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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소요유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는 세상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는 세상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오늘 11월에 열리는 G20 정상회담의 경제적 가치를 24조 6천억으로 예상했다고 한다. 단 이틀간 열리는 회의의 수출 증대 효과가 22조라니 아무리 야바위 세상이라고 하지만, 이건 좀 심한 것 아닌가. 도대체 어떤 근거로 이틀 동안의 회의를 통해 경제성장률을 2% 끌어올리고 일자리를 11만 2천개를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G20 회의를 일주일만 하면 1년 경제성장률을 모두 달성하고도 남는다는 말인데, 뻥을 쳐도 좀 적당히 쳐야 되지 않을까?

김연아의 동계올림픽 금메달 가치는 5조 2천억원이었고, 남아공 월드컵 16강의 가치는 10조 2천억원이었단다.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 세상이다. 그 환산 과정이란 것도 너무나 자의적이어서 초등학생조차 믿기 어려운 것인데도 기어이 돈으로 바꾸고 보자는 세상이다. 예수나 붓다의 가르침도 헌금의 액수로 측정하는 세상이니 무엇을 더 말하랴.

결국 인간들이란 마지막 나무가 사라진 뒤에야 돈을 먹고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족속들이다. 그 전까지는 끊임없이 부자 되기를 기도하고 대박나기를 기원하는 탐욕의 세월을 보낼 것이다. 필요 이상의 지나친 부는 축복이 아닌 재앙이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인간들의 자해는 계속될 것이다.

안타깝지만 어쩌겠는가. 예수나 붓다도 구원하지 못한 세상인 것을.

사라지는 것들의 쓸쓸함

사라지는 것들의 쓸쓸함

멸족을 눈 앞에 둔 소인족 소녀 아리에티와 심장병으로 시한부 삶을 살고 있는 소년 쇼우. 따사로운 어느 봄날 그들은 조우한다. 아리에티에게 인간은 공포였고, 쇼우에게 소인족은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공포와 호기심의 만남은 서로에 대한 연민이 되었고, 그 연민의 끝은 이별의 쓸쓸함이었다.

아리에티와 쇼우 그들은 조만간 사라질 것이다. 소인족은 멸족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고, 쇼우는 삶을 지탱하기 힘들 것이다. 그들은 사라질 것이지만, 아리에티와 쇼우는 그들이 함께 했던 짧은 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삶의 본질은 그런 것이다. 언뜻언뜻 희망의 한자락이 보이기도 하지만, 본질은 쓸쓸하게 사라지는 것이다. 사라지는 순간까지 삶은 지속될 것이고, 그 안에서 행복한 순간들을 만날 것이다.

그것으로 족한 것 아닐까.

땅 위에 희망은 없었다

땅 위에 희망은 없었다

땅 위에 희망은 없었고, 신은 우리를 잊은 듯 했다. 어떤 이들은 신의 아들을 보았다 했지만, 다른 이들은 보지 못했다. 그가 왔다면, 그는 전에 했던 것처럼 아주 위대한 일들을 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도, 그가 한 일도 보지 못했기에 그가 왔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들은 희망을 잡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들은 그의 자비를 구하기 위해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었다. 그들은 그가 했다고 알려진 약속에 매달렸다.

<붉은 구름,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There was no hope on earth, and God seemed to have forgotten us. Some said they saw the Son of God; others did not see him. If He had come, He would do some great things as He had done before. We doubted it because we had seen neither Him nor His works. The people did not know; they did not care. They snatched at the hope. They screamed like crazy men to Him for mercy. They caught at the promise they heard He had made.

<Red Cloud, Bury my heart at Wounded Knee>

가위에 눌리다

가위에 눌리다

꿈 속에서 나는, 현실에서 내가 자고 있는 모습과 똑같은 모습으로 자고 있었다. 말하자면, 꿈 속의 나와 현실의 나는 구분되어지지 않았다. 꿈 속의 나는 잠을 자면서 또다른 존재를 느끼게 되는데, 그 존재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다만, 꿈 속에서 그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알 뿐이었고, 그 존재가 “또다른 나”란 사실을 알았다. 그 존재는 꿈 속에서 자고 있는 나에게 달라붙었다. 꿈 속에서 나는 움직일 수 없었고, 현실의 나도 움직일 수 없었다. 현실의 나는 꿈 속의 나와 동조되어 있었고, 꿈 속의 나는 또다른 나와 달라붙어 있었다.

너무나 답답하여 발버둥을 쳐보았지만, 전혀 움직일 수 없었고, 숨도 쉴 수 없었다. 더이상 견디기 힘들게 되었을 때 가까스로 나는 꿈 속에서 눈을 떴고, 그러자 현실에서도 눈을 뜨게 되었다. 눈을 뜨자 꿈 속에서 나에게 달라붙어 있던 그 존재는 사라졌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가 조금 넘었다. 식은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 내렸다.

세상에 정의는 존재하는가

세상에 정의는 존재하는가

세계 최고의 대학이라 불리는 하버드에서 최고의 강의를 한다는 마이클 샌델 교수의 책 <정의(Justice)란 무엇인가>는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비껴갈 수 없는 여러 도덕적 딜레마들을 유명한 철학 이론들을 끌어들여 설명하고, 그것이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좋은 책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권할 만하다.

이 책의 뒷부분에서 샌델 교수가 도덕적 책임의 세 가지 범주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는 그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불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그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도대체 세상에 정의는 존재하는가? 인간들의 관념 속이 아니고, 하버드 대학 같은 아름다운 강의실이 아니고,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 과연 정의는 존재하고 정의는 승리하는가? 사필귀정이란 말은 진리인가?

엊그제 미국 대통령 오바마는 사실상 이라크 전쟁이 끝났음을 선언했다. 사담 후세인이라는 독재자와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를 없앤다는 명분으로 시작한 전쟁이었다. 이 전쟁으로 4만 여명의 군인과 86만 여명의 민간인 등 총 90만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수많은 아이들과 여자들은 모래 사막에서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쓰러져 갔다. 이런 것이 정의로운 전쟁인가?

15세기 콜럼버스가 오기 전 미국 대륙에는 천만 명이 넘는 인디언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백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인디언들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던 고난을 당한다. 15세기에 천 만명이 넘던 인디언들이 20세기에는 불과 20만명 밖에 살아남지 못한다. 6000천만 마리나 있던 들소들은 2천여 마리만 살아 남았다. 백인들의 사악함과 탐욕 앞에 인디언과 들소들은 겨우 멸족만을 면했을 뿐이다. 이들에게 정의라는 것이 존재했을까?

광주에서 수백 명의 무고한 국민들을 죽이고 집권한 전두환은 “정의 사회 구현”이란 표어를 내걸었다. 이 독재자는 호주머니에 29만원을 넣고 다니면서 말년에 아주 평화로운 삶을 보내고 있다. 이런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인가?

인류 역사 상 정의라는 것이 실현된 적이 있었는가? 왜 언제나 힘없는 사람은 죽어야 하고, 고통받아야 하고, 탄압받아야 하는가? 그렇다면 힘이 정의인가?

힘이 정의인 세상에서 샌델 교수의 책은 한낱 멋진 지적 유희로 끝나 버릴 것 같은 슬픈 예감이 든다.

트위터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트위터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허지웅 씨와 고재열 씨의 “트위터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라는 논쟁을 재미있게 보았다. 이것은 기술결정론에 대한 전통적인 논쟁의 2010년판이라 할 수 있다. 트위터는 정보 유통에 대한 강력한 잠재력을 가진 도구인데, 이 도구를 이용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앨빈 토플러나 토마스 프리드만 같은 기술결정론자들은 기술의 발전(특히, 정보기술의 발전)이 세상을 바꾼다고 말한다. 그것도 유토피아로 말이다. 기술결정론자들의 장밋빛 환상이다. 과연 정보기술이 발전하면 세상은 유토피아가 될 수 있을까? 아니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때문에 기술의 발전 자체가 세상을 직접적으로 바꾸지는 못한다.

하지만, 기술 그 자체에 내재된 속성을 간과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총이라는 도구를 발명했는데, 그 총이라는 것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생명을 죽이는데 사용된다. 총으로 농사를 지을 수도 없고, 사람을 살리는 수술을 할 수도 없다. 핵무기는 어떤가? 결국 기술에도 근원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속성 또는 가치가 있다.

인류 역사 상 세상을 바꾼 기술이라는 일컬어지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금속 활자, 증기 기관, 인터넷 같은 것들이다. 이런 기술들이 사람들의 사용에 의해 잠재적으로 내재되어 있던 속성이 발현되었고, 결국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바꾸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사람”이다. 기술을 만드는 것도 사람이고, 기술을 사용하는 것도 사람이다. 궁극적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은 기술의 발전이 아닌 사람이다.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바꾸는 것은 “깨어있는 사람들”이다. 깨어있는 사람들의 조직된 힘과 행동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트위터나 블로그 같은 서비스들은 정보를 공유하고 사람들을 조직하는데 도움을 주는 강력한 도구들이다. 때문에 지배계층은 인터넷이라는 것을 몹시 싫어하고, 어떻게 해서든 통제하려 한다. 인터넷이 권력의 분산과 이동에 도움을 주는 속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깨어있는 사람들의 조직된 힘과 행동이고, 트위터는 그들에게 큰 도움을 주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절망

감당할 수 없는 절망

문수 스님이 4대강 죽이기에 반대하며 소신공양으로 열반에 드신 이후 그리고 그 소신공양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눈으로 확인한 이후 나는 감당할 수 없는 절망에 빠졌다. 마치 작년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에 맘먹는 충격에 빠져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고, 아무 글도 쓸 수 없었다.

그 소신공양이란 것은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가장 극적인 기원이자 저항 행위일 것인데, 문수 스님의 유서는 너무나 소박하고 애처로워 보여 슬펐다. 자기 몸을 나무토막처럼 불태우며 스러져 갔어도, 세상은 아무일 없다는 듯 무심했고, 굴삭기는 여전히 강바닥을 긁어내고 있었다.

감당할 수 없는 절망은 나를 세상과 분리시키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를 침묵하게 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고요함이다
산에 둘러싸인 작은 밭에서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플 때까지 괭이질을 하며
가끔 그 허리를
녹음이 짙은 산을 향해 쭉 편다
산 위에는
작고 흰 구름이 세 조각 천천히 흘러가고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고요함이다
산은 고요하다
밭은 고요하다
그래서 나는 고향인 도쿄를 버리고 농부가 되었다
이것은 하나의 의견인데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고요함이다
산은 고요하다
밭은 고요하다
흙은 고요하다
벌이가 안 되는 것은 괴롭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필요한 것은
고요함이다

[야마오 산세이, 고요함에 대하여]

야마오 산세이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고요함이라 말한다. 수양이 부족한 나는 때로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때로는 가슴에 담아 둔 말을 참지 못한다. 때로는 말이 너무 많고, 때로는 밑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쏟아낸다.

산의 고요함을 닮아야 할텐데, 나무와 바위의 침묵을 배워야 할텐데, 아직은 갈 길이 너무 멀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고요함이다. 야마오 산세이가 말했다.

한겨레가 부른 “놈현”이라는 애칭

한겨레가 부른 “놈현”이라는 애칭

2주 전쯤 한겨레신문은 “DJ 유훈통치와 놈현 관장사를 넘어라“라는 글을 올렸고,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정론지를 추구하는 언론이 서거한 전직 대통령을 두고 “놈현”, “관장사” 같은 표현을 쓸 수 있는지 분노했다. 비판이 거세지자 한겨레는 편집국장 성한용의 명의로 사과문을 올린다. 성한용이라는 자가 한겨레 편집국장으로 있는지 나는 이때 처음 알았으며, 성한용이라면 능히 “놈현”이라는 표현을 쓰고도 남을 작자임을 진작에 알고 있었다. 그들이 어쩔 수 없이 내놓은 사과문에는 어떠한 진심도 발견할 수 없었다. 나는 한겨레에 대한 기대를 진작에 접은 터라 분노하지 않았고, 그에 대한 글을 쓸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 필화사건은 월드컵에 묻혀버렸고, 그런대로 마무리가 되는 듯 했는데, 한겨레는 꽤나 속히 뒤틀렸던 모양이다. 한겨레는 오늘 “놈현”을 “놈현”이라고 불렀는데 뭐가 잘못이냐, 오히려 사과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다라는 식의 칼럼을 올렸다. 이 칼럼을 쓴 언론인 김선주는 자신은 “놈현”을 노무현의 애칭으로 부른다고 했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이 여자도 성한용과 한통속임을 고백했다.

그러나 때때로 나는 ‘놈현’이라고도 말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하하는 쪽에서 놈 자와 현 자를 합해서 악의적으로 만든 말이라 할지라도 그런 것을 따지지 않았다. 나 나름의 애칭일 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불편하고 길고 어감상 매끄럽지 않다. 이명박 대통령도 ‘명바기’ 혹은 ‘이명바기’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김선주, 말조심 글조심 … 어렵네]

이런 글은 한마디로 개같은 글이다. 아니 개만도 못한 글이다. 반노들이 만들어낸 악의적인 말이라고 해놓고도 따지지 않는단다. 나름대로 애칭이라고 버젓이 일간지 지면에 써갈긴다. 김선주는 더 나아가 “놈현 관장사”라는 제목이 정곡을 찌르는 적절한 제목이었다고 말한다.

재론되는 것을 어느 쪽도 원하지 않겠지만 나로선 이 사건의 발단에서 마무리까지가 적절했다고 볼 수 없다. 그 기사를 읽었을 때 이런 반응을 전혀 예상치 못했다. ‘정곡을 찔렀네…제목 잘 뽑았네’ 했던 것이 첫 느낌이었다.

요즘 한겨레는 비판하는 많은 사람들은 한겨레를 “한걸레”라고 얘기한다. 나도 한겨레에 대한 비판 글을 많이 썼지만, 한번도 한겨레를 “한걸레”라고 표현한 적은 없다. “한걸레”라는 것이 결코 명칭이나 애칭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겨레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고, 이제는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넜다.

지난 20여년간 진보 진영의 정론지라는 타이틀을 독점해 놓고, 그들은 아무런 성과도 업적도 내놓지 못하고 오로지 조중동 따라하기만을 반복한다. 그들의 오만과 독선, 그리고 치졸함은 조중동 못지 않다. “놈현 관장사”라는 제목을 붙이고 성한용과 그 일당들은 얼마나 낄낄거렸을까. 그들의 비아냥 섞인 미소가 눈에 선하다.

그들은 노무현의 죽음을 “관장사”로 비하했다. 그런데 정작 노무현의 죽음을 팔아먹기 바쁜 족속들은 오마이뉴스나 한겨레 같은 자칭 진보 정론지들이었다. 한국 현대 정치사에 가장 위대한 인물의 죽음을 그들은 “놈현 관장사”로 표현했다.

참여정부 시절 성한용과 그 일당들의 분탕질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현직에 있을 때도 그들은 끝없이 노무현을 조롱했고, 노무현이 죽고 나서도 그들의 비하와 저주는 그칠 줄 몰랐다. 끝없는 횡설수설과 궤변도 그들의 위선을 감추지는 못했다.

김선주는 박정희는 “박통”으로 부를 수 있지만, 노무현은 “노통”이라고 부를 수 없고 어쩔 수 없이 “놈현” 또는 “노무혀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단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영어 이니셜이 아니라면 ‘박통’처럼 부르기 쉽고 적절한 이니셜을 이번에 문제를 제기한 쪽에서 마련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으면 바보라고 할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이 ‘놈현’ 혹은 ‘노무혀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으니까.

영어 이니셜이 맘에 들지 않는다면서도 그들은 김대중 대통령을 DJ라고 부르고, 이명박을 MB라 부른다. 김대중을 때중이라고 부른 적도 이명박을 쥐박이라고 부른 적도 없지만, 노무현에 대해서는 “놈현”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는 개만도 못한 족속들. 그들은 여전히 스스로 진보 정론지임을 자처한다.

이제 한겨레에 대해서는 분노할 필요도 비판하거나 비난할 필요도 없다. 분노나 비판이나 비난은 어느 정도 관심과 애정이 있을 때나 가능한 것이다. 그들이 짖어대면 그냥 개만도 못한 족속들이 짖어대는구나 하고 무시해 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다가 그들은 그냥 제 풀에 지쳐 사라질 것이다.

우리나라의 유일한 정론지는 이제 “딴지일보” 하나 남았다. 주간지로는 “시사인” 정도일 것이고.

<덧붙임>

참여정부 시절 한겨레의 분탕질을 정리한다. 아래 글들은 한겨레를 읽고 열받아 쓴 글들이다. 이제는 더이상 열받을 일도 없을 것이다.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경기를 제대로 망치는 방법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경기를 제대로 망치는 방법

아르헨티나와 우리나라의 축구 경기에서 우리나라의 승리를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르헨티나는 이겨야 본전이고, 우리나라는 져도 잃을 것이 없는 경기였다.

허정무는 정말 창의력이 뛰어난 감독이다.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경기에서 굳이 잃을 것을 만들어내는 그의 놀라운 창의력에는 스티브 잡스조차 박수를 칠 만하다. 그는 경기 시작부터 선수들이 정상적으로 뛸 수 없게 철저히 거세시키는 전술을 펼쳤다. 그리스 전에서 펄펄 날던 선수들은 온데간데 없이 모두 사라졌다. 같은 선수들을 데리고 이렇게 180도 다른 경기를 만들어내는 허정무의 능력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이번 경기에서 무려 5골이나 났어도 어느 하나 제대로 된 골이 없었다. 모두가 버벅대다가 나온 골이었기에 4대1 대승을 거둔 아르헨티나도 개운하지 않을 것 같다.

북한과 브라질의 경기도 이 경기와 마찬가지로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는 경기였다. 아무도 북한이 브라질을 이기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결과는 예상대로 2대1 브라질의 승리였지만, 북한은 그 경기에서 너무나 많은 자신감을 얻었고,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으며, 정신력의 측면에서는 오히려 브라질을 압도했다고 볼 수 있다. 더군다나 그 경기에서 나온 3골은 모두가 아름다운 골이었고, 골키퍼가 어쩔 수 없는 골다운 골이었다.

우리 선수들은 질 때 지더라도 정상적인 경기를 했어야 했다. 아르헨티나는 메시를 제외하고 그다지 강하다고 생각되지 않는 팀이었다. 물론, 경기는 상대적인 것이라 한국이 정상적인 경기를 하지 않으니 그들의 움직임이 정상적으로 나올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경기 결과를 떠나 이런 졸전의 책임은 100% 감독에게 있다. 감독의 잔머리와 온정주의가 어떻게 잃을 것이 없는 경기를 망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 허정무 이후의 축구 대표팀을 맡을 감독과 다른 나라 축구 감독들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경기라 할 수 있다.

축구는 운동 경기일 뿐이다. 질 때도 있고 이길 때도 있다. 하지만 질 때 지더라도, 어떻게 지느냐 그 과정이 결과 못지 않게, 아니 때로는 결과보다도 더 중요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최선을 다하고 즐긴다면 결과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북한과 브라질의 경기는 그런 것을 보여줬다.

조직을 이끄는 리더의 잘못된 판단과 의사결정은 조직을 쉽게 망칠 수 있다. 그것은 축구 경기뿐만 아니고, 기업이나 정부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것을 지난 2년간 뼈저리게 느끼고 있고, 어제 월드컵 축구 경기에서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나이지리아와의 다음 경기에서 허정무는 어떤 판단을 할까? 그의 결정이 자못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