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스티브 잡스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에게 스티브 잡스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시사인 고재열 기자의 “우리에겐 왜 스티브잡스가 없을까”를 재미있게 읽었다. 이 기사는 우리나라 기업들이 시장을 읽지 못했고, 소비자와 소통을 하지 못했으며, 철학이 부재했기 때문에 스티브 잡스의 아이폰이나 아이패드를 만들 수 없다고 분석하고 있다. 겉으로 보면 다 맞는 얘기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우리나라에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이 있으면 더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다. 우리에게 스티브 잡스가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우리나라는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나라의 지배계층은)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을 원하지도 않는다.

스티브 잡스는 천재적인 경영감각으로 거의 죽어가는 애플을 세계 최고의 IT 기업으로 바꾸어 놓았다. 스티브 잡스는 양부모 밑에서 자랐고, 대학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는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애플 컴퓨터를 만들어 승승장구하다 애플에서 쫓겨나는 신세로 전락했다. 새로운 운영체제를 만들고, 픽사(Pixar)라는 회사를 만들어 3D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큰 성공을 거두기도 하다가 다시 애플의 CEO로 영입되어 오늘날 같은 IT 업계의 선구자로 떠오른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이력을 가진 사람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스티브 잡스가 우리나라에 있었다면 과연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학벌도 없고, 돈도 없고, 집안 배경도 없는 이런 사람이 상상력과 아이디어 하나로 회사를 차렸다 말아먹고 신용불량자가 되지는 않았을까? 스티브 잡스가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재능 하나로 과연 한국에서 IT 업계의 선도자가 될 수 있었을까?

우리나라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나라에도 꽤나 알아주는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조선시대만 보더라도 중국에서도 부러워할 정도의 식견을 가진 천재들이 있었다. 그 많은 천재들이 다 어떻게 되었나? 다 죽임을 당하든지 아니면 몇 십년 간 귀양살이 하면서 다 거세되지 않았는가? 조선 세종 때와 정조 때 잠깐을 제외하고 그런 재능있는 사람들이 대접받고 자기 재능을 꽃피웠던 적이 있었던가? 일제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해방 이후는 또 어땠는가? 과연 능력있는 사람들이 인정받고 성공한 때가 있었는가?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에서 딱 한 번 예외적인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노무현이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노무현이 대통령이 된 것은 기적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를 물어뜯고 죽인 것은 누구인가? 노무현 대통령을 과연 대통령으로 인정한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었나?

우리나라에서 성공하려면 누구처럼 아버지가 재벌이고 부자라서 아무리 죄를 지어도 죄가 되지 않는 사람이거나, 누구처럼 공부를 잘해 일류 대학 나오고 일류 대학 교수와 총장까지 해먹으면서 731부대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거나, 누구처럼 거짓말을 너무도 잘해 자기 자신조차 속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스티브 잡스 같은 상상력과 재능이 있는 사람은 일찌감치 “듣보잡”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겐 왜 스티브잡스가 없을까?”라고 물어보는 것 자체가 어이없는 자해 행위다. 때문에 우리나라 기업들은 세계 일류 기업이 될 수 없고, 일류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 수 없으며, 일류 지도자를 키울 수도 없다. 한국에서 스티브 잡스 같은 인물은 나올 수 없고, 아이폰 같은 제품도 만들어질 수 없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누군가는 그래도 무슨 방법이 없나라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으로 봐선 “없다”. 혹시 조중동이 폐간되거나 한나라당이 없어지거나 뉴라이트가 해체되면 조금 희망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일이 과연 벌어지기야 하겠는가. 조선 후기 이후로 수백 년간 권력과 금력을 잡아온 집단이, 나라를 팔아 권력을 유지한 집단이 아직까지도 저렇게 날을 세우고 있는데, 그런 것이 과연 가능이나 하겠는가? 혹시 모르겠다. 국민들이 정신차리고 선거에 참여해서 제대로된 정치인들을 지도자로 세우면 어떨지. 그런데 과연 그런 일이 일어나겠는가?

블로깅에 대한 나의 몇 가지 생각

블로깅에 대한 나의 몇 가지 생각

밤하늘에 무수한 별들이 떠있는 것처럼 인터넷에는 수많은 블로그들이 존재한다. 돈을 벌기 위한 블로그, 정보를 공유하기 위한 블로그,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한 블로그 등등, 그 블로그들은 헤아릴 수 없는 저마다의 존재 이유를 가지고 있다. 우주의 수많은 별들 중 똑같은 별이 없듯이 블로그계의 수많은 블로그들도 똑같은 것은 없다. 이런 이유로 블로그계는 아름다운 것이다.

블로그를 시작한지 3년이 조금 넘었다. 숨을 쉴 공간이 필요했고, 나만의 공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철저히 자유로운 공간이 필요했다. 이 블로그는 다른 누구도 아닌 “소요유”를 위한 공간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시, 노래, 책 등을 올려놓고 내가 주로 감상하곤 했다. 어쩌다 이 블로그를 지나치는 나그네가 있으면 그 나그네와도 가끔 얘기도 나누고. 그러다가 몇몇 좋은 벗들도 알게 되었다. 미리내님, 민노씨님, 도아님, 아거님, CeeKay님, SoandSo님 등등… 내가 알고자했던 것도 아니고 그들이 나를 알고자했던 것도 아닐테지만, 우연과 필연의 그물 속에서 공감과 관심으로 (물론 나의 일방적인 생각일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블로그 이웃이 되었다.

블로그를 시작할 때, 가장 먼저 세웠던 원칙은 “독립형”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내가 내 블로그에서 나의 생각을 풀어놓았는데, 누가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글을 지웠다고 생각해보자. 나는 이런 상황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고, 용납할 수도 없었다. 나는 내 블로그에 대해 전적인 권한을 가져야만 했다. 나는 네이버나 다음 같은 한국의 포탈을 믿을 수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물론, 준법이라는 변명을 늘어놓겠지만) 서슴없이 계정을 정지시킬 수도 있고, 글을 지우거나 수정할 수도 있는 그런 집단이기 때문에, 나는 굳이 나의 시간과 돈을 들여가며 (해외) 서버를 구입하고 워드프레스를 설치했다.

또하나 생각한 원칙은 블로그의 정체성을 철저히 “소요유”로 제한한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블로그라는 것은 인터넷에 “공개”된 공간이다. 아무리 블로거가 자신만을 위한 공간을 만든다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와서 글을 읽고 그들의 생각을 보탤 수 있기 때문에 흔히 블로거들은 다른 이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검열” 기제가 발동할 수 있다. 나는 이런 상황에 맞닥드리는 것도 몹시 견디기 힘들었다. 하여 나의 현실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고 “소요유”의 생각만을 담기로 했다. (이런 이유로 민노씨님이 내 블로그에서 벽을 쌓는 느낌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주낙현 신부님의 “블로깅 – 변명어린 잡감”이란 글을 읽었다. 저간의 사정은 잘 모르지만, 신부님이 꽤 마음 고생을 하셨을지도 모른다는 짐작을 해본다. 신부님의 블로그를 통해서 성공회가 무엇인지도 알았고, 특히, 신부님의 “신앙인, 그 낯선 이방인” 같은 설교를 볼 수 있어서 기뻤다. 이 땅에도 정말 훌륭한 성직자가 있다는 사실과 그런 훌륭한 성직자들이 블로그를 통해 세상과 교감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했다. 나의 소박한 바람은 내가 신부님의 블로그 글을 보고 기뻤듯이 신부님도 블로깅을 통해 그만큼 기쁨을 누리시길 바라는 것이고, 가끔 꾸밈없고 담백한 말씀으로 나같은 못난 중생을 일깨워주셨으면 하는 것이다.

블로깅을 통해 좀 더 자유로와져야 하고, 블로그로 인한 소통과 공감을 통해 좀 더 기쁨을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나에게는 사치이거니와 내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다.

인간들이 겸손해야 하는 까닭

인간들이 겸손해야 하는 까닭

임마뉴엘 스베덴보리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아이작 뉴튼과 어깨를 나란히할 정도로 유명한 과학자였다. 그는 57세 때부터 27년간 지상과 영계를 자유자재로 오가며 천국과 지옥을 체험했고, 그것들을 방대한 기록으로 남겼다.

당대 최고의 과학자였던 그가 신을 버리고 과학을 추종하는 인간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과학은 놀라운 기적을 인류에게 가져다줄 것입니다. 그러나 두 가지만은 절대로 못합니다. 첫째 현미경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고, 둘째 싹트는 보리알 하나도 생명을 가진 것을 창조하지 못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위대한 선물, p.63>

인간유전자 염기서열을 판독해낸다는 인간의 과학이지만, 스베덴보리의 말처럼 생명을 가진 것은 짚신벌레 한마리 만들어내지 못한다. 인간의 과학으로는 알 수도 볼 수도 없는 신이기에 “신은 없다” 또는 “신은 죽었다”라고 말한다. 과학으로 볼 수 없으면 정말 없는 것인가. 인간의 과학이 그만큼 완전한 것인가.

엄청난 발전을 이룬 과학이지만, 우리 인간들이 알고 있는 것은 갠지즈강의 모래알 몇 개뿐이다. 진실로 인간들은 신 앞에, 그리고 신이 창조한 자연 앞에 겸손해야 한다. 인간들의 오만은 파멸을 불러온다. 신은 언제나 그것을 경고하지만, 인간들은 여전히 못들은 체 하거나 실제로 듣지 못한다. 그 소통 능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너는 어떤 봉사를 해왔는가?”

“너는 어떤 봉사를 해왔는가?”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선택을 하게되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된다.

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 박사는 그의 자서전 <생의 수레바퀴>에서 “신이 우리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자유의지”라고 말한다. 그 자유의지에 따라 인간들은 자기의 삶을 만들어 간다. 인간들이 각자의 소명을 다하고 물리적 몸을 벗을 때, 다시 말해 인간들의 삶이 죽음을 통해 완성될 때, 물리적 몸은 소멸하지만 인간들의 영은 창조의 근원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 존재의 근원을 신이라고 하고, 하느님이라고도 하고, 붓다라고도 부르지만 결국에는 하나의 근원이다.

지상에서의 삶을 끝내고 창조의 근원 앞에서 받는 단 하나의 질문.

“너는 어떤 봉사를 해왔는가?”

이 질문에 쩔쩔매며 우물쭈물할 나를 상상해본다.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봉사를 해왔을까.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영향을 주며 살아왔을까. 이 질문 앞에서 나는 부끄럽지 않고 당당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은 자명하다. 예수나 붓다를 비롯한 인류의 수많은 성인들과 선지자들의 가르침은 단 하나, “무조건적인 사랑”이었다. 아무런 조건없이 (심지어 원수라 할지라도)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다른 이들의 아픔과 고통을 감싸주는 것, 그것만이 영원하다는 것은 진리다.

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죽음은 결코 불행이 아니라고. 죽음은 고통도 두려움도 아니라고. 죽음은 삶의 완성이자 다른 차원으로 옮겨가는 과정이라고. 마치 누에가 고치를 벗고 나비가 되는 것과 같이. 우리가 이 세상에 온 이유는 그 “무조건적인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기 위해서이고 삶의 목적은 성장하기 위해서라고.

우리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는 우리의 몸을 진짜 “나”로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몸이 죽어 소멸하면 우리도 소멸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로스 박사의 연구와 증거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가 그토록 좋아하는) “과학”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은 수많은 신비주의 스승들이 수천 년 전부터 가르쳐왔던 것들이다. 우리의 몸이 소멸한다 해도 우리의 “참나”는 소멸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진정한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진지한 해답을 찾고자하는 사람들에게 <생의 수레바퀴>는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해줄 것이다. 이 책은 죽음에 대한 나의 생각을 바꾸어 놓았고, 그만큼 나는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한없이 기뻤다.

이 책을 추천해 주신 미리내 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평범한 사람

평범한 사람

생이 거듭될수록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야 하리라. 욕망이 소멸하고 더이상 생을 반복할 이유가 사라질 때 비로소 안식할 수 있다. 그런 삶을 위해 지극히 평범하여, 흔적도 없이 스쳐가야 한다. 바람과 같이 그리고 구름과 같이.

누가 영웅이 되고자 했던가. 누가 위인이 되고 열사가 되고자 했던가. 그들은 진정으로 그런 삶을 원했을까? 지극히 평범한 삶을 원했지만, 시대를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세상이 그들을 그렇게 몰고간 것은 아닐까? 제물이 된 것은 아닐까?

오르고 또 올라가면
모두들 얘기하는 것처럼
정말 행복한 세상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나는 갈 곳이 없었네
그래서 오르고 또 올랐네
어둠을 죽이던 불빛
자꾸만 나를 오르게 했네

알다시피 나는 참 평범한 사람
조금만 더 살고 싶어 올라갔던 길
이제 나의 이름은 사라지지만
난 어차피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으니
울고 있는 내 친구여
아직까지도 슬퍼하진 말아주게
어차피 우리는 사라진다
나는 너무나 평범한
평범하게 죽어간 사람
평범한 사람

<루시드 폴, 평범한 사람>

이렇게 담백하면서도 서정적인 가락에 시대의 아픔을 녹여낼 수 있는 조윤석은 “평범한 사람”은 아닌 듯 하다. 모두들 정글같은 세상에서 자기 욕망만을 쫓는 시대에 이런 노래를 들려주는 그가 고마울 뿐이다.

그로 인해 나는 숨을 쉴 수 있었다.

빨갱이와 신자유주의

빨갱이와 신자유주의

수구반동 기회주의 세력들이 해방 이후 자신들의 친일 행적을 감추기 위해 들고 나온 무기는 “반공”이었다. 자신들의 정적을 죽이기 위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은 “빨갱이” 딱지를 남발했다. 수많은 민족주의 인사들과 독립운동가들이 빨갱이라는 미명으로 스러져갔다. 이성과 논리와 상식은 빨갱이 딱지 앞에 처참하게 뭉개졌다. “반공”을 국시로 50여년 간을 살았다.

수구반동 기회주의자의 전형인 박정희는 그의 정적 김대중을 빨갱이로 낙인찍어 평생을 괴롭혔다. 내가 어렸을 때, 나는 김대중이 정말 좌파 정치인인줄로만 알았다. 김대중의 <옥중서신>을 읽고서야 그가 얼마나 보수적인 정치인인지 알게 되었고, 사실 조금은 실망한 적이 있다. 남로당 군총책을 맡았던 박정희가 온건 보수정치인 김대중을 빨갱이로 몰아붙일 정도이니 더 이상 무엇을 말하겠는가.

수구반동 기회주의 세력들이 처음으로 정권을 놓친 것이 해방 이후 52년만인 1997년이었다. 그들은 지독히도 탐욕적이지만 또한 지독히도 무능했는데 그 결과는 1997년 IMF 외환 위기였다. 이때도 김대중은 원조 수구반동 기회주의자 중 하나인 김종필과 손을 잡지 않고는 정권교체를 할 수 없었다.

2002년, 혜성과 같은 노무현의 등장은 수구반동 기회주의 세력들에게는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반만년 역사를 자랑하는 이 땅 한반도에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그들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노무현이 단기필마로 정권을 쟁취했긴 했지만, 수구반동 기회주의 세력은 노무현을 탄핵했고, 끊임없이 흔들어댔다. 수구반동 세력들은 10년만에 정권을 다시 가져갔다. 그리고 그들은 2009년 노무현과 김대중을 죽였다. 인정하지도 않았고, 인정할 수도 없었던 그 10년의 세월을 지우려고 노무현과 김대중을 죽였다.

수구반동 기회주의 세력들과는 다르게 소위 자칭 좌파라는 세력들은 김대중과 노무현 10년의 세월을 “신자유주의” 시대로 규정하고 공격했다. 지금 이 땅의 주요한 문제들은 신자유주의로부터 기인하며 그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인 김대중과 노무현은 공공의 적이라는 논리였다. 김대중과 노무현이 이명박보다 더 파렴치하다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면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수구반동 기회주의 세력의 “빨갱이” 공격과 자칭 자파라는 세력들의 “신자유주의” 공격은 방향만 다를 뿐 본질은 같다. 수구반동 세력들은 무능하고 부패하고 탐욕적인 세력이고 자칭 좌파들은 몰역사적이고 독선적인 세력이지만 기회주의자들이라는 점에서는 똑같다.

최근 경향신문의 논설위원 이대근이 레디앙에 기고한 글을 보면 진보 정치학자 최장집의 논리와 판박이다. 이명박 정권을 반민주 정권이라 할 수 없고, 이명박 정권이 반민주이면 김대중, 노무현도 반민주가 되어야한다는 그 논리 말이다.

일반적으로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반민주 독재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같은 기준으로 이명박 정권에 대해서도 그런 딱지를 붙여서는 안 된다. 물론 이명박 정권이 단순히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 노선을 계승했을 뿐 아니라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분명히 차이가 있다. 그러나 역시 그 차이로 민주 대 반민주 구도를 설정할 수 없는 것은 너무 자명하다. 사회적 시민권의 확산 정도, 사회 경제적 정책을 기준 삼아 이명박 정권을 반민주로 규정하고 싶다면 지난 10년 정권도 역시 반민주가 되어야 한다.

<이대근, “민주당-진보정당 모두 패배하는 길“, 레디앙>

이대근과 같은 사이비 좌파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수구반동 세력의 영구집권을 꿈꾸는 것일까? 정말 이들이 신자유주의를 반대한다면 이명박 정권 퇴진 운동에 나서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김대중, 노무현은 신랄하게 공격하면서 이명박은 애써 두둔하거나 모른척 한다. 김대중, 노무현이 신자유주의 정부라 공격을 받아야한다면 그 잣대로 이명박은 한 100만배쯤 더 신랄하게 공격받아야 한다. 때문에 나는 이들이 정말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자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역겹다.

자칭 B급 좌파인 김규항도 이대근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 10여년 동안 세 개의 정권이 존재했다. 그중 두 정권은 민주주의의 껍질을 앞세워 자본 편에 섰고 하나의 정권은 그 껍질마저 팽개치고 자본 편에 서고 있다. 그리고 그 두 정권을 맡았던 사람들이 그 ‘차이’를 내세워 오늘 다시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하고 있다. “어떠세요. 겪어보니까 그래도 옛날이 그립지요?” 근래 그들 가운데 한 주요한 인사가 강연에서 했다는 말은 그들의 태도를 잘 드러낸다. 그들이 마치 인간이 어디까지 파렴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는 듯한 행태를 지속할 수 있는 건, 그들을 ‘그래도 현실적인 대안’이라 인정하는 사람들 덕이다.

<김규항, 민주주의의 씨앗, 한겨레>

김규항의 논리대로라면 노무현을 지지하는 나같은 사람은 파렴치한이다. 우스운 것은 나같은 파렴치한은 신자유주의를 찬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노무현을 지지했을까? 노무현은 정말 신자유주의자였을까? 노무현은 정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아픔을 외면하고 자본의 편에만 섰을까? 노무현의 정책은 모두 신자유주의이기 때문에 내팽개쳐져야만 라는 것일까? 과연 우석훈의 말대로 “행정도시 건설”이나 “4대강 죽이기 사업”이 똑같은 토목사업일 뿐일까?

나는 궁금하다. 진보신당 지지율 1.2%로 그들은 어떻게 권력을 쟁취할 것인가? 조중동과 한나라당과 싸우지 않고 그들은 어떻게 정권을 쟁취해서 신자유주의를 몰아낼 것인가? 반노무현, 반신자유주의만으로 그들은 그들이 꿈꾸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

미안하지만, 이 땅의 민주주의는 김대중 노무현의 유산을 이어가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민주주의 씨앗은 김대중, 그리고 노무현이다.

아바타, 획을 긋는다는 것

아바타, 획을 긋는다는 것

제임스 카메론은 그의 최신작 <아바타>로 까칠한 천재 흥행 감독에서 스탠리 큐브릭과 미야자키 하야오의 계보를 잇는 거장의 반열로 올라섰다. 민노씨 님의 말처럼 좋든 싫든 이제 인간들이 만들어낸 영화는 <아바타> 이전과 이후로 나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카메론과 어깨를 견줄 수 있는 감독으로는 피터 잭슨 정도일 것이고, 나머지는 그야말로 나머지로 전락했다.

영화의 줄거리나 모티브가 새롭지는 않지만, 과문한 내가 보기에도 영화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완벽한 영상은 모든 반론들을 무마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그리고 그 완벽한 영상들의 흐름을 아우르는 나비족 여전사 네이티리의 한마디는 왜 이 영화가 걸작인가를 말해준다.

All energy is only borrowed and one day, you have to give it back.

영화를 보면서 내내 씁쓸했던 것은 자본의 폭력과 인간의 탐욕이 우주 저 편 판도라 행성만 파괴시킨 것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러한 탐욕과 폭력은 지금 여기에서도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다. 나비족은 판도라 행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 땅 한반도에도 있는 것이다.

2009년 제임스 카메론은 영화 <아바타>로 획을 그었고, 이 땅 한반도는 <4대강 죽이기>로 난도질당하고 있다.

누가 그들을 “보수”라 하는가

누가 그들을 “보수”라 하는가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적을 아는 것이다. 일찌기 손자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했다. 적을 알고 그들을 정확하게 규정해내는 것은 모든 싸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일 뿐더러 가장 시급히 해야 할 일이다.

언제부터인가 이 땅의 친일세력과 군사독재 잔재세력을 “보수”세력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조중동 같은 사이비 찌라시 신문을 “보수”신문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김창호 전 국정홍보처장의 신간인 <다시 진보를 생각한다>를 보면 시종일관 우리 정치를 보수와 진보의 대립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어떻게 하면 진보가 다시 권력을 창출할 수 있을지를 논하고 있다. 이런 식의 논의 전개는 연구결과의 유용성과는 상관 없이 그들에게 “보수”라는 정당성을 부여한다.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그렇다면 보수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나 변화를 반대하고 전통을 옹호하고 유지하려는 것인데, 정치적으로 볼 때 여기에는 상식과 민족이란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보수란 무조건적으로 새로운 변화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고, 민족주의 관점에서 자신들이 지키고자 하는 가치가 유효한 범위 내에서의 변화는 수용한다. 따라서 보수란 개념에는 어느 정도 긍정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지금 이 땅에서 “보수”라 불리는 세력들의 면면을 보자. 한나라당, 조중동, 뉴라이트 등등의 세력들에게 과연 “보수”라는 딱지를 붙일 수 있을까? 그들의 뿌리가 어디인가? 그들은 가깝게는 군부독재의 잔재 또는 부역 세력이고 멀게는 일제시대의 친일세력이며, 조선시대 당쟁의 주류였던 노론세력이다. 이들은 수백 년간 이 땅의 권력과 부를 장악했고, 그들만의 성을 쌓아 특권 주류세력으로 부상했다.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사법, 언론, 학계 등등 이 땅의 모든 지배 기재를 장악한 세력들이다.

과연 그들을 보수라 부를 수 있을까? 이런 세력에게서 과연 민족이나 상식과 같은 개념을 찾아볼 수 있을까? 그들은 조선시대에는 조선의 왕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개혁을 추구하는 군주를 서슴지 않고 독살하였다. 오로지 중국의 황제만을 추종하는 듯 하면서 자신들의 영달과 탐욕을 추구하였다. 힘의 균형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넘어가자, 이들은 앞다투어 나라를 팔았고 친일세력으로 탈바꿈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미국의 등 뒤에 숨어 “반공”이라는 무기로 무장하여 죄없는 양민들을 괴롭혔다. 이승만과 결탁하여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고, 박정희, 전두환의 군사독재에 앞장서 부역하였다.

수백 년의 역사 속에서 이들이 정치 권력을 놓쳐본 것은 단 10년, 1998년부터 2007년까지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재임 기간이었다. 그들이 얘기하는 대로 과연 “잃어버린 10년”의 기간이었다. 물론 이 10년 동안에도 행정부의 권력만이 개혁세력에게 잠시 넘어왔을 뿐, 나머지 모든 지배 기재는 여전히 이들 세력의 수중에 있었다.

우리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이들의 동물적인 본능은 누가 자신들의 적인지 그리고 누가 그 적의 핵심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한다는 것이다. 해방 이후 수없이 쓰러져간 민주 인사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들 세력의 영악함과 간교함이 어떤지를 알 수 있다. 김구 선생을 시작으로 최근의 노무현까지 이들 세력들의 탄압으로 쓰러져간 인물들은 모두 그 시대의 가장 핵심적 민주개혁 인사였다. 노무현을 죽이고 6개월도 채 되지 않아 그들은 한명숙을 공격하고 있다.

그들을 “보수”라 규정하고 “보수”라 대우해서는 절대 그들을 이길 수 없고 그들을 넘어설 수 없다. 그들은 역사의 반동이고, 전형적인 기회주의 세력일 뿐이다. 그들은 친일세력이고 독재세력이고 부도덕한 부패세력일 뿐이다. 그들은 탐욕만을 추구하며 부끄러움을 전혀 모르는 불구세력일 뿐이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아직도 그들을 보수라 부를 것인가? 그들을 보수라고 부르는 순간, 이미 그들의 전략에 말려든 것이고 게임은 해보나마나 한 것이다.

그들은 보수가 아니다.

예수님께 드리는 편지

예수님께 드리는 편지

아홉살 먹은 딸아이는 아직도 성탄절을 기다리며 예수님께 편지를 썼다. 그리고 그 편지를 크리스마스 트리 앞에 놓았다. 예수님이 읽어 보고 꼭 선물을 달라는 애원(또는 협박?)이었다. 편지 앞면에는 예수의 탄생 장면이 그려져 있고, 뒷면(이면)에는 예수님께 하고 싶은 말이 적혀 있었다.

예수님께!

예수님, 내일이 예수님의 생신 성탄절이에요. 예수님은 천국에 계시죠?

저는 욕심꾸러기에요. 어쩌면 선물을 받고 싶어서 이러는지도 몰라요? 그래도 용서해 주실 거죠?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계시잖아요. 용서하지 않으신다면 벌을 받을께요…

이면지를 꼭!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이 편지를 본 아빠의 마음은 급해졌다. 예수님을 거짓말장이로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성탄 전날, 많은 가게들이 일찍 문을 닫았고, 동네 장난감 가게만이 나와 같이 마음 급한 부모들로 북적거렸다.

12월 25일이 예수 탄신일이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 분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그 분은 언제나 가장 낮은 곳에 임하셨고, “사랑”과 “용서”를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사랑과 용서, 그것 이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을까?

딸아이는 정확하게 예수님의 참뜻을 알고 있었고, 그것과 더불어 한가지 더, “선물”을 바라고 있었다. 예수님은 사랑과 용서를 보여주셨고, 아빠는 선물을 마련하였다.

천국이 어린 아이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예수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아이들만 생각하면 늘 행복하다.

자식을 아주 쉽게 망치는 방법

자식을 아주 쉽게 망치는 방법

누군가가 말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거울이라고. 아이들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거의 전부 어른들의 책임이다. 특히, 아이의 생활과 사고방식에 가장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부모의 책임이다. 모든 아이들은 태어나길 천사로 태어났다. 지금의 어른들이 어렸을 때도 천사와 같은 맑은 눈망울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의 어른들이 탐욕에 눈이 멀게 된 것은 그 어른들의 부모 때문이며, 지금의 아이들이 못된 어른이 되는 것은 그 아이들의 부모인 우리 어른들 때문이다.

최근 외국어고등학교의 존폐 문제로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사교육을 부추기고 입시 전문 학원으로 전락한 외고가 존재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외국어를 전문적으로 가르쳐 아이들을 글로벌 인재로 키우겠다는 학교가 외고인데, 사실 이런 발상 자체가 아주 웃기는 일이다. 도대체 말끝마다 글로벌 인재 운운하는 사회 풍토도 상식 이하이지만, 외국어만 잘한다고 글로벌 인재가 된다는 생각 자체는 너무 순진해 눈물이 나올 지경이다. 더욱 큰 문제는 이런 아주 웃기는 설립 취지조차 제대로 지키지 않고 학교를 입시 학원처럼 만들어 버린 사실이다.

이런 기형적 교육기관(이라는 말을 쓰기도 민망하지만)에 자식을 보내고 있는 어떤 엄마는 “공부 못하는 학생들과 섞이게 하기 싫다”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닌다. 미안한 말이지만, 이런 부모 밑에서 아이들은 제대로 자랄 수 없다. 물론 수학 문제 하나, 영어 단어 하나 더 잘 풀고 외울지는 몰라도 그것이 공부 잘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이런 부모들은 자기들의 탐욕때문에 자식의 인생을 망치고 자식의 행복을 유린하는 사람들이다.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과 섞이게 하기 싫다고? 그렇다면 못사는 아이들과 섞이게 하기도 싫을 것이고, 피부색이 까만 아이들과도 섞이게 하기 싫을 것이다. 참으로 반인권적이고 반사회적이고 반교육적 발상 아닌가. 그러면 공부 잘하는 학생들만 모아놓고 그 안에서 공부하면 아주 훌륭한 인간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아무런 이론적 실증적 증거도 없는 이런 논리는 특권의식에 젖은 부모들이 (본인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자식을 망치기 위해 들이대는 흉기인 것이다. 이렇게 키워진 아이들은 다른 사람들의 아픔과 눈물을 이해할 수 없는 절름발이 인생을 살게 된다.

자식에게서 뜨거운 가슴을 빼앗는 부모들, 자기의 욕심을 채우려고 자식의 삶을 망치는 부모들, “이게 다 너를 위해서 그러는거야”라고 매일 거짓말하며 공부를 강요하고 자식을 못살게구는 부모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당신 자식은 결코 당신 소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쳐줘야 할 것은 치열한 경쟁에서 이겨 네 친구를 밟고 일어서라는 정글의 법칙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어려운 친구들을 도와주고 같이 살아갈 수 있는지, 내가 어려울 때는 어떻게 도움을 받는지,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더불어 같이 살아가는지를 보여줘야 한다. “공부 못하는 아이들과 섞이게 하기 싫다”는 태도는 지극히 반인간적이고 반교육적이기에 아이들은 쉽게 감당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최근들어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한국의 교육열을 예로 들면서 미국 사회를 자극하고 있는 모양이다. 미국의 공교육이 무너졌기에 이를 바로잡기 위해 오바마가 한국의 경우를 예로 드는 것이겠지만, 이것은 오바마가 하나는 알고 둘을 모르는 것이다. 한국 부모들의 교육열은 유대인들조차 놀랄 정도로 높지만, 그 교육의 방향과 방법은 심히 뒤틀려있고 노력에 비하면 효과도 아주 낮은 실정이다. 아이들을 공부하는 기계로 만들어버리고 무한 경쟁으로 몰아가는 한국 부모들의 실상을 오바마가 안다면 더이상 한국의 예를 들어가면서 미국의 공교육을 회복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못하는 아이들과 섞여야 하고, 운동 잘하는 아이들은 못하는 아이들과 섞여야 하고, 잘사는 아이들은 못사는 아이들과 섞여야 한다. 그렇게 부딪히면서 서로를 알아가고 서로를 도와주며 자라나야 한다.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지금의 외고는 마땅히 폐지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