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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만적 민주주의와 수구세력의 힘

기만적 민주주의와 수구세력의 힘

우선 글을 시작하기 전에 두어 가지 사실을 바로잡아야겠다. 우리나라의 잘난 수구 언론들이 총선이 끝나고 나팔을 불어대는 것 중의 하나가 “민심이 보수화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거짓말이다. 투표를 한 46%의 표심은 보수화된 것이 아니고 “수구” 또는 “극우” 그 자체였다. 수구세력이라 할 수 있는 한나라당이 과반수를 차지했고, 또 다른 정통 수구인 자유선진당과 친박연대 (진짜 이름 웃기지 않은가) 그리고 친박 무소속을 합하면 50여석이 넘는다. 수구 세력이 의회 권력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했다. 언론이 진보로 분류하는 통합민주당이나 창조한국당 등은 사실 보수라고 보는 것이 맞고, 진보세력이라 불리울 수 있는 정당은 민노당과 진보신당 정도이다. 진보신당은 당선자를 내지 못했고, 민노당은 5석 정도의 명맥만 유지했다. 결과적으로 진보 세력은 국회의 1.67% 만을 차지한 것이다.

수구 언론들이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면서 또 지껄이는 이야기는 “절묘한 민심의 선택”이라는 말이다. 이건 그냥 “수구” 투표를 해버린 46% 유권자들에 대한 감사의 립서비스이다. 수구 세력이 개헌선을 가져가 버렸는데 무슨 민심의 절묘한 선택? 한나라당이 턱걸이 과반을 했기 때문에 하는 소리인가 아니면 너무 좋아서 웃자고 하는 소리인가? 한나라당과 자유선진당, 친박연대 뭐가 다른가. 그들은 다 한 뱃속에서 나온 일란성 샴쌍둥이일 뿐이다.

20여년 전, 그 지긋지긋한 군부독재를 청산하고, 많은 국민들은 권력을 국민의 손으로 선출하면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것은 정말로 순진한 생각이었다. 87년도 전두환이 물러가고도 전두환의 친구인 노태우가 국민의 손에 의해 뽑혔고, 92년에는 이들과 손을 잡은 김영삼이 다시 선출되었다. 97년에 와서야 수구세력에서 보수세력으로의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는데, 수구세력이 나라를 말아먹지 않았다면 불가능했고 아니 나라를 말아먹었다 해도 김대중이 또다른 수구인 김종필과 손잡지 않았다면 역시 불가능했다. 첫번째 정권교체는 외환위기로 인한 나라 망한 댓가로 받은 절반의 정권교체였다.

2002년은 어떠했는가? 그때는 노무현이라는 걸출한 정치인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노무현은 정말 1세기 한번 나올까 말까한 정치인이다. 수구세력이 노무현을 그렇게 미워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노무현과 더불어 인터넷이라는 또다른 무기가 국민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거의 기적이었고, 신이 대한민국을 보살폈다고 밖에 얘기할 수 없는 세계 정치사의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와 같은 민주화 이후 20여년의 짧은 역사를 살펴봐도 친일과 독재로부터 시작된 우리나라의 수구들의 힘은 정말 막강하다. 우리나라 언론, 입법, 사법, 행정 모든 분야에서 수구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현재 90% 이상이다. 이들은 자기들 입맛에 맞게 여론을 호도하거나 왜곡하고 민주주의를 기만한다. 투표 성향으로 보았을 때, 우리나라 국민들 중 이런 수구들의 이념을 따르는 사람들이 한 30% 정도 되는 것 같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수구세력들은 계급적 이익 때문이건 (이 부분은 5%도 안되는 것 같고) 지역주의 때문이건 아니면 반공 때문이건 간에 언제나 한나라당에 투표를 한다. 이 30% 는 거의 언제나 투표를 한다는 것이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국회의원 선거이든, 대선이든, 보궐선거이든 간에 말이다.

따라서 전체 투표율이 60% 이하가 되면 수구세력을 이길 방도가 없다. 참여정부 때 재보선에서 40 대 0으로 열린우리당이 졌고, 그때 정치권은 참여정부의 실정때문이라고 노무현을 몰아세웠지만, 이건 노무현이 아니라 세종대왕이 대통령이 되었어도 이길 수 없는 선거였다. 투표율 30% 정도인 재보선에서 수구세력이 아니고는 이길 방법이 없다. 이번 총선도 마찬가지다. 투표율 46%로는 수구세력이 아닌 보수, 진보는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선거였다. 적어도 민주당이나 민노당이 한나라당과 대등하게 경쟁을 하려면 적어도 70% 이상의 투표율이 나와야 한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악순환이 발생하는데 정치권의 수구세력들은 그들의 명성에 걸맞게 정치 혐오를 불러 일으키고 (부정부패든, 성추행이든, 개싸움이든 간에) 유권자들은 점점 그 행태를 보고 욕을 해대면서 선거에 관심을 잃게 된다. 왜냐하면 바뀌는 것이 없고, 그렇게 욕을 먹어도 그놈들이 또 뽑히니까.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증폭되면서, 투표율은 점점 낮아지게 된다. 그러면서 정치 권력은 점점 수구화되어 간다. 이것은 수구 세력들의 또다른 전략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국민들이 정치에 무관심할수록 자신들이 득세할 수 있기 때문에 계속 정치 혐오를 불러 일으킨다.

또 하나 웃긴 것은 친일에 앞장서고 독재에 부역을 했던 신문들이 민주화 이후에 언론 자유를 외친다는 사실이다. 박정희를 찬양하고 전두환을 옹호했던 수구세력들은 민주화 이후에 줄기차게 투표를 해댄다는 사실이다. 민주화 과정에 아무 기여도 하지 않았던 아니 오히려 민주화의 적이었던 세력들이 민주화의 열매를 가져간다. 이거 정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일이다.

군부 독재 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지금의 수구세력들은 선거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정치적 정당성(그것이 비록 기만적이라 할지라도)을 획득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정희, 전두환 때는 거리로 나가 싸우면서 위안이라도 얻고 희망이라도 얻었는데, 지금은 그것조차 여의치 않다는 것이다. 국민들이 뽑았다는데 무슨 할 말이 있는가? 왜 투표 안했냐고 하면 무슨 할 말이 있는가? 사실 상황은 20여년 전보다 더 비참해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어떻게 타파할 것인가?

  1. 투표를 의무화해야 한다. 지금처럼 50% 이하의 투표율로는 선출된 권력도 정당성을 찾기는 쉽지 않다. 투표를 의무화한 호주는 투표율이 90%를 넘고 있다. 이 정도는 되어야 우리는 민심을 운운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기권할 자유도 있다고 얘기하는데,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2. 투표 용지에 기권란을 넣어야 한다. 뽑고 싶지 않은 후보가 당연히 있을 수 있으므로 기권란을 반드시 추가해야 한다.
  3. 기권이 50%가 넘으면 그 선거는 무효로 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정당은 해산해야 하고, 다시 처음부터 정치 지형을 다시 짜야 한다.
  4. 선출된 권력에 대한 소환의 권리를 국민들에게 주어야 한다.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잘못 선출되었을 때는 소환되어야 하고 탄핵되어야 한다. 그러한 권리가 국민들에게 부여되어야 한다.
  5. 국민들에게도 입법청원권과 입법권 그리고 국민투표에 부의할 수 있는 권리를 주어야 한다.
  6. 이러한 절차를 간소화하고 투표를 쉽게 하기 위해서 전자투표(인터넷 투표나 휴대전화 투표) 등을 도입해야 한다.

이 정도 되면, 민주주의의 기만성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선거 제도의 변경은 헌법이나 선거법 등 관련 법률을 개정해야 하는데, 수구 세력이 3분의 2나 들어가 있는 국회에서 국민들의 선거 참여를 위해 법률을 개정할 리 만무하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앞으로 선거로 정권을 교체하기는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국민들의 정치에 더욱 혐오감을 느낄 것이고, 그에 비례하여 투표율은 계속 50%를 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수구 세력의 장기 집권은 불을 보듯 뻔하다.

역사에 비추어 볼 때, 두 가지 가능성이 있는데, 하나는 97년의 경우처럼 나라가 망하는 경우이고, 또 하나는 노무현과 같은 매력적인 정치인이 나와 국민들에게 잠시나마 희망을 주는 것이다. 이메가와 한나라당의 국정운영 능력을 보았을 때, 외환 위기와 같은 경우가 멀지 않아 다시 올 것 같지만, 그 때도 박근혜가 눈물 한두 번 흘리면 수구 세력은 다시 뭉칠 것이다. 즉, 나라가 망해도 정권교체는 쉽지 않다는 얘기다. 다른 하나는 노무현과 같은 정치인이 다시 나와 주어서 국민들의 관심을 높여야 하고 정치 참여를 높여야 하는데, 이 부분도 그렇게 쉽지는 않을 것 같다.내가 유시민을 지켜 보는 이유는 바로 두번 째 가능성 때문이다. 유시민 정도되면 노무현의 뒤를 이을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다시 한 번 신이 대한민국을 보살피시고, 많은 국민들이 관심을 갖는다면 아예 불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적어도 70% 아니 80% 이상의 국민들이 선거에 참여하지 않으면, 이메가가 운하를 파든, 사기를 치든, 나라를 말아 먹든, 팔아 먹든, 뭘 해도 수구의 집권을 막을 길이 없다. 수구 언론들과 선관위와 검찰과 사법부 등은 지속적으로 국민들의 정치 참여를 좌절시킬 것이다. 지금처럼 정치에 무관심해서는 우리는 민주주의를 한다고 얘기할 수 없을 것이다. 미안한 얘기지만, 우리나라의 앞날은 상당히 어둡고, 민주주의는 서민과 노동자들을 더욱 기만할 것이다.

한줌도 안되는 친일과 독재 세력을 단죄하지 못한 것이 나라의 원죄가 되어 버렸다. 이제 어찌할 것인가. 어떻게 희망의 근거를 마련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들의 고민이 되어야 할 것이다.

박종철, 언제 우리는 그에게 떳떳할 수 있을까

박종철, 언제 우리는 그에게 떳떳할 수 있을까

영정 속의 박종철은 언제나 20대 초반의 앳띤 얼굴이다. 그가 죽은지 21년이 되었지만 그는 늘 순수한 청년으로 우리들 가슴 속에 남아 있다. 그 20대 청년의 죽음은 1987년 6월 민주 항쟁의 불씨가 되었고, 그의 목숨을 댓가로 우리의 민주주의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가 가고 21년이 지났다. 그와 함께 20대를 보냈던 청년들은 지금 다 40대의 중년이 되었다. 청년 시절, 독재의 부당함에 당당히 맞섰던 그들도 세월의 버거움에 두 손을 들었다. “도덕성이 밥 먹여 주냐”며 그들은 지난 세월을 저주했고, 자신의 안위만을 갈구했다.

박종철과 함께 보냈던 20년 전의 시간은 이제 화석이 되었다. 영웅은 전설이 되지 못하고, 영정 속에서만 존재하고 있다. 1년 전에도 그에게 미안했던 나는 이제 그에게 고개를 들지 못한다.

언제 우리는 그에게 떳떳할 수 있을까?

이젠 우리보구 입 닥치라구?

이젠 우리보구 입 닥치라구?

대통령한테 입 닥치라고 한 선관위가 이젠 네티즌과 블로거들의 입을 막겠다고 나섰다.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지지 혹은 비방 글을 인터넷에 올려서는 안된단다. 그 기준은 선관위가 알아서 정한단다. 인터넷을 이용하는 모든 국민이 잠재적 선거법 위반자가 될 판이다.

선관위에 따르면 앞으로 정당 또는 후보자를 지지·추천·반대하는 내용이 구체적으로 포함되거나 정당 명칭과 후보자 성명을 나타내는 광고, 인사장, 벽보, 사진, 문서·도화, 인쇄물, 녹음·녹화 테이프를 배부·첩부·살포·상영·게시하는 행위가 금지된다. 특히 인터넷에 올리는 글이나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도 금지 문서로 간주되는 만큼 유권자들의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대선D-180일부터 인터넷등에 지지·반대 글 금지, 경향신문]

자기 홈페이지나 블로그에 특정 후보를 지지 또는 반대하는 내용의 글을 올리면 안되다는 얘기다. 이것이 세계 제 1의 인터넷 강국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군사 독재가 물러간 뒤에 이제 선관위가 국민들의 입을 막으려 하고 있다. 대통령만 당하는 것이 아니고, 이젠 주권자인 국민한테 그 화살을 돌리고 있다. 우리나라 헌법은 모든 국민의 언론, 출판의 자유를 규정하고 있다. 도대체 선관위가 무슨 권한으로 이 자유를 제한하려 하는가.

그리고 그 위반 행위 자체가 법률로 구체적으로 정의되어 있지도 않다. 얼마만큼의 표현이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지 자기들이 알아서 판단하겠다는 얘기다. 도대체 누가 이런 무소불위의 권한을 선관위에게 부여했다는 말인가.

만의 하나라도 네티즌의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가 선관위에 의해 침해되었을 때 우리는 분연히 떨쳐 일어나야 한다. 헌법소원을 비롯한 법적 절차를 통해 우리의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 필요하면 선관위 앞에서 촛불이라도 들어야 한다.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이 되는 자유가 제한된다는 것은 민주주의를 하지 말자는 말이다. 이러한 행위를 선관위가 아무 꺼리낌 없이 하고자 한다면 전 국민의 저항을 받을 것이다. 선거를 민주주의 축제의 장으로 만들지 못하고 감시와 처벌의 장으로 전락시키려는 선관위의 시도에 강력히 저항해야 할 것이다.

상상해 보라. 축구 경기의 승패에 영향을 미친다고 관중들의 그리고 국민들의 응원을 막으려는 축구 심판이 있다면, 우리는 그 심판을 뭐라 할 것인가. 미쳤다고 할 것이고, 당장 심판 자격을 박탈해야 할 것이다.

선관위 이성을 찾아라. 국민의 역린을 건들지 말라.

민주주의의 에일리언들, 6월은 끝나지 않았다

민주주의의 에일리언들, 6월은 끝나지 않았다

20년 전 우리는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최류탄 연기 자욱한 거리를 누볐었다. 그렇다. 민주주의를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다. 수 많은 열사들과 민중들이 흘린 피 위에서 호헌은 철폐되었고, 독재는 물러갔다. 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전두환, 노태우는 주머니에 29만원을 남긴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그들이 심어 놓은 세력들은 에일리언의 알처럼 민주주의에 기생하며 우리의 민주주의를 좀먹고 있다.

군부독재가 사라진 이후 이 땅의 언론들은 그 부당한 권력을 독차지했다. 제대로 된 기자와 언론인들이 독재에 저항하다 도태된 이후 한국의 언론은 에일리언들에 의해 장악되었다. 건전한 상식과 가치가 전도되었고, 여론은 왜곡되었다. 민주 세력이 흘린 피와 땀은 언론에 의해 매도되었다. “무능보다는 부패가 낫다” 이 말도 되지 않는 마타도어가 언론에 의해 만들어졌고, 무의식 중에 많은 사람들의 판단을 좀먹었다. 6월 항쟁의 결과물로 탄생한 한겨레신문마저 이들 언론 에일리언들과 놀아난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가장 뼈아픈 고통이다.

그렇게 힘들고 소중하게 이룩한 우리의 민주주의는 국회에서조차 유린당하고 있다. 한나라당의 김형오라는 에일리언은 국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어 “피 흘리며 이룩한 민주주의가 밑둥치부터 흔들리고 있다”며 “민주주의를 떠받치고 있는 두 개의 기둥, 언론자유와 정당정치가 위협받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언론자유의 위기는 대통령과 청와대에서, 정당의 위기는 열린우리당과 집권세력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취재지원 시스템 선진화방안을 “세계적인 웃음거리이자 국민의 알권리를 제한하는 언론탄압”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또한 “정부는 국민에게 숨기지 않으면 안 될 무슨 비밀이 있냐”고 반문하며 “노 대통령이 언론을 탄압한 독재적 발상을 가진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김형오 “피흘려 이룩한 민주주의가 흔들리고 있다”, 데일리 서프라이즈]

민주주의를 탄압한 박정희, 전두환을 시조로 모시고 있는 한나라당의 원내대표라는 자가 한 말들이다. 민주주의를 위해 피를 흘리게 한 자들이 20년이 지난 후에 하는 말들이다. 역사는 이렇게 뒤틀려가고 있다. 어떤 언론도 이 김형오라는 자의 말을 비판하지 않았다. 그들은 같은 피를 나눈 에일리언이기 때문이다. 나는 도대체 김형오라는 작자가 20년전 무엇을 했기에 저렇게 뻔뻔스럽게 말할 수 있는지 정말 궁금하여 그의 약력을 찾아보았다. 그는 역시 5공의 청와대 비서실 출신이었다. 전두환의 하수인이었던 것이다.

노무현은 이 에일리언들과 싸우는 최후의 정치인이다. 그는 에일리언들에게 극도로 탄압받는 대통령이지만, 오늘도 그들의 심장을 겨누어 일타를 날렸다.

지난날의 기득권 세력들은 수구언론과 결탁하여 끊임없이 개혁을 반대하고, 진보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국민으로부터 정통성을 부여받은 민주정부를 친북 좌파정권으로 매도하고, 무능보다는 부패가 낫다는 망언까지 서슴지 않음으로써 지난날의 안보독재와 부패세력의 본색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나아가서는 민주세력 무능론까지 들고 나와 민주적 가치와 정책이 아니라 지난날 개발독재의 후광을 빌려 정권을 잡으려 하고 있습니다.

지난날 독재권력의 앞잡이가 되어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고 민주시민을 폭도로 매도해 왔던 수구언론들은 그들 스스로 권력으로 등장하여 민주세력을 흔들고 수구의 가치를 수호하는 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 중에 누구도 국민 앞에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군사독재의 잔재들은 아직도 건재하여 역사를 되돌리려 하고 있고, 민주세력은 패배주의에 빠져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노무현, “6월항쟁 20년, 국민주권의 시대 열자”]

누가 뭐라 해도 노무현과 참여 정부는 6월항쟁의 계승자다. 민주주의의 에일리언들과 이렇게 처절하게 맞서는 사람은 노무현 밖에 없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도 역시 노무현이다. 친일과 군부독재의 잔재를 정리하지 않고, 언론을 개혁하지 않는 한 우리의 민주주의는 완성될 수 없다.

하여 나는 노무현을 끝까지 지지함으로써 나의 6월항쟁을 계속할 것이다. 노무현과 함께 이 땅의 민주주의를 완성시켜 나갈 것이다. 당신은 어떤가? 그냥 민주주의의 무임승차자로 남을 것인가? 저 에일리언들과 같이 민주주의를 좀먹으며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릴 것인가?

우리의 6월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웹2.0 시대의 대통령, 노무현

웹2.0 시대의 대통령, 노무현

웹2.0의 원칙은 흔히들 알듯 개방, 참여, 공유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러한 원칙을 가장 잘 실현한 사이트들이 웹2.0 시대의 대표 주자로 제 2의 인터넷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사용자가 만든 여러 형태의 정보가 모이고, 이러한 정보들이 합리적인 거름장치를 통해 “집단 지성”으로 전환되어 다시 사용자들에 의해 공유되고 소비되는 구조, 이것이 웹2.0이 추구하는 근본 정신이다. 결국 웹2.0의 힘은 사용자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웹2.0의 근본 정신을 정치로 환원하면 바로 우리가 추구하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된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이 권력을 만들며, 그 권력의 봉사를 국민이 받는 정치 시스템.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근본 정신도 웹2.0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개방, 참여, 공유 또는 협력.

노무현 대통령의 참평포럼 강연을 들으면서,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웹2.0 시대에 가장 걸맞는 지도자란 생각이 들었다. 대통령은 참여정부의 성과, 우리나라가 나아가야 할 방향, 민주주의, 지도자의 품성 등에 대해 4시간 이상 말씀하셨는데, 그의 강연 속에 그의 정치 철학과 정치 역정이 오롯히 녹아 있어 한마디 한마디 감당하기 어려운 힘이 있었다.

대통령은 더 이상 전두환에게 명패를 던지던 혈기 왕성한 초선 의원이 아니었다. 대통령은 더 이상 지역주의를 타파하고자 홀몸으로 부산으로 내려가는 그런 비주류 정치인이 아니었다. 지난 5년간 대통령은 수많은 시련을 극복하면서 너무도 진화하여 천하무적이 되었다. 그는 정치 철학과 사상을 집대성한 정치 사상가가 되었으며, 그의 사상을 실제 완벽하게 실현할 수 있는 시스템과 정책을 만들어온 겸손한 권력자가 되었다. 경제, 외교, 안보, 사회, 문화, 언론 등 국정의 어느 한 부분조차 소홀히 다루지 않았고, 모든 것은 상식과 원칙의 의해 처리되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최고의 정치인을 대통령으로 가진 정말 복이 많은 그리고 행복한 국민이 된 것이다. 대통령은 웹2.0이 오기도 전에 이미 웹2.0 정치를 해 왔던 것이다. 이런 대통령을 누린 우리 국민들이 과연 이명박이나 박근혜를 다음 대통령으로 뽑을 거라 생각하나? 그건 마치 웹2.0 시대에 다시 DOS로 돌아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소비라는 것은 하방경직성이 있고, 한 번 높아진 눈이 쉽게 내려가지 않는 법이다.

대통령은 모든 언론들이 덤벼도, 한나라당, 민노당을 포함한 거의 모든 정치인이 대들어도 감당할 힘이 있었고, 자신감이 넘쳤다. 집권 마지막 해에 이런 Force를 보이는 대통령은 세계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그에게는 명분이 있고, 그 명분을 실천할 합리적인 정책이 있으며 그를 최후까지 지지해 줄 일당백의 지지자가 있기 때문에 거칠 것이 없다.

언론을 포함한 우리나라의 모든 특권 세력은 그에 의해 정리될 것이고, 정권은 재창출 될 것이다. 노무현의 철학과 사상, 정책을 계승할 사람을 우리 국민들은 선택할 것이다. 이것이 진실이다. 진실은 주머니 속의 송곳 같아서 결코 감출 수 없는 것이며, 국민들은 그것을 알고 있다.

우리의 참여로 탄생한 대통령은 우리에게 봉사하였고 또다른 참여의 길을 열었다. 우리는 5년 전에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듯이 그를 계승할 인물을 찾아 그의 뒤를 잇게 하면 되는 것이다. 이번은 지난 번보다 훨씬 쉬운 싸움이다. 우리에게는 천하무적 노무현이 뒤에 있기 때문이다.

웹2.0 시대의 대통령 노무현, 그는 우리에게 축복이다.

노무현, 그는 정말 위인의 반열에 오르려는가

노무현, 그는 정말 위인의 반열에 오르려는가

한사람의 정치인이 나를 이렇게 감동시킬 줄이야 내 어찌 알았겠는가. 그의 정치 역정이 그러했고, 그가 대통령이 되는 과정이 그러했으며, 그가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과정 또한 그러했지만, 오늘 그가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린 “정치, 이렇게 가선 안됩니다”라는 글은 다시 한번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글은 정치하는 사람들, 또한 정치를 하려는 사람들이 반드시 읽고, 암기하고, 실천해야 할 원칙이자, 계명이자, 실천매뉴얼이다. 이런 글을 쓸 수 있고, 이 글대로 정치를 해 온 사람이 나의 그리고 우리의 대통령이란 사실이 너무 감격스럽고, 감사하고, 행복하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정치인이 가져야 할 철학과 원칙을 이렇게 분명하고 쉽게 쓴 글을 본 적이 없다. 이런 글은 자신이 그렇게 살지 않고는 쓸 수 없는 글이다. 자신과 국가 앞에 떳떳하지 않고는 절대로 쓸 수 없는 글이다. 대통령은 말한다.

저울과 계산기일랑 미련 없이 버려야 합니다. 정치는 남으면 하고 안 남으면 안 하는 ‘장사’가 아닙니다. 공익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일입니다. 대가를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니라 그 자체로 보람을 찾아야 하는 일입니다. 먼저 헌신하고, 결과는 그 다음에 따라 오는 것입니다.

정치는 공익을 추구하는 일입니다. 공익을 대의명분으로 내세우고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정치적 이익만을 셈하여 정치를 해서는 안됩니다. 정치는 정정당당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본질입니다. 민주주의는 마치 운동경기와 같이 규칙으로 하는 것입니다. 국민이 심판입니다. 투명하고 알기 쉽게 해야 합니다. 복잡한 정략과 권모 술수로 국민의 판단을 흐리게 해서는 안됩니다. 콩이면 콩, 팥이면 팥이지요. 애매하고 혼란스럽게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정말 한 구절 버릴 수도 없는 정치에 대한 소신이자 원칙이다. 그리고 우리들이 언뜻 알고 있는 그런 말들이다. 하지만 나는 이 말에 왜 이렇게 감동을 받는 것일까? 만약 다른 정치인 예를 들면 요즘 잘 나간다는 대권 주자들에게 같은 말을 들었다 하더라도 이런 감동을 받았을까?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글이 심금을 울리는 이유는 그가 바로 그렇게 정치를 해왔기 때문이다. 그의 말이나 글은 언제나 그의 실천으로 뒷받침되고 있다. 그러니 울림이 크고 힘을 갖는 것이다.

이제 정치를 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 가이드라인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기준에 미달하는 사람은 정치지도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를 실천하고 명문화한 대통령께 감사드린다.

생각같아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5년만 더 이 나라를 이끌어 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그것을 못하게 해 놓은 우리나라 헌법이 너무 야속하다.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나라는 정말 상식으로 굴러가는 그런 나라가 될 수 있을텐데 정말 아쉽다. 그렇다면 다음 대통령 선택의 기준은 명확해진다. 과연 누가 노무현의 이 원칙과 정책을 가장 잘 계승할 것인가?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해서만 정확히 판단하고 대답을 하면 된다.

노무현. 그는 이미 나의 마음 속에서는 위인의 반열에 올랐다. 단언하건대 그는 이 시대 우리나라가 낳은 가장 위대한 정치가로 기억되고 기록될 것이다. 그와 같은 시대를 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

아! 노무현. 그는 감동이다.

20년전 오늘 우리는 이 노래를 불렀다

20년전 오늘 우리는 이 노래를 불렀다

진달래가 가득한 교정에서 최류 가스에 눈물을 쏟으면서 불렀던 노래.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사는 나무다”라고 외친 선배들의 죽음을 보면서 흐느끼며 불렀던 노래. 뜨거운 분노와 서러운 슬픔을 가슴 가득 안고 친구들과 함께 쓸쓸히 불렀던 노래.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히 멧등마다
그날 쓰러져 간 젊음같은 꽃사태가
맺혔던 한이 터지듯 여울 여울 붉었네

그렇듯 너희는 지고 욕처럼 남은 목숨
지친 가슴 위엔 하늘이 무거운데
연련히 꿈도 설워라 물이 드는 이 산하

<이영도, 진달래>

오늘도 그때처럼 교정 가득 꽃이 피었건만, 아무도 이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태양만 말 없이 꽃을 비출 뿐, 아무도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박종철은 용서할 수 있을까

박종철은 용서할 수 있을까

20년 전 오늘, 박종철 그는 남영동 대공분실 차가운 욕조바닥에서 저들의 고문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함성으로 이어졌고 독재의 임시 항복을 받아냈다. 그가 죽은지 10년이 지난 뒤 정권은 교체되었고, 20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세계 최고 수준의 언론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다. 우리는 그에게 너무 많이 빚졌다.

나는 그가 죽은 후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그의 추모제가 열리는 명동성당에 갔었다. 해마다 추모객은 줄어들었고, 그에 비례하여 지키는 전경의 숫자도 줄어들었다. 올해는 명동성당에서 추모제가 열리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이런 나를 그는 용서할 수 있을까.

그가 죽음으로써 지키고자 했던 선배 박종운은 지난 총선 때 한나라당의 공천을 받기 위해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아직 그 당에는 그가 타도하려 했던 독재의 하수들이 국회의원 뺏지를 달고 있다. 그 보잘 것 없는 선배를 목숨 다하여 지킨 박종철이 숭고하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다. 박종철은 그 선배를 용서할 수 있을까.

고문의 배후로 지목받고 있는 정형근은 아직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은 채, 아무런 사과도 하지 않은 채 국회의원이 되었고, 노무현 정부를 비난하고 있다. 정형근은 정말 용서받을 수 있을까.

박정희는 역대 대통령 중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기억되고 있고, 박종철을 죽인 자들이 속한 한나라당은 하는 일 없이 반대만으로 최고의 지지를 얻고 있다. 가치관이 이렇게 전도된 우리 사회를 보고 박종철은 무엇이라 할까. 가치관 전도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우리나라 신문들을 박종철은 용서할 수 있을까.

우리 오늘 하루만이라도 그를 생각하자.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그리고 그가 어떻게 살려고 했는지 기억하자. 그러면 그가 조금이라도 위로받지 않겠는가.

그의 영전에 정희성의 시를 바친다. 그의 영혼이 위로받길 기도한다.

너를 부르마
불러서 그리우면 사랑이라 하마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아도
내 가장 가까운 곳
나와 함께 숨 쉬는
공기(空氣)여
시궁창에도 버림받은 하늘에도
쓰러진 너를 일으켜서
나는 숨을 쉬고 싶다.
내 여기 살아야 하므로
이 땅이 나를 버려도
공기여, 새삼스레 나는 네 이름을 부른다.
내가 그 이름을 부르기 전에도
그 이름을 잘못 불러도 변함없는 너를
자유여.

<정희성, 너를 부르며>

그에게 너무 미안한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