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김장하와 무주상보시

어른 김장하와 무주상보시

무주상보시는 남을 도울 때 아무런 대가나 조건 없이 남을 위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돕는 행위를 말하는데, 그런 보시는 정말 드물 뿐만 아니라 거의 불가능하다. 대개 사람들은 남을 도울 때조차 그 도움이 내게 어떤 이로움을 가져올지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은 사실상 보시가 아니라 거래일 확률이 높다.

평생을 무주상보시를 행하며 살아온 김장하 선생은 살아있는 보살이다. 거짓과 위선과 탐욕이 판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살아볼 만한 이유는 선생과 같은 의인이 있기 때문이다.

죄인과 영웅

죄인과 영웅

안중근이 메모를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제가 이토의 목숨을 없앤 것은 죄일 수 있겠지만, 이토의 작용을 없앤 것은 죄가 아닐 것입니다. 제가 재판에서 이토를 죽인 까닭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저의 복이고, 이토가 살아 있을 때 이토에게 말하지 못한 것은 저의 불운입니다. 신부님.”

빌렘이 말했다.

“너의 말은 다만 말일 뿐이다. 인간의 행위는 몸과 마음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너의 말은 뉘우치는 자의 마음이 아니다. 너는 너의 마음의 진실을 말하라. 뉘우침의 힘으로 새로워져라.”

안중근이 메모를 들여다보지 않고 말했다.

“제가 이토를 죽인 일을 뉘우친다면, 제가 이토를 죽이는 사업에 성공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만일 이 사업에 실패해서 이토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저는 이토를 죽이려는 저의 마음을 뉘우칠 수가 없습니다. 신부님.”

“그것은 세속의 마음이다. 뉘우침이 아니다.”

“그것이 저의 진심입니다.”

“너의 마음의 깊은 곳에 또다른 마음이 있을 것이다. 말하기 힘들어도 그것을 말해라.”

안중근은 눈을 감고 혀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안중근이 말했다.

“이토를 쏠 때, 이토를 증오하는 마음으로 조준했습니다. 쓰러뜨리고 나서, 신부님께 세례 받던 날의 빛과 평화가 떠올랐습니다.”

<김훈, 하얼빈, 문학동네, 2022, p. 272-278>
고통의 시작

고통의 시작

주어진 상황을 마음속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것’ ‘나쁜 것’으로 명명하고 분류할 때 고통은 시작된다. 당신은 주어진 상황을 원망하고, 원망은 그것을 개인적인 것으로 만들어 대립하는 ‘나’를 이끌어낸다.

명명과 분류는 습관화된 것이지만 타파할 수도 있다. 먼저 작은 것부터 ‘명명하지 않는’ 연습을 하라. 예를 들어 비행기를 놓치거나 컵을 깼거나 진창에 넘어졌을 때, 그것을 ‘나쁜 것’ ‘고통스러운 것’으로 명명하지 않는 것이다. 그 순간의 ‘그러함’을 즉시 받아들이는 것이다.

주어진 상황을 나쁜 것으로 명명할 때 내면에 정신적 위축이 일어난다. 하지만 아무런 이름을 붙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는 순간 놀라운 힘이 내면에 생긴다.

<에크하르트 톨레, 고요함의 지혜, 김영사, 2004, p. 128>

괴로움의 시작은 분별심이다.

참나를 알기 위한 도구

참나를 알기 위한 도구

참나를 깨닫기 위한 단순하지만 강력한 도구.

“지금 잠깐 멈추고 숨쉬기.”

길고 깊게 숨 쉬고, 느리고 부드럽게 숨 쉬어라. 에너지가 가득하고 사랑이 가득한 삶, 그 삶의 부드럽고 달콤한 무(無)를 숨 쉬어라. 너희가 쉬는 숨은 신의 사랑이니, 깊이 숨 쉬어라. 그것을 느낄 수 있도록 아주아주 깊이 숨 쉬어라. 그 사랑이 너희를 울게 하리니. 기쁨에 겨워 울게 하리니.

<남우현, 죽음 그 이후, 지식과감정, 2022, p. 189>
하염없이

하염없이

국어사전에는 ‘하염없이’라는 말이 ‘시름에 싸여 멍하니 이렇다 할 만한 아무 생각이 없이’ 또는 ‘어떤 행동이나 심리 상태 따위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계속되는 상태로’라는 뜻으로 풀이되어 있다.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다가 ‘하염없이’라는 말에 꽂혔다.

“군사독재 정권 밑에서 교련선생이 뭐냐, 교련선생이. 죽은 느그 성이 무덤서 벌떡 일어나겄다.”

속엣말을 감추는 법이 없는 아버지가 만날 때마다 쏘아붙였더니 어느 날 박선생이 느닷없이 눈물을 쏟으며 말했다.

“상욱아. 너 하염없다는 말이 먼 말인 중 아냐?”

아버지는 말문이 막혔고 박선생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먹은 소주가 죄 눈물이 되어 나오는 것 같았다고. 생전 처음 취했던 아버지가 비틀비틀, 내 몸에 기대 걸으며 해준 말이다. 고2 겨울이었다. 자기 손으로 형제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자책감을 안고 사는 이에게 하염없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열일곱 여린 감수성에 새겨진 무늬는 세월 속에서 더욱 또렷해져 나는 간혹 하염없다는 말을 떠올리곤 했다. 아직도 나는 박선생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하염없이 남은 인생을 견디고 있을, 만난 적 없는 아버지 친구의 하염없는 인생이 불쑥불쑥 내 삶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곤 했다.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창비, 2022, pp. 49-50>

쥐며느리 또는 공벌레

쥐며느리 또는 공벌레

새벽에 명상을 하려고 앉았는데, 책장 밑에서 벌레 한 마리 기어 나온다. 자세히 보니 쥐며느리 같다. 아파트 10층에 이 녀석이 어떻게 올라왔을까, 신기해서 가만히 쳐다보다가, 살짝 건드려보니, 어라! 이 녀석이 공처럼 몸을 말아 버리네. 쥐며느리처럼 생겼지만, 건드렸을 때 몸을 마는 녀석은 ‘공벌레’라고 하는구나. 한참 몸을 말고 있다가 아무 기척이 없으니 다시 몸을 폈는데, 아뿔싸! 그만 몸이 뒤집어져 허연 배가 하늘만 쳐다보고 있다. 몸을 뒤집으려고 짧은 다리로 버둥거리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하고. 그래서 도와주려고 살짝 건드리니 다시 몸을 말아 버린다. 아무리 해도 녀석을 도와줄 방법이 없다. 건들기만 하면 몸을 말아 공이 되고, 몸을 펴면 뒤집어져 있고.

삶의 법칙이 공벌레 한 마리에게도 에누리 없이 적용된다. 결국 자기 삶은 자기가 살아야 한다는 그 법칙이.

청복(淸福)

청복(淸福)

깊은 산중에 살며 삼베옷에 짚신을 신고 맑은 샘물에 발을 씻고, 소나무에 기대 휘파람을 분다. 소박한 살림이지만 집에는 악기와 바둑판을 갖추고 책도 가득하다. 마당에는 백학 한 쌍이 노닐고 신기한 꽃과 나무, 장수에 도움 되는 약초를 심는다. 때로 스님이나 신선 같은 이들과 왕래하며 즐기다 보면 세월이 오감을 모르고, 정치가 잘되는지 엉망인지도 모른다. 이를 청복이라 한다.

<정약용, 다산시문집 13>

무한책임과 무책임

무한책임과 무책임

윤석열이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했던 말.

“국민 안전은 국가의 무한책임입니다. 국민들께서 안심하실 때까지 끝까지 챙기겠습니다.”

그리고 기자회견 후 100일이 지나지 않았는데, 이태원 참사가 일어났다. 160여명의 꽃다운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는데도 아무도 책임도, 아무런 조치도 없었고, 누가 죽었는지도 밝히지 않았다. 이것이 윤석열이 말한 무한책임이다.

윤석열의 말은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국민 안전은 국가의 무책임입니다. 국민들께서 근심하실 때까지 끝까지 개기겠습니다.”

무한책임과 무책임은 “한”끗 차이였다.

패륜

패륜

살면서 수십 차례 조문을 했지만, 장례식장에 위패와 영정이 없는 곳은 없었다. 누가 돌아가셨는지 알아야 고인에 대한 예를 갖춰 명복도 빌고, 유가족도 위로할 것 아닌가.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이름을 공개하는 것이 패륜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있다. 누가 희생당했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제대로 된 추모와 애도를 할 수 있을까. 진짜 패륜은 축제를 즐기러 나온 젊은이들이 길거리에서 죽도록 내버려 두고, 추모도 할 수 없게 희생자들의 신원을 공개하지 않는 것이다.

윤석열은 누가 죽었는지도 알 수 없는 분향소에 매일 출근을 했다. 이건 조문이 아니고 그냥 쑈다. 그냥 쑈도 아니고 아주 패륜적인 쑈다. 윤석열은 이태원 참사 희생자를 두 번 죽였다.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하는 말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하는 말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8년이 흘렀지만, 대한민국은 변한 것이 없다. 문재인 정부 때는 세월호 참사의 진상이 규명될 것으로 기대했건만, 밝혀진 것은 없었고 제대로 책임진 사람도 없었다.

정권이 바뀌자 또다시 이태원에서 참사가 일어났다. 이태원 할로윈 축제는 매년 했던 것이고 매년 많은 사람이 모였던 행사인데, 왜 올해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매년 할로윈 축제 때, 질서 유지를 위해 인력을 배치했던 경찰과 구청이 올해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인력을 배치하지 않았다(마약 단속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지만, 아직 확인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죄 없는 156명의 젊은이들이 어이없이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의 명단도 발표되지 않고 위패도 세우지 않은 분향소에 윤석열은 매일 출근했다. 물론 제대로 된 사과도 하지 않았다. 사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기에 놀랍지 않았지만, 그의 출근 조문은 여전히 역겨웠다.

세월호 참사 때도 말했고, 지금 이태원 참사 때도 사람들은 말한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이제 더 이상 이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 사실 지켜줄 생각이 있었으면 윤석열이나 오세훈이나 박희영에게 투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혀 공인 의식이 없는 사람들을 대표로 선출해 놓고 ‘지못미’를 외치는 것은 자기기만이고, 책임 회피일 뿐이다. 국민을 지킬만한 의지와 책임 의식이 없는 자들에게 투표하는 한, 이런 참사는 계속 반복될 것이고 ‘지못미’는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올 것이다.

참사의 1차적 책임은 윤석열, 오세훈, 박희영에게 있지만, 이들을 대통령, 시장, 구청장으로 선출한 국민들도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 더 근본적인 책임은 국민들의 판단을 흐리고 오도하는 언론에게 있지만, 사실 이 나라에 언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족속이 있는지 의문이다.

그저 할 수 있는 일이란 희생자의 명복을 빌고 유가족에게 위로를 전하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