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가끔 검은 밤바다의 등대처럼 희미한 불빛이 보일 때도 있지만, 그것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다. 삶은 방황 속에서 저마다의 길을 찾는 것이다. 그 누구도 답을 보여줄 수도, 알려줄 수도 없다. 삶을 대신 살아줄 수도 없다. 그것은 각자가 짊어진 원죄와도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방황하는 삶을 실패라고 말하지만, 방황할수록 삶은 풍부해지고 깊어진다.
방황 없는 청춘은 없다.
청춘의 방황은 서툴고 지리멸렬하다. 나이 들수록 방황은 익숙해지고 그 방황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조금씩 지혜가 찾아온다. 방황이 멈추면 청춘도 끝나고 삶도 끝난다.
그리하여 청춘의 항해는 다시 시작된다.
우린 어제, 서툰 밤에, 달에 취해
삯을 잃었네, 삯을 잃었네
어디 있냐고 찾아봐도 이미 바보같이
모두 떨어뜨렸네, 남김없이 버렸네
우린 익숙해져 삭혀버린 달에 취해
아무 맛도 없는 식은 다짐들만 마셔대네
우린 이제서야 저문 달에 깨었는데
이젠 파도들의 시체가 중천에 떠다니네
떠다니네, 봄날의 틈 속에서
흩어지네, 울며 뱉은 입김처럼
꿈에도 가질 수가 없고 꿈에도 알려주지 않던
꿈에도 다시는 시작되지 못할 우리의 항해여
<국카스텐, Lost>
국카스텐의 노래는 낯설고, 몽환적이고, 섹시하다. 이 노래를 처음 들려준 아이의 방황은 언제쯤 끝날 것인가.
우주의 모든 생명체에게 죽음은 숙명이다. 태어난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죽게 되어 있다. 오직 인간들만이 그 죽음을 피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중국 진시황은 영생을 위해 불로초를 찾으려 했고, 현대 과학은 생명 연장을 위해 냉동인간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모두 부질없는 짓이다.
영원히 산다는 것은 시간 속에서 영속적으로 존재하는 삶이 아니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고 주어진 순간 순간을 최대한 충실히 사는 삶이다. 다른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If we take eternity to mean not infinite temporal duration but timelessness, then eternal life belongs to those who live in the present.
우리가 만약 영원을 시간이 무한히 지속된다는 뜻이 아니라 무시간성으로 받아들인다면, 영원한 삶은 현재를 사는 사람들의 몫이다.
여름은 아무도 모르게 다가와 스며들었다. 정수리 위의 태양이 연일 뜨거운 볕을 내뿜었다. 지난 2주 동안 한방울의 비도 오지 않았다. 땅이 갈라지고 작물은 메말라 농민들의 속은 타들어갔다. 몇 년 전부터 6월의 장마는 자취를 감췄다. 기상청은 마른장마라고 얘기하지만, 비가 오지 않는 것을 장마라 일컫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삼백 년 동안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았다던 경북 청송의 주산지도 바닥을 드러냈다. 수백 년을 물 속에 잠겨 있었던 왕버들의 무수한 잔뿌리가 하염없이 말라갔다. 신비롭고 고혹스러웠던 주산지의 풍광이 옛모습을 잃었다.
자연이 허락하지 않으면 인간들은 살 수가 없다. 더욱 겸허한 마음으로 온천지에 비를 내려달라고 빌어볼 요량이다. 그리하면 그 정성이 하늘에 닿아 그 마음을 받아주시지 않을까. 주말에는 제법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다. 그 비로 대지의 메마름이 조금이나마 걷히길 빌어본다.
간밤에 내린 비로 나무에서 물비린내가 났다. 상쾌하고 촉촉한 6월의 아침, 딸아이가 생일 축하 카드를 보냈다.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세상을 지배하는 궁극의 원리가 사랑임을 깨닫고 이 삶이 다하는 날까지 그 사랑을 나누며 사는 것은 아닌지… 딸아이가 보내 준 카드가 문득 그것을 일깨운다.
덴마크 사람들의 행복은 휘게(Hygge)에서 나온다. 휘게는 간소하고 편안하고 따뜻하고 안전하고 평화로운 느낌이다.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마치 태아가 엄마 뱃속에서 느끼는 바로 그러한 아늑함이다. 모든 불필요로부터 자유로와지는 것, 그리하여 더이상 욕망할 것이 없는 상태가 휘게일 것이다. 행복한 삶이란 지금 이 순간 휘게에 빠지는 것이다.
삶이란 인간의 지식과 소유가 실체 없는 허구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당위적 과정인데, 실제 일생 동안 그것을 깨닫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삶의 역설이다. 따라서 삶이란 사람들이 스스로 만든 관념의 허구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허우적대다 끝내버리는 고통의 연속으로 다시 정의될 수 있다. 고은의 시는 그런 사실을 건조하고 앙상하게 드러낸다.
비록 우리가 가진 것이 없더라도 바람 한 점 없이 지는 나무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또한 바람이 일어나서 흐득흐득 지는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우리가 아는 것이 없더라도 물이 왔다가 가는 저 오랜 썰물 때에 남아 있을 일이다 젊은 아내여 여기서 사는 동안 우리가 무엇을 가지며 무엇을 안다고 하겠는가 다만 잎새가 지고 물이 왔다가 갈 따름이다
<고은, 삶>
덧.
이런 아름다운 시를 쓰는 시인 고은이 성추행을 일삼는 고약한 사람이었다는 사실 또한 삶의 역설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