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로운 전쟁? 그런 건 없다

정의로운 전쟁? 그런 건 없다

인간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 중 가장 추악하고 가장 불행한 것은 “전쟁”이다.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가 어떤 명분을 갖다 붙여도 전쟁은 가장 추악하고 불행하다.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가장 못된 짓의 총합이 바로 전쟁이다. 전쟁은 살인이고 유괴고 강간이고 파괴고 폭력이다.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는 자들은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될 수 없다.

오바마가 노벨평화상을 받으면서 “정의로운 전쟁(Just War)”에 대해 언급했다. 개인적으로 그의 이런 언급은 참으로 실망스럽다. 지금 두 개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미국의 대통령이라는 입장과 세계 평화를 위해 노력한 사람들에게 주는 가장 영예로운 상을 받는 수상자의 입장이 만들어낸 어정쩡한 합리화가 정의로운 전쟁이다.

정의로운 전쟁? 그런 것은 없다.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은 인간들의 탐욕을 가장 파괴적이고 가장 추악하게 드러낸 가장 불행한 행위일 뿐이다. 전쟁이 합리화될 수 있는 단 하나의 경우라 하면, 그건 전쟁을 일으킨 자들에 대한 “방어”와 같은 불가피한 경우뿐인데, 이 때도 실제 전쟁 행위 자체에 “정의”라는 말을 붙일 수 없다. 그 행위라는 것은 결국 살인과 파괴와 폭력일 뿐이니까. 전쟁에서는 모든 인간들이 고통을 받는다. 죽는 자도 죽이는 자도. 어린 아이들과 여자들이 겪는 불행과 고통은 말로 헤아릴 수 없다. 인간의 영혼까지 파괴시키는 행위가 전쟁이다.

지금 미국이 하고 있는 두 개의 전쟁을 오바마가 일으킨 것은 아니지만, 그는 상당히 곤혹스러울 것이다. 미국 대통령으로서 어떻게든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해야 하는 입장과 노벨평화상 수상자로서의 의무가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 오바마야 당연히 전쟁에 반대하겠지만, 미국 대통령으로서의 오바마는 다른 결정을 내려야할 수도 있다. 미국은 가장 강하지만 가장 탐욕스러운 나라이기 때문이다.

오바마는 예수나 붓다 같은 성인이 아니다. 간디나 킹 목사와 같은 인권운동가도 아니다. 그는 현실 정치인이다. 그가 간디나 킹 목사와 같은 순수한 주장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러나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에 있다. 그의 결정 하나에 수십 만명, 아니 수백 만명의 목숨이 달려 있다. 따라서 그의 현실적인 영향력이 간디나 킹 목사를 넘어설 수 있다.

그는 빠른 시일 내에 전쟁을 끝내야 한다. 동시에 미국에서 전쟁을 부추기는 세력들이 권력을 갖지 못하도록 자기의 정치적 입지를 지켜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오바마의 존재 이유다. 그에게 부여된 역사적 책임과 의무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와 지혜다. 그가 전세계 인민들의 염원인 평화와 공존을 뿌리치지 않길 바랄 뿐이다.

마지막으로 그가 노벨평화상 수상 연설에서 언급한 킹 목사의 말을 다시 한 번 기억하길 바란다.

Violence never brings permanent peace. It solves no social problem: it merely creates new and more complicated ones.”

전쟁은 가장 극악한 폭력일 뿐이다. 따라서 전쟁으로 항구적인 평화를 이룰 수 없다.

아이폰, 제대로 된 것들은 그렇게 까였다

아이폰, 제대로 된 것들은 그렇게 까였다

아이폰이 출시된 지 일주일이 지났건만 블로그계와 언론은 여전히 아이폰으로 떠들썩하다. 그동안 우리나라에 출시된 휴대전화기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아이폰만큼 논란의 중심이 된 것은 없었다. 아무리 무시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기업의 존재 이유를 물으면 열에 아홉은 이윤 추구라고 대답한다. 이윤,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윤을 추구하는 조직을 정말 제대로 된 기업이라고 할 수 있을까. 피터 드러커 같은 경영학의 구루한테 같은 질문을 하면, 고객이 필요로 하는 가치를 제공하는 것이 기업의 존재 이유이고 이윤은 그에 수반되어 따라오는 부수적인 것이라는 답이 나온다. 관점이 전혀 다르다.

그동안 우리나라 이통사들과 단말기 제조업체들은 어떤 식으로 장사를 했나? 과연 고객의 새로운 요구에 끊임없이 부응하기 위해 노력을 했던가? 전혀 아니었다. Wi-Fi 기능을 요구하는 고객들에게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부러 그 기능을 제거하고 시장에 내놓은 것은 누구인가? 마치 사채업자가 돈놀이하듯 무선 인터넷 접속비를 받아 챙겼던 이들이 누구인가? 고객은 이통사들의 봉이었다.

단말기 업체들의 행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이폰은 몇 년의 기획과 개발을 통해 시장에 나온 제대로 만들어진 물건이다. 아이폰의 인터페이스를 본따 삼성은 불과 몇 주만에 햅틱이라는 전화기를 내놓는다. 그렇게 개발자들을 쥐어 짜서 살인적인 스케줄로 제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삼성의 경쟁력일지는 모르겠지만, 애초부터 경쟁 상대가 되지 않는다.

단말기 업체들은 아이폰과 경쟁하기 위해 태극기를 앞세운 애국심 마케팅을 하고, 기자들과 알바를 동원해 아이폰을 까대는 쓰레기 기사와 댓글들을 쏟아내고 있다. 비단 아이폰만이 아니고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된 것들은 쓰레기 언론에게 그렇게 까였었다. 하지만 그런 단말기 업체의 행태는 애플의 아이폰에 정공으로 대항할 수 없는 그들의 처지와 열등감을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애플은 단 하나의 모델로 전세계 스마트폰 시장을 휩쓸고 있다. 언론플레이를 하기는커녕 오히려 높은 콧대때문에 비난을 듣기도 한다. 그런 자신감을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고객 중심 사고와 고객의 필요를 만족시킬 줄 아는 그들의 실력에서 나오는 것이다.

나는 스마트폰이 필요한 많은 사람들이 아이폰을 사용했으면 좋겠다. 제대로 만들어진 물건이 주는 편의와 즐거움을 누려보았으면 하는 것이고, 아이폰의 폭발적 인기는 뒤틀어진 국내 무선통신 시장에 경각심을 불러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땅 짚고 헤엄치면서 장사하는 시대는 지났다. 양어장에서 물고기 잡듯 고객들을 가두어놓고 봉이 김선달 짓을 하는 시대는 아니다. 아이폰 도입을 계기로 우리나라 기업들이 정신 차리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다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다

장자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는 나비가 되어 온 세상을 훨훨 날아다녔다. 그 나비는 잠시 쉬려고 나뭇가지에 앉았다가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어보니 나비가 아니라 장자였다. 장자가 나비 꿈을 꾼 것인지, 나비가 장자의 꿈을 꾼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을 만났다. 그의 서거 후 처음 그의 모습을 본 것이다. 그는 건강해 보였고, 무척이나 바빠 보였다. 그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의 말을 들어주었다. 늘 그렇듯 그의 얼굴에는 인자한 미소가 가득했다. 누군가가 말했다. 그의 곁을 지키던 사람들이 모두 떠났다고. 마지막 남았던 보좌관도 어제 떠났다고. 내가 그에게 다가가 그의 곁에 있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그저 웃기만 했다. 나는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을 주저리주저리 얘기했다. 한참을 듣고만 있던 그는 “자네는 쓸모 있는 사람이군.”이라고 말하며 저 멀리 앞서가기 시작했다. 그를 잡으려 했으나 잡을 수가 없었다. 꿈이었다.

꿈속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만난 건 이번이 세 번째인데, 이번처럼 선명하게 그를 만나서 얘기한 적은 없었다. 그는 이 세상에서보다 저 세상에서 훨씬 평안해 보였으나 그의 곁에는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저 세상에도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많은데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가 떠난 이 세상에는 여전히 그를 탓하는 사람들로 넘친다. 수구든 진보든 간에 여간해서 그의 진심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마치 이 어처구니없는 세상의 모순이 마치 모두 그로부터 시작된 듯이 말한다. 때때로 그와 이명박을 비교하며 다를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목숨까지도 버렸는데 말이다. 우석훈은 이명박의 4대 강이나 노무현의 세종시가 모두 같은 토건이라 말한다. 시사IN의 고종석은 이렇게 말한다.

이명박 정권은 나쁜 정권인가? 그렇다. 이 정권은 애오라지 자본의 자기증식 욕망 위에 올라탄 ‘삼마이 정권’이다. 그럼 노무현 정권은 좋은 정권이었나? 모르겠다. 희망 잃은 노동자들이 잇따라 제 몸을 살라도 “분신을 투쟁 수단으로 삼는 시대는 지났다”라고 그들을 훈계한 이가 노무현이고, 아무도 강요하지 않은 한·미 FTA를 날조된 통계수치 위에서 강행한 이가 노무현이며, 자신의 정치적 결정 때문에 이역만리에서 참혹하게 살해된 자국 시민에게 예의를 갖추기는커녕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테러에 단호히 대처하겠다며 ‘위엄’을 보인 이가 노무현이고, 당시 여당과 한나라당 사이에 무슨 이념 차이가 있느냐며 이른바 대연정(大聯政)을 꾀했던 이가 노무현이다. 특권(층)이 싫다며 좌충우돌하던 그가 미움이라는 열정을 조금만 합리적으로 배분했더라면, 오늘날 한국 공교육의 터미네이터가 돼버린 외국어고등학교라는 괴물은 진작 없어졌을 것이고, 그 자신이 피해자였던 학벌주의의 힘도 조금은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고종석, 어느 회색인의 서유기>

아무래도 내가 병신인가 보다. 저렇게 똑똑한 지식인들이 노무현을 아무렇지도 않게 비난할 수 있는데 나는 그럴 수 없으니 말이다. 그는 슈퍼맨도 아니었고 신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모든 것은 노무현 때문이다. 저들에게 노무현 따위는 안중에도 없나 보다. 그렇게 하찮은 노무현이고 실패한 노무현인데, 나는 왜 노무현만 생각하면 눈물이 앞서는 걸까. 아무래도 내가 미쳤나 보다. 왜 꿈속에서조차 그의 안부가 궁금하고 그의 곁을 지키겠다고 안달하는 것일까. 아무래도 내가 제정신이 아닌 게지, 아마 그럴 게야…

완벽히 고립된 블로그

완벽히 고립된 블로그

거의 3주 가까이 블로그의 RSS Feed가 작동하지 않았다. 지난 달 말에 워드프레스를 2.8.5로 자동 판올림을 했고, iPod touch에서 워드프레스를 깔끔하게 보여주는 플러그인(WPtouch iPhone Theme)을 설치한 후 RSS Feed 문제가 발생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제 때 알지 못했다. 그동안 대여섯 개의 글을 썼는데, 댓글은 거의 없었고 블로그를 찾아오는 이도 드물었다. RSS가 작동하지 않는 블로그는 “바다에 표류하다 무인도에 고립된 난민”과도 같은 처지였다. 아무도 찾지 않는 적막하고 완벽히 쓸쓸한 공간이 되어버렸다. 원래 많이 이들이 찾지 않는 곳이라 그리고 워낙 둔감한 편이라 이런 변화를 깨닫지 못하다가 3주만에 RSS가 문제라는 것을 아주 우연히 알게 되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거의 하루 가까운 시간을 소비했다. 구글에 물어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몇 시간 삽질을 하다 결국 플러그인과의 충돌 때문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고, 모든 플러그인을 죽였다가 하나씩 살리면서 어떤 플러그인이 문제를 일으키는가를 알아냈다. 내 블로그는 원래 나를 위한 가장 이기적인 공간이지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블로그 또한 상당히 낯선 공간임을 느꼈다. 그리고 RSS라는 기술의 중요함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소통되지 않고 완벽히 고립된 공간이 얼마나 답답한 곳인가. 궁극적으로 인간이란 “신 앞에 선 단독자”들이지만, 나는 아직 그 경지에는 이르지 못한 것 같다. 수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아직은 벗들과의 소통이 더 그리운 듯 하다.
기자와 똥꼬치마

기자와 똥꼬치마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언론이라고 인정받을만한 주간지인 <시사IN>의 기자, 고재열 씨가 지하철 계단에서 아주 짧은 치마(그는 똥꼬치마라고 했다)를 입은 여자를 뒤따르다 느낀 불쾌함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다가 곤경에 처했다. 많은 비난들이 쏟아졌고, 급기야 그는 그 글에 대한 사과문을 게재했다.

고재열 기자가 올린 “지하철 똥꼬치마에 대한 단상”이라는 글을 읽고, 남자인 나도 무척 당황했다. 아무리 본인의 짜증이 머리 끝까지 뻗쳤다 하더라도 그런 식의 글을 올린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그 글을 읽고 내가 받은 느낌은 마치 이명박의 “마사지걸” 발언이나 “기생” 농담을 듣는 기분이었다. 그 글에는 여성 비하와 폭력적 표현이 넘쳤다. 본인도 밝혔지만, 무의식 중에 고재열 기자의 마초 근성이 반영된 글이었는지도 모른다.

오늘 고재열 기자와 트위터로 대화를 나는 마법사 님의 글을 보다가 고재열 기자의 “똥꼬치마” 글이 실수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고재열 기자가 트위터에 올린 짧은 글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었다.

좌파는 섹시한 것을 섹시하다고 하지 못하고, 꼴불견을 꼴불견이라고 하지 못하는 것인가 봅니다. 댓글이 장난이 아니네요.

나는 개인적으로 고재열 기자를 모르기 때문에 그가 좌파인지 수구 꼴통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올린 “똥꼬치마” 글이 좌파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그가 자신의 실수 혹은 잘못을 뉘우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는 이유는 그의 장황한 사과문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진정으로 잘못을 뉘우치는 사람은 그렇게 장황하게 꼬치꼬치 변명을 늘어놓지 않는다.

마법사 님의 말대로 그는 적어도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더 깊은 성찰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정치적 이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며, 인간의 기본 품성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이념을 떠나 성숙하지 못한 남자들이 흔히 여성을 적대시하거나 비하하는 것을 종종 목격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아직 철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과 생명의 기원이 여성임을 깨달을 때 그들은 비로소 아름다운 어른이 될 수 있다.

남자들은
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
비로소 자신 속에서 으르렁거리던 짐승과
결별한다.
딸의 아랫도리를 바라보며
신이 나오는 길을 알게 된다.
아기가 나오는 곳이
바로 신이 나오는 곳임을 깨닫고
문득 부끄러워 얼굴 붉힌다.
딸에게 뽀뽀를 하며
자신의 수염이 때로 독가시였음도 안다.
남자들은
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
비로소 자신 속에서 으르렁거리던 짐승과
화해한다.
아름다운 어른이 된다.

<문정희, 남자를 위하여>

철모르는 남자들이 자신 속의 짐승과 결별하고 아름다운 어른이 되길 바란다.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 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 바닥 썩는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흐르는 강은 슬픔을 위로하고 노동을 어루만졌다. 스스로 깊어가는 강에 삽을 씻으며 절망으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담배 한 대 피우며 흐르는 강으로부터 위안을 얻었다해도 고단한 삶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자연과 하나되면서 노동의 피로를 잊을 수 있었고 슬픔을 씻을 수 있었다.

이제 강은 아무도 위로해주지 못할 것이다. 수많은 삽과 포크레인이 강을 짓이길 것이며, 수십개의 댐은 강물을 가두어 버릴 것이다. 강변은 콘크리트로 뒤덮일 것이고, 그 위에 썰렁한 자전거 도로만이 덩그러니 놓여질 것이다. 강은 인간의 탐욕으로 그렇게 질식해 죽어갈 것이다. 강이 죽어갈수록 인간들의 병은 깊어질 것이다. 자연은 더 이상 인간을 위로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정희성의 <저문 강에 삽을 씻고> 같은 아름다운 시는 더 이상 불려지지 않을 것이다.

자연은 그들의 탐욕을 저주할 것이며, 나도 그들의 탐욕을 저주할 것이다.


출처 : “진짜 강변 걸어봐요, 4대강사업 하고픈가” – 오마이뉴스

이 아름다운 강변의 갈대를 어찌한단 말인가.

신종플루, 예방주사를 맞을 것인가

신종플루, 예방주사를 맞을 것인가

날씨가 추워지자 신종플루라고 불리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환자들이 늘고 있다. 신종플루로 죽은 사람들 숫자도 늘고 있는데, 미국의 경우에는 1000명이 넘었고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40명이 넘었다. 신종플루 바이러스는 다행히도 일반 계절성 독감 바이러스에 비하면 독성이 약해 보인다. 그리고 아직까지 또다른 변종 바이러스도 나타나지 않았다. 따라서, 신종플루에 대해 너무 과민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다. 신종플루에 걸린다 해도 99%의 사람들은 자신의 면역으로 나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신종플루의 치사율은 0.03% 정도다.

지난 주 미국의 권위있는 신문 New York Times도 사설을 통해 신종플루가 그리 걱정할만한 질병이 아님을 보도했다. 미국에서 1년에 계절성 독감으로 죽는 사람이 36,000명 정도임을 감안할 때, 신종플루의 독성은 약한 편이다. 대부분의 감기나 독감에는 약이 없다. 감기나 독감에 걸렸을 경우 몸을 잘 돌보고 추스려서 자기의 면역으로 나아야 한다. 신종플루에 대한 처방약으로 알려져 있는 타미플루도 사실은 조류독감 바이러스에 대비하여 만들어진 약이지 신종플루 바이러스와는 별 관련이 없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듯이 의약품도 순기능과 역기능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병에 걸렸을 때, 그 병을 치료하는 약을 먹으면 된다고 단순하게 생각하지만,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거의 모든 약은 부작용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부작용을 느끼지 못하거나 견딜만하다고 생각한다. 정작 문제는 여러 종류의 약을 동시에 복용하고 있는 경우다. 예를 들어, 혈압을 조절하기 위해 혈압약을 먹고, 당뇨 때문에 당뇨약을 먹는 사람들이 신종플루에 걸렸다고 타미플루를 복용한다고 가정해보자. 타미플루 자체의 부작용은 그리 심각하지 않을지 몰라도 다른 약들과의 교호작용이 발생했을 때, 그 위험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세상에는 수만 가지 약이 존재하고 그 약들간의 교호작용에 대해서 알려진 것이 극히 일부다.

타미플루는 신종플루 바이러스에 대비해 만들어진 약이 아닐 뿐더러, 그 약의 안전성 특히 다른 약들과의 교호작용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신종플루로 죽은 사람이 40명이 넘었지만, 그 중에는 정작 신종플루의 독성보다도 타미플루와 다른 약들의 교호작용으로 인한 부작용으로 죽은 사람들도 존재할 것이다. 신종플루 사망자 대부분이 고위험군이고, 고위험군 사람들은 적어도 몇 가지 약들을 평소에 복용해왔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 과학적인 연구가 진행되지 않는 한, 아무도 알 수 없다.

또 하나의 문제는 신종플루를 미리 예방하겠다고 개발된 백신이다. 특히 신종플루 백신은 급조된 경우라 그 안정성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제약회사들은 안정성 검사를 하기 위해 수백명의 사람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을 것이다. 그 실험 대상자들은 물론 건강한 사람들이다. 건강한 사람들은 대부분 큰 문제가 없다. 이런 사람들은 백신을 맞지 않아도 되고, 설령 신종플루에 걸렸다고 해도 쉽게 회복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문제는 고위험군에 속해 있는 어린이들, 임산부들, 노인들, 환자들이다. 최근 계절성 독감 백신을 맞고 죽은 사람이 7명이나 된다. 이런 일이 발생할 때마다 제약회사나 보건당국은 그저 우연으로 치부하고 만다. 과연 그럴까?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신종플루 백신을 맞겠다는 사람들은 30% 이하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유럽에서는 그 비율이 20% 이하로 떨어지고 있다. 신종플루의 위험이 그렇게 크지 않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고, 백신의 효과와 안정성이 확실하게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신을 맞고 안맞고는 사람들이 선택할 사항이다.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것을 국가가 강제하는 경우다.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벌써 그런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정말 우려할만한 사안이다. 신종플루 백신은 사람들에게 안도감을 주는 측면에서(플라시보 효과)는 의미가 있을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건강한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고위험군 사람들은 백신 접종에 신중해야 한다. 지난 6개월 동안 신종플루로 죽은 사람이 40명이지만, 최근 독감 예방 주사를 맞고 죽은 사람이 7명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말이다. 특히 계란에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들이 신종플루나 독감 백신을 맞으면 심각한 부작용이 올 수도 있다.

신종플루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손을 잘 씻고, 과로하지 않고, 사람이 많은 곳에 가지 않는 것이 좋다. 설령 신종플루에 걸렸다 하더라도 며칠 쉬면서 몸을 잘 추스르면 대부분은 나을 수 있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판결들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판결들

1. 며칠 전 헌법재판소는 미디어법에 대한 권한쟁의 청구 사건에 대해 절차상 위법이지만 법의 효력은 유효하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대리투표도 사실이고, 일사부재의 원칙도 위배했지만 법의 효력은 인정한단다. 헌법재판소는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대단한 사람들이다. 행정수도 심판에서는 관습헌법과 경국대전을 들먹였고, 종부세에 대해서는 취지는 인정하는척 하면서 무력화시켰다. 그리고 이번 미디어법에 대해서는 절차는 위법이지만 효력은 인정한단다. 그들의 상상력과 계급의식과 비열함에 경의를 표한다. 헌법재판관 중에서도 상식을 가진 이들이 있지만 그들은 역시 소수에 불과했다. 평생 법을 공부한 법의 전문가들이 내놓은 판결은 유치원생들의 상식에도 부합하지 못했다. 그 법관들은 유능했고, 명석했고, 상상력이 풍부했고, 거의 완벽에 가까웠지만, 단 한가지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 그들의 판결이 그들의 이름과 함께 역사에 남는다는 사실에 부끄러워 하지도 않았고, 두려워 하지도 않았다.

2. 용산 참사 피고인들에 대해 중형이 내려졌다. 그 피고인들의 가족과 이웃 5명은 용산에서 경찰의 진압 도중 불에 타 숨졌다. 물론 사건 발생 열 달이 지났는데도 장례조차 치루지 못했다. 그 피고인들은 피고인이기 전에 피해자였다. 그럼에도 검찰은 농성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기소했고 법원은 그들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검찰은 법원이 제출하라는 수사기록 3천 페이지조차 제출하지 않았지만, 법원은 검찰의 손을 들어주었다. 법원은 증거도 없이 추측에 근거하여 판결을 내렸다. 남편은 불에 타 숨졌고 아들은 징역을 살아야 하는 기구한 운명에 처한 여인이 오열했다. 법을 다루는 자들은 그 여인의 오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억울한 사람들의 피눈물을 모른척 했다. 법은 가진 자의 손을 들어 주어야 하는 것이 이 나라의 법이 되어버렸다.

3. 지만원이라는 사람은 영화배우 문근영의 기부 행위에 대해 “문근영 기부는 빨치산 선전용 심리전”이라는 말을 했다. 이 말에 대해 한 네티즌이 “지만원은 만원이라도 냈나”고 일갈하자 그 네티즌은 모욕죄로 고소되었고 법원은 그 네티즌에게 벌금형을 선고했다. 지만원의 인격이 소중하다면 문근영의 인격도 그에 못지 않게 소중하다는 것이 상식일 터인데, 법원은 지만원의 인격을 보호해 주었다. 물론 문근영은 지만원을 고소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만약 문근영이 지만원을 고소했다면 법원은 문근영의 인격을 지만원의 인격처럼 보호해 주었을까?

4. 판사에게 석궁을 쏘았다고 알려진 김명호 전 교수는 대법원에서 4년형을 선고받았다. 물론 그가 진짜 판사에게 석궁을 쏘았는지는 김명호 교수와 그 판사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김명호 전 교수는 최근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했으나 역시 패소했다. 정직에 대한 댓가를 처절하게 치른 그가 이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는 아직도 법에, 법원에, 판사에게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수학자이기에 그의 논리로 법에 도전했지만, 이 땅의 법은 논리가 통하는 법이 아니었다. 절차가 위법인데도 그 효력을 인정해주는 법원에 논리를 들이댄다면, 그 논리를 들이대는 사람만 바보가 되어버린다.

유사 이래 법은 단 한 번도 만인 앞에 평등하지 않았다. 법은 가진 자의 편이었고, 권력의 편이었다. 불쌍하고 억울한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기 보다는 그들의 눈에서 피눈물이 나도록 만들었다. 이것이 법에 대한 나의 기대이고, 법은 여간해서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아직도 한나라당을 지지한다는 그대에게

아직도 한나라당을 지지한다는 그대에게

그대가 소위 강부자, 고소영이라는 대한민국 1% 기득권층이라면 이 글을 그냥 못본척 하시라. 그대는 한나라당을 지지할 자격이 있다. 한나라당은 그대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기 위해 오늘도 불철주야 열심히 뛰고 있지 않은가. 그대가 1% 강부자는 아니지만, 1% 강부자가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 글을 읽지 마시라. 이 글은 그대의 욕망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글이기에 그대는 시간만 낭비할 뿐이다. 그대가 친일과 군부독재에 빌붙었던 사람이라면 이 글을 그냥 지나치시라. 이 글은 그대의 건강에 지극히 이롭지 못한 글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강부자도 아니고 친일과 독재에 빌붙지도 않았는데, 아직도 심정적으로 한나라당을 지지하거나 이번 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을 찍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이 글을 읽어 보시라. 그대가 쌀값 폭락에 울분을 터뜨리는 농민이면서 한나라당을 지지한다면, 그대가 언제 짤릴지 모르는 비정규직 노동자이면서 한나라당을 지지한다면, 그대가 취직난을 겪는 20대이면서 한나라당을 지지한다면 그대는 다시 한 번 그대가 지금 어디 서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대가 쌀값 폭락에 울상 지으며 논을 갈아엎는 농민이라면 그대는 한나라당을 지지해서는 안된다. 아무리 논을 수십 마지기 갈아엎어도 그대가 계속 한나라당을 찍는다면 그대의 삶은 결코 나아질 수가 없다. 한나라당은 그대 같은 농부를 위한 정당이 아니기 때문이다. 논을 수십 번 갈아엎는 것보다도 투표 한 번 제대로 하는 것이 훨씬 현명한 일이다. 고향 사람이라고 찍어주고, 지역감정 때문에 찍어주는 어리석음을 이제 떨쳐버려야 한다. 현명한 투표가 그대와 그대의 자식들을 위해 몇 백배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대가 하루하루 품팔이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라면 그대는 한나라당을 지지해서는 안된다. 그대는 조중동과 한나라당이 비정규직법을 두고 어떤 거짓말을 했는지 알아야 한다. 그들은 결코 당신들 편이 아니다. 그들은 재벌과 대기업을 옹호하지 결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대변하지 않는다. 이런 사실을 모른다면 그대는 어리석은 사람이고, 알고도 한나라당을 지지한다면 더이상 그대의 정규직화를 바라지 말라. 그대는 몸만 비정규직 노동자이지 마음은 이미 강부자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취업을 걱정하는 20대라면 그대는 한나라당을 지지해서는 안된다.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권이 늘린 것은 청년 인턴이라는 이름의 6개월 알바자리였다. 정규직 대졸 초임은 30%까지 깎였고, 그나마 그런 일자리조차 거의 사라지고 있다. 그대가 그런 정당에게 아직도 일말을 기대를 걸고 있다면 그대는 어리석거나 순진하다. 정치적으로 각성되어 있지 않는 20대에게 정치인들은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이것은 몇 안되는 진리 중 하나이다. 20대가 끊임없이 싸워나가지 않으면 20대를 위한 나라는 없다. 무관심하지 마라. 무관심은 20대에게 가장 치명적인 독이다. 20대가 깨어있음을 온몸으로 선언하라.

그대가 진정 자식들의 교육과 앞날을 걱정하는 중년의 가장이라면 그대는 한나라당을 지지해서는 안된다. 지금 이 나라의 교육을 보라. 학교 끝나고 매일 학원에서 10시 11시까지 공부하는 불쌍한 그대의 아들 딸들을 보라. 이것이 과연 정상적인 교육이라고 생각하는가? 이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대는 한나라당을 지지할 자격이 있다. 한나라당이 원하는 세상은 강자만이 살아남는 정글이다. 이런 정글에서 그대의 아들 딸이 살아남기를 바라는가? 그대가 강부자가 아닌데, 그대의 자식들이 과연 이런 무한경쟁에서 생존할 수 있을까? 그대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 아니라면 그대는 한나라당을 지지해서는 안된다.

이제 보궐선거가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여전히 모른 척하고 무관심할 것인가? 투표를 안해도 상관없다고 할 작정인가? 투표조차 안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대는 강부자가 아니면서 왜 한나라당을 지지하는가? 강부자가 되고 싶은가? 정상적으로 살면서 강부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것이 아니라면 그대는 친일과 독재에 심정적으로 동의하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그대는 한나라당을 지지할 이유도 명분도 없다.

한나라당 정권 하에서 지난 2년간 배운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그대의 암울한 삶은 지속될 것이고, 그 절망은 그대들의 자식들과 손자들에게 이어질 것이다. 한나라당은 아무나 지지할 수 있는 그런 정당이 아니다.

새벽 강을 보러 가다

새벽 강을 보러 가다

정태춘의 노래처럼, 우울한 나날들이 우리 곁을 아주 오래도록 머무르고 맴돌아 나는 새벽 강을 보러 떠났다. 강은 아무 말없이 흐르지 않는 듯 흘렀고, 새벽 강에서는 물안개가 천천히 피어올랐다. 그 안갯속에서 가을은 점점 깊어졌다. 한여름 푸르름에 지쳤던 나뭇잎들은 저마다 다른 색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안개는 산과 강을 구별하지 않았고, 나무와 사람을 나누지 않았다. 일찍 일어난 새 두어 마리만이 안갯속을 헤치며 날고 있었다.

강은 소리 없이 안갯속으로 흘렀다. 흐르고 흘러 그 강물은 낯선 서울에 닿을 것이며, 그곳에서 욕망의 찌꺼기들과 맞닥뜨릴 것이다. 안개는 그렇게 흘러가는 강물을 조용히 배웅하고 있었다. 그 강은 억겁의 세월을 소리 없이 흘렀고, 새벽마다 안개는 어김없이 피어올랐다. 무엇을 바라지도 않았고, 무엇을 이루고자 하지도 않았다.

정태춘은 더 이상 노래하지 않는단다. 한때 그는 그의 노래로 세상을 위로하고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자 했다. 사실 모든 것이 부질없었다. 욕망으로 충만한 세상은 새벽 강과 같은 그의 노래를 반기지 않았다. 그는 순수했고 담백했지만 그의 노래로 세상의 탐욕을 정화할 수 없었다. 원래 탐욕이란 그런 것이다.

그가 더 이상 노래하지 않는다 해도 그의 노래는 영원히 내 가슴에 남았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고요한 새벽 강에 가면 나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그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세상의 그 어떤 음악도 그의 <북한강에서>처럼 새벽 강을 가슴 절절히 노래하지는 못할 것이다.

세상의 욕망에 아랑곳하지 않고 강은 흐르고 흐를 것이다. 새벽마다 그 강은 안개를 피워 올리고 정태춘의 노래는 그 안개 사이로 은은히 떠오를 것이다. 위로하려 하지 말고 바꾸려고 하지 말라. 강의 일부가 되어 떠오르고 가라앉다가 그저 그렇게 흘러 가리라. 그리고 욕망이 다하지 않는 한 우울한 삶은 그렇게 지속되리라.

저 어두운 밤하늘에 가득 덮인 먹구름이
밤새 당신 머리를 짓누르고 간 아침
나는 여기 멀리 해가 뜨는 새벽 강에
홀로 나와 그 찬물에 얼굴을 씻고

서울이라는 아주 낯선 이름과
또 당신 이름과 그 텅 빈 거리를 생각하오.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가득 피어나오.

짙은 안갯속으로 새벽 강은 흐르고
나는 그 강물에 여윈 내 손을 담그고
산과 산들이 얘기하는 나무와 새들이 얘기하는
그 신비한 소리를 들으려 했소.

강물 속으로는 또 강물이 흐르고
내 맘 속엔 또 내가 서로 부딪히며 흘러가고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또 가득 흘러가오.

아주 우울한 나날들이 우리 곁에 오래 머물 때
우리 이젠 새벽 강을 보러 떠나요.
과거로 되돌아가듯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 처음처럼 신선한 새벽이 있소.

흘러가도 또 오는 시간과
언제나 새로운 그 강물에 발을 담그면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천천히 걷힐 거요.

흘러가도 또 오는 시간과
언제나 새로운 그 강물에 발을 담그면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천천히 걷힐 거요.

<정태춘, 북한강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