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북부 나바라 지방은 한여름이라도 밤낮의 기온 차이가 꽤 크다. 아침 일찍 출발하면 기분좋게 걸을 수 있지만, 한낮이 되면 따가운 햇볕에 쉽게 지친다.
해가 중천으로 넘어갈 즈음, 마을 입구에서 한 소년을 만났다. 방학이라 학교에 가지 않는 소년은 순례자들을 상대로 레모네이드를 판다고 했다. 얼굴도 잘생기고 머리도 영리한 소년은 레모네이드에 값을 매기지 않았다. 한잔 마시고, 내고 싶은 만큼 기부하라고 했다. 그 돈을 모아 불우이웃을 돕겠다고 했다. 더위에 지친 순례자들은 시원한 레모네이드 한잔을 마시고, 적어도 1유로 이상의 돈을 기부했다. 그 녀석의 장사 수완에 순례자들은 모두 유쾌한 한때를 보냈다.
한낮의 태양이 머리 위에서 이글거릴 때, 아이들은 수영복만 입고 다리 위로 달려갔다. 겁이 없는 개구쟁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다리 위에서 개울로 몸을 던졌다. 지나가던 어른들은 혹시라도 아이들이 다칠까봐 잔소리를 해대지만, 아이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다이빙을 하고 멱을 감았다. 그 아이들 머리에서 나바라의 햇볕 냄새가 났다. 평화로운 마을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역시 천국은 아이들의 것이었다.
여왕의 다리(푸엔테 라 레이나)를 떠난 카미노는 마녜루와 시라우키를 지났다. 포도밭과 밀밭이 번갈아 나오고,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에 비행기가 길을 내면서 날고 있었다. 다음 목적지는 에스테야인데, 이정표에 적힌 거리가 잘못된 듯 걸어도 걸어도 그 마을은 나오지 않았다.
레모네이드 파는 소년물놀이하는 아이들저 멀리 시라우키 (살모사 둥지)나바라의 포도밭추수 끝난 밀밭과 비행운사이프러스 나무와 밀밭노란 바람개비와 순례자부엔 카미노, 코리안!
아이패드 미니(iPad Mini)를 사용하다가 키보드가 필요하여 Logitech Ultrathin Keyboard Cover를 구입했다. 그런데 iOS 9으로 판올림한 후 한영전환 키가 작동을 하지 않는 문제가 발생했다. 아이패드에 입력을 자유롭게 하려고 키보드를 사용하는 것인데, 한영전환이 자유롭지 않으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 저것 구글링을 하다가 알아낸 것은 Ctrl+Space를 사용하면 된다는 것인데, 이 키보드에는 Ctrl 키가 없다. 어떤 글에는 Shift+Command+Space를 사용하면 된다고 나와 있는데, 이것도 해결책이 아니었다.
한동안 키보드를 사용하지 않다가 며칠 전 iOS 10으로 판올림한 후 다시 한 번 이 문제에 도전하였다. 그리하여 알아낸 결과는 바로 Function+Caps Lock이다. Function 키와 Caps Lock 키를 동시에 누르니 이전처럼 한영전환이 자유롭게 되었다.
이 기능을 사용하려면, iOS 10에서 Settings > General > Keyboard > Hardware Keyboard > Caps Lock Switch to/from Latin 을 켜주어야 한다. 간단한 것인데 알아내기 쉽지 않은 것들이 있다.
아이패드 미니를 위한 Logitech Ultrathin Keyboard Cover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순례길을 걷다 보면 크고 작은 마을을 거치게 되는데, 어느 마을에나 성당이 있다. 아무리 작고 초라한 마을이라도 그 한가운데에는 제법 규모 있는 성당이 자리 잡고 있다. 성당은 예나 지금이나,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마을의 중심이라 할 만하다.
어느 성당이든 간에 그 성당에 들어서면 십자가 위에 못 박힌 예수가 사람들을 맞이한다. 예수는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십자가의 형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예수는 고통의 피눈물을 흘리고 있고,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죄책감을 느낀다. 예수는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며, 그의 죽음으로 사람들은 구원을 얻었다는 그 전설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용서 대신 죄책감과 고통만 불러일으킨다.
예수는 이제 십자가에서 내려져야 한다. 예수가 고통의 상징이 되어서는 안 된다. 고통의 예수를 더 이상 숭배하면 안 된다. 그가 사람들에게 고통과 죄책감을 느끼게 하려고 죽었을까?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보았던 예수들은 늘 십자가 위에 있었고, 고통의 상징이었고, 죄의식을 불러 일으켰다. 예수의 가르침은 고통이 아니라 사랑이다. 그가 자비와 사랑과 용서의 화신으로 부활해야 한다.
용서의 언덕을 떠난 카미노는 우르테가, 무루사발, 오바노스를 지나 아르가 강에 닿았고, 그 강에는 왕비의 다리(푸엔테 라 레이나)가 우아하게 놓여 있었다. 사람들은 왕비의 다리가 카미노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라고 얘기했다. 순례자들은 왕비의 다리를 건너 에스테야로 가기 전, 이 마을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마을은 조용했고, 성당의 종소리가 은은히 울려 퍼졌다. 저녁 무렵, 어느 카페 앞에서 떠돌이 악사들이 노래를 했다. 순례자들과 마을 사람들은 그의 노래를 들으며 술을 마셨다. 어둠은 짙어지고 별이 떠올랐으며, 카미노의 밤은 악사들의 노래와 함께 깊어만 갔다.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대변인이었던 윤태영 씨가 <대통령의 말하기>라는 책을 내놓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뛰어난 연설가이고, 달변가였으며, 토론의 명수였다. 말 잘하는 사람으로 첫손에 꼽을만한 정치가였으나, 그는 그의 재능 때문에 적지 않은 설화를 겪기도 했다. 물론 그 설화의 대부분은 그를 하이에나처럼 물어뜯던 언론과 기득권 세력의 근거없는 시기와 모략 때문이었다.
<대통령의 말하기>의 서문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말에 대한 철학과 원칙이 어떠했는지 보여주는 구절이 있다.
“말은 한 사람이 지닌 사상의 표현이다. 사상이 빈곤하면 말도 빈곤하다. 결국 말은 지적 능력의 표현이다.”
“말을 잘하는 것과 말재주는 다른 것이다. 국가 지도가의 말은 말재주 수준이 아니고 사상의 표현이고 철학의 표현이다. 가치와 전략, 철학이 담긴 말을 쓸 줄 알아야 지도자가 되는 법이다.”
<윤태영, 대통령의 말하기, pp. 5-7>
노무현의 비서관이자 대변인이었던 윤태영은 이 책에서 청와대 근무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23가지의 방편을 소개한다. 이 방편들은 모두 노무현 대통령에게서 나온 것들이다. 말(특히 연설)을 잘하고 싶은 사람들(특히 정치인이나 리더)에게 유용한 지침들이다.
대중을 설득해야 하는 정치인이 아닌 일반 사람들이 말을 잘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 책을 읽다가 말하기에 대한 평소의 생각을 정리해본다. 윤태영이 정리한 노무현의 말하기 방편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그 방편보다 더 기초적인 항목들이다.
말을 잘하기 위한 가장 기본은 경청이다. 경청을 잘하는 사람은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특별히 말을 잘하지 않아도 경청을 잘하고 공감 능력이 뛰어나면 상대방은 그 사람이 말을 잘한다고 느낀다.
말을 할 때 진심을 담아야 한다. 말재주가 좋아 유창하고 세련된 표현으로 말을 하더라도 진심을 담지 않으면, 상대방은 그 말에 영혼이 없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챈다.
자기의 말을 해야 한다. 남의 얘기 말고, 자기의 얘기를 해야 한다. 자기가 직접 경험한 것이라면 더욱 좋고, 설령 남이 한 말을 전할 때에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자기 말이 아닐 경우, 대부분 그 말들은 공허하거나 깊이가 없다.
노무현은 훌륭한 대통령이었고, 참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말 한마디에도 고심을 했고, 영혼을 담으려 노력했다. 책을 읽으면서 그가 많이 보고 싶었다.
<덧> 같이 읽으면 좋은 글
우울증은 자살이라는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잘 들여다보면 자살하는 사람이 정말 원하는 것은 몸의 죽음이 아니라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다. 그러나 몸은 딜레마를 만들어 낼 수도 없고 이 딜레마를 경험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몸을 없애면 고통의 근원도 사라지리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딜레마를 창조하거나 경험하는 것은 몸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문제는 의식 속에서 일어나므로 해결책도 의식 속에 있다. 의식의 본질을 살펴보고 나서 문제를 유발하고 경험하는 곳이 의식임을 이해하면 문제를 해결해야 할 곳도 의식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이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원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 문제의 해결책이다.
우리는 자신을 몸과 동일시해서 몸이 곧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생명 에너지를 상실하는 것은 기가 꺾여 있기 때문이며, 그렇기 때문에 에너지가 줄어든다. 대부분의 죽음은 사실 미묘하게 수동적인 자살의 형태를 띠고 있다. 살아 있음에 대한 느낌과 삶에 대한 기대감, 열의를 상실해 버린 결과다.
[중략]
의식이라는 에너지 장 안에서 우리는 엄청난 자유를 지니고 있다. 우리의 선택에 따라 에너지 장이 달라진다는 의미다. 가치 부여의 권한이 자신에게 있음을 이해하기만 해도, 자신의 힘을 회복할 수 있다. 자신이 희생자라는 시각에서 벗어나 스스로 원천이 되면서 세상에 내맡겼던 자신의 힘을 다시 받아들인다. 이로 인해 자기 존재의 가치를 경험하고, 어떤 증명도 해 보일 필요가 없으며 세상이 그 무엇도 해 줄 필요가 없음을 깨달으면서 내적으로 고요한 상태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