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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소요유

“아, 씨바, 노무현 보고 싶다”

“아, 씨바, 노무현 보고 싶다”

그래, 나 노무현 좋아. 난 자연인 노무현보다 남자다운 남자를 본 적이 없어. 나보다 남자다워. 난 서른 중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남자가 다 됐어. 그 전엔 나도 부분적으로 찌질했어. 하여튼 난 그런 사람 처음 봤고 아직까진 마지막으로 봤어.

아, 씨바, 노무현 보고 싶다.

이명박 같은 자가 그런 남자를 죽이다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내가 노무현 노제 때 사람들 쳐다볼까 봐 소방차 뒤에 숨어서 울다가 그 자리에서 혼자 결심한 게 있어. 남은 세상은,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그리고 공적 행사에선 검은 넥타이만 맨다. 내가 슬퍼하니까 어떤 새끼가 아예 삼년상 치르라고 빈정대기에, 그래 치를게 이 새끼야, 한 이후로. 봉하도 안 간다. 가서 경건하게 슬퍼하고 그러는 거 싫어. 체질에 안 맞아. 나중에 가서 웃을 거다. 그리고 난 아직, 어떻게든 다 안 했어.

<김어준, 닥치고 정치, p. 299~300>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를 보다가 이 대목에서 울컥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어떻게 이명박 같은 자가 노무현을 죽일 수 있었을까. 이런 일은 영화에서도 일어나지 않는 일인데, 이 빌어먹을 땅이 저주를 받긴 받은 모양이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하늘은 푸르고, 은행잎은 저리도 노랗게, 예쁘게 물드는데…

아, 씨바, 노무현 보고 싶다.

구르는 천둥이 남긴 말

구르는 천둥이 남긴 말

비를 내리게 하는 체로키 인디언 치료사 구르는 천둥(Rolling Thunder)이 남긴 말들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이 없이 할 수 있는 말들이 아니기 때문에 늘 가슴에 담아두면서 되새기고 싶다.

삶의 가르침은 그런 식으로 찾아오지 않는다. 단순히 자리에 앉아서 진리에 대해 토론한다고 해서 진리가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진리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대는 삶 속에서 진리를 경험해야 하고, 진리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한다 해도 진리를 깨닫기가 어렵다. 진리는 아주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씩 다가오며 결코 쉽게 오지 않는다. (p. 54)

어떤 존재도 다른 존재를 해치거나 통제할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 어떤 개인이나 정부도 사람들을 강제로 어떤 조직이나 체제에 들어가게 하거나 학교나 교회로 보내거나 전쟁터에 내보낼 권리가 없다. 모든 존재는 고귀한 것이고 또한 생의 목적을 갖고 있다.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스스로 자기를 다스리는 힘이 필요한 것이며, 그것이 곧 영적인 힘이다. (p. 264)

인간은 대지를 소유할 수 없다. 오히려 대지가 인간을 소유한다. 어떤 사람은 문서를 작성해 자신이 그 땅의 소유자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다. 우리는 대지의 소유자가 아니며, 누구도 그렇게 될 수 없다. 대지의 소유자는 ‘위대한 정령’이며, 다만 우리에게 그 권한이 부여되었을 뿐이다. 우리는 대지를 보호하는 자이다. (p. 344)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인 인디언들의 지혜를 감당하기 어렵다. 그들은 오래 전에 어떻게 살아야 할 지를 이미 깨달은 사람들이다. 얼굴 흰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하자 인디언들의 삶은 철저히 파괴되어 사라져 버린다.

몇몇 남겨진 인디언들의 잠언만이 우리를 일깨우고 있다. 과연 세상은 발전하는 것인가?

스티브 잡스 (Steve Jobs)

스티브 잡스 (Steve Jobs)

Steve Jobs
Steve Jobs (1955-2011)

세상을 바꾸려던 천재들은 늘 그렇게 일찍 세상을 등졌다.

오늘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났고, 나는 그가 만든 아이폰으로 그의 부음을 들었다.

명복을 빈다.

9월이 간다

9월이 간다

시인은 9월에 대해 이렇게 읖조렸다.

9월이 오면 강물이 들판을 금빛으로 만들 듯이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사람과 더불어 우리도 다른 이들에게 남겨 둘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고.

따뜻하고 아름다운 시인의 바람과는 달리 9월은 슬픔과 분노와 아쉬움만을 남긴 채 가버렸다. 일년 중 가장 풍성한 때인 한가위가 있었음에도 9월은 도무지 신명도 즐거움도 없이 그렇게 가버렸다.

추석 전 날, 아이들을 위해 늘 노심초사 봉사하던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이 사악한 검찰 집단에 의해 구속되었다. 추석이 지나자마자 7개 저축은행들이 영업 정지를 당했고, 그 저축은행에 돈을 예금한 서민들은 넋을 잃고 말았다. 추악한 권력 비리의 흔적들이 곳곳에서 감지되었다. 민노당과 참여당의 진보 통합 노력이 좌절되었다. 지난 몇 달 동안 꿈꿔왔던 대중적 통합 진보 정당의 출현이 불발된 것이다. 이정희 대표와 유시민 대표가 안쓰러웠다.

따지고 보면, 사람들의 희망이 속시원하게 실현된 적이 있었던가? 어쩌면 그런 바람과 희망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는 실현될 수 없을지도 모를 일이다. 실현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런 바람들은 아름다운 것이고, 인간들은 늘 그런 바람과 희망이 실현되길 기도하는지도 모른다.

그대
구월이 오면
구월의 강가에 나가
강물이 여물어 가는 소리를 듣는지요
뒤 따르는 강물이 앞서가는 강물에게
가만히 등을 토닥이며 밀어주면
앞서가는 강물이 알았다는 듯
한 번 더 몸을 뒤척이며
물결로 출렁 걸음을 옮기는 것을
그 때 강둑 위로
지아비가 끌고 지어미가 미는 손수레가 머무는
인간의 마음을 향해 가는 노을

그대
구월의 강가에서 생각하는지요
강물이 저희끼리만 속삭이며
바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젖은 손이 닿는 곳마다
골고루 숨결을 나누어 주는 것을
그리하여
들꽃들이 피어나 가을이 아름다워지고
우리 사랑도 강물처럼 익어가는 것을

그대
사랑이란
어찌 우리 둘만의 사랑이겠는지요
그대가 바라보는 강물이
구월 들판을 금빛으로 만들고 가듯이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사람과 더불어 몸을 부비며
우리도 모르는 남에게 남겨 줄
그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을
구월이 오면
구월의 강가에 나가
우리가 따뜻한 피로 흐르는 강물이 되어
세상을 적셔야 하는 것을

<안도현, 구월이 오면>

9월이 가고, 10월이 온다.

노무현 정신을 지키는 방법

노무현 정신을 지키는 방법

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 농부는 세상에서 둘도 없는 아주 귀하고 소중한 씨앗을 얻었습니다. 농부는 그 씨앗이 너무나 소중해 몇 백년이라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싶었습니다. 아니 대를 이어 가보로 남기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농부는 그 씨앗을 아무도 모르는 곳에 보관하기로 했습니다. 세월이 가면서 그 씨앗은 서서히 마르기 시작했습니다. 씨앗은 생기를 잃었습니다. 씨앗은 너무나도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었지만, 생명을 잃은 씨앗은 더 이상 씨앗이라 불릴 수 없었습니다. 농부도 그 씨앗의 존재를 잊기 시작했습니다.

또 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 농부도 세상에 둘도 없는 귀한 씨앗을 얻었습니다. 농부는 이듬 해 봄에 그 씨앗을 밭에 뿌렸습니다. 농부는 씨앗이 싹을 틔우도록 온갖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때론 날이 너무 가물었고, 때론 세찬 바람이 불었으며, 때론 억센 비가 쏟아져 내렸습니다. 농부는 너무 힘이 들어 포기하고도 싶었지만, 씨앗이 죽지 않고 싹 틔우길 매일매일 기도했습니다. 드디어 씨앗은 온갖 어려움을 뚫고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가을이 되자 그 씨앗은 수천 아니 수만의 씨앗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비록 처음의 그 씨앗은 땅 속에서 사라졌지만, 이제 그 씨앗과 똑같은 수천 수만의 씨앗을 얻게 되었습니다. 농부는 그 귀한 씨앗을 마을 사람 모두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모두들 그 귀한 씨앗을 받고 기뻐했고, 새봄이 어서 오길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그 씨앗이 바로 “노무현 정신”이란 씨앗입니다.

현역 정치인 중에 유시민과 이정희 만큼 노무현을 닮은 정치인은 없습니다. 그 두 사람은 “노무현 정신”을 누구보다도 더 잘 꽃피울 사람들입니다. 나는 참여당 대표 유시민과 민노당 대표 이정희를 신뢰합니다. 이제 두 사람이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당원들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쉽지만은 않은 길이란 것을 압니다. 하지만,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습니다. 노무현을 꼭 닮은 정치인들이 양당의 대표를 맡을 수 있는 기회는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오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어려움이 있고, 많은 서운함이 있더라도 지금이 함께 할 기회입니다. 그 소중한 씨앗을 최소한 밭에 뿌려 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유시민이 정리한 노무현 대통령 자서전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통추 활동을 접고 새정치국민회의 입당을 하는 대목에서 3김청산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원칙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전략적, 전술적 명제는 타협할 수 있다. 나는 ‘3김청산’이라는 것은 원칙이 아니라 타협할 수 있는 전략적 명제라고 보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DJP연합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념과 노선을 100% 순수하게 밀고가기는 어렵다. [중략] 정당에 대해서도 그렇다. 누가 주도하는지를 본다. 주도세력의 색깔이 그 정당의 색깔이다. 대통령 후보가 김대중 총재로 결정된 이상 주도세력 문제는 정리가 된 것이 아닐까? [중략] 주도세력의 성격과 철학이 뚜렷하면 된다.

유시민과 이정희가 주도하는 정당이라면 그 당이 참여당이든, 민노당이든, 새로운 통합진보정당이든 크게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 두 사람이 주도하는 정당이 바로 “노무현 정신”이 살아있는 정당이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면, 예수가 기독교를 창시하지 않았듯이, 노무현은 참여당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노무현은 참여당원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당원이 주인이 되고 당원 민주주의가 뿌리내린 정당의 당원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그는 열린우리당이 해체되는 것에 대해 그렇게 서운해 했는지도 모릅니다.

손학규가 대표인 지금의 민주당은 김대중, 노무현의 민주당이 아닙니다.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내년 두 번의 선거에서 그 민주당과 어떻게든 연합을 해야하기 때문에, 그리고 “노무현 정신”을 실현해내야 하기 때문에 지금 통합된 진보정당이 필요합니다. 진보정당들이 통합하면, 민주당이 지금처럼 쉽게 무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현재의 민주당은 유력한 대권주자가 없는 불임정당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유시민과 이정희가 함께 싹틔우고 꽃피울 통합되고 대중화된 진보 정당, 그 길을 함께 하고자 합니다. 그 길이 “노무현 정신”을 지킬 수 있는 가장 강고하고 올바른 길이라 믿습니다.

사위어가는 고향

사위어가는 고향

어릴 적, 추석에 고향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고향가는 사람들로 꽉 들어찬 버스는 차리리 꽁치통조림이었다. 비포장길을 먼지 풀풀 날리며 굽이굽이 달렸던 통조림 버스 속에서 고향은 여전히 아득했다. 서너 시간의 고생 끝에 드디어 당도한 고향은 생기와 위안을 주었다. 시골이라도 북적거렸고, 명절 냄새가 가득했다.

세월이 흐르고, 모든 것은 변했다. 고향을 지키던 사람들은 이제 모두 팔순이 넘거나 아니면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많은 것이 편리해졌지만, 고향은 점점 소멸해가고 있었다. 뜨거운 가을 볕에 팔순을 넘긴 농부 몇이 밭에 엎드려 힘겨운 노동을 견디고 있을 뿐, 그 예전의 북적거림과 생기는 모두 사라졌다.

그들이 모두 사라지면, 고향은 어떻게 될 것인가? 노인들은 해가 다르게 야위어가고 기력을 잃었다. 머리 맡에 한 바구니의 약봉지만이 그들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남은 이들도 오래지 않아 떠날 것이다. 고향에는 빈집들만 덩그러니 남을 것이고, 논밭에는 이름모를 풀들이 무성할 것이다.

명절에 찾은 고향은 점점 사위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곧 사라져 버릴 것 같다. 아름다운 것은 그렇게 사라질 것이고, 사라지는 것은 그리움의 여운을 길게 남길 것이다. 고향은 이제 기억 속에만 남게 될 것이고, 누군가는 그 아련함을 추억하며 살 것이다.

안철수 그리고 정치인의 조건

안철수 그리고 정치인의 조건

9월 초부터 몰아닥친 안철수 태풍이 박원순 변호사와의 단일화로 일단락되었다. 윤여준이라는 모사꾼과 언론이 부추긴 안철수 현상은 그의 권력 의지 부족과 준비 부족으로 일단 중단되었는데, 안철수 교수는 현 시점에서 아주 현명한 결정을 내린 셈이다.

안철수 교수를 잘 알지 못하지만, 그는 상식에 기반한 삶을 추구하는 인물로 능력이 뛰어나며 운이 좋은 사람인 것 같다. 최근 시골의사 박경철 원장과의 청춘콘서트라는 강연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아주 인기가 많다.

그의 평소 이미지로 봤을 때, 그는 정치인이라는 직업과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 특히 그의 말투나 음성에서는 정치지도자 특유의 카리스마를 느낄 수 없다. 그에게는 젊은이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대학 교수라는 직업이 훨씬 잘 어울리고 잘 해낼 것 같다.

안철수 교수의 정치적 성향이나 좌표를 알 수 없는 현 시점에서 그에 대한 평가나 지지는 유보한다. 그가 여태까지 훌륭하고 성공적인 삶은 산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정치인으로서 또는 지도자로서 그 능력을 보여줄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처럼 젊은이들의 인기와 지지를 전폭적으로 받고 있는 인물이 만약 정치를 하고자 한다면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 설령 실패하더라도 다른 정치인들처럼 그렇게 쉽게 밑천을 드러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가 신문방송에서 한 이야기들이 정말 그의 내공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증명했으면 좋겠다. 그를 지지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실망과 열패감을 느끼지 않도록 당당했으면 좋겠다.

안철수 교수가 정치에 뛰어든다면, 그는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확실히 밝힐 필요가 있다. 물론 연막전술일 수는 있겠지만, 어떤 때는 한나라당을 지지할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야권단일후보로도 나설 수 있다고 얘기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언젠가도 얘기했듯이, 정치적 이념이 절대적 기준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무시할 수도 없는 요소다. 좌우 또는 보수 진보라는 정치적 지향을 확실히 드러낼 때 그를 바라보는 유권자들의 올바른 판단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안철수 교수가 정치를 시작한다면, 자신의 정치적 지향 또는 이념이 같은 세력, 정당과 함께 해야 한다. 혼자서는 절대로 성공한 정치인이 될 수 없다. 단기필마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설령 당선된다 하더라도 시장이나 대통령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모든 것은 세력이고 안철수는 어떤 세력과 계층을 대변할 것인가를 보여줘야 한다. 안철수는 슈퍼맨이 아니다.

안철수 교수가 그의 말대로 역사의식이 있다면, 그는 이 나라의 가장 근본적인 대립과 갈등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청산되지 않은 친일세력과 독재세력들이 특권층을 형성하고 있는 이 나라에서 재벌, 언론, 검찰로 상징되는 권력들이 역사적으로 어떤 행위들을 저질렀는지 깨닫고 있어야 한다. 조중동, 한나라당, 그리고 뉴라이트가 어떤 족속들인지 그는 이미 알고 있어야 한다.

역사의식이 있는 정치인이 되려면, 당연히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어떤 식으로든 계승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역사에서 평가받는 정치인이 될 수 없다. 그럴 자신과 용기가 없을 때는 아예 정치를 시작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것이 안철수 본인이나 안철수를 존경하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모두 좋은 일이다.

역사의식이 있는 정치인이 되려면, 수구반동 기득권 세력들과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 그것은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일이다. 안철수가 그 정도의 강단을 보여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안철수는 누가 뭐라 해도 대한민국 0.1% 안에 드는 기득권층이다. 선량하고 유약한 기득권층 출신의 성공한 사업가 겸 학자가 사악한 조중동, 검찰, 한나라당을 이기고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이 점에 있어서는 여전히 판단을 유보하지만, 사실 회의적이다.

제대로 할 수 없다면, 정치에 뛰어들지 말고 차라리 존경받는 지식인으로 남는 것이 본인을 위해서나 그를 좋아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나 여러 모로 유익하다. 그리고 절대 윤여준 같은 모사꾼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 좋다. 그는 여우의 꾀를 가진 뱀과 같은 자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안철수 태풍은 지나갔고, 안철수는 현명한 결정을 했다. 그가 여전히 많이 이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인물로 남았으면 한다. 정치를 하든, 하지 않든 간에. 그마저 기회주의자로 판명이 난다면 정말 많은 젊은이들의 배신감을 감당할 수 없으리라.

그의 건투를 빈다.

나만 진보다?

나만 진보다?

최근 몇 달 동안 진행되어 온 진보세력들의 통합 논의를 지켜보면 과연 이들을 진보세력이라 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지난 5월 31일, 진보진영 대표자 연석회의 최종합의문에 서명을 하고도 그 합의사항을 보란 듯이 팽개쳐 버리는 이들이 과연 진보세력일까?

진보라는 개념을 이념만을 가지고 재단하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다. 이념은 여러 가지 기준 중 단지 하나에 불과하며, 그 이념이라는 것이 고정불변도 아닐 뿐더러, 역사적으로 봤을 때 많은 이들이 자신의 이념을 손쉽게 배신했기 때문이다.

진보세력이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는 열린 마음이고 겸손이며, 다른 사람들에 대한 신뢰다. 이런 덕목들이 결여된 사람들을 오직 이념이 좌편향되었다고 해서 진보세력이라 칭하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고, 진보세력이 진보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이른바 노심조) 등으로 대표되는 진보신당의 일부 세력들은 진보통합의 검열자로 나섰다. 노심조가 슈퍼스타K2의 심사위원도 아닌데, 누가 진보인지 아닌지를 심사하고 있다. 특히, 유시민과 참여당에 대한 그들의 비토는 정상적인 사고 방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해 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진보신당이 민노당과 분리되어 나갈 때, 그들은 한때 동지였던 민노당 당원들에게 “종북좌파”라는 딱지를 붙였었다. 민노당은 노심조가 뛰쳐 나간 뒤 강기갑, 이정희 의원이 대표를 맡으면서 오히려 건강한 진보로 탈바꿈하고 있다. 기존의 민노당의 문제는 종북좌파가 문제가 아니라 노심조로 상징되는 좌파기득권 세력들이 문제였던 것이다.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진보세력이 하나로 뭉치려는 움직임 속에서도 유독 진보신당의 노심조들만 유시민과 참여당을 비토하고 있다. 조직적 반성과 성찰을 하라는 둥, 반성에 진정성이 없다는 둥, 민노당과의 통합에 훼방을 놓지말라는 둥, 도무지 말도 안되는 트집을 잡고 있다.

사실 정강정책만으로 진보신당, 민노당, 참여당을 비교하면 적어도 70~80%는 거의 동일하다. 진보신당은 신자유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체제(사회주의라 적시하지는 않았지만, 사회주의를 지칭하는 것 같다)를 강조하고, 민노당은 자주를 중요시하며, 참여당은 노무현의 기본 철학인 원칙과 상식을 강조하는 것을 제외하면 세 당의 지향점은 거의 유사하다.

이런 객관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진보신당의 노심조들이  말도 안되는 트집을 잡는 것은 그들의 열등감에 있다고 보여진다. 노심조는 노무현과 유시민이 인간적으로 싫은 것이다. 노무현의 후계자인 유시민이 싫은 것은 그들이 좌파 속에서 누리고 있던 기득권을 위협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들의 열등감과 질투가 유시민과 참여당을 밀어내는 기본적 동기인 것이다.

이제는 그들의 어깃장을 들어줄 인내심도 바닥이 났고, 현실적으로 시간도 없다. 조만간 버스는 떠나야 한다. 진보신당의 노심조들이 유시민과 참여당과의 통합을 끝내 함께 할 수 없다면, 그들은 5.31 연석회의 합의문부터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결정은 진보신당 대의원 총투표를 통해 5.31 합의문을 부결시키고, 진보대통합의 전선에서 빠져야 한다. 짐작컨데, 진보신당 당원들도 노심조들의 편협함을 그다지 달가워하지는 않을 것 같다.

여러 번 강조했지만, 이념만을 가지고 진보를 재단하는 것은 곤란하다. 사람을 보아야 한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인지, 기회주의자들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기회주의자들을 솎아내지 않고는 진보가 진보할 수 없다.

지금은 열등감과 질투로 똘똘 뭉친 그리고 좌파 기득권만을 부여잡은 노심조들이 아니라 유연하고 건강한 진보로 거듭나고 있는 이정희와 유시민이 답이다. 이정희와 유시민을 중심으로 진보세력은 새롭게 재편되어야 한다.

열린 마음과 겸손이 결여된 좌파는 진보가 아니라 그냥 좌파일 뿐이다. 그것도 찌질이 좌파일 뿐이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기술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기술

언제부턴가 귀에 몹시 거슬리는 단어가 있다. “재테크”. 재무 테크놀로지(Financial Technology)를 일본식으로 줄여서 부르는 말인 것 같은데, 한마디로 말하면 “돈 버는 기술”이란 뜻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일은 하지 않고 돈 놓고 돈을 먹겠다는 일종의 야바위 기술”을 의미한다. 2007년 말부터 세계 금융 시장에 위기가 닥쳤다. 미국발 비우량주택담보대출(Subprime Mortgage Loan)이 문제가 되어 전세계 금융 시장을 강타했다. 물론 몇 년 전부터 이것이 문제가 될 것이라는 경고가 계속되었지만, 미국의 부시 정권은 그것을 대응할 만한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금융 위기의 원인이 복잡해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그 위기는 인간들의 탐욕 때문에 일어난 문제다. 일은 하지 않고 일확천금을 노리겠다는 그 도둑놈 심보 같은 탐욕이 금융 위기의 근원인 것이다. 위기에 봉착한 각국 정부는 땜질식 처방으로 위기를 넘겨 보려고 안간힘을 쓰곤 있지만, 근본적인 패러다임을 전환하지 않는 한 쉽지 않아 보인다. 한국 같이 금융 시장이 완전 개방되어 있고, 외부 의존도가 높은 경제 구조에는 치명적이다. 더군다나 지금의 이명박 정권은 미국의 부시 정권에 버금가는 무능함과 무대책을 갖추고 있지 않는가.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주식시장이 도박장으로 변한지는 오래 전이다. 기업들에게 건전한 경로를 통해 자본을 대주고, 기업의 성과를 투자자들에게 나누겠다는 아이디어로 시작된 주식시장은 본말이 전도되어, 돈 놓고 돈 먹는 야바위판으로 변질되었다. 이런 판국에 개미투자자라고 불리는 개인들이 이 판에 들어가는 것은 자살행위다. 실제로 연일 폭락하는 주식사장에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다. 불빛을 보고 달려든 불나비처럼 그들은 그렇게 스러지고 있다. 주위에 주식하는 사람들이 꽤 되지만, 그 판에서 돈을 번 사람은 거의 없다. 돈 놓고 돈 먹기 판에서 개인들이 기관이나 외인들을 이길 방법이 없는 것이다. 사태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시중 서점가에는 “재테크”에 대한 책들이 널려 있고, 신문, 방송 등의 언론에서도 연일 현명한 “재테크”를 운운한다. 이런 식의 호객 행위로 아무 것도 모르는 개미들의 탐욕을 자극하여 판을 키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재테크”라고 불리는 것은 전형적 야바위꾼 기술이다. 지금의 주식시장이나 부동산시장은 제로섬 게임이기 때문에 누가 돈을 벌면, 누군가는 그만큼 잃게 되어 있다. 아무런 가치를 생산하지 못하는 것이다. 가치를 생산하려면 누군가는 일을 해야 하는데, 일하는 사람은 없고 앉아서 돈만 챙기려고 하니 벌어지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재테크” 운운하는 것은 기만이며 사기다. 그리고 그 사기질에 대다수 개미들은 속고 있다. 물론 그 개미들의 탐욕도 사기꾼들의 탐욕과 별반 다르지는 않지만 말이다. 금융 시장은 실물 경제의 보조적 위치에 머물러야 한다. 실제로 가치를 생산하는 분야는 실물이고, 금융은 그 실물 경제가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돕는 역할이 되어야 한다. 지금은 주객이 전도되어 있는 차원을 넘어, 실물 경제와는 무관하게 금융만으로 돈을 벌겠다고 달려드는 형국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 몇 년간 유행처럼 번졌던 “재테크” 열풍은 사기극에 다름 아니다. 나는 “재테크”라는 말을 혐오한다. 인간들의 탐욕을 자극하여 종국에는 파멸에 이르게 하는 상황을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속이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개미들은 정신차리고 그 탐욕의 야바위판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그동안 그 판에서 많은 돈을 잃었다 하더라도 과거는 모두 잊고 빠져나와야 한다. 고통스럽다고 해도 그 길만이 살 길이다. 잃은 돈을 만회해 보겠다고 계속 기웃거리면 결국에는 파멸만 있을 뿐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일확천금을 노리지 마라. 돈을 벌고 싶으면 일을 하라. 그리고 현재에 충실하라. 행여 필요 이상의 돈이 모이면 다른 사람들을 도와라. 그리고도 돈이 조금 남는다면 그냥 저축을 하라. 이것이 내가 가진 상식이다. 부디 많은 개미들이 “재테크”라는 허울 좋은 사탕발림에 넘어가지 말고, 상식으로 돌아오길 기대한다.
<나가수> 감상법

<나가수> 감상법

이명박 정권 들어 뉴스를 비롯한 방송을 거의 보지 않았다. 정권은 신문과 방송을 포함한 모든 언론매체를 장악했다. 언론이나 기자라 불리는 것들은 권력이 장악하기도 전에 그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그것들의 야비함에 구토가 나올 지경이었으므로, 건강을 위해서라도 그것들을 거들떠 볼 수 없었다.

그 와 중에 지난 몇 달간 유일하게 본방사수를 외치며 눈길을 사로잡은 프로그램은 바로 <나는 가수다>이다. 일명 <나가수>라고 불리는 이 프로그램은 가수들의 공연을 5백명의 청중이 평가하여 순위를 매기는 일종의 생존 게임이다.

<나가수>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이유는 황폐해진 우리나라 대중가요계에 새로운 희망을 던져 주었기 때문이다. 최근 10여년간 우리나라의 대중가요계는 “아이돌”이라 불리는 수많은 그룹들에게 점령되었다. 아이돌들은 음악을 하는 가수라기 보다는 철저히 기획되고 만들어지는 일종의 공산품이었다. 거의 모든 아이돌들은 가수가 아닌 만능 엔터테이너들로 키워졌다. 산업의 논리가 가요계를 점령해 버리자, 모든 것이 하나의 목적을 위해 줄을 섰다. 다양한 가수들이 사라지고, 획일화된 꼭두각시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은 일종의 선언이었다. “가수는 노래하는 사람”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명제를 다시 일깨워준 프로그램이었다. 노래는 산업이기 전에 음악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 음악은 대중들의 삶과 사랑을 투영하며 그들의 희로애락을 함께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다.

지난 몇 달 간 <나가수>는 수많은 화제를 뿌렸고, 사람들의 환호와 비난을 동시에 듣곤 했다. 아이돌 산업이 우리나라의 대중음악을 사막화하는 동안, 사람들은 삶을 위로해 주는 노래와 가수들에게 목말라했다. 그것에 대한 반향이 이 프로그램에 대한 뜨거운 관심으로 나타났다.

<나가수>는 일종의 생존 게임으로 기획되었기 때문에 경쟁이 있고, 순위가 매겨지게 된다. 함정은 여기에 있다. <나가수>에 출연하는 가수나 그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청중들은 본질을 외면한 채 순위에 집착하게 된다. 하지만 순위는 부차적인 것이다. 그냥 흥미를 더하기 위한 곁가지일 뿐이다.

본질은 뛰어난 가창력을 지닌 가수들이 최선을 다해 그 무대를 준비하고, 노래하고, 청중을 행복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출연 가수들은 긴장도 하게 되고, 부담감도 갖지만 음악을 통해 청중과 교감하며 무한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본질인 것이다.

<나가수> 출연 가수들에게 경쟁이나 순위는 별 의미가 없다. 그 순위라는 것은 단지 선곡에 따른 운과 청중평가단의 취향에 달려 있는 것이다. 설령 7위를 해서 탈락한다 해도 아무도 그들이 실력 때문에 탈락했다고 믿지도 인정하지도 않을 것이다. 과정을 즐기고 그 순간 최선을 다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삶은 몇 등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비단 <나가수> 뿐만 아니다. 학교에서건 사회에서건 순위는 결코 본질이 아니다. 그 과정을 얼마나 즐겼는가,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가, 얼마나 행복했는가, 그로 인해 다른 이들도 행복했는가 이런 것들에 대해 진정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본말을 전도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순위에만 관심을 갖는다. 본질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삶의 모든 과정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며, 모든 이들을 가치의 잣대가 아닌 존재로서 대해야 한다.

여러 말들이 난무하지만, <나가수>라는 프로그램는 충분히 지지받을만 하다. <나가수>가 아니었으면 임재범을 다시 볼 수 없었을 것이며, 박정현이나 김범수 그리고 YB의 노래를 6개월 가까이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소라의 소름끼치는 <넘버 원>을 들을 수도, 조관우의 <하얀 나비>를 접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당분간 <나가수>는 유일한 위안거리가 될 것이다. <나가수>를 통해 최고 가수들이 준비하는 최선의 무대를 지켜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음악을 통해 충분히 행복해질 것이다. 그것이면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