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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죽음

잊어야 한다면

잊어야 한다면

잊어야 한다면 잊혀지면 좋겠지만, 죽는 날까지 잊혀지지 않는 것도 있다.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들은 죽는 날까지 먼저 간 자식을 잊지 못한다. 자식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자식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흐르는 피눈물을 어찌할 수 없다.

자식의 시신 수습이 유일한 희망이 된 부모들은 오늘도 하염없이 무심한 바다만 바라볼 뿐이다. 차라리 꿈이기를, 악몽이기를 수천 번 수만 번 기도했다. 목이 터져라 불러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 아이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한달 전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을 뿐이지만, 어떤 종교의 신도 응답하지 않았다. 깊고 깊은 슬픔은 그렇게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고, 먼저 간 아이들은 대답이 없었다.

자식을 잃은 그들을 위로하고 싶지만, 인간의 언어로는 형용할 수 없다. 그 아픔은 잊혀지지도, 나누어지지도 않는다. 다만, 그들 옆을 지켜주는 것만이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아닐까?

김광석의 노래를 요즘처럼 아프게 들은 적도 없다.

그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그대를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
그대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느낄 수 있었던 그날들

그대는 기억조차 못하겠지만
이렇듯 소식조차 알 수 없지만
그대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흐르곤 했었던 그날들

잊어야 한다면 잊혀지면 좋겠어
부질없는 아픔과 이별할 수 있도록
잊어야 한다면 잊혀지면 좋겠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대를

그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그대를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
그대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느낄 수 있었던 그날들

그렇듯 사랑했던 것만으로
그렇듯 아파해야 했던 것만으로
그 추억 속에서 침묵해야만 하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날들

<김광석, 그날들>

죽음에 관한 몇 가지 진실

죽음에 관한 몇 가지 진실

많은 사람들은 죽음을 슬퍼하거나 두려워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죽음에 대해 탐구해본 결과 다음과 같은 진실에 이르렀다.

  1.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다. 죽음은 삶의 부분이며, 삶의 완성이다. 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 박사가 말했듯이 죽음의 경험은 출생의 경험과 같다.
  2. 죽음은 변화이다. 마치 누에가 고치를 벗고 나비가 되듯이 죽음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죽음은 새로운 형태의 삶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3. 현상만을 놓고 보았을 때, 죽음은 육체의 소멸이다. 사람들이 죽음을 슬퍼하거나 두려워하는 이유는 육신을 ‘나’와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이 착각에서만 벗어난다면, 그 누구도 죽음을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4. 죽음으로 잃어버리는 것은 육체뿐인데, 그 대신 우리는 더 높은 의식 상태로의 변화를 얻는다. 육체가 소멸되는 이유는 더 이상 육체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나비도 고치를 벗어났다고 슬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고치가 더이상 필요없기 때문이다.
  5. 따라서 진정한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삶에는 긍정적인 목적이 존재함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간소한 유언

간소한 유언

삶과 죽음은 간결하고 소박해야 한다. 될 수 있으면 모든 군더더기를 없애고, 꼭 필요한 것만 남겨야 한다. 스콧 니어링(Scott Nearing)이 죽기 전에 남긴 몇 가지 당부는 간소하게 살고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 준다.

1. 마지막 죽을 병이 오면 나는 죽음의 과정이 다음과 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길 바란다.

  • 나는 병원이 아니고 집에 있기를 바란다.
  • 나는 어떤 의사도 곁에 없기를 바란다. 의학은 삶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며, 죽음에 대해서도 무지한 것처럼 보인다.
  • 그럴 수 있다면 나는 죽음이 다가왔을 무렵에 지붕이 없는 열린 곳에 있기를 바란다.
  • 나는 단식을 하다 죽고 싶다. 그러므로 죽음이 다가오면 나는 음식을 끊고, 할 수 있으면 마찬가지로 마시는 것도 끊기를 바란다.

2. 나는 죽음의 과정을 예민하게 느끼고 싶다. 그러므로 어떤 진정제, 진통제, 마취제도 필요 없다.

3. 나는 되도록 빠르고 조용하게 가고 싶다. 따라서,

  • 주사, 심장충격, 강제 급식, 산소 주입, 또는 수혈을 바라지 않는다.
  • 회한에 젖거나 슬픔에 잠길 필요는 없다. 오히려 자리를 함께할지 모르는 사람들은 마음과 행동에 조용함, 위엄, 이해, 기쁨과 평화로움을 갖춰 죽음의 경험을 나누기 바란다.
  • 죽음은 광대한 경험의 영역이다. 나는 힘이 닿는 한 열심히, 충만하게 살아왔으므로 기쁘고 희망에 차서 간다. 죽음은 옮겨 다니거나 깨어남이다. 모든 삶의 다른 국면에서처럼 어는 경우든 환영해야 한다.

4. 장례 절차와 부수적인 일들.

  • 법이 요구하지 않는 한, 어떤 장의업자나 그 밖에 직업으로 시체를 다루는 사람의 조언을 받거나 불러들여서는 안 되며, 어떤 식으로든 이들이 내 몸을 처리하는 데 관여해서는 안 된다.
  • 내가 죽은 뒤 되도록 빨리 내 친구들이 내 몸에 작업복을 입혀 침낭 속에 넣은 다음, 소나무 판자로 만든 보통의 나무 상자에 뉘기를 바란다. 상자 안이나 위에 어떤 장식도 치장도 해서는 안 된다.
  • 그렇게 옷을 입힌 몸은 내가 요금을 내고 회원이 된 메인 주 오번의 화장터로 보내어 조용히 화장되기를 바란다.
  • 어떤 장례식도 열어서는 안 된다. 어떤 상황에서든 죽음과 재의 처분 사이에 언제, 어떤 식으로든 설교사나 목사, 그 밖의 직업 종교인이 주관해서는 안 된다.
  • 화장이 끝난 뒤 되도록 빨리 나의 아내 헬렌 니어링, 만약 헬렌이 나보다 먼저 가거나 그렇게 할 수 없을 때는 누군가 다른 친구가 재를 거두어 스피릿 만을 바라보는 우리 땅의 나무 아래 뿌려주기 바란다.

5. 나는 맑은 의식으로 이 모든 요청을 하는 바이며, 이러한 요청들이 내 뒤에 계속 살아가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존중되기를 바란다.

 

1. When it comes to my last illness I wish the death process to follow its natural course; consequently:
a. I wish to be at home not in a hospital.
b. I prefer that no doctor should officiate. The medics seem to know little about life, and next to nothing about death.
c. If at all possible, I wish to be outside near the end; in the open, not under a roof.
d. I wish to die fasting; therefore, as death approaches I would prefer to abstain from food.

2. I wish to be keenly aware of the death process; therefore, no sedatives, painkillers, or anaesthetics.

3. I wish to go quickly, and as quietly as possible. Therefore:
a. No injections, heart stimulants, forced feeding, no oxygen, and especially no blood transfusions.
b. No expressions of regret or sorrow, but rather, in the hearts and actions of those who may be present, calmness, dignity, understanding, joy, and peaceful sharing of the death experience.
c. Manifestation is a vast field of experience. As I have lived eagerly and fully, to the extent of my powers, so I pass on gladly and hopefully. Death is either a transition or an awakening. In either case it is to be welcomed, like every other aspect of the life process.

4. The funeral and other incidental details:
a. Unless the law requires, I direct that no undertaker, mortician, or other professional manipulator of corpses be consulted, be called in, or participate in any way in the disposal of my body.
b. I direct that as soon as convenient after my death my friends place my body in a plain wooden box made of spruce or pine boards; the body to be dressed in working clothes, and to be laid on my sleeping bag. There is to be no ornament or decoration of any kind in or on the box.
c. The body so dressed and laid out to be taken to the Auburn, Maine crematorium of which I am a paid member, and there cremated privately.
d. No funeral services are to be held. Under no circumstances is any preacher, priest, or other professional religionist to officiate at any time or in any way between death and the disposal of the ashes.
e. As soon as convenient after cremation, I request my wife, Helen K. Nearing, or if she predecease me or not be able to, some other friend to take the ashes and scatter them under some tree on our property facing Spirit Cove.

5. I make all these requests in full consciousness and the hope that they will be respected by those nearest to me who may survive me.

개미약

개미약

건물관리인이 개미약을 놓으면서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개미약에는 유인물질이 들어있어 개미들은 먹이인 줄 압니다. 개미들이 이 약을 물고 집으로 들어가 모두 나누어 먹게 되면, 개미집에 있는 모든 개미들은 죽게 되지요.”

개미들이 하나씩 둘씩 개미약을 나르기 시작했다. 그것이 자기 종족을 몰살시키는 독약인지도 모든 채, 본능으로 내재된 근면성 하나로 부지런히 개미약을 물고 집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밤새 죽어간 개미의 시체들이 바닥에 널려 있었다. 몇몇은 아직도 고통의 몸부림을 치고 있었고, 몇몇은 여전히 개미약을 물고 집으로 들어갔다.

독약을 먹고 밤새 몸부림쳤을 개미들을 생각해본다. 그 고통을 깨닫지 못하고, 본능대로 독약을 먹이인 줄 알고 집으로 물고 들어가는 개미들이 처연하다. 죽음에 다다르기가 이렇게 어렵고 고통스러울 줄이야.

어차피 죽일 개미였다면, 고통없이 단숨에 죽여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개미약은 여전히 미완성이다.

세 가지 메세지

세 가지 메세지

이븐 알렉산더가 죽음 너머의 세계에서 가져온 세 가지 메세지는 다음과 같다.

“그대는 진실로 사랑받고 있고 소중히 여겨지고 있어요, 영원히.”

“그대가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대가 저지를 수 있는 잘못은 없어요.”

<이븐 알렉산더, 나는 천국을 보았다, p. 60>

세상을 지배하고 지탱하는 본질은 오직 “사랑”이라는 이 메세지는 이 세상 모든 이들을 안도하게 한다. 욕망과 공포가 떠나가고 오직 사랑으로 존재할 수 있다면 죽음 너머 세계뿐만 아니라 죽음 이전의 세계도 천국이 될 것이다.

오늘도 딸아이는 전화기에 대고 말한다. “아빠, 사랑해.” 그 한마디가 세상을 천국으로 만든다.

부음(訃音)

부음(訃音)

인간들의 역사가 문자로 기록된 이후 세상은 언제나 말세였고, 인간들은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기다려 말세인 세상을 구원해주길 간절히 기도했다. 때때로 후세에 성인이라 일컬어지는 걸출한 사람들이 나타났지만 인간들은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들을 저주하여 죽였다.

어느 시대든 그 시대의 절망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등지는 이들이 나타났다. 세계화된 자본주의(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하지만)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꽃같은 젊은이들이 매일매일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가장 아름다워야 할 시기에 그들은 절망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젊은 시절, 기성세대들의 탐욕을 욕했던 젊은이들도 나이가 들자 그들의 부모를 닮기 시작했고, 그들의 아이들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었다. “이게 다 너를 위한 거야” 말도 안되는 변명을 뇌까리면서 아이들을 무한 경쟁의 정글로 몰아넣었다. 그런 상황을 견디지 못한 아이들 중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들부터 죽어나갔다. “행복은 성적 순이 아니잖아요”는 영화 제목으로만 의미가 있었다.

그러거나 저러거나 나보다 나이 어린 이들의 부음(訃音)을 받을 때만큼 고역스런 일이 없다. 그들의 죽음에 공범 아닌 공범으로 그리고 기성세대로서 일말의 책임을 느끼기 때문이다. 자식을 앞세운 부모만큼 불쌍한 사람들이 있을까. 그야말로 지울 수 없는 상처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손으로 자기가 낳은 자식의 장례를 치르는 것이다.

아이들은 세상에 절망하여 세상을 뜨고, 부모들은 먼저 간 자식들을 생각하며 절망한다. 운 좋게도 아직 그런 상황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부모들은 여전히 자식을 위한다며 그들을 죽음의 경쟁으로 몰아넣는다. 이런 말도 안되는 절망의 악순환은 중단되지 않는다.

섬진강의 매화와 진해의 벚꽃이 만개하여 이 조그마한 땅 한반도에 온통 꽃향기 휘날릴 때에, 어떤 아이들은 어디선가 혼자 세상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이 아름다운 봄에 슬픈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너는 어떤 봉사를 해왔는가?”

“너는 어떤 봉사를 해왔는가?”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선택을 하게되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된다. 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 박사는 그의 자서전 <생의 수레바퀴>에서 “신이 우리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자유의지”라고 말한다. 그 자유의지에 따라 인간들은 자기의 삶을 만들어 간다. 인간들이 각자의 소명을 다하고 물리적 몸을 벗을 때, 다시 말해 인간들의 삶이 죽음을 통해 완성될 때, 물리적 몸은 소멸하지만 인간들의 영은 창조의 근원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 존재의 근원을 신이라고 하고, 하느님이라고도 하고, 붓다라고도 부르지만 결국에는 하나의 근원이다. 지상에서의 삶을 끝내고 창조의 근원 앞에서 받는 단 하나의 질문.
“너는 어떤 봉사를 해왔는가?”
이 질문에 쩔쩔매며 우물쭈물할 나를 상상해본다.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봉사를 해왔을까.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영향을 주며 살아왔을까. 이 질문 앞에서 나는 부끄럽지 않고 당당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은 자명하다. 예수나 붓다를 비롯한 인류의 수많은 성인들과 선지자들의 가르침은 단 하나, “무조건적인 사랑”이었다. 아무런 조건없이 (심지어 원수라 할지라도)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다른 이들의 아픔과 고통을 감싸주는 것, 그것만이 영원하다는 것은 진리다. 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죽음은 결코 불행이 아니라고. 죽음은 고통도 두려움도 아니라고. 죽음은 삶의 완성이자 다른 차원으로 옮겨가는 과정이라고. 마치 누에가 고치를 벗고 나비가 되는 것과 같이. 우리가 이 세상에 온 이유는 그 “무조건적인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기 위해서이고 삶의 목적은 성장하기 위해서라고. 우리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는 우리의 몸을 진짜 “나”로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몸이 죽어 소멸하면 우리도 소멸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로스 박사의 연구와 증거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가 그토록 좋아하는) “과학”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은 수많은 신비주의 스승들이 수천 년 전부터 가르쳐왔던 것들이다. 우리의 몸이 소멸한다 해도 우리의 “참나”는 소멸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진정한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진지한 해답을 찾고자하는 사람들에게 <생의 수레바퀴>는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해줄 것이다. 이 책은 죽음에 대한 나의 생각을 바꾸어 놓았고, 그만큼 나는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한없이 기뻤다. 이 책을 추천해 주신 미리내 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배우는 사람이 아니다?

배우는 사람이 아니다?

영화판에서 잔뼈가 굵은 한 제작자는 배우(俳優)라는 말을 풀어쓰면서, 한자로 배우를 나타내는 배(俳)는 사람인(人)과 아닐비(非)가 합쳐진 낱말로 “배우는 사람이 아니지만 아주 뛰어난 사람”이라는 엉뚱한 정의를 내렸다. 그는 이어서 배우들은 이성보다는 감성에 주로 의존한 삶을 살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에 비해 감수성이 아주 예민할 뿐더러 때로는 즉자적이고, 때로는 엇나간 모습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배우들은 영화나 연극 혹은 TV 연속극에서 늘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서의 연기를 해야 하는 직업을 가졌기에 때로는 진짜 자기가 누구인지 헷갈릴 때도 있을 것이다. 진짜 연기를 잘하는 배우들은 자기를 버리고 실제로 감독이나 연출자의 지휘에 몸을 맡겨버린다. 그리고, 그 작품을 촬영하는 동안에는 자기가 아닌 그 작품 속의 인물로 살아간다고 한다. 영화 밀양에서 신애를 연기한 전도연이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 작품이 끝나고도 본래의 자기로 돌아오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실제로 주홍글씨 촬영을 마친 이은주는 자살했다. 물론, 그 죽음이 영화 때문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에서 나오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배우든, 가수든 우리가 흔히 속된 말로 “딴따라”라고 부르는 광대들은 그들의 예술과 창작으로 관객들을 즐겁게 그리고 행복하게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삶은 순탄치 않다. 아니 행복하고 바른 광대들은 더이상 광대라고 부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생의 밑바닥까지 부딪혀 보지 않고는, 그 쓰디쓴 인생의 절망을 맛보지 않고는 제대로된 광대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들의 천형이라면 천형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길을 간다.

한때 이 시대 최고의 우상이었던 최진실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배우로서, 연기자로서, 그리고 광고모델로서 꽤나 성공한 축에 들지만 그의 삶은 순탄치만은 않았던 것 같다. 견뎌야했던 것들과 견딜 수 없던 것들 속에서 그는 수없이 방황했을 것이고, 그 롤러코스터 같은 삶의 끝은 그에게 너무도 갑자기 그리고 어이없게 닥쳐버렸을 것이다. 슬픔은 엄마를 그렇게 보내버린 두 아이의 몫으로 오롯이 남아버렸다. 그에게 주어진 삶이 그만큼이라는데 누굴 탓할 것인가.

최진실의 죽음은 그가 너무 유명한 스타이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 있지만, 실제 우리나라에서는 하루에 35명이 넘는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있다. 삶은 유명 배우에게도, 생활고에 시달리는 서민들에게도, 돈이 너무 많아 주체할 수 없는 재벌 회장에게도 그렇게 견디기 힘들고 팍팍한 것임을, 그리하여 붓다는 삶은 고(苦)라고 말씀하셨는지도 모른다.

비루하고, 고통스럽고, 쓸쓸하지만, 삶은 또 그렇게 지속된다. 스스로 세상을 등질 수 밖에 없었던 모든 이들의 명복을 빈다. 다음 생은 부디 편안하기를 그리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다 행복하기를…

죽음을 앞두면 현자가 되는가

죽음을 앞두면 현자가 되는가

내가 인정하는 또 하나의 진리.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죽는다.” 아무리 큰 명예와 부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해갈 수는 없다. 때문에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가 언제 죽을지를 모르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내일이 될지 아니면 몇 십년 후가 될지.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아는 사람들은 삶에 대한 태도가 달라진다. 아무리 흉악한 범죄자라 할지라도 그가 사형선고를 받고 집행을 기다릴 때는 어떤 종교인들 보다도 더 경건한 삶을 유지한다고 한다. 죽음이 삶과 대적되는 개념이 아니라 삶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할지라도 우리가 다음 생을 준비할 때는 자신의 삶의 궤적을 되돌아보게 되어 있다.

카네기멜론 대학에서 가상 현실을 가르치는 Randy Pausch라는 교수의 마지막 강의가 잔잔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아주 우연히도 이 교수의 강의 동영상을 보았는데, 췌장암 말기를 선고받고, 아직도 어린 세 아이들을 위해 자신이 어떤 꿈을 가지고 그 꿈을 이루어 왔는지를 보여주는 이 공개 강의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

이 교수의 강의 내용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 교수의 삶이 내가 감명을 받을 정도로 훌륭한 것도 아니다. 지극히 상식적으로, 의욕적으로 열심히 살아온 사람이다. 40대 후반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젊은 아내와 어린 세 아이들을 두고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 사람의 마지막 강의는 그 상식적인 내용에도 불구하고 울림의 정도는 다르다.

내가 Randy Pausch의 입장이라면, 나는 내 딸아이에게 어떤 말을 해 줄까? 곰곰히 생각해 보지만,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떠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더군다나 그것이 다시 만날 기약을 할 수 없는 것이라면 더더군다나 그렇다. 그리고 그 슬픔은 살아남은 아이들의 몫이 될테니까.

Randy Pausch가 건강해지길 바라지만, 그가 건강을 되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강의를 보면서 그의 세 아이들은 건강하게 자라날 것이다. 자기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