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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의식

유발 하라리의 세 가지 질문

유발 하라리의 세 가지 질문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는 뛰어난 이야기꾼이다. 그의 주장은 (물론, 오류가 가득하지만) 도발적이고 독창적이며 재미있다.  그가 <호모 데우스>의 말미에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질문을 하는데, 그 질문들에 대한 짧은 생각을 적어 본다.

1. 유기체는 단지 알고리즘이고, 생명은 실제로 데이터 처리 과정에 불과할까?

2. 지능과 의식 중에 무엇이 더 가치 있을까?

3. 의식은 없지만 지능이 매우 높은 알고리즘이 우리보다 우리 자신을 더 잘 알게 되면 사회, 정치, 일상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

<유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 김영사, 2017>

  1. 학자들도 생명을 명확하게 정의하지 못한다. 어떤 이들은 물질대사로, 어떤 이들은 유전자로, 어떤 이들은 열역학법칙으로 생명을 정의하려 한다. 그 어느 것도 생명을 충분하게 보편적으로 정의하지 못한다. 생명을 데이터 처리 과정이라 말하는 것은 생명이 지닌 하나의 특성을 기술한 것뿐이다.  생명을 정의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발견한 가장 정확한 생명에 대한 정의는 “생명은 의식”이라는 것이다. 생명과 의식은 하나다.
  2. 지능과 의식은 분리될 수 없다. 의식 없는 지능은 존재하지 않는다. 의식은 지능의 전제 조건이다.
  3. 의식은 없지만 지능이 매우 높은 알고리즘은 존재할 수 없다. 의식 없는 지능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알고리즘은 데이터 처리 절차일 뿐이다. 따라서 존재할 수 없는 알고리즘이 우리 자신을 더 잘 알게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데이터는 현실의 묘사일 뿐, 현실 자체가 될 수 없다. 데이터가 만들 수 있는 세계는 가상 세계일 뿐이다. 데이터 분석은 의사 결정에 도움을 주는 도구이다. 알고리즘이 직접 의사 결정을 한다면 그것은 호모 사피엔스들이 그렇게 알고리즘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유발 하라리 같은 사피엔스들이 흔히 저지르는 오류는 호모 사피엔스를 너무 높이 평가한다는 것이다. 사피엔스들은 생명이 무엇인지 모르고, 생명을 창조할 수 없다. 단지 유전자를 조작할 뿐이다. 의식이나 영의 세계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한데,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유물론자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유발 하라리 같은 사피엔스들이 저지르는 또다른 오류는 사피엔스 자신들이 개발한 과학기술을 분리하여 타자화한다. 과학기술은 은하계 우주에서 뚝 떨어진 에일리언이 아니다. 사피엔스들이 연구하고 개발한 지식이다. 더구나 유발 하라리는 그 과학기술이 모든 것을 해결하고 궁극적으로 사피엔스를 지배한다고 예언한다. 이것은 극단적 기술결정론자들의 특징이다.

따라서 유발 하라리는 재주 좋은 입담꾼인 동시에, 유물론자이자 극단적 기술결정론자라 할 수 있다.

마음은 뇌의 산물인가

마음은 뇌의 산물인가

오늘날 많은 신경과학자(혹은 뇌과학자)들은 인간의 마음 또는 의식이 뇌의 활동으로 생겨난다고 믿고 있다. 뉴런과 시냅스의 패턴을 연구하면, 첨단 장비로 뇌 영상을 찍어 보면, 마음이나 의식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알 수 있을까? 지난 번에 얘기했듯이, 과학자들은 생명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과학자들은 마음이나 의식에 대해서도 정의하지 못한다. 마음이나 의식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서, 그것이 뇌 활동의 산물인지는 어떻게 단정할 수 있을까? 물리요법가이자 UCLA 신체운동학 교수였던 발레리 헌트(Valerie Hunt)는 인간의 두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두뇌를 인간과 세계 사이의 관계에 중요한 요소라고 너무 지나치게 과대평가해왔다고 생각한다. 두뇌는 단지 정말 훌륭한 컴퓨터일 뿐이다. 하지만 창조성, 상상력, 영성 등의 모든 것과 관계되는 마음의 측면들을 두뇌 속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마음은 두뇌가 아니다. 마음은 바로 이 에너지 장 속에 있다.” <마이클 탤보트, 홀로그램 우주, 정신세계사, p. 273>
아무리 좋은 현미경으로 신을 볼 수 없듯이, 인간의 과학으로 뇌를 아무리 연구해도 마음이나 의식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몸이 ‘참나’가 아니 듯이, 우리의 뇌가 마음이나 의식은 아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생명이란 무엇인가

한 유명한 생명과학자(혹은 생물학자)의 강연에 갔다가, 질문 기회를 얻어 생명이란 무엇인지 물어 보았다. 그는 잠시 당황하더니 생물 교과서에서 볼 수 있는 얘기를 했다. 세포로 구성되어 있고, 물질대사를 하고, 자극에 대해 반응하고 항상성을 유지하며, 발생, 생장, 생식, 유전, 적응과 진화를 하는 개체라고 말이다.

그것은 생명의 특성을 나열한 것이지, 생명의 정의는 아니다. 그가 말한 생명의 특성도 모든 생명체에 적용되지 않는다. 바이러스는 살아 있는 생명체인가? 수 년의 동면 기간 동안에 먹지도 않고 성장하지도 않는 아르테미아 새우는? 아름다운 조직으로 성장하고 복제하는 수정은?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생물과 무생물을 구분하지만, 그 경계는 모호하다. 과학계에서 일관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생명에 대한 면밀한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많은 학자들이 생명에 대한 수십 가지의 정의를 내렸지만, 그 어느 것도 생명이 무엇인지 명쾌히 설명하지 못했다. (Tsokolov, S. A., 2009, “Why is the definition of life so elusive? Epistemological considerations,” Astrobiology, Vol. 9, No. 4, pp. 401-412.)

그러던 중, <그리스도의 편지>를 읽다가 다음 구절에서 전율하였다.

우주에는 견고한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다양한 ‘의식의 상태’를 현상화시켜 보여주고 있는 것임을, 그리고 그 의식의 상태가 ‘티끌들의 아물거림’의 조직과 형상을 결정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모든 외적 형태란 내적 의식의 표현물이었다.

[생명]과 [의식]은 하나이고 같은 것임을 깨달았다.

“이것은 [생명]이다”라거나, “저것은 [의식]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의식은 곧 생명이었고, 생명은 곧 의식이었다. 그리고 그 둘을 만들어낸 ‘창조적 권능‘은 우주의 배후와 그 속과 그 너머에 있는 [신성한 우주심](Divine Universal Mind)이었다.

I realized there was nothing solid in the universe, everything visible was manifesting a differing ‘state of consciousness’ which determined the composition and form of the ‘shimmer of motes’.

Therefore, all outer form was an expression of the inner consciousness.

LIFE and CONSCIOUSNESS, I realized, were one and the same thing.

It was impossible to say ‘This is LIFE’ and ‘That is CONSCIOUSNESS’.

Consciousness was Life, and Life was Consciousness and was the ‘Creative Power’ of both; DIVINE UNIVERSAL MIND’ beyond, within and behind the universe.

<그리스도의 편지, 정신세계사, p. 44>

이 책을 통해 “생명은 의식이다”는 언명이 가장 정확한 생명의 정의임을 알 수 있었다. 물론 물질 세계만을 다루는 과학자들은 동의하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알파고보다 더 무서운 것

알파고보다 더 무서운 것

구글의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AlphaGo)가 이 나라에 한바탕 광풍을 일으키고 있다. 알파고는 세계 바둑 최강자 중 한 사람인 이세돌 9단과의 대결에서 4승 1패로 낙승을 거두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동안 인간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바둑의 세계가 기계에 의해 점령당했다며 충격에 빠졌고, 또 다른 사람들은 이제 공상과학 영화처럼 기계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냐며 두려움에 떨었다. 충격과 공포. 이세돌을 이긴 알파고에 대해 전문가를 비롯한 대부분 사람들이 보인 반응이다.

워낙 냄비근성과 호들갑에 익숙한 나라의 언론과 백성들이라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길 만큼 바둑을 잘 둔다고 해서 갑자기 세상이 바뀌거나 망하지는 않는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해질 필요가 있다.

우선 바둑은 서양장기 체스에 비해 어마어마하게 복잡한 게임이지만, 언젠가는 컴퓨터가 인간보다 잘 할 수 있는 게임이고, 그 날이 우리 생각보다 조금 빨리 온 것 뿐이다. 체스는 바둑보다 훨씬 단순하여 인간이 컴퓨터를 이길 여지가 없다. 컴퓨터는 체스 게임에서 모든 경우의 수를 다 고려하여 최적의 수를  계산한다.

바둑이 체스보다 훨씬 복잡하지만, 컴퓨터의 연산 속도가 빨라지고 알고리즘이 더욱 효율적으로 발전한다면 컴퓨터가 인간과의 대결에서 충분히 우위를 보일 수 있다. 알파고가 이세돌과의 대결에서 그것을 보여준 것이다. 때문에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겼다고 해서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다.

알파고는 몇 가지 알고리즘과 빅데이터 분석을 바탕으로 스스로 학습할 수 있는 범용 인공지능 프로그램이다. 앞으로 바둑뿐만 아니라 금융이나 의료 분야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알파고가 기존의 인공지능 프로그램보다 매우 발전된 것은 사실이고, 엄청난 연산 능력과 분석 능력 때문에 어떤 분야에서는 인간보다 더 훌륭한 성과를 낼 수 있지만, 결국은 인간이 만든 알고리즘이고 인간이 만든 컴퓨터 프로그램이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알파고가 발전해도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갖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인간들이 그렇게 하도록 개발했기 때문에 그런 결과를 낼 뿐이다. 알파고가 아무리 바둑을 잘 둔다 해도 알파고는 바둑이 뭔지 모른다. 엄청난 양의 데이터 분석과 연산을 통해 이길 확률이 높은 착점을 찾아낼 수 있지만, 그것이 바둑인지 뭔지는 알 수 없다. 왜 그것을 해야 하는지,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인간들은 때때로 스스로를 너무 과대 평가한다. 인간의 과학이 아무리 발전한다 해도 할 수 없는 것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어떤 과학 도구로도 신(神)을 찾을 수 없고, 다른 하나는 어떤 과학 기술로도 생명을 만들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이 아무리 훌륭한 로봇이나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개발한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인간과 같은 의식을 갖을 수 없으며 결국 그것들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할 수 없다.

만약 인공지능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가 온다면 그것은 인공지능 스스로 세상을 지배한 것이 아니고 인간들이 인공지능을 그렇게 하도록 시켰기 때문이다. 결국 두려워 해야할 것은 인공지능 알파고가 아니라 인공지능을 개발하고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인공지능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고, 바로 인간들이다. 그것도 아주 탐욕스러운 인간들이다.

신에 대한 가장 진보된 정의

신에 대한 가장 진보된 정의

미리내 님이 권해주신 “내 안의 참나를 만나다(Discovery of the Presence of God)”를 읽었다.

사람의 언어로 형언할 수 없는 경지가 기록되어 있었는데, 의식 수준이 낮은 나의 처지에서 그런 내용들은 이해는 고사하고 범접하기조차 쉽지 않았다. 데이비드 호킨스(David Hawkins)는 이 책을 통해 그동안 내가 품고 있던 신과 영혼과 종교와 인간에 대한 다양한 의문들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깨달음을 찾아 구도의 길을 떠나는 수많은 영혼들이 왜 가치있는지, 의식의 진화와 성장 단계가 무엇인지, 궁극으로 도달하려고 하는 지향이 무엇인지, 왜 성인들은 용서와 사랑을 한결같이 강조했는지 이 책은 주관적 경험과 객관적 사실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특히, 신의 본성을 설명해 놓은 부분은 그동안 내가 그 어떤 종교에서도 접할 수 없었던, 가장 진보된 것이었다.

  1. 신성(Divinity)은 비선형적이고 불편부당하고 시비분별이 없으며, 편파성과 취사선택하는 편애를 넘어서 있다.
  2. 신성은 변덕스럽거나 분별하지 않으며, 추정적인 인간 감정들의 한계에 종속되지 않는다. 신성한 사랑은 태양과 마찬가지로 무조건적이다. 한계는 에고의 귀결이다.
  3. 신의 정의는 신성의 전능과 전지의 자동적 귀결이다. 신은 ‘행’하거나, ‘작용’하거나, ‘원인’이 되지 않고 그저 ‘있을’ 뿐이다. 신성의 성질은 무한한 힘의 장으로서 방사되는데, 그 무한한 힘의 장에 의해 존재하는 전부는 있는, 그리고 되어 있는 ‘것’에 따라 자동적으로 정렬된다. 각각의 영혼/영은 이렇듯 고유한 운명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수준을 향해 끌려가는데, 그것은 마치 바다 속의 코르크나 전자기장 속의 쇳가루의 움직임과 같다.
  4. 신성은 낮은 힘을 훨씬 넘어서 있는 무한한 힘의 고유한 성질로 말미암아 절대적 지배권이다. 낮은 힘은 위치성과 통제의 도구이며 유한하다. 힘은 무한한 세기를 갖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힘을 구할 필요가 없는 신성한 참나로서의 힘의 근원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5. 신성의 막강함과 전적인 현존 내에서, 존재하는 전부는 스스로를 정렬시킨다. 이 조정은 영적 선택의 귀결이다. 자유는 신성한 정의에 고유하다.
  6. 의식의 무한한 장으로 표현된 신성의 전지와 전능은, 실상을 가능성의 전 단계에 걸쳐 확인해 주는 의식 연구 측정 기법으로 확인할 수 있다. 모든 생각, 행위, 결정이 시간과 장소 너머에 있는 의식의 무한한 장에 각인된다. 이 각인에 의해, 정의가 보증된다.

<데이비드 호킨스, 내 안의 참나를 만나다, pp. 152-153>

겸손한 삶, 내맡기는 삶, 그리고 사랑으로 충만한 삶, 결국 인류 역사상 모든 성인들과 스승들이 한결같이 가르쳤던 내용들이 진리였던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에게는 새로운 화두가 생겼는데, 그것은 환상으로 명명된 이 차원에서의 삶이 너무 허무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비로소 성철 스님의 법문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도 같았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려고 오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