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 그리고 사랑

젊음 그리고 사랑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지금 하고 있는 불과 같은 사랑이 영원할 것 같지만 그 사랑도 언젠가는 식어버린다. 달콤한 사랑일수록 아픔과 상처도 그만큼 깊어질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이 죽음으로 끝난 비극적 사랑이었기에 아름다웠다. 실제로 그들의 사랑이 결실을 맺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긴 세월을 같이 살았다면, 그들도 끊임없이 싸우고 화해하고, 그들의 열정적 감정도 세월에 따라 변했을 것이다.

지독하게 격한 감정을 믿지 말라. 그것이 사랑이든, 증오이든 간에 그런 감정은 늘 순간적인 것이다. 평정심이 생겼을 때, 그 감정을 조용히 바라보면 그 감정을 일으키게 한 상대를 보다 냉정하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젊음은 이런 따위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것이 젊음이다.

삶의 여러 굴곡을 거치고 산전수전을 겪은 후에야,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된다. 류시화 시인의 말처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우리의 생이 바뀔 수 있겠지만, 그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때문에 삶은 운명이다. 사랑도 그렇고 이별도 그렇다.

젊었을 때 꽤나 좋아했던 영화 음악,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의 테마. 오늘 문득 이 노래가 듣고 싶어졌다.

What is a youth? Impetuous fire.
What is a maid? Ice and desire.
The world wags on.

A rose will bloom, it then will fade.
So does a youth, so does the fairest maid.

Comes a time when one sweet smile,
Has its season for a while.
Then love’s in love with me.

Some they think only to marry.
Others will tease and tarry.
Mine is the very best parry.
Cupid he rules us all.

Caper the caper; sing me the song.
Death will come soon to hush us along.

Sweeter than honey and bitter as gall.
Love is the pasttime that never will pall.

Sweeter than honey and bitter as gall.
Cupid he rules us all.

좋은 노무현은 죽은 노무현

좋은 노무현은 죽은 노무현

백인들이 인디언들의 땅을 빼앗기 위해 그들과 전쟁을 벌이면서 했던 말,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이다.”

한나라당 출신 손학규가 민주당 대표가 됨으로써 민주당은 자유선진당과 더불어 한나라당의 위성 정당이 되었다. 민주당 대표 손학규가 노무현 대통령 묘소에 가서 무릎을 꿇었지만, 그 모습에서 아무런 진심이나 감동을 엿볼 수 없었다. 죽은 노무현은 말이 없었고, 손학규는 여전히 기회주의자에 불과했다.

노무현은 한줌의 지지자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이들에게 불편한 존재였다. 재벌, 언론, 한나라당, 그리고 검찰 등으로 이루어진 이 땅의 특권 세력에게는 말할 것도 없었고, 아파트 한채 부여 잡고 집값 떨어질까봐 전전긍긍하던 소시민에 이르기까지 노무현은 성가시고 귀찮고 불편한 존재였다. 수구, 진보를 막론하고 노무현에게 집단 린치를 가했고, 그는 피할 곳이 없었다.

그의 진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는 철저히 고립되었다. 그는 한줌 밖에 되지 않는 지지자들에게도 너무 미안해했다. 그는 부끄러움을 아는 거의 유일한 정치인이었던 데다가 결벽증까지 있었던 터였다. 그는 쓸쓸히 스스로를 유폐시켜 갔다.

노무현이 죽자 세상은 그들이 원하던 지난 세월로 돌아가 버렸다. 사람들이 그렇게 싫어하고 욕하고 증오하던 그가 사라졌는데 정작 그들의 눈에서 행복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국민의 세금으로 강을 파헤치고 보를 세워 카지노배를 띄우겠다는 환상적 계획 앞에서도, 국민의 세금으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음향대포를 들여와도, 배추 한포기에 만오천원이 넘어 김장을 하기 힘들어도, 경포대라고 노무현을 비아냥대던 손학규가 민주당의 대표가 되었어도 사람들은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한미FTA에 대해 “좌파신자유주의”라고 게거품을 물던 진보들도 한-EU FTA에 대해서는 입 한번 뻥긋하지 않았다.

고은 시인이 노벨문학상 수상 가능성이 보도되면서 그가 쓴 <만인보>의 “노무현”이란 시가 회자되고 있다.

모든 것을 혼자 시작했다
처음에는 공장에 다니다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을 검정고시로 마친 뒤
사법고시도 마친 뒤

그는 항상 수줍어하며 가난한 사람 편이었다
그는 항상 쓸쓸하고 어려운 사람 편이었다
슬픔 있는 곳
아픔 있는 곳에
그가 물속에 잠겨 있다가 솟아나왔다

푸우 물 뿜어대며

그러다가 끝내 유신체제에 맞서
부산항 일대
인권의 등대가 되어
그 등대에는
마치 그가 없는 듯이 무간수 등대가 되었다
힘찬 불빛으로

어디 그뿐이던가
사람들 삐까번쩍 광(光)내는데
그는 혼자 물러서서 그늘이 되었다
헛소리마저 판치는
텐트 밑에서
술기운 따위 없는 초승달이었다
아무래도 그의 진실 때문에
정치를 할 수 없으리라

속으로
속으로 격렬한
진실 때문에

<고은, “노무현”, <만인보> 중에서>

고은 시인은 이미 13년 전에,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기 훨씬 이전에 노무현의 진실을 꿰뚫어보고 그가 정치를 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특권과 탐욕이 판을 치던 시대에 노무현은 이방인이었고, 그는 세상과 타협을 하거나 공존할 수 없었다. 이 시를 읽으면서 한없는 슬픔과 그리움이 밀려왔다.

세상은 그가 살아있을 때보다 훨씬 그를 후하게 평가할지도 모른다. 그의 가치를 새삼 깨달아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가 죽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에게 좋은 노무현은 죽은 노무현이기 때문이리라.

노무현은 참으로 쓸쓸한 사람이었고, 나는 그 쓸쓸함을 사무치게 사랑했다.

잔인한 본능, 그리고 희망

잔인한 본능, 그리고 희망

지구 상에서 가장 머리가 좋은 동물인 인간은 생존이 아닌 다른 이유로 자기 종족을 공격하거나 죽인다. 같은 종족끼리 전쟁을 하고, 폭력을 행사하고, 살인을 저지르는 동물은 인간이 거의 유일하다 할 수 있는데, 인간과 유전적으로 가장 흡사하다는 침팬지에게서도 이런 경향이 종종 발견되곤 한다.

제인 구달이 쓴 <희망의 이유>에는 한 침팬지가 다른 침팬지를 죽이는 잔인한 장면이 나온다.

침팬지 길카가 새끼를 안아 어르고 앉아 있었을 때, 또 다른 침팬지 패션이 나타나서 잠시 동안 노려보다가 털을 세우고 공격했다. 길카는 소리 높여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그러나 그녀는 절름발이였다. 1966년 유행성 소아마비로 손목 관절 하나가 부분적으로 마비되었던 것이다. 절룩거리는데다가 보호할 새끼까지 데리고 있어서 길카에게는 가망이 없었다. 패션은 그 새끼를 잡아채어서 앞이마를 한번 강하게 물어죽이고 나서, 딸과 어린 아들과 함께 소름끼치는 축제를 벌이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

<제인 구달, <희망의 이유> 중에서>

침팬지 패션은 먹을 것이 없어서 길카와 그의 새끼를 죽이고 잡아먹은 것이 아니다. 이런 소름끼치는 행위가 인간만큼 빈번한 것은 아니지만, 침팬지들도 증오와 분노를 폭력적으로 표출할 수 있다는 사실은 몇 백만년 전에 같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적 형질이 유사함을 말해준다.

며칠 전, 어느 장애여성이 무자비한 구타로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경찰조사결과 이들은 지문을 남기지 않기 위해 손에 붕대까지 감았으며, 50대씩 돌아가며 때리기도 하는 등 무자비하게 김씨를 집단구타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어 이들은 김씨가 의식을 잃고 쓰러지자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고 경찰은 밝혔다.

<성폭행범으로 오해받자 장애여성 집단구타로 숨지게 해, 노컷뉴스>

이런 잔인한 사건들이 너무 자주 발생하기 때문에 인간들은 놀라지도 않는다.

맹자는 인간들이 본래 선하게 타고 났다고 말하면서 측은지심을 예로 들었지만, 인간의 본성에는 측은지심과 더불어 극도의 잔인함이 내재되어 있는 것 같다. 더군다나 요즘같이 배금주의, 물질 만능주의가 횡행하는 시대에서는 이러한 잔인한 풍경이 일상이 되고 있다.

제인 구달은 올해로 76살이 된 할머니이다. 1년에 300일 이상 지구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끊임없이 희망을 말한다. 그는 몇 되지 않은 희망의 상징으로 남아 있고, 아직 인간들이 지구를 더 이상 망치지 않고 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여전히 낙관적이고, 유쾌하고, 그리고 아름답다.

그의 희망이 모든 사람들에게 전염되길 기도한다.

빈둥거릴 때 읽으면 좋은 시

빈둥거릴 때 읽으면 좋은 시

6일이나 되는 추석 연휴 내내 한없이 빈둥거렸다. 사놓기만 하고 읽지 않았던 책이나 읽어보자고 계획 아닌 계획을 세웠지만, 그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하루 세끼 꼬박꼬박 찾아먹고, 평소에 자지않던 낮잠도 실컷 잤는데, 밤에는 여전히 잠이 쏟아졌다. 체중은 하루가 다르게 늘었고, 운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 하루는 딸아이를 데리고 집 근처 뒷산을 다녀왔으며, 하루는 고궁에 나갔다 하릴없이 쏘다닌 것이 전부였다.

정현종의 <시간의 게으름>을 읽고 행복했다. 6일이 살과 같이 흘렀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야 했다.

나, 시간은,
돈과 권력과 기계들이 맞물려
미친 듯이 가속을 해온 한은
실은 게으르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런 속도의 나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보면
그건 오히려 게으름이었다는 말씀이지요)

마음은 잠들고 돈만 깨어 있습니다.
권력욕 로봇들은 만사를 그르칩니다.
자동차를 부지런히 닦았으나
마음을 닦지는 않았습니다.
인터넷에 뻔질나게 들어갔지만
제 마음속에 들어가보지는 않았습니다.

나 없이는 아무것도
있을 수가 없으니
시간이 없는 사람들은 실은
자기 자신이 없습니다.

돈과 권력과 기계가 나를 다 먹어버리니
당신은 어디 있습니까?

나, 시간은 원래 자연입니다.
내 생리를 너무 왜곡하지 말아주세요.
나는 천천히 꽃 피고 천천히
나무 자라고 오래 오래 보석 됩니다.
나를 ‘소비’하지만 마시고
내 느린 솜씨에 찬탄도 좀 보내주세요.

<정현종, 시간의 게으름>

이런 것은 “저주”라 부를 만하다

이런 것은 “저주”라 부를 만하다

만약 화성 표면에서 일직선으로 된 무언가를 발견한다면, 인간들은 화성에서 생명체가 산다는 또는 살았다는 증거를 찾았다고 환호성을 지를 것이다. 자연과 우주는 일직선으로 된 무언가를 만들지 않는다. 어떤 생명체라든지, 아니면 초자연적인 존재의 의지가 들어가지 않는 한 그런 직선은 나타나지 않는다. 추석 연휴에 서울과 수도권에 물폭탄이라 부를만한 비가 쏟아졌다. 시간 당 거의 100mm의 비가 대여섯 시간 쏟아지니, 도시는 순식간에 물바다가 되었다. 기상 관측 이후 100여년만에 처음으로 광화문과 청계천 일대가 침수되었다. 이런 폭우를 가져온 비구름은 서울을 정확하게 조준한 폭탄처럼 보였다.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그런 구름이 아니었다. 무언가의 의지가 포함된 듯한 그런 구름이었다. 초자연적인 현상이라 할만했다. 이런 현상을 전문 용어로 “저주”라 부른다. 이 구름 사진을 보면서 나는 문수 스님을 떠올렸다. 왜 그랬을까? 추석 연휴 첫날부터 방송에 나와 찌질거리는 자가 있었고, 광화문과 청계천, 그리고 수도권에는 물폭탄이 떨어졌다. 하지만 정작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서민들만이 폭우의 피해자가 되었다. 풍성하고 즐거운 한가위가 아니라, 잊지 못할 슬픈 한가위가 되어버렸다.
꿈이 죽으면 나타나는 징후들

꿈이 죽으면 나타나는 징후들

파울로 코엘료는 그의 첫번째 소설 <순례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꿈들을 죽일 때 나타나는 첫번째 징후는,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살면서 알게 된 사람들 중 가장 바빠 보였던 사람조차 무엇이든 할 시간이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 피곤하다고 말하고, 정작 자신들이 하는 게 거의 없음을 깨닫지 못하면서 하루가 너무 짧다고 끊임없이 불평을 하지요.

꿈들이 죽어가는 두번째 징후는, 스스로에 대한 지나친 확신입니다. 삶이 우리 앞에 놓인 거대한 모험이라는 것을 보려 하지 않는 것이죠. 그리고 스스로 현명하고 올바르고 정확하다고 여깁니다. 아주 적은 것만 기대하는 삶 속에 안주하면서 말이죠.

마지막으로, 그 세번째 징후는 평화입니다. 삶이 안온한 일요일 한낮이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자신에게 대단한 무엇을 요구하지도, 우리가 줄 수 있는 것 이상을 구하지도 않게 됩니다. 그러고는 우리는 자신이 성숙해졌다고 여깁니다.

<파울로 코엘료, 순례자 , 문학동네, pp. 78-79>

코엘료의 말이 맞다는 가정에서 본다면, 나의 꿈은 이미 죽어 버렸다. 나에게 나타난 징후는 세 번째 것인데, 언제부턴가 나는 삶에 대한 기대를 접었던 것 같다. 무엇이 되고자 하지도 않았고, 무엇을 이루고자 하지도 않았다. 운이 좋았던 몇몇 경우엔 내 노력보다 훨씬 큰 것을 얻기도 했고, 그렇지 않았던 대부분은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었다.

실패했다고 해서 실망하지도 않았고, 운이 좋았다고 해서 기뻐하지도 않았다. 삶은 나의 의지와는 다르게 내 곁을 스쳐 갈 뿐이었다. 나에게는 열정이 없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그랬다. 그저 순간순간 내 자신을 물끄러미 지켜볼 뿐이었다.

내 삶은, 언젠가는 바다로 가겠지만 그것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흐르는 강물 같은 것이었다. 때로는 바위에 부딪히기도 하고, 때로는 폭포에서 떨어지기도 했지만, 내가 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삶은 그렇게 나에게 왔다가 가버렸다.

나의 꿈은 무엇인가? 코엘료의 말처럼 나의 꿈은 이미 죽어 버린 것인가?

아내가 스페인 산티아고로 떠난 지 벌써 한 달이 되었다. 아내의 꿈은 코엘료처럼 산티아고 길을 걷는 것이었다. 아내는 산티아고 길을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꿈을 이룬 후에 아내의 삶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는 세상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는 세상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오늘 11월에 열리는 G20 정상회담의 경제적 가치를 24조 6천억으로 예상했다고 한다. 단 이틀간 열리는 회의의 수출 증대 효과가 22조라니 아무리 야바위 세상이라고 하지만, 이건 좀 심한 것 아닌가. 도대체 어떤 근거로 이틀 동안의 회의를 통해 경제성장률을 2% 끌어올리고 일자리를 11만 2천개를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G20 회의를 일주일만 하면 1년 경제성장률을 모두 달성하고도 남는다는 말인데, 뻥을 쳐도 좀 적당히 쳐야 되지 않을까? 김연아의 동계올림픽 금메달 가치는 5조 2천억원이었고, 남아공 월드컵 16강의 가치는 10조 2천억원이었단다.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 세상이다. 그 환산 과정이란 것도 너무나 자의적이어서 초등학생조차 믿기 어려운 것인데도 기어이 돈으로 바꾸고 보자는 세상이다. 예수나 붓다의 가르침도 헌금의 액수로 측정하는 세상이니 무엇을 더 말하랴. 결국 인간들이란 마지막 나무가 사라진 뒤에야 돈을 먹고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족속들이다. 그 전까지는 끊임없이 부자 되기를 기도하고 대박나기를 기원하는 탐욕의 세월을 보낼 것이다. 필요 이상의 지나친 부는 축복이 아닌 재앙이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인간들의 자해는 계속될 것이다. 안타깝지만 어쩌겠는가. 예수나 붓다도 구원하지 못한 세상인 것을.
사라지는 것들의 쓸쓸함

사라지는 것들의 쓸쓸함

멸족을 눈 앞에 둔 소인족 소녀 아리에티와 심장병으로 시한부 삶을 살고 있는 소년 쇼우. 따사로운 어느 봄날 그들은 조우한다. 아리에티에게 인간은 공포였고, 쇼우에게 소인족은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공포와 호기심의 만남은 서로에 대한 연민이 되었고, 그 연민의 끝은 이별의 쓸쓸함이었다.

아리에티와 쇼우 그들은 조만간 사라질 것이다. 소인족은 멸족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고, 쇼우는 삶을 지탱하기 힘들 것이다. 그들은 사라질 것이지만, 아리에티와 쇼우는 그들이 함께 했던 짧은 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삶의 본질은 그런 것이다. 언뜻언뜻 희망의 한자락이 보이기도 하지만, 본질은 쓸쓸하게 사라지는 것이다. 사라지는 순간까지 삶은 지속될 것이고, 그 안에서 행복한 순간들을 만날 것이다.

그것으로 족한 것 아닐까.

땅 위에 희망은 없었다

땅 위에 희망은 없었다

땅 위에 희망은 없었고, 신은 우리를 잊은 듯 했다. 어떤 이들은 신의 아들을 보았다 했지만, 다른 이들은 보지 못했다. 그가 왔다면, 그는 전에 했던 것처럼 아주 위대한 일들을 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도, 그가 한 일도 보지 못했기에 그가 왔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들은 희망을 잡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들은 그의 자비를 구하기 위해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었다. 그들은 그가 했다고 알려진 약속에 매달렸다.

<붉은 구름,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There was no hope on earth, and God seemed to have forgotten us. Some said they saw the Son of God; others did not see him. If He had come, He would do some great things as He had done before. We doubted it because we had seen neither Him nor His works. The people did not know; they did not care. They snatched at the hope. They screamed like crazy men to Him for mercy. They caught at the promise they heard He had made.

<Red Cloud, Bury my heart at Wounded Knee>

가위에 눌리다

가위에 눌리다

꿈 속에서 나는, 현실에서 내가 자고 있는 모습과 똑같은 모습으로 자고 있었다. 말하자면, 꿈 속의 나와 현실의 나는 구분되어지지 않았다. 꿈 속의 나는 잠을 자면서 또다른 존재를 느끼게 되는데, 그 존재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다만, 꿈 속에서 그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알 뿐이었고, 그 존재가 “또다른 나”란 사실을 알았다. 그 존재는 꿈 속에서 자고 있는 나에게 달라붙었다. 꿈 속에서 나는 움직일 수 없었고, 현실의 나도 움직일 수 없었다. 현실의 나는 꿈 속의 나와 동조되어 있었고, 꿈 속의 나는 또다른 나와 달라붙어 있었다.

너무나 답답하여 발버둥을 쳐보았지만, 전혀 움직일 수 없었고, 숨도 쉴 수 없었다. 더이상 견디기 힘들게 되었을 때 가까스로 나는 꿈 속에서 눈을 떴고, 그러자 현실에서도 눈을 뜨게 되었다. 눈을 뜨자 꿈 속에서 나에게 달라붙어 있던 그 존재는 사라졌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가 조금 넘었다. 식은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