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치족

무치족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보수라 스스로 떠드는 사람들 중 대개는 보수라고 불릴 자격이 없는 자들이다. 보수라 함은 나라와 민족의 안위를 자기 자신의 이익보다 먼저 생각하며, 그것을 위해 힘쓰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보수라 스스로 일컫는 사람들의 뿌리는 멀리는 친일 세력이고, 가까이는 군부 쿠데타 세력들이다. 이들은 우리나라의 민주화에 무임승차한 후 그 열매만을 한없이 누리고 있다. 이들의 특징은 얼굴이 두껍고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것이다. 하여 나는 이들을 무치족(無恥族)으로 부를란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족속들이라고.

Blog Usability: Top Ten Design Mistakes

Blog Usability: Top Ten Design Mistakes

Jakob Nielsen은 Usability 분야의 대가 중의 한 사람이다. 내가 웹 디자인에 관심이 있을  때 그의 웹사이트 useit.com 을 매일 들락거렸다. 1년 전쯤 그는 블로그 Usability에 관한 범하기 쉬운 열 가지 실수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그가 말한 열 가지 실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No Author Biographies
  2. No Author Photo
  3. Nondescript Posting Titles
  4. Links Don’t Say Where They Go
  5. Classic Hits are Buried
  6. The Calendar is the Only Navigation
  7. Irregular Publishing Frequency
  8. Mixing Topics
  9. Forgetting That You Write for Your Future Boss
  10. Having a Domain Name Owned by a Weblog Service

이 기준에 맞춰 내 블로그를 평가해 보면, 일단 블로그 주인에 대한 소개와 사진이 빠졌으므로 첫 번째와 두 번째 실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섯 번째 사항은 아직 블로그 시작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해당 사항 없다. 이 블로그는 달력 내비게이션을 사용하지 않으므로 여섯 번째 이야기도 해당하지 않는다. 아홉 번째로 지적한 것은 글을 쓸 때 보다 신중하라는 것. 비록 블로그가 개인의 필요와 만족을 위해 쓰인다 해도 언제 누가 글을 볼지 모르므로, 한 번 더 생각하라는 것이다. 새겨 볼 말이다. Jakob의 기준에 의하면 이 블로그는 현재 80 점이다.

진리

진리

성경이나 불경, 그 밖의 다른 종교의 경전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모든 경전들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진리는 하나이며, 그것을 가르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유대교의 여호와나 기독교의 하나님이나 이슬람교의 알라는 모두 같은 이의 다른 이름이다. 이미 수천 년 전 힌두교의 경전, 리그 베다는 이것을 분명히 못 박았다.

진리는 하나인데, 현자들은 여러 가지로 말한다.

<리그 베다 1:164:46>

그러므로, 다른 종교를 존중하지 않고 자기의 신앙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독선은 대개 사이비라고 말할 수 있다.

용서 The Wisdom of Forgiveness

용서 The Wisdom of Forgiveness

중국은 1950년 티베트를 침략한 이후 현재까지 티베트를 강제 점령하고 있다. 우리는 이 기간 동안 티베트 사람들이 당한 고통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 민족도 일제 치하 36년이라는 긴 시간을 같은 고통으로 아파했으니까.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마오쩌둥의 ‘인간 해방’이라는 이념은 티베트 사람들에게는 구속이었고, 절망이었다. 중국이 티베트를 물리적으로 점령하고 구속할 수는 있었지만, 정신적으로 그들을 지배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마오쩌둥의 이념은 달라이 라마의 용서 앞에 무릎을 꿇었다.

달라이 라마는 <용서 The Wisdom of Forgiveness>에서 중국을 진심으로 용서한다고 말한다.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상처를 준 사람에게 미움이나 나쁜 감정을 키워 나간다면, 내 자신의 마음의 평화만 깨어질 뿐이다. 하지만 그를 용서한다면 내 마음은 평화를 되찾을 것이다. 용서해야만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다.

용서는 단지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들을 향한 미움과 원망의 마음에서 스스로를 놓아주는 일이다. 그러므로 용서는 자기 자신에게 베푸는 가장 큰 자비이자 사랑이다.

용서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모든 존재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한다. 우리를 힘들게 하고 상처를 준 사람들, 우리가 ‘적’이라고 부르는 모든 사람을 포함해, 용서는 그들과 다시 하나가 될 수 있게 해준다. 그들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했는가는 상관없이, 세상 모든 존재는 우리 자신이 그렇듯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한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라.

고통을 견뎌낼 수 있는 인내심을 키우기 위해서는, 우리를 상처 입힌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 우리는 용서를 베풀 기회를 얻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스승조차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 내면의 힘을 시험한다. 용서와 인내심은 우리가 절망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힘이다.

미움은 강인함이 아닌 나약함의 다른 모습이다. 미움을 통해 얻어진 것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한다. 미움이나 분노를 통해서는 누구도 행복해질 수 없다. 용서를 통해, 개인적인 차원에서든 국가적, 국제적인 차원에서든 우리는 진정한 평화와 행복에 이르게 된다. 용서는 가장 큰 수행이다.

<달라이 라마, 용서, 오래된 미래>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예수도 그의 제자 베드로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그때, 베드로가 예수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주님, 형제가 제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

<마태복음 18:21-22>

그렇다면, 나도 그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 아니, 아직은 아니다. 지금은 예수도, 달라이 라마도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용서는 회개와 반성을 전제로 한다.

최장집, 강준만, 그리고 이한우

최장집, 강준만, 그리고 이한우

최장집은 김대중 정부 시절,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장으로 일했던 우리나라 진보학계의 대표적 지식인 중의 한 사람이다. 조선일보는 그를 낙마시키기 위해, 그의 제자 이한우를 이용하여 그를 빨갱이로 몰아 버린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격분했고, 강준만 같은 이는 이한우를 가리켜 “스승의 등에 칼을 꽂은 청부업자”라고 일갈했다. 1999년의 일이다. 나는 그때 정말 이한우만 나쁜 놈인 줄 알았다.

노무현 정부 들어 강준만이 커밍 아웃해 버리고, 드디어 최장집마저 정체를 드러냈다. 경향신문 창간 60주년 기념 인터뷰에서 최장집은 왜 제자가 스승보다 나을 수 없는지를 보여 주었다. 그의 칼 꽂는 솜씨는 제자 이한우보다 한 수 위였다.

대부분 진보라 일컬어지는 사람들은 이념을 절대 시 한다. 그리하여 자기와 조금이라도 다른 이념을 가진 사람과는 끝없이 분열한다. 이념의 다름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이념은 절대 기준이 아니다. 많은 기준 중 하나일 뿐이다.

“The things you own, they end up owning you.”

“The things you own, they end up owning you.”

영화 Fight Club (1999) 은 David Fincher의 역작이다. 이 영화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TYLER: I mean, you did lose a lot of nice, neat little shit. The trendy paper lamps, the Euro-trash shelving unit, am I right?
(Jack laughs, nods. He shakes his head, drinks.)
TYLER: But maybe, just maybe, you’ve been delivered.
JACK: (toasts) Delivered from Swedish furniture.
TYLER: Delivered from armchairs in obscure green stripe patterns.
JACK: Delivered from Martha Stewart.
TYLER: Delivered from bullshit colors like “Cobalt,” “Ebony,” and “Fuchsia.”
(They laugh together. Then, silence. They drink.)
JACK: Insurance’ll cover it.
TYLER: Oh, yeah, you gotta start making the list.
JACK: What list?
TYLER: The “now I get to go out and buy the exact same stuff all over again” list. That list.
JACK: I don’t… think so.
TYLER: This time maybe get a widescreen TV. You’ll be occupied for weeks.
JACK: Well, I have to file a claim…
TYLER: The things you own, they end up owning you.

네가 가진 것들이 결국은 너를 지배하게 될 거다. 공교롭게도 이 말은 이 영화가 나오기 30년 전쯤 법정 스님의 무소유란 수필에서 하신 말씀이다.

우리들이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법정, 무소유, 범우사>

영화 Fight Club의 Tyler Durden은 법정 스님과는 정반대의 캐릭터이지만 – Tyler는 자신의 신념을 이루기 위해 911 같은 테러를 시도한다. – 소유에 대한 생각은 역설적이게도 똑같다. 버리면 버릴수록 더 자유로워진다. 진리는 참으로 단순하지 않은가. 그렇지만 행하기는 만만치 않다.

The Road Not Taken

The Road Not Taken

프로스트 (Robert Frost)의 절창 The Road Not Taken 은 이렇게 끝난다.

Two roads diverged in a wood, and I –
I took the one less traveled by,
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숲속의 두 갈래 길 중 사람들이 덜 다닌 길을 택했는데, 그 선택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고. 삶은 수많은 선택의 연속이며, 그중 몇몇 선택은 그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다. 돌이켜 보면, 나에게도 그런 선택의 순간이 몇 번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으로 되돌아간다 해도 나는 같은 선택을 반복할 것이다. 지금 알았던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다른 선택을 하겠지만, 그때는 지금 알았던 것을 알지 못했다.

루쉰(魯迅)의 소설 <고향> 중에 희망을 길에 빗대어 한 말이 나온다.

희망은 본디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에 난 길과 같다. 애초부터 땅 위에 길이란 없다. 걷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곳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프로스트의 길과 루쉰의 길을 비교하자면, 전자는 미시적이고 개인적인 선택을 표현한 반면, 후자는 역사 속의 민중의 힘을 나타낸 느낌이다. 우리에게 길은 선택이 되기도 하고, 희망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경우 어찌할 것인가. 그때는 길을 만들어야 되지 않을까.

자유롭게 노닐다 …

자유롭게 노닐다 …

<장자(莊子)>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북쪽 깊은 바다에 물고기 한 마리가 살았는데, 그 이름을 곤(鯤)이라 하였습니다. 그 크기가 몇천 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 물고기가 변하여 새가 되었는데, 이름을 붕(鵬)이라 하였습니다. 그 등 길이가 몇천 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한 번 기운을 모아 힘차게 날아오르면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 같았습니다. 이 새는 바다 기운이 움직여 물결이 흉흉해지면, 남쪽 깊은 바다로 가는데, 그 바다를 예로부터 하늘못(天池)이라 하였습니다.

<오강남, 장자, 현암사>

<장자>를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이 끝없는 상상의 나래와 거칠 것 없는 호방함 때문이다. 동서양의 고전 중 <장자>처럼 이렇게 호쾌하게 시작하는 책은 많지 않다. 소요유(逍遙遊)는 <장자> 첫 번째 편의 제목이다. 이것을 오강남은 “자유롭게 노닐다” 라고 풀이했다. 그는 절대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변화와 초월이 소요유 편의 주제라 말한다.

오래전부터 블로그를 시작하려고 했지만,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무료 블로그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도 많이 있지만, 나의 결벽은 나만의 공간을 고집했다. 마음에 드는 블로그 제목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게으름과 결벽은 대체로 일을 더디게 만든다.

이제야 내 공간을 만들고, 그 제목을 <장자> 첫째 편에서 따왔다. 자유롭게 노닐다… 이것만큼 이 블로그에 어울리는 제목도 드문 것 같다. 이제 멍석을 깔았으니 제대로 한 판 놀아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