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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th: March 2009

신에 대한 가장 진보된 정의

신에 대한 가장 진보된 정의

미리내 님이 권해주신 “내 안의 참나를 만나다(Discovery of the Presence of God)”를 읽었다.

사람의 언어로 형언할 수 없는 경지가 기록되어 있었는데, 의식 수준이 낮은 나의 처지에서 그런 내용들은 이해는 고사하고 범접하기조차 쉽지 않았다. 데이비드 호킨스(David Hawkins)는 이 책을 통해 그동안 내가 품고 있던 신과 영혼과 종교와 인간에 대한 다양한 의문들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깨달음을 찾아 구도의 길을 떠나는 수많은 영혼들이 왜 가치있는지, 의식의 진화와 성장 단계가 무엇인지, 궁극으로 도달하려고 하는 지향이 무엇인지, 왜 성인들은 용서와 사랑을 한결같이 강조했는지 이 책은 주관적 경험과 객관적 사실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특히, 신의 본성을 설명해 놓은 부분은 그동안 내가 그 어떤 종교에서도 접할 수 없었던, 가장 진보된 것이었다.

  1. 신성(Divinity)은 비선형적이고 불편부당하고 시비분별이 없으며, 편파성과 취사선택하는 편애를 넘어서 있다.
  2. 신성은 변덕스럽거나 분별하지 않으며, 추정적인 인간 감정들의 한계에 종속되지 않는다. 신성한 사랑은 태양과 마찬가지로 무조건적이다. 한계는 에고의 귀결이다.
  3. 신의 정의는 신성의 전능과 전지의 자동적 귀결이다. 신은 ‘행’하거나, ‘작용’하거나, ‘원인’이 되지 않고 그저 ‘있을’ 뿐이다. 신성의 성질은 무한한 힘의 장으로서 방사되는데, 그 무한한 힘의 장에 의해 존재하는 전부는 있는, 그리고 되어 있는 ‘것’에 따라 자동적으로 정렬된다. 각각의 영혼/영은 이렇듯 고유한 운명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수준을 향해 끌려가는데, 그것은 마치 바다 속의 코르크나 전자기장 속의 쇳가루의 움직임과 같다.
  4. 신성은 낮은 힘을 훨씬 넘어서 있는 무한한 힘의 고유한 성질로 말미암아 절대적 지배권이다. 낮은 힘은 위치성과 통제의 도구이며 유한하다. 힘은 무한한 세기를 갖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힘을 구할 필요가 없는 신성한 참나로서의 힘의 근원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5. 신성의 막강함과 전적인 현존 내에서, 존재하는 전부는 스스로를 정렬시킨다. 이 조정은 영적 선택의 귀결이다. 자유는 신성한 정의에 고유하다.
  6. 의식의 무한한 장으로 표현된 신성의 전지와 전능은, 실상을 가능성의 전 단계에 걸쳐 확인해 주는 의식 연구 측정 기법으로 확인할 수 있다. 모든 생각, 행위, 결정이 시간과 장소 너머에 있는 의식의 무한한 장에 각인된다. 이 각인에 의해, 정의가 보증된다.

<데이비드 호킨스, 내 안의 참나를 만나다, pp. 152-153>

겸손한 삶, 내맡기는 삶, 그리고 사랑으로 충만한 삶, 결국 인류 역사상 모든 성인들과 스승들이 한결같이 가르쳤던 내용들이 진리였던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에게는 새로운 화두가 생겼는데, 그것은 환상으로 명명된 이 차원에서의 삶이 너무 허무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비로소 성철 스님의 법문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도 같았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려고 오셨습니다.

나에게 소중한 블로그들

나에게 소중한 블로그들

불가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한다. 하늘에 별같이 수많은 블로그들 중 어떤 인연에 의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다가온 블로그들이 있다.  나는 그 블로그들을 통해 또다른 세상과 세상을 바라보는 또다른 시각을 배웠다. 그들의 긍정적인 에너지들이 내게 전해졌으며, 나는 그들을 알기 전보다 조금은 더 성장할 수 있었다. 그들과의 인연을 늘 감사한다.

  • 일체유심조: 미리내 님의 초대를 받게 된 것은 나에게는 더없는 영광이자 행운이었다. 그의 블로그를 통해서 알게된 마음 공부와 의식의 성장은 내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될 것 같지만, 아직은 내 수준이 일천하여 많은 것을 이해하거나 깨닫지 못한다.
  • SoandSo.net: 소소한 일상 속에 번득이는 촌철살인이 배어있는 블로그다. 일상의 평범한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는 깨닫게 해주는 블로그일 뿐더러, 그 단순한 디자인이 나를 사로잡았다.
  • 도아의 세상사는 이야기: (도아 님이 들으시면 기분나쁘실지는 모르겠지만) 블로그계에서 나와 가장 비슷한 시각을 가진 블로거를 꼽으라면 현재까지는 도아 님인 것 같다. (이것이 칭찬인지, 욕인지는 나도 헷갈린다.) 나와 비슷한 연배에, 비슷한 청년기를 거치고, 지금도 비슷한 의식을 지니신 듯한 도아 님의 블로그는 늘 유쾌함과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 민노씨.네: 블로거 중에 민노씨 님을 모르면 간첩일 정도로 유명한 분이다. 내가 아는 블로거 중 가장 에너지가 충만한 분이 아닐까 한다. 내가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피울 양이면, 언제나 나를 흔들어 깨운다. 민노씨 님이 없는 블로그계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다.
  • 아거: 지금은 심원의 고요 속에 칩거하고 계신 아거 님. 사실 아거 님은 나를 잘 모를 것이다. 내가 아거 님 블로그를 처음 찾은 것은 내가 블로그를 시작하기 훨씬 전의 일이다. 블로그에 관심은 있었지만 삶에 여유가 없어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시절, 아거 님의 블로그를 처음 만났다. 그리고 블로그가 무엇인지를 깨우쳐 주었다.
조선일보 추종자들에게 바치는 노래

조선일보 추종자들에게 바치는 노래

신문을 발행한다고 해서 모두 “언론”이라고 생각하면 그건 오해다. 조선일보가 자칭 “일등 신문”이라 떠든다고 해서 조선일보를 가장 좋은 언론이라고 여긴다면 그 사람은 1% 특권층에 속하든지, 그 특권층에 속하고 싶어 안달이든지, 그도 저도 아니면 대개 무뇌아라 불릴 정도로 분별력이 없는 사람이다.

조선일보는 언론이 아니다. 조선일보는 정치집단이다. 그것도 친일과 독재, 극우와 반공을 밑천 삼아 돈벌이를 하는 수구 정치 집단이며, 천민 매판 자본이다. 일제 시대에는 친일을 했고, 군부 독재 시대에는 독재에 앞장서서 부역을 한 집단이 형식적 민주주의가 도래하자 “언론 자유”의 과실을 앞장 서서 누린다. 자신들의 이익과 이해관계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거짓과 왜곡은 기본이다.

파렴치하고 몰상식하지만, 더욱 나쁜 것은 이들이 몰라서 이런 짓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이 거짓과 왜곡인줄 알면서도 아무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돈을 벌 수만 있다면, 권력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한다.

이런 조선일보의 본질을 알지 못하고, 또는 외면하면서, 편집이 어떠느니, 종이 질이 어떠느니 하면서 애독자인척 추종하는 자들은 조선일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옛말에 유유상종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들 속에 조선일보와 같은 파렴치함과 위선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그런 신문을 아무 꺼리낌없이 볼 수 있는 것이다.

루시드 폴의 조윤석이 “미선이” 라는 밴드 활동을 할 때 부른 “치질” 이라는 노래가 있다. 이런 노래는 조선일보 추종자들이 한 번쯤 들어볼 필요가 있다. 이 노래를 듣는다고 그들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혹시 본인의 “치질”이 어디에서 왔는지 추측해볼 수는 있지 않을까.

매일 아침처럼 문 밖에 놓인 신문을 들고
무슨일이 있었나 살펴보려 변기에 앉았네
볼일이 끝날 무렵 다 떨어진 휴지걸이 위로
황당하게 비친 내 모습 불쌍하게 웃네

한장 찢어서 곱게 구겨 부드럽게 만들고
찝찝하긴 하지만 그런대로 대충 처리를 했네
며칠이 지나고 조금 아프긴 했지만 설마라도
내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네

휴지보다 못한 너희들 종이 사지 않겠어
아무리 급해도 닦지 않겠어 쓰지 않겠어

너희들의 거짓말 듣지 않겠어 믿지 않겠어
단돈 300원도 주지 않겠어 보지 않겠어

<미선이, 치질>

덧. 이 글은 민노씨 님의 언어의 투명성: 내가 조선일보를 비판하는 이유라는 글에 대해 트랙백을 보내기 위해 쓴 글인데, 정작 트랙백은 가지 않아 뜬금없는 글이 되어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덧. 민노씨 님의 블로그와 트랙백이 되지 않는군요. 왜 그럴까요?

유저 인터페이스의 압박

유저 인터페이스의 압박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마음에 걸렸던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댓글을 올리는 분들에 대한 나의 무심함이었다. 워낙에 게으르고 잘 챙기지 못하는 성격이라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굳이 댓글에 대해 하나하나 대응하지 않았었다. 급기야 민노씨 님은 이런 나의 게으른 행동에 대해 한마디를 했다.
소요유 블로그는 강렬한 개성을 갖고 있지만,  대화가 가능한 블로그라고 생각한다. 물론 답글이 좀 인색한 편이긴 하지만. : )
정곡을 찌르는 한마디에 부끄럽기도 했지만, “워드프레스가 댓글에 대한 답글 기능(Threaded Comment)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 변명을 했다. 사실 댓글이 여러개 달려있는데, 답글 기능이 없으면 굳이 댓글 다신 분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저 아래에서 대응하기가 마땅치 않았었다. 이제 워드프레스 2.7로 넘어오고, 테마도 변경하면서 댓글마다 답글을 달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워드프레스 탓을 했던 나의 변명이 통하지 않게 되었다. 댓글마다 달려있는 “reply”가 나를 노려보는 것이었다. 이제는 되도록 댓글을 주시는 분들에 대해 나의 응답을 제공하려 한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게을러서 언제까지 그렇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새로운 유저 인터페이스가 내 게으름을 압박하고 있다.
봄맞이 블로그 단장

봄맞이 블로그 단장

겨울이 아무리 춥고 고단했다 해도, 봄은 어김없이 겨울을 제치고 문지방을 넘는다. 경칩이 지나니 햇살이 따사롭고, 완연한 봄내음이 대기에 가득하다. 이제 조금 있으면, 나무들은 새잎을 틔울 것이고, 꽃들은 꽃망울을 내비칠 것이다.

인간들의 세상은 탐욕을 주체할 수 없어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지만, 자연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새봄을 불러온다. 새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싱그럽고 따사로운 햇살이 대지를 어루만진다.

봄을 맞아 소요유 블로그도 새단장을 했다. 워드프레스 2.7로 판올림을 한지가 한달도 더 지났는데, 이제야 테마를 바꾼다. 굳이 테마를 바꾸어야 할 이유는 별로 없었지만, 워드프레스 2.7이 제공하는 기능을 좀 더 사용하고 싶었다.

그동안 내 블로그에서 제공하지 못했던 것은 댓글에 대한 응답 기능(Threaded Comment)이었는데, 워드프레스 2.7에는 이 기능이 기본으로 들어가 있다. 문제는 테마 또한 댓글에 대한 응답을 정확히 보여주도록 디자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워드프레스 테마를 검색하다가 내 디자인 원칙부응하는 테마를 찾았다. 바꿔놓고 보니 그전 테마와 그리 다르지는 않지만, 단순하고 소박한 모습이 마음에 든다.

단순하고, 소박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그렇게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