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언론 사기, 암 완치율이 절반 가까이 된다?

또 하나의 언론 사기, 암 완치율이 절반 가까이 된다?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우리나라 암 진단과 생존율을 보도하면서 우리나라 언론들은 또 제목 장사를 했다. 언론들의 왜곡과 사기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건강 문제를 가지고 이렇게 장난하는 이 나라의 언론들이 국민 건강에 끼치는 해악은 정말 치명적인 것이다.

연합뉴스 이주영 기자는 복지부의 암 발생률과 생존율 발표를 보도하면서 암 완치율이 절반 가까이 된다고 보도했다.

암 환자 절반 정도는 완치 = 1993~2002년 암 발생자의 5년 생존율은 44.5%로 나타났다. 이를 전후반으로 나눠 생존율을 계산하면 후반기(1998~2002년) 생존율이 46.3%로 전반기(1993~1997년)보다 4.6%포인트가 높다.

암 환자 5년 생존율은 암 치료에서 통상적으로 완치 기준으로 통한다. 5년 생존율 46.3%는 암에 걸린 사람이 100명이라면 이 가운데 46명이 이상이 완치된다는 뜻이다.

<암 걸릴 확률 4명중 1명…절반 가까이 완치, 연합뉴스>

암의 완치율이 절반 가까이 된다면 이건 정말 기뻐해야 할 일이고, 암이 더 이상 불치병이나 난치병이 아니라는 얘기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암은 여전히 우리나라 사망원인의 으뜸을 차지하고 있고, 암에 대한 획기적인 치료법이 나온 것도 아닌 현실에서 이 기사를 쓴 기자는 전형적인 제목 장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기사에서 얘기하는 완치율은 5년 생존율을 말한다. 암에 대해 치료 받은 후 5년 동안 살 수 있는 사람이 100명 중 46명이라는 얘기다. 그 5년 이상을 살아 남은 사람 중 5년 6개월 또는 6년, 7년 만에 재발되거나 치료되지 않은 암때문에 죽는 사람이 꽤 될 것이다. 그렇다면 5년 이후에 암 때문에 죽은 사람들은 암이 완치된 것인가 아닌가.

완치라고 하면 암이 완전히 나은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기자의 표현대로 의료계에서 5년 생존율을 통상적으로 완치율이라 한다면 이것은 현대 의학이 암을 완치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내가 아는 현대 의학의 패러다임으로는 암을 완치하기가 정말 힘들다. 증상에 대처하는 대증요법을 근간으로 하는 현대 의학에서 눈에 보이는 암세포를 수술이나 약물로 일시적으로 제거하거나 억눌러 놓았다고 해서 암이 완치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현대 의학의 치료법은 엄청난 부작용을 수반하고 있다. (더 자세한 것은 현대의학은 암을 고칠 수 있는가를 참조하시길)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암을 조기 발견, 치료하면 완치율이 높아진다”는 말이다. 5년 생존율을 완치율이라 정의했을 때, 이 말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말이다. 암 진단을 받았다고 해서 환자가 금방 사망하는 것이 아니다. 진단과 치료부터 사망까지는 일정한 시간이 걸린다. 췌장암 같은 경우를 제외하고, 일반적인 위암이나 유방암 같은 경우 조기에 발견하면 5년간 생존할 확률은 치료를 받건 안 받건 높아질 수 밖에 없다. 당연히 말기에 발견하게 되면 치료를 받건 안 받건 5년을 살기가 힘들어진다.

현대 의학의 암치료가 5년 생존율을 높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주위에서 수술이나 항암요법의 부작용으로 정말 고통받으면서 사는 사람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과연 이 치료법이 암환자들에게 도움이 되는지 되묻고 싶은 경우도 많다.

이주영 기자가 환자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 암 완치율이 절반 가까이나 된다고 보도했을지도 모르지만, 언론의 정도는 사실을 정확하게 보도하는 것이다. 지난 번 조류 독감 보도 때도 그랬지만, 언론의 무책임한 기사가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지 그 해악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런 식이라면 우리나라 언론의 왜곡, 과장 보도로 스트레스를 받아 암에 걸릴 수도 있지 않을까.

이랜드의 교훈, 예수를 팔면 망한다

이랜드의 교훈, 예수를 팔면 망한다

예수를 팔아 돈을 번 건 비단 가롯 유다 뿐만이 아니다. 지금도 이 땅 한반도에는 예수를 팔아 장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이랜드라 할 것이다. 독실한 기독교 기업이라고 알려진 이랜드는 회사 내에 기도실까지 설치하여 이익 6%를 달성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1년에 헌금만 130 여억원을 낸다고 한다. 겉으로는 정말 신앙으로 똘똘 뭉친 독실한 기독교 기업으로 보일지 몰라도 이 회사는 예수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거스르고 있다.

이랜드는 비정규직법의 헛점을 이용하여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용역직으로 전환하여 비정규직을 확산하려 했다. 당연히 노조의 반발을 불러왔고 파업으로 이어졌으며 사태는 이랜드 상품 불매 운동으로까지 전개됐다. 공권력의 투입으로 노사의 대립은 파행으로 끝이 났다.

자본주의 원리로 따지더라도 이랜드는 정말 멍청한 짓을 한 것이다. 인건비를 줄이겠다고 직원들를 용역으로 전환하려 했지만, 이 사태로 인해 이랜드가 입은 피해는 줄이고자했던 비용의 몇 배가 될 것이다. 소탐대실이다. 점거 농성은 공권력으로 일단락되었지만 이랜드가 입은 이미지 손상은 되돌리기 힘들어 보인다. 노조의 반발과 소비자들의 불매운동도 계속될 것이다. 당장 민주노총이 이랜드 사업장 전체를 점거하겠다고 벼르고 있지 않은가.

이랜드 경영진에게 묻는다. 정말 어느 쪽이 더 이익인가? 인건비가 더 들어가더라도 노조와 화합하여 회사의 직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키고 회사의 이미지를 높이는 것이 더 회사에 이익인가 아니면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직원들을 용역직으로 전환하고, 노조의 반발을 불러 점거농성 하게 하고, 파업하게 하고, 공권력 불러 들여 진압하게 하고, 소비자들로 하여금 불매운동을 하게 하는 것이 이익인가? 어느 쪽이 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인가? 머리가 있으면 이 단순한 계산을 1분만 해 보길 바란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연행된 파업 참가자들을 다 석방하고 노조와 마주 앉아 합리적으로 협상하라. 할 수 있으면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시켜라. 당장의 이익만을 생각하지 말고 조금만 멀리 보라. 예수를 믿는 기업이니 예수가 어떻게 살았는지 조금만 묵상해 보라.

가롯 유다는 예수를 팔아 은전 30냥을 벌었지만, 그 돈을 써 보지도 못하고 자살한다. 이랜드도 지금 이런 식의 경영이라면 헌금 한 푼 낼 수 없는 처지에 몰릴지도 모른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닮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고, 예수처럼 살기 위해 힘쓰는 것이다.

예수는 위선자들을 축복하지 않는다. 예수를 팔면 기필코 망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신문들이 망할 수 밖에 없는 이유

우리나라 신문들이 망할 수 밖에 없는 이유

한겨레신문 홍대선 기자의 ‘쫓기고 밀리고’ 자동차 산업 길을 잃다 라는 기사는 우리나라 기자들이 어떻게 독자들을 우롱하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라 하겠다. 이 기사는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이 쫓아오는 중국과 앞서가는 일본 사이에 끼여서 정말 어려워지고 있다는 내용이다. 물론 중국은 우리보다 기술 수준이 쳐져 있으니 우리를 쫓아오는 것은 사실이고, 일본은 우리보다 앞서 있으니 우리가 그들 사이에 끼여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홍대선 기자는 정말 어처구니 없는 자료로 자신의 주장을 침소봉대하고 있다. 그가 제시한 그림을 한 번 보자.

출처: 한겨레신문

이 그래프를 언뜻 보면 일본과 중국으로의 수출이 최근 들어 급격히 감소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그래프는 눈속임이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의 데이터는 년간 수출액수이고 2007년은 1월부터 4월까지의 수출 액수이기 때문이다 (그림에는 2004년 1월~4월로 되어 있지만 이것은 2007년을 잘못 쓴 것으로 보인다).

그래프를 정확히 그리려면 2007년 평균 예상치로 이 액수에다가 3배를 해 줘야 한다. 그러면 2007년말의 년간 대중국 자동차 수출액은 8.1억 달러는 전년도 6억 달러보다 엄청난 증가를 하게 된다. 대일본 수출도 6.3억 달러로 전년도 4.7억 달러보다도 훨씬 증가한 것으로 나타난다. 부품 수출 또한 마찬가지다.

기자가 제시한 자료는 오히려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이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여 있지만 예상보다는 훨씬 선전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자료는 기자의 주장과는 정반대의 얘기를 해주고 있다.

홍대선 기자의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을 걱정하는 마음은 갸륵하다 할 수 있지만 이런 식으로 독자들을 호도하면 안된다. 이 기사는 지금도 한겨레신문 사이트 첫 헤드라인으로 걸려 있다.

한겨레신문은 제일 믿을만한 신문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신뢰도 1위의 신문조차 이런 식의 데이터 조작으로 독자들을 우롱한다면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보다 100배 먼저 시장에서 퇴출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은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지만, 적어도 세계 시장에서 어느 정도의 평가는 받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언론은 어떤가? 이 질문이 쑥쓰러울 정도로 다른 나라의 언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저질이다. 그러면서 기자들은 블로그를 까고 있다. 정말 어처구니 없지 않은가.

우리나라 신문들이 이런 식이라면 멀지 않아 신문들은 문을 닫을 수 밖에 없다. 경쟁력도 없을 뿐더러 왜곡과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 신문은 더 이상 언론이라 할 수 없다. 그 자리를 블로그들이 대체할 것이다.

보도준칙까지 만든 한겨레는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있다. 다른 신문들이야 더 말해야 무엇하랴.

블로그코리아 유감

블로그코리아 유감

원조 메타 블로그 사이트인 블로그코리아가 다시 돌아왔다. 최근 올블로그가 거의 독점하다시피 한 우리나라의 메타 블로그 시장에 원조의 복귀는 여러 의미를 가진다. 우리나라 블로그 역사의 복원이라는 측면에서도 좋은 일이지만, 차별화된 서비스로 올블로그와 경쟁한다면 또다른 소통 채널로 많은 블로거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공개된 블로그코리아는 적어도 나에게는 실망감을 안겨 주었다. 나는 Firefox를 브라우저로 사용하고 있는데 블로그코리아는 Firefox를 지원하지 않고 있다. 레이아웃이 깨지는 것은 둘째치고라도 로그인조차 되지 않고, 회원가입 화면은 아예 뜨지도 않는다. IE에서는 이런 기능들이 정상적으로 작동되는데 Firefox에서는 되지 않는다. (Opera나 Safari에서는 아직 테스트해 보지 않았다.)

궁금한 것은 블로그코리아가 웹표준을 지켜 다른 브라우저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사이트를 제공할 계획이 있느냐는 것이다. 지금은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향후에도 계속 이런 식이라면 적어도 나는 블로그코리아를 올블로그처럼 이용하지는 않을 것 같다. 블로그코리아를 들어가기 위해 IE를 수고스럽게 사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시간이 촉박하더라도 제대로 테스트를 하고 공개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것은 비단 블로그코리아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니다. 프로젝트를 수행할 때 아직까지도 테스트에 크게 신경쓰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시간과 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처음부터 프로젝트 수행 계획을 세울 때, 테스트의 중요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블로그코리아 같은 경우 많은 블로거들을 베타테스터로 활용할 수 있었을텐데 이런 모습으로 공개된 것은 참으로 아쉽다. 물론 블로그코리아가 IE 이외의 다른 브라우저 사용자들은 신경쓰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면 할 수 없지만 말이다.

블로그코리아가 올블로그와의 경쟁과 협력을 통해 우리나라 블로거들의 보다 나은 소통에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웹표준을 제대로 지켜 Firefox나 그 밖에 다른 브라우저에서도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사이트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블로그코리아의 발전을 기원한다.

예수는 조갑제를 용서할까

예수는 조갑제를 용서할까

전직 월간조선 사장이었던 극우 언론인 조갑제가 예수를 들먹이면서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도덕적이라고 설교했다. 예수가 한반도로 건너와 정말 고생 많이 하신다. 위대한 시장경제론자가 되어야 하고, 이랜드의 매출과 이익도 올려줘야 하고, 사학법도 막아줘야 하고, 초대형 교회 부흥도 시켜야 하고, 서울도 봉헌받아야 하고.

백만 보 양보해서 조갑제의 말대로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더 도덕적”이라 하자. 그렇다면 예수는 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을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정으로 말한다.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어렵다.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매우 놀라서 물었습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마태복음 19:23-25>

조갑제의 말대로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더 도덕적인데, 예수는 그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천국은 아무도 없는 텅빈 공간이란 말인가. 우리나라의 부자 낙타들 중 과연 천국의 바늘 구멍을 통과할 자가 누구란 말인가, 갑제씨.

조갑제의 의해 위대한 시장경제론자가 된 예수도 조갑제의 논리에 의하면 부도덕한 이가 되어 버렸다. 부자를 축복하지는 못할 망정 거의 저주에 가까운 말을 해 버린 예수는 조갑제 식으로 얘기하면 부도덕의 극치가 된 것이다. 어떤가? 자기모순 아닌가? 이명박을 구하기 위해 진정 이렇게 예수까지 팔아야 한단 말인가, 갑제씨?

내가 아는 한, 제대로 된 그 어떤 종교도 부자가 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예수도 부처도 부자를 축복하지 않았다.

사랑의 상징 예수가 과연 조갑제를 용서할 것인가? 나는 다만 그것이 궁금할 뿐이다.

왜 신정아만 문제인가

왜 신정아만 문제인가

광주 비엔날레 감독을 맡은 동국대 신정아 교수의 학력이 위조되었다 한다. 박사 학위 뿐만 아니고 석사 학사까지 위조라고 하니 그 여인 또한 보통 사람은 아닌 듯 하다. 불을 찾아 헤매는 불나비처럼 오로지 출세라는 허명을 붙잡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은 젊은 여인이 측은하기까지 하다. 이 여인은 분명 사기를 쳤고, 그에 대한 대가를 치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누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지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우리 사회의 도덕의 잣대는 이 여인의 사기를 재단할 수 있을 정도로 과연 얼마나 반듯하단 말인가?

한나라당의 어떤 대선 주자는 위장전입 문제가 제기되자 정권 차원을 음모라며 개거품을 물다가 슬그머니 인정하고 말았다. 자식 교육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다라고, 양해바란다고. 대다수 쓰레기 언론들은 이 자의 거짓과 위선을 지키기에 급급하다.

더구나 이 자는 위장전입 뿐만 아니라, 부동산 투기, 재산 은닉, 위증 교사, 주가 조작 등 헤아릴 수 없는 범죄 의혹을 받고 있는 자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인간이 검증을 회피하기 위해 “윤리 교사를 뽑는 것이 아니다”라는 망발을 일삼는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이런 인간을 눈감아 주는 사회가 왜 유독 신정아만 문제를 삼는가. 광주 비엔날레 감독이 되기 위해 꼭 박사 학위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적어도 신정아는 자신의 의혹을 까발린 측에 대해 정권 차원을 음모라며 검찰에 고발하는 적반하장을 일삼진 않았다. 신정아가 비도덕적이긴 해도 누구처럼 나라와 국민을 대표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진 않았다.

신정아가 문제라면 왜 그보다 한 십만 배쯤 더 문제가 있는 이명박은 괜찮은가? 유영철은 연쇄살인범으로 죽어서 죄값을 치루어야 할 인간이지만 왜 그보다 한 오만 배쯤 더 죄값을 치루어야 할 전두환은 괜찮은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어서? 한나라당이면 모든 것이 용서되기 때문에?

우리는 도대체 우리의 아이들에게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대통령은 윤리 교사가 아니기 때문에 부동산 투기를 해도 괜찮고, 주가 조작을 해도 괜찮고, 재산 은닉을 해도 괜찮고, 위증을 교사해도 괜찮고, 위장 전입을 해도 괜찮지만, 다만 고졸 대통령은 안된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잘 살게만 해주면 된다고? 이명박이 과연 국민들을 잘 살게 할 수 있을까? 경부운하 운운하는 삽질 경제로? 아마 종부세를 내는 2% 계층의 사람들은 더 잘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신정아를 욕하라. 그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하지만 그 여인에게 들이댄 잣대 그대로 이명박 같은 자를 재단하라. 그러면 신정아도 억울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 이랜드의 예수는 나의 예수와 다른가

왜 이랜드의 예수는 나의 예수와 다른가

이랜드라는 기독교를 신봉하는 기업이 비정규직 노동자를 대량해고했고, 해고된 노동자들은 그에 맞서 점거 농성을 벌이고 있다.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말인데, 도대체 그들이 믿는 예수는 어떤 예수란 말인가. 이랜드는 이익 6%를 이룰 수 있도록 기도한다고 한다. 정말 예수는 그들의 기도에 응답할까.

내가 알고 있는 예수는 부자가 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는 예수는 언제나 약자 편에 섰고, 그들의 병을 고쳐 주었고, 그들의 아픔을 달래 주었으며,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세상에는 내가 알고 예수 이외에 또 다른 예수가 있나 보다.

그 또 다른 예수는 가진 자 편에서 물질의 축복을 내리며, 부자는 더 부자가 되게 하고,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하게 만드는 그런 예수인가 보다. 그 또 다른 예수는 비정규직은 아무 때나 해고하고 그들의 눈에서 피눈물이 나게 만드는 그런 예수인가 보다. 그 또 다른 예수는 이랜드의 예수이고, 초대형 교회 목사들의 예수이고, 사립학교 이사장들의 예수이고, 한기총의 예수이고, 재벌들의 예수이고, 서울을 봉헌하겠다던 이명박의 예수인가 보다.

팔레스타인 그 척박한 땅에서 2000년 전에 태어나 세상을 바꾸고 하나님의 나라 지상낙원을 이루고자 했던 그 예수가 2000년이 지난 지금 이 땅 한반도 서울에서 그 또 다른 예수로 변신한 것인가. 천박한 자본주의를 비호하고 축복하는 예수로 전락한 것인가.

이랜드여! 당신들이 돈을 버는 것은 좋은데 제발 예수를 팔지 말라. 자본의 논리로 비정규직을 해고하더라도 예수를 들먹이지 말라. 당신들은 위선자들이고 독사의 자식들이다. 이것이 당신들의 기도에 대한 내가 아는 예수의 응답이다.

더 이상 나의 예수를 욕되게 하지 말라.

비올 때 듣고 싶은 노래

비올 때 듣고 싶은 노래

간밤에 빗소리가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빗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했으나 감당하기 힘들어 결국 창문을 닫고 말았다. 빗소리는 나를 어머니의 자궁으로 데려간다. 아늑하고 아련하게. Rare Bird의 Sympathy는 이럴 때 듣고 싶은 노래다.

Now when you climb, into your bed tonight.
And when you lock and bolt the door.
Just think of those, out in the cold and dark,
’cause there’s not enough love to go ’round.

And sympathy is what we need my friend,
and sympathy is what we need.
And sympathy is what we need my friend,
’cause there’s not enough love to go ’round,
no there’s not enough love to go ’round.

Now half the world, hates the other half.
And half the world, has all the food.
And half the world, lies down and cries: “We starve”,
’cause there’s not enough love to go ’round.

And sympathy is what we need my friend,
and sympathy is what we need.
And sympathy is what we need my friend,
’cause there’s not enough love to go ’round,
no there’s not enough love to go ’round.

<Rare Bird, Sympathy>

우리 주위에 사랑은 정말 충분하지 않은 것인가. 비와 참 잘 어울리는 음악이지만 가사는 뼈아프다. 이 비를 맞으며 어딘가 배고픔에 웅크리고 있을 이웃이 있다. 정말 우리에게는 그들에게 나눌어 줄 사랑이 충분하지 않은 것일까.

사랑에 대해 알고 싶으면

사랑에 대해 알고 싶으면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사람과 세상을 행복하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사랑이다. 단정적으로 말하지만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신약 성경 고린도전서를 펼쳐보면 사도 바울이 사랑에 대해 적어 놓은 구절이 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동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쉽게 성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소망하며, 모든 것을 견뎌 냅니다. [고린도전서 13:4-7]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이 구절을 읽으면 된다. 그리고 행하면 된다. 이 구절만큼 명확하게 사랑을 정의한 것을 보지 못했다. 진리는 수천년 전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명백히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너무도 단순하지만, 이 단순한 진리를 행하기는 쉽지 않다.
딸과 헤어지는 것은

딸과 헤어지는 것은

공항에서 딸아이는 연신 팔을 쳐들었다. 안아달라는 얘기다. 이제 만 여섯을 훌쩍 넘긴 아이는 앞니가 빠지고 새 이가 나기 시작했다. 키도 제법 크고 몸무게도 늘어나 옛날 아기 때처럼 안고 업고 하기엔 좀 버거웠다.

아빠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아이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이제 아빠 가면 심심해서 어떡해? 엉~ 엉~ 엉.” 공항까지 웃고 까불면서 따라온 아이의 가슴 속에는 그리움과 허전함이 공존했던 것이다. 그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이 아빠의 무심함이 부끄러웠다.

딸아이의 울음에 나도 눈물이 핑 돌았다. 피로 연결된다는 것은 이런 것인가. 나의 분신인 딸아이의 가슴에 나의 부재로 인한 허전함이 사무쳤다. 아이는 내일이면 또 이 순간의 그리움을 잊을 것이다. 그렇다해도 내 가슴은 미어졌다.

나는 딸아이에게 몇 가지를 얘기했다. 건강할 것, 친구들하고 재미있게 놀 것, 엄마 말씀 잘 들을 것 등등. 딸은 훌쩍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딸아이의 건강이 좋지 않았을 때, 나는 하루 24시간 딸과 같이 있었다. 그때 나는 미리 알았다. 내 인생에서 딸과 가장 오랜동안 같이 보낼 시간이라는 것을. 이것은 신이 나에게 준 선물이라는 것을.

이제는 딸아이와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 1년에 고작 두어달 정도. 아이가 커서 사춘기가 되면 같이 살더라도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을 것이다. 아이가 자라면 부모 곁을 떠나는 것이 자연스런 일이지만, 막상 나는 그 순간을 견디기 어려울 것 같다.

딸아이가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게 되는 날, 나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것 같다. 지금은 나의 부재에 대해 딸아이가 울지만, 그날에는 딸아이의 부재에 대해 내가 울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딸아이는 엄마 품에 안겨 울면서 공항을 떠났고, 나는 비행기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