 것이다. 그는 교육 정책을 통해 양극화를 심화하고 신분제를 공고히 해왔다.
나향욱 같은 인간에게 개, 돼지라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노예가 노예인지도 모르고 사는 것이다. 형식적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사회에 산다고 해서 모두가 민주국가의 같은 시민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이 나라는 이미 봉건국가를 지나 내재적 노예국가로 퇴행했다.
노예가 노예인줄 알아야 그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뭐라도 할 것 아닌가? 노예 주제에 주인인 줄 안다면, 1% 지배계급이 만들어 놓은 이 시스템은 별일 없이 잘 굴러갈 것이다. 지배계급이 가장 원치 않는 것은 개, 돼지 민중이 깨어나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나향욱은 민중들을 일깨우는데 큰 힘을 보탰다.
나향욱의 건투를 빈다.
에반스 웬츠(Evans Wentz)가 정리, 요약한 <티벳 사자의 서>에 담긴 가르침들이다.
윤회계의 모든 존재들이 처한 상황과 장소와 조건들, 그리고 인간계와 천상계와 지옥계들은 모두 전적으로 현상에 의존한다. 다시 말해 단지 현상(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모든 현상은 윤회하는 마음에게만 나타나는 것일 뿐 실제로는 덧없는(영원하지 않은) 것이고, 환영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천신들이나 악마들이나 신령들이나 중생들과 같은 존재들은 사실 어떤 곳에도 없다. 이 모두는 원인에 의존한 현상일 뿐이다.
이 원인이란 육체적인 감각과 변하기 쉬운 윤회의 삶을 추구하는 욕망이다.
이 원인이 완전한 깨달음(대지혜)으로 극복되지 않는 한 죽음은 태어남을 뒤쫓고 태어남은 죽음을 뒤쫓아, 현명한 소크라테스까지도 믿었듯이 그것은 끝이 없다.
사후세계는 그 조건만 다를 뿐 인간 세상에서 만들어진 현상의 연속이다. 이 두 세계는 똑같이 카르마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죽음과 환생 사이의 중간 상태(바르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은 이 생에서 어떤 행위들을 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꿈의 연장이다. 일종의 4차원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곳에서, 꿈꾸는 자의 생각에 담긴 내용들이 곧바로 환영으로 나타난다. 그런 영상들이 그곳에는 가득 차 있다. 만일 좋은 카르마를 지녔다면 행복하고 천국 같을 것이고, 나쁜 카르마라면 비참하고 지옥 같은 환영들일 것이다.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지 않으면 카르마의 법칙에 따라 천상계나 지옥계로부터 또는 바르도 세계로부터 곧바로 인간 세계에 환생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완전한 깨달음은 윤회계가 또는 존재 그 자체가 하나의 환영이며 실재하지 않는 허상임을 깨닫는 데서 얻어진다.
이런 깨달음은 인간세계에서도 가능하고, 인간 세계에서 맞이하는 임종의 중요한 순간에서도 가능하며, 사후세계의 전과정 곧 바르도 상태에서나, 아니면 인간계가 아닌 어떤 다른 세계들에서도 가능하다.
명상 수행, 다시 말해 ‘바른 지식’에 이르기 위해 마음을 집중할 수 있도록 사념을 조절하는 수행은 필수적이다.
이 명상 수행은 스승 또는 교사의 가르침을 받을 때 가장 효과적이다.
이번 세계의 주기에 인류에게 알려진 가장 위대한 스승은 고타마 붓다이다.
그의 가르침은 그만의 독창적인 것이 아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 죽음과 환생의 순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윤회의 대양을 건너 니르바나에 이르기 위해 아득한 세월 이전부터 수많은 붓다들이 인간 세계에 폈던 것과 똑같은 가르침이다.
아직 환영의 그물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이 세계나 다른 세계들에 존재하는 영적으로 더 많은 깨달음에 이른 보디사트바(보살)들이나 스승들은 자신들보다 뒤쳐져 도의 길을 걸어오는 제자들에게 거룩한 축복과 능력을 베풀 수 있다.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목적은 윤회계로부터의 해방이며, 그것만이 유일한 목적이 될 수 있다.
이 해방은 니르바나(모든 고통과 번뇌가 끊어진 경지)를 실현하는 데서 얻어진다.
니르바나는 극락과 천상계와 지옥계와 그 밖의 모든 세계들을 초월한 경지이며, 윤회에서 벗어나 있다.
<티벳 사자의 서>에서 얘기하는 죽음 이후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바르도(Bardo)는 글자 그대로 ‘사이(Bar)’와 둘(do)’을 뜻한다. 두 상태 사이, 다시 말해 죽음과 환생 사이가 바르도이다.
죽음을 맞이한 순간부터 3일 반이나 때로는 4일 동안, 대부분의 경우 의식체는 자신이 육체로부터 분리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기절 상태 또는 수면 상태에 빠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기간이 첫번째 바르도이며 그것은 치카이 바르도(Hchikhahi Bardo), 곧 ‘죽음 순간의 바르도’라고 부른다. 이때 최초의 투명한 빛이 사자 앞에 나타난다. 그 빛은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밝아 오는 순수한 빛이다. 그러나 사자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다시 말해 그 빛이 상징하는 마음 본래의 초월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지 못하고, 자신의 카르마 때문에 그것을 흐릿하게 인식한다.
첫번째 바르도가 끝났을 때 자신에게 죽음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자는 두번째 바르도를 경험하기 시작한다. 이것을 초에니 바르도(Chösnyid Bardo), 곧 ‘존재의 근원을 체험하는 바르도’라고 부른다. 이 상태는 곧이어 세번째 바르도의 상태로 흘러들어간다. 그것이 시드파 바르도(Sridpahi Bardo), 곧 ‘환생의 길을 찾는 바르도’이다. 이 바르도는 의식체가 인간계나 다른 세계, 또는 천상의 극락세계에 환생함으로써 막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