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owsed by
Author: 소요유

아내에게 불러주고 싶은 노래

아내에게 불러주고 싶은 노래

여우가 어린왕자에게 말했다. 너의 장미가 너에게 그토록 소중한 이유는 그 장미와 함께 한 시간때문이라고. 여우가 한 말은 맞는 말이지만, 사실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어린왕자와 그 장미가 그렇게 소중한 시간을 같이 보내도록 운명지워졌다는 것.

나는 남녀의 사랑과 결혼에 관해서는 운명론자다. 그 무수한 가능성과 확률을 뚫고 한 여자와 한 남자가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평생을 같이한다는 것은 “운명” 말고 다른 것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러한 인연은 전생에서부터 미리 결정되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속편한 일일지도 모른다.

오늘은 아내와 결혼을 한지 꼭 10년째 되는 날이다. 우리 부부는 무슨 기념일을 챙기는 편이 아니지만, 10년이라는 세월 앞에서는 감개무량함을 감출 수 없다. 돌아보면, 살과 같이 흐른 지난 세월이 마치 꿈만 같다. 우리는 그 세월을 별 탈없이 살아왔다. 딸아이가 생겼고, 그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 우리들은 어느덧 학부형이 되었다. 재기발랄하고 풋풋했던 20대는 아니지만, 이제 삶이 무엇인지 행복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지를 어렴풋이나마 깨달은 중년은 소중하다.

아내가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결혼 초였던가. 공원 벤치에 앉아 뉘엿뉘엿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단팥빵을 나누어 먹었던 일. 그러면서 우리는 늙어서도 이런 부부가 되자고 얘기했었던 일. 우리는 노인이 되어서도 그런 부부가 될 것이다. 할머니가 되어서도 아내는 나에게 까불까불 할 것이고, 할아버지가 된 나는 아내의 그런 쾌활함을 즐길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단팥빵을 나누어 먹을 것이다.

아내와 나의 사랑이 10년이라는 나이테를 둘러 꽤나 틈실해졌다. 이제 예전처럼 바람이 불고 비가 온다 하더라도 여간해서는 흔들리지 않는 그런 성숙함과 중후함이 보인다. 그렇다. 나이는 그냥 먹는 것이 아니고, 시간은 그냥 흐르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았다.

(아내가 늘 강조하는 것이지만) 나는 운이 좋은 놈이다. 아내처럼 예쁘고 현명한 여자와 평생 함께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아내를 닮은 예쁘고 똘똘한 딸을 얻었으니 말이다. 행복하다. 그리고 지금까지 잘해왔듯이 앞으로도 그렇게 잘 살 것이다. 욕심을 버리고 집착하지 않고 되도록 단순하고 소박하게 그렇게 살 것이다.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풍요롭게 하는지 우리는 지난 10년을 함께 배워왔다.

결혼 10주년에 아내에게 불러주고 싶은 노래가 있다. 아내가 늘 듣고 싶어하던 노래. 아내는 윤도현보다도 내가 더 이 노래를 잘 한다고 얘기했었지. 사실일 것이다. 내겐 너무 소중한 아내, 내겐 너무 행복한 당신. 앞으로의 10년은 더 행복한 시간이 될거야. 그렇지? 사랑해 그리고 고마워.

나의 하루를 가만히 닫아주는 너
은은한 달빛 따라 너의 모습 사라지고
홀로 남은 골목길엔 수줍은 내 마음만

나의 아픔을 가만히 안아주는 너
눈물 흘린 시간 뒤엔 언제나 네가 있어
상처받은 내 영혼에 따뜻한 네 손길만

처음엔 그냥 친군 줄만 알았어
아무 색깔 없이 언제나 영원하길
또 다시 사랑이라 부르진 않아
아무 아픔 없이 너만은 행복하길
워우워우 예~~~

널 만나면 말 없이 있어도
또 하나의 나처럼 편안했던 거야

널 만나면 순수한 네 모습에
철없는 아이처럼 잊었던 거야

내겐 너무 소중한 너
내겐 너무 행복한 너

<윤도현 밴드, 사랑 Two>

세상에서 가장 비싼 사진

세상에서 가장 비싼 사진

이메가의 미국 방문이 있기 전, 내가 알고 있었던 세상에서 가장 비싼 사진은 바로 이 사진이었다. 한 국가의 국보 1호와 맞바꾼 사진이니까 복구비 200억원 보다 훨씬 높은 가격의 사진임을 틀림없다. 어떤 사람들은 화재 현장에 와서 울부짖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사라진 국보의 제사까지 지냈다. 모르긴 몰라도 그들 중에는 지난 대선 때 이메가를 찍었고, 이번 총선 때는 한나라당을 찍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국보 1호와 맞바꾼 사진보다도 몇 만배나 더 비싼 사진이 나왔다. 역시 주인공은 이메가고, 조연으로 조지(고) 부시(고)가 출연하였다. 이메가가 미국 대통령의 별장이라는 캠프 데이비드에서 자기 위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전면 개방했다. (사실 협상이라고도 볼 수 없지만) 쇠고기 협상이 타결되자 하룻밤 사이에 소값은 8%나 떨어졌고, 소를 키우는 농민들은 망연자실했다. 모르긴 몰라도 그 농민들 중 상당수는 지난 대선 때 이메가를 찍고, 이번 총선에서 한나라당을 찍었을 것이다. 이 쇠고기 협상에서 우리가 얻은 것은 이메가의 대통령 별장 숙박과 위의 사진 한장. 농민들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이 사진을 위해 우리나라 국민들의 목숨이 담보로 잡혔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도 광우병으로 의심되는 젊은이가 사망 직전에 있는데, 우리나라는 이메가의 사진 한장을 위해 아무런 조건없이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기로 결정했다. 이번 협상의 결과로 미국에서 광우병이 발견되어도 우리나라는 수입을 금지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또 30개월 미만 쇠고기의 경우 현행 수입 위생조건상 수입이 금지된 광우병 특정위험물질(SRM) 7개 가운데 편도와 회장원위부(소장 끝부분)만 제외하고 척추뼈·뇌·눈 등 5개는 수입이 허용되고, 그동안 수입 목록에서 제외됐던 소시지·훈제·육포 등 쇠고기를 이용한 육가공품도 수입된다. 아울러 미국에서 광우병이 추가로 발생하면 미국 쪽이 곧바로 역학조사를 해 그 결과를 놓고 한국 정부와 협의하되, 국제수역사무국(OIE)의 ‘광우병위험통제국’ 지위에 반하는 상황이 발견될 경우에만 수입을 중단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광우병 발생 즉시 수입을 전면 중단할 수 있었다. [미 ‘뼈 있는 쇠고기’ 내달부터 밀려온다, 한겨레]
광우병이 어떤 병인가? 치료는 고사하고 진단도 할수 없는 치사율 100%인 병이다. 잠복기가 무려 10년에 이르기 때문에 자신이 광우병에 걸렸는지조차 알 수 없는 병이며, 자신의 뇌에 구멍이 숭숭 뚫리기 시작하면 발작을 하며 죽어야 하는 병이다. 돈에만 눈이 먼 미친 인간들이 소를 미치게 했고, 그 미친 소들이 죽어가며 사람을 죽이고 있다.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면 이런 일은 언제나 일어나게 되어 있다. 이제 우리나라는 광우병의 위험 앞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으면 광우병에 걸린 소들이 어떤지 한번 감상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이메가와 부시의 저 사진 한장을 위해 우리 모두의 목숨이 저당잡혔다. 우리나라 국민 한사람의 목숨 값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으나, 저 사진은 인류 역사상 가장 비싼 사진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 시작이라는 것이다. 저 사진보다도 더 비싼 사진들이 앞으로도 5년동안 계속 쏟아질 것이다. 경제가 아니고, 이제 나를 포함한 우리들의 목숨, 우리 자식들의 목숨이 달린 문제가 되어버렸다. 5년을 견딜 수 있겠는가?
인생을 쉽게 사는 방법

인생을 쉽게 사는 방법

내 책상 컴퓨터 자판 옆에 있는 조그마한 책 한 권. 불교 초기 경전 중의 하나인 법구경이다. 일을 하다가 좀 시간이 나면 무심코 들춰 보면서 한 구절씩 읽곤 하는데, 그때마다 잔잔한 감동을 얻는다. 법구경의 ‘더러움’ 편에 있는 구절이 우연히 눈에 들어왔다.

얼굴이 두터워 수치를 모르고
뻔뻔스럽고 어리석고 무모하고
마음이 때묻은 사람에게
인생은 살아가기 쉽다

수치를 알고 항상 깨끗함을 생각하고
집착을 떠나 조심성이 많고
진리를 보고 조촐히 지내는 사람에게
인생은 살아가기 힘들다

<법구경, 244-245>

부끄러움을 모르고 뻔뻔하게 살면, 삶은 참 쉬워진다. 서너 달 사이 대한민국은 참 쉽게 사는 사람들의 천국이 되어버렸다. 견디기 힘들다. 이 조그마한 땅에 무슨 업보가 그렇게 많은 것일까? 반만년 동안 아니 해방 이후만 보더라도 이 동쪽의 조그마한 땅은 참 편안하게 지낸 적이 없는 것 같다. 늘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이 날뛰는 세상이었다.

그런 와중에 이런 사람이 이 척박하고 황폐했던 나라의 제 16대 대통령이었다는 것은 기적이었다. 그를 추억하면서 견딜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누가 그를 잇겠다고 나설 것인가? 그가 우리의 희망이 될 것이다.

내 아이들에게는 어떤 삶을 보여 줄 것인가. 어떤 삶을 살라고 말할 것인가. 쉽고 살라고? 힘들게 살라고?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되라고 말해 주고 싶다. 그것이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예의인 것이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들에게 앞으로의 몇년은 참으로 고단한 시간이 될 것이다. 고단하고 힘들더라도 그것이 삶을 제대로 살아내는 것이다.

아직도 모든 것이 노무현 탓

아직도 모든 것이 노무현 탓

퇴임한 지 두달이 지난 노무현 대통령은 여전히 동네북이다. 수구들은 노무현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혈안이고, 좌파들은 총선의 패배를 노무현 탓으로 돌리기 위해 안달이다. 수구세력의 첫 번째 목표가 된 것은 노무현 정부의 주된 정책 중의 하나인 지방분권화와 혁신도시 정책이다. 공공기관의 지방 이전을 기다리고 있던 지방 정부와 지방 국민들은 손가락만 빨 것이다. 예상한 일이었기에 놀랍지도 않다.

그런데, 소위 좌파 세력들이 총선 패배의 책임을 노무현한테 돌리는 듯한 발언은 도저히 참기 힘들다. 김규항은 “노회찬과 홍정욱”이란 글에서 노회찬이 패배한 책임을 노무현에게 돌린다. 노무현이 한국 국민들에게서 “가치 추구”를 빼앗았기 때문에 이명박이 당선되고, 홍정욱이 당선되었단다.

가짜 진보’ 노무현 정권의 가장 큰 죄악은 대다수의 한국인들에게서 ‘가치에의 추구’를 앗아가 버렸다는 것일 게다. 이명박 씨는 5년 전만 같아도 대통령 후보로서 파멸하기 충분한 도덕적 결함들을 가졌다. 그러나 그 결함들은 노무현 정권 5년을 통해 더 이상 결함이 아니게 되었다. 2007년의 한국인들은 이명박을 도덕적으로 용서한 게 아니라 이명박의 도덕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번 총선에서 진보신당 같은 곳의 후보가 당선되는 건 애초부터 어려운 일이었다.

[김규항, 노회찬과 홍정욱]

참으로 엿같은 소리다. 더군다나 이런 현실 인식은 좌파 세력들에게도 전혀 도움이 안되는 것이다. 나는 노무현만큼 가치를 중요시 여기는 정치인을 알지 못한다. 노무현이 추구한 가치는 “상식과 원칙”, 이 두가지다. 물론, 좌파들이 봤을 때는 아주 우스운 가치일 수도 있겠지. 민중들의 계급의식을 깨우쳐 주어야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상식과 원칙이라는 가치조차 건국 이래 단 한번도 실현된 적이 없는 나라가 이 잘난 “대한민국”이다.

우리나라 좌파의 위기는 민중들이 자신의 계급의식을 자각하지 못해서 나타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식과 원칙조차 수용되지 못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1%로 대표되는 수구언론과 재벌, 사법부, 검찰, 고위공무원들 그리고 그 1% 수구세력을 30% 지지하는 지역주의 투표들. 이러한 문제들을 노무현 정부가 만들어낸 것인가? 이 문제들은 해방 이후 지금까지 죽 있어 왔고, 오히려 그 갈등은 노무현 정부 때 더 커졌으며, 이제 그 1% 수구세력들의 면모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

노무현과 수구들이 대립할 때, 좌파들은 어느 편에 있었나? 내가 알기로는 대부분 수구들의 편에 있었다. 노회찬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자마자 조선일보에서 강연을 하면서 30년간 조선일보를 봐왔으며 가장 좋은 품질의 신문이라고 말했다. 조선일보가 어떤 신문인가? 친일과 군부독재 세력의 본산지 아닌가? 나는 노무현이 조선일보를 본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누가 가치를 앗아갔나? 이라크 파병과 한미FTA를 제외하고 민노당은 한나라당과 손잡고 반노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그리고도 좌파가 망하는 건 모든 게 노무현 탓이다.

좌파들은 참으로 머리가 나쁘다. 노무현보다도 나쁘고 심지어 수구들보다도 머리가 나쁘다. 문제가 뭔지를 모른다. 적이 누구인지, 동지가 누구인지, 누가 연대할 세력인지 알지 못한다. 문제가 해결하려면 문제가 무엇인지 부터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자신들의 소멸을 노무현 탓으로만 돌리고는 그들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다. (나도 동의하는 바이고, 좌파의 관점에서 봤을 때도) 노회찬은 홍정욱보다 훌륭한 인생을 살아왔다. 하지만, 이번 선거처럼 뉴타운 사기극에 투표율 50% 이하일 경우에는 노회찬이 아니라 노회찬 할아버지가 와도 수구를 이길 수 없다.

노무현은 이제 무대를 내려왔다. 이제 노무현을 내버려 둘 때도 되지 않았는가? 노무현은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다했다. 노무현의 문제라면, 그가 시대를 너무 앞서 나왔다는 것 밖에 없다. 하지만 상식으로 살고 싶어하는 국민들이라면 그에게 존경을 보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 봉하마을에서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좌파가 진보가 되려면 정신을 차려야 할 것이다.

딸에게 보내는 노래

딸에게 보내는 노래

토이(Toy) 6집을 듣다가 우연히 발견한 “딸에게 보내는 노래”. 유희열이 만든 아름다운 가사와 성시경의 감미로운 목소리. 내 아내와 딸에게도 들려주고 싶은 노래라 블로그에 올린다. (저작권 문제가 있어 조만간 내려야 할 지도 모르지만)

아내와 늘 주고받는 말 중의 하나. 우리가 결혼해서 제일 잘한 것은 딸을 낳은 것이라는 얘기. 우리들의 꿈많던 젊은 날이 오롯이 묻어 있는, 우리들에게는 꽃이요, 꿈인 그 아이. 기어이 사랑이란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준 아이. 딸을 키운다는 것은 신과 세상에 무한한 감사를 해야 함을 의미한다.

성시경의 노래는 듣기는 좋은데, 너무 미성이고 높아서 따라 부르기가 힘들다. 하지만 이 노래는 좀 연습을 해서 아내와 딸에게 내가 직접 불러주고 싶다. 기타 연습도 좀 해서 말이다. 아빠의 공연을 기대하시라.

세상 모두 멈춘 것 같은 밤
방 안 가득 별빛 쏟아져 내려
지친 하루 피곤한 모습의 엄마와
우릴 닮은 니가 잠들어 있단다

처음 샀던 엄지만한 신발
품에 안고 기뻐하던 어느 봄날
누구보다 행복해 보이던 엄마의 얼굴
그토록 밝게 빛나던 4월의 미소
영원히 잊지 못할 설레임 가득하던
엄마의 눈망울

사랑스런 너를 만나던 날
바보처럼 아빤 울기만 하고
조심스레 너의 작은 손을
엄만 한참을 손에 쥐고 인사를 했단다

살아가는 일이 버거울 때
지친 하루 집에 돌아오는 길
저 멀리 아파트 창문 새로 너를 안고
반갑게 손을 흔드는 엄마의 모습
나는 웃을 수 있어 무엇보다 소중한
우리가 있으니

한참 시간이 흐른 뒤 어른이라는 이름 앞에
때론 힘겨워 눈물 흘릴 때면 이 노래를 기억해 주렴
너에게 줄 수 있는 단 하나의 작은 선물
꿈 많던 엄마의 눈부신 젊은 날은
너란 꽃을 피게 했단다
너란 꿈을 품게 됐단다
그리고 널 위한 이 노래

너의 작은 손 빛나던 미소
소중한 우리가 있으니

기억해 주겠니 널 위한 이 노래
소중한 우리가 있으니

[토이, 딸에게 보내는 노래]

[audio:Toy-Song4Daughter.mp3]
기만적 민주주의와 수구세력의 힘

기만적 민주주의와 수구세력의 힘

우선 글을 시작하기 전에 두어 가지 사실을 바로잡아야겠다. 우리나라의 잘난 수구 언론들이 총선이 끝나고 나팔을 불어대는 것 중의 하나가 “민심이 보수화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거짓말이다. 투표를 한 46%의 표심은 보수화된 것이 아니고 “수구” 또는 “극우” 그 자체였다. 수구세력이라 할 수 있는 한나라당이 과반수를 차지했고, 또 다른 정통 수구인 자유선진당과 친박연대 (진짜 이름 웃기지 않은가) 그리고 친박 무소속을 합하면 50여석이 넘는다. 수구 세력이 의회 권력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했다. 언론이 진보로 분류하는 통합민주당이나 창조한국당 등은 사실 보수라고 보는 것이 맞고, 진보세력이라 불리울 수 있는 정당은 민노당과 진보신당 정도이다. 진보신당은 당선자를 내지 못했고, 민노당은 5석 정도의 명맥만 유지했다. 결과적으로 진보 세력은 국회의 1.67% 만을 차지한 것이다.

수구 언론들이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면서 또 지껄이는 이야기는 “절묘한 민심의 선택”이라는 말이다. 이건 그냥 “수구” 투표를 해버린 46% 유권자들에 대한 감사의 립서비스이다. 수구 세력이 개헌선을 가져가 버렸는데 무슨 민심의 절묘한 선택? 한나라당이 턱걸이 과반을 했기 때문에 하는 소리인가 아니면 너무 좋아서 웃자고 하는 소리인가? 한나라당과 자유선진당, 친박연대 뭐가 다른가. 그들은 다 한 뱃속에서 나온 일란성 샴쌍둥이일 뿐이다.

20여년 전, 그 지긋지긋한 군부독재를 청산하고, 많은 국민들은 권력을 국민의 손으로 선출하면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것은 정말로 순진한 생각이었다. 87년도 전두환이 물러가고도 전두환의 친구인 노태우가 국민의 손에 의해 뽑혔고, 92년에는 이들과 손을 잡은 김영삼이 다시 선출되었다. 97년에 와서야 수구세력에서 보수세력으로의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는데, 수구세력이 나라를 말아먹지 않았다면 불가능했고 아니 나라를 말아먹었다 해도 김대중이 또다른 수구인 김종필과 손잡지 않았다면 역시 불가능했다. 첫번째 정권교체는 외환위기로 인한 나라 망한 댓가로 받은 절반의 정권교체였다.

2002년은 어떠했는가? 그때는 노무현이라는 걸출한 정치인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노무현은 정말 1세기 한번 나올까 말까한 정치인이다. 수구세력이 노무현을 그렇게 미워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노무현과 더불어 인터넷이라는 또다른 무기가 국민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거의 기적이었고, 신이 대한민국을 보살폈다고 밖에 얘기할 수 없는 세계 정치사의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와 같은 민주화 이후 20여년의 짧은 역사를 살펴봐도 친일과 독재로부터 시작된 우리나라의 수구들의 힘은 정말 막강하다. 우리나라 언론, 입법, 사법, 행정 모든 분야에서 수구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현재 90% 이상이다. 이들은 자기들 입맛에 맞게 여론을 호도하거나 왜곡하고 민주주의를 기만한다. 투표 성향으로 보았을 때, 우리나라 국민들 중 이런 수구들의 이념을 따르는 사람들이 한 30% 정도 되는 것 같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수구세력들은 계급적 이익 때문이건 (이 부분은 5%도 안되는 것 같고) 지역주의 때문이건 아니면 반공 때문이건 간에 언제나 한나라당에 투표를 한다. 이 30% 는 거의 언제나 투표를 한다는 것이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국회의원 선거이든, 대선이든, 보궐선거이든 간에 말이다.

따라서 전체 투표율이 60% 이하가 되면 수구세력을 이길 방도가 없다. 참여정부 때 재보선에서 40 대 0으로 열린우리당이 졌고, 그때 정치권은 참여정부의 실정때문이라고 노무현을 몰아세웠지만, 이건 노무현이 아니라 세종대왕이 대통령이 되었어도 이길 수 없는 선거였다. 투표율 30% 정도인 재보선에서 수구세력이 아니고는 이길 방법이 없다. 이번 총선도 마찬가지다. 투표율 46%로는 수구세력이 아닌 보수, 진보는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선거였다. 적어도 민주당이나 민노당이 한나라당과 대등하게 경쟁을 하려면 적어도 70% 이상의 투표율이 나와야 한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악순환이 발생하는데 정치권의 수구세력들은 그들의 명성에 걸맞게 정치 혐오를 불러 일으키고 (부정부패든, 성추행이든, 개싸움이든 간에) 유권자들은 점점 그 행태를 보고 욕을 해대면서 선거에 관심을 잃게 된다. 왜냐하면 바뀌는 것이 없고, 그렇게 욕을 먹어도 그놈들이 또 뽑히니까.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증폭되면서, 투표율은 점점 낮아지게 된다. 그러면서 정치 권력은 점점 수구화되어 간다. 이것은 수구 세력들의 또다른 전략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국민들이 정치에 무관심할수록 자신들이 득세할 수 있기 때문에 계속 정치 혐오를 불러 일으킨다.

또 하나 웃긴 것은 친일에 앞장서고 독재에 부역을 했던 신문들이 민주화 이후에 언론 자유를 외친다는 사실이다. 박정희를 찬양하고 전두환을 옹호했던 수구세력들은 민주화 이후에 줄기차게 투표를 해댄다는 사실이다. 민주화 과정에 아무 기여도 하지 않았던 아니 오히려 민주화의 적이었던 세력들이 민주화의 열매를 가져간다. 이거 정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일이다.

군부 독재 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지금의 수구세력들은 선거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정치적 정당성(그것이 비록 기만적이라 할지라도)을 획득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정희, 전두환 때는 거리로 나가 싸우면서 위안이라도 얻고 희망이라도 얻었는데, 지금은 그것조차 여의치 않다는 것이다. 국민들이 뽑았다는데 무슨 할 말이 있는가? 왜 투표 안했냐고 하면 무슨 할 말이 있는가? 사실 상황은 20여년 전보다 더 비참해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어떻게 타파할 것인가?

  1. 투표를 의무화해야 한다. 지금처럼 50% 이하의 투표율로는 선출된 권력도 정당성을 찾기는 쉽지 않다. 투표를 의무화한 호주는 투표율이 90%를 넘고 있다. 이 정도는 되어야 우리는 민심을 운운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기권할 자유도 있다고 얘기하는데,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2. 투표 용지에 기권란을 넣어야 한다. 뽑고 싶지 않은 후보가 당연히 있을 수 있으므로 기권란을 반드시 추가해야 한다.
  3. 기권이 50%가 넘으면 그 선거는 무효로 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정당은 해산해야 하고, 다시 처음부터 정치 지형을 다시 짜야 한다.
  4. 선출된 권력에 대한 소환의 권리를 국민들에게 주어야 한다.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잘못 선출되었을 때는 소환되어야 하고 탄핵되어야 한다. 그러한 권리가 국민들에게 부여되어야 한다.
  5. 국민들에게도 입법청원권과 입법권 그리고 국민투표에 부의할 수 있는 권리를 주어야 한다.
  6. 이러한 절차를 간소화하고 투표를 쉽게 하기 위해서 전자투표(인터넷 투표나 휴대전화 투표) 등을 도입해야 한다.

이 정도 되면, 민주주의의 기만성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선거 제도의 변경은 헌법이나 선거법 등 관련 법률을 개정해야 하는데, 수구 세력이 3분의 2나 들어가 있는 국회에서 국민들의 선거 참여를 위해 법률을 개정할 리 만무하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앞으로 선거로 정권을 교체하기는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국민들의 정치에 더욱 혐오감을 느낄 것이고, 그에 비례하여 투표율은 계속 50%를 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수구 세력의 장기 집권은 불을 보듯 뻔하다.

역사에 비추어 볼 때, 두 가지 가능성이 있는데, 하나는 97년의 경우처럼 나라가 망하는 경우이고, 또 하나는 노무현과 같은 매력적인 정치인이 나와 국민들에게 잠시나마 희망을 주는 것이다. 이메가와 한나라당의 국정운영 능력을 보았을 때, 외환 위기와 같은 경우가 멀지 않아 다시 올 것 같지만, 그 때도 박근혜가 눈물 한두 번 흘리면 수구 세력은 다시 뭉칠 것이다. 즉, 나라가 망해도 정권교체는 쉽지 않다는 얘기다. 다른 하나는 노무현과 같은 정치인이 다시 나와 주어서 국민들의 관심을 높여야 하고 정치 참여를 높여야 하는데, 이 부분도 그렇게 쉽지는 않을 것 같다.내가 유시민을 지켜 보는 이유는 바로 두번 째 가능성 때문이다. 유시민 정도되면 노무현의 뒤를 이을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다시 한 번 신이 대한민국을 보살피시고, 많은 국민들이 관심을 갖는다면 아예 불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적어도 70% 아니 80% 이상의 국민들이 선거에 참여하지 않으면, 이메가가 운하를 파든, 사기를 치든, 나라를 말아 먹든, 팔아 먹든, 뭘 해도 수구의 집권을 막을 길이 없다. 수구 언론들과 선관위와 검찰과 사법부 등은 지속적으로 국민들의 정치 참여를 좌절시킬 것이다. 지금처럼 정치에 무관심해서는 우리는 민주주의를 한다고 얘기할 수 없을 것이다. 미안한 얘기지만, 우리나라의 앞날은 상당히 어둡고, 민주주의는 서민과 노동자들을 더욱 기만할 것이다.

한줌도 안되는 친일과 독재 세력을 단죄하지 못한 것이 나라의 원죄가 되어 버렸다. 이제 어찌할 것인가. 어떻게 희망의 근거를 마련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들의 고민이 되어야 할 것이다.

죽음을 앞두면 현자가 되는가

죽음을 앞두면 현자가 되는가

내가 인정하는 또 하나의 진리.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죽는다.” 아무리 큰 명예와 부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해갈 수는 없다. 때문에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가 언제 죽을지를 모르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내일이 될지 아니면 몇 십년 후가 될지.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아는 사람들은 삶에 대한 태도가 달라진다. 아무리 흉악한 범죄자라 할지라도 그가 사형선고를 받고 집행을 기다릴 때는 어떤 종교인들 보다도 더 경건한 삶을 유지한다고 한다. 죽음이 삶과 대적되는 개념이 아니라 삶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할지라도 우리가 다음 생을 준비할 때는 자신의 삶의 궤적을 되돌아보게 되어 있다.

카네기멜론 대학에서 가상 현실을 가르치는 Randy Pausch라는 교수의 마지막 강의가 잔잔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아주 우연히도 이 교수의 강의 동영상을 보았는데, 췌장암 말기를 선고받고, 아직도 어린 세 아이들을 위해 자신이 어떤 꿈을 가지고 그 꿈을 이루어 왔는지를 보여주는 이 공개 강의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

이 교수의 강의 내용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 교수의 삶이 내가 감명을 받을 정도로 훌륭한 것도 아니다. 지극히 상식적으로, 의욕적으로 열심히 살아온 사람이다. 40대 후반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젊은 아내와 어린 세 아이들을 두고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 사람의 마지막 강의는 그 상식적인 내용에도 불구하고 울림의 정도는 다르다.

내가 Randy Pausch의 입장이라면, 나는 내 딸아이에게 어떤 말을 해 줄까? 곰곰히 생각해 보지만,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떠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더군다나 그것이 다시 만날 기약을 할 수 없는 것이라면 더더군다나 그렇다. 그리고 그 슬픔은 살아남은 아이들의 몫이 될테니까.

Randy Pausch가 건강해지길 바라지만, 그가 건강을 되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강의를 보면서 그의 세 아이들은 건강하게 자라날 것이다. 자기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말이다.

사람은 사람이다, 아무리 작아도

사람은 사람이다, 아무리 작아도

기괴한 주인공들이 리듬감있게 기이한 이야기들을 엮어나가는 Dr. Suess의 그림책들은 디즈니 류의 이야기들과는 다르다. “그 후로도 주욱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Happily ever after)” 식으로 끝을 맺는 디즈니의 그림책이 주류라고 한다면, 크리스마스를 훔치는 그린치나 초록색 달걀이 나오는 Dr. Suess의 그림책은 확실히 비주류라 할만하다. 낯설고 친숙해질 수 없는 뭔가가 있는 그의 그림책들은 상당히 컬트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Dr. Suess의 그림책에 나오는 문장들은 같은 운으로 떨어지는 리듬을 반복하고 있어 영어를 배우는 어린 아이들에게 더할 나위없이 좋은 교재로 쓰이곤 한다.

아거 님의 추천에 따라 주말에 7살 난 딸아이와 함께 “Horton Hears a Who”라는 영화를 보았다. 알려진대로 코끼리 Horton이 작은 먼지 속에 있는 또다른 세상과 소통하면서 그들을 구한다는 이야기다. 사실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만든 영화지만, 그 이야기가 전달하는 메세지는 녹녹하지 않다. 굳이 불교의 가르침을 꺼내지 않더라도, 이 작은 이야기 속에는 우주에 대한 진리와 삶에 대한 희노애락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영화를 보면서 “나락 한 알 속에도 우주가 있다”라는 장일순 선생의 이야기가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이 영화에서 계속 반복되는 Horton의 이야기.

A person’s a person, no matter how small.

아이들에게도 좋은 영화지만, 어른들에게도 추천하고 싶은 그런 영화다. 좋은 영화를 소개해주신 아거 님께 감사드린다.

20대를 위한 나라가 없는 이유

20대를 위한 나라가 없는 이유

한겨레가 보도한 적극적 투표의사층 여론 조사를 보고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번 총선에서 우리나라 20대 중 적극적으로 투표하겠다고 답한 사람은 전체의 44.6% 밖에 되지 않았다. 60대 이상의 87.1%가 투표하겠다고 한 것에 비하면 절반 밖에 안되는 수준이다.

우리나라 20대들의 정치적 무관심에 놀랐고, 그들은 분노조차 표출할 수 없는 자들이라는 사실에 절망했다. 도대체 우리나라 20대들이 바라는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투표의 권리를 저버릴 정도로 우리 사회가 그들에게는 더할 나위없이 행복한 사회일까? 그러면서 왜 88만원 세대가 어떻다느니, 청년백수가 어떻다느니, 대학 등록금이 너무 올랐다느니 하는 불만들을 쏟아내는 것인가. 정말 우리나라 20대들은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도덕 상실과 약육강식의 이 정글 같은 사회에 만족하고 있는 것인가?

현재 합법적으로 정권을 교체하는 방법은 선거에서 투표를 하는 것 밖에 없다. 마음에 드는 후보가 없다, 찍을 사람이 없다, 찍어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라고 하는 20대들의 변명에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적 권리 포기를 합리화하지는 못한다. 세상이 바뀌지 않는 이유는 20대가 투표하지 않기 때문이다. 찍을 사람이 없을 수는 있지만, 찍지 말아야 할 사람은 있다. 당선되지 말아야 할 사람은 있다. 과반수를 획득하지 말아야 하는 정당이 있단 말이다.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투표권 하나를 쟁취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선배들이 목숨을 버리고 피를 흘렸는지를 아는가. 이 투표권이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이것을 안다면 “투표를 하지 않을 권리도 있다”라는 한가한 소리를 하지는 못할 것이다. 후보로 나온 자들이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최소한의 지능이 있다면 단 1밀리미터라도 누가 더 20대들의 처지를 위해 노력할 사람인지, 어떤 정당이 더 나은 정당인지 비교하여 표를 던져라. 그것도 못하겠다면 투표장에 가서 자기 이름을 쓰고 나오는 한이 있더라도 투표하러 가라.

도아 님의 글을 보면 20대가 투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잘 나와 있다. 20대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20대를 위한 나라는 오지 않는다. 2008년 4월 이메가와 한나라당이 날뛰는 이 초현실적인 세계가 마음에 든다면 당신은 투표장에 가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들을 눈뜨고는 더 보지 못하겠다면 투표장에 반드시 가야 한다. 가서, 민노당이든, 민주당이든, 진보신당이든 찍어라. 그래야지만 20대들이 기성세대에 대해 욕을 할 권리라도 생기는 것이다.

정말 이메가가 노리는 잿빛 세상의 회색 인간으로서, 노예로서 병신같이 살아갈 것인가? 20대를 위한 나라는 20대가 만들어야 한다. 20대가 이렇게 정치에 무관심해서는 이 나라의 미래는 없다. 희망은 없다.

이제 20대들도 (Matrix의 Neo처럼) 빨간 약을 먹어야 할 시간이다. 진실을 알고 책임을 져 나가야 할 때다. 분노할 때는 분노해야 한다. 어찌 할 것인가? 정말 계속 이런 세상에 파란 약을 먹고 살고 싶은가?

방관자는 그저 동조자일 뿐이다. 선택은 20대들의 몫이다.

떠날 때를 아는 노인은 지혜롭다

떠날 때를 아는 노인은 지혜롭다

건조하고 황량한 세상을 쉼없이 살았다고 해서 누구나 혜안을 갖는 것은 아니다. 견고하고 치밀한 부조리를 복기하고 예언한다고 해서 모두가 지혜로운 것은 아니다. 진정 지혜로운 노인들은 자신이 떠나야 할 때를 아는 사람들이다. 그것은 책에 나오는 것도 아니고, 누가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다. 본능과도 같은 것이다. 그 본능을 체득했다면 그는 주어진 자신의 삶을 미련없이 제대로 살아낸 것이다.

예수 이전에도 이후에도 세상은 언제나 말세였다. 세상은 늘 버릇없는 새로운 세대들 때문에 번민했고, 노인들은 그들의 싸가지 없음을 한탄했다. 하지만, 자신의 세대가 이미 지나갔음을 깨닫고 조용히 떠나는 노인들은 흔치 않았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그 어디에도 없음을 깨닫고 유유히 사라져야 하는데도 말이다. 자신들이 어쩌지 못하는 세상을 부여잡고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고집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세상의 법칙이 아니다.

물 위를 흘러가는 배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삶은 그런 것이다. 미련없이 살다가 흔적없이 사라지는 것. 악당이든 보안관이든 누구든 이 법칙을 벗어날 수는 없다. 그것을 깨달았다면, 그가 악당이든 보안관이든 지혜롭게 무대를 내려올 것이다. 지혜로운 자들은 담백하게 자신의 삶을 털고 일어난다. 물론 쓸쓸하다. 하지만 삶의 뒤안은 누구에게나 쓸쓸한 법이다. 그것만이 위안이 될 것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이러한 삶의 쓸쓸한 뒤안을 조용히 보여준다.

영화에서 인상깊었던 부분 중 하나였던 동전던지기 장면이다.

Chigurh: You need to call it. I can’t call it for you. It wouldn’t be fair. It wouldn’t even be right.

Proprietor
: I didn’t put nothin up.

Chigurh: Yes you did. You been putting it up your whole life. You just didn’t know it.

자기 삶을 모두 걸어 놓고 그 사실을 모를 뿐이다. 그리고 선택은 언제나 본인의 몫이다. Anton Chigurh는 잔인하지만 참 매력적인 악당이다. 그의 머리 모양만큼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