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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소요유

딸에게 권하는 책들

딸에게 권하는 책들

초등학교 2학년이 된 딸아이가 세상에 대해 조금씩 알기 시작했다. 친구들도 많이 생기고, 학교도 재미있고, 이제는 숙제도 스스로 알아서 한다. 셈을 하고, 보고 싶은 책을 알아서 도서관에서 빌려온다. 박경리의 토지가 오세영의 그림으로 다시 탄생했는데, 그것을 빌려와서 읽기도 했다. 무슨 얘기인지 아느냐 물었더니 잘 모른다고 했다. 딸아이는 만화책을 참 좋아한다.

딸아이가 성장하는 것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으례 그렇듯이 두가지다. 하나는 참으로 대견하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참으로 아쉽다는 것. 아이가 어른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없지만, 그 푸릇푸릇하고 착한 마음을 간직하면서 좀 더 행복하고 희망찬 세계를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딸아이가 자라면서 꼭 읽었으면 하는 책들을 정리한다. 물론, 특별한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책들은 나의 주관적인 기준에 의해 선택된 것이고, 내 인생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책들이다. 딸아이가 자라면서 여기 적혀있는 책들을 읽는다면, 그의 삶이 조금은 더 풍요롭게 될 것이라 믿는다.

이 목록들은 계속 늘어날 것인데, 몇 권이나 될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순서는 큰 의미가 없다. 그냥 생각나는대로 적는 것이니 말이다.

  • 신약성경 (특히, 4복음서)
  • 장자
  • 도덕경
  • 법구경
  • 숫타니파타
  • 반야심경
  • 논어
  • 월든
  • 채근담
  • 티벳 사자의 서
  • 간디 자서전 (The Story of My Experiments With Truth)
  • 스콧 니어링 자서전 (The Making of a Radical)
  • 크로포트킨 자서전 (Memoirs of a Revolutionist)
  • 조화로운 삶 (The Good Life)
  • 전태일 평전
  •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 우리들의 하느님
  •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 어린 왕자 (Le Petit Prince)
  • 예언자 (The Prophet)
  •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무소유
  • 작은 것이 아릅답다 (Small is Beautiful)
  • 시민 불복종 (Civil Disobedience)
  • 간디의 물레
  • 부자의 그림일기
그러거나 말거나

그러거나 말거나

세상이 나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해서, 내가 세상에 집착한다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경제를 나락으로 떨어뜨려 놓고 급전 300억 달러를 빌릴 수 있게 되었다고 환호작약하는 저들에게 해줄 얘기는 아무것도 없다. 한나라당이 1%만을 위한 정당인 줄 알면서도 선거만 있으면 한나라당을 찍어대는 국민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거나 말거나.

민주당은 우리의 대안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희망도 패기도 정열도 용기도 없다. 그냥 리만 브라더스와 한나라당에 질질 끌려다니는 무기력만 가득할 뿐이다. 비전도 없고, 대안도 없고, 그저 떡고물이나 쫓아다니는 궁물들과 386 떨거지들이 모여있는 노회한 정당일 뿐이다. 김대중과 노무현이 사라진 정당에는 적막만 감돈다.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제대로된 정치 세력, 정당이 없다는 것이다. 수십 만의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서도 그것을 정치적 힘으로 묶어낼 세력이 없다. 아무리 이명박과 한나라당이 깽판을 쳐도 4년 후에 그들을 딛고 일어설 세력이 있다면 그나마 위안이 될 수도 있을텐데 우리에겐 그것이 없다. 희망이 없다는 것만큼 견디기 힘든 것도 없다. 새로운 정당이 생겨야 할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것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될 수 있으면 당분간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침묵하고 싶다. 지쳤다. 아니 저들의 탐욕에 질려버렸다. 저들의 탐욕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은 당분간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 탐욕의 극한에서 그 탐욕에 의해 저들이 쓰러질 때까지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탐욕은 죄다. 그 죄의 댓가를 모두가 질 것이다. 같은 하늘을 이고 있다는 이유 하나로.

그러거나 말거나.

단풍이 아름답다. 떨어지는 낙엽 사이로 가을은 깊어간다. 바람이 살랑거리고, 햇살이 따사롭다. 인간의 탐욕만 외면해버리면 그나마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다. 아직도 자연의 품은 그렇게 넉넉하다. 밥 굶지 않고, 내 몸뚱이로 노동을 감당할 수 있을만큼 건강하다면 행복할 것이다. 이 나라에서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사치인 것 같다.

그러거나 말거나.

피폐해지는 블로그

피폐해지는 블로그

“티벳 사자의 서”의 저자 파드마삼바바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과거 삶을 알고 싶으면 현재 그대의 행동을 들여다보아라. 그대의 앞날을 알고 싶으면 현재 그대의 행동을 들여다보아라.

블로그의 글들이 점점 피폐해진다. 비난과 비판과 비아냥으로 가득 차 있는 글들은 내가 써놓은 것이긴 하지만 참으로 읽기 민망하다. 증오와 분노가 영혼을 피폐하게 만든다는 달라이 라마의 가르침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분노한다. 인간들의 역사가 파렴치하고 탐욕적인 자들의 농간으로 끊임없이 더럽혀져 왔다는 사실에 나는 절망한다.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려야 했고, 간디는 암살당했다. 달라이 라마는 정치적 망명을 떠나야 했으며, 김구도 저들의 총탄에 세상을 떠났다.

왜 역사는 이리도 부조리하단 말인가? 왜 사필귀정은 영화 속에서만 가능한 것일까? 왜 가난한 자들은 늘 그렇게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는가? 왜 정의로운 자들은 늘 그렇게 탄압을 받아야 하는가? 수천 년 전 예수와 부처가 고민한 문제들은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결국 인간이란 구원받을 수 없는 절망적인 존재들이란 말인가?

블로그 글들이 피폐해지는 만큼 내 영혼도 피폐해진다. 파드마삼바바의 말처럼 현재 나의 모습은 과거와 미래의 나의 모습일 것인데, 나는 그 사실이 두렵다.

따뜻하고 소박한 글들을 쓰고 싶다. 하지만 이런 바람은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원하는 것만큼이나 공허해 보인다. 그런 나의 무기력이 슬프고, 비루하고 처참한 세상이 슬프다.

어떻게 살 것인가.

경제 위기를 절대 극복할 수 없는 이유

경제 위기를 절대 극복할 수 없는 이유

“좋은 기업에서 위대한 기업으로(Good to Great)”의 저자 짐 콜린스는 위대한 기업의 가장 중요한 요건으로 “사람”을 꼽았다. 짐 콜린스가 5년간 그 엄청난 연구를 통해 밝혀낸 것은 위대한 기업들은 겸손하고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야말로 제대로 된 인물들을 리더로 삼았고, 그 리더들은 제대로 된 사람들을 고용하여 기업을 성공시켰다는 사실이다. 그야말로 상식 중의 상식 아닌가. 기업뿐만 아니라 어느 조직이든지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경제 위기가 쓰나미처럼 몰려오고 있다. 우리나라는 이 위기를 절대로 극복할 수 없다. 이명박과 강만수, 그 유명한 리만 브라더스가 저렇게 버티고 있는 한 말이다. 도대체 전과 14범의 사기꾼을 대통령으로 뽑아놓고 경제를 살려내라고 아우성치는 국민들의 사고방식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그들 대부분도 조중동을 비롯한 독사의 새끼들에게 사기를 당한 피해자들이긴 하지만.

이번 경제 위기의 진원지 미국도 마찬가지다.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 부시는 지난 8년 동안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말아먹었다. 미국 대통령 부시와 FRB 의장이었던 그린스펀이 현 금융 위기를 몰고 온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부시가 그런 사실을 알고는 있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미국은 다음달 선거를 통해 오바마라는 인물을 새 대통령으로 뽑을 것 같다. 때문에 우리나라만큼 상황이 암울하지는 않다.

미국발 경제 위기를 피해갈 수는 없었겠지만, 리만 브라더스는 이 사태를 계속 악화시키고 있다. 호미로 막을 수 있는 것을 가래로도 아니 포클레인으로도 막을 수 없는 지경에 몰리고 있다. 조중동은 국민들을 속여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들었지만, 시장은 조중동에게 속지 않는다. 시장은 이명박과 강만수를 절대 믿지 않는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끊임없이 주식을 팔 것이고, 채권도 팔 것이고, 어떻게 해서든 한국 시장에서 발을 뺄 것이다.

증권사 직원들의 자살이 보도되기 시작했다. 이런 위기가 지속되면 기업들이 망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수많은 실업자들이 쏟아지게 될 것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97년 IMF 때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많이 어렵고 힘들었지만, 그때는 그나마 준비된 대통령 김대중이 있었기에 1~2년 만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지금은? 임기 8개월 만에 나라를 말아먹은 리만 브라더스를 앞으로 4년 4개월이나 보고 있어야 하는 한국은 그야말로 처참한 지경이다.

리만 브라더스를 사퇴시키고 제대로 된 사람을 새 지도자로 뽑지 않는 한,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다. 이렇게 당하고도 4년 4개월 후에 또 박근혜 타령을 해댄다면 정말 답이 없는 민족이 될 것이다. 그들을 사퇴시킬 수 없다면, 4년 4개월 이를 악물고 견디는 수밖에 없다. 지난 8개월은 연습이었고, 본 게임은 이제부터 시작일 테니.

위기의 바닥을 알고 싶은가? 리만 브라더스의 사퇴까지가 바닥이라고 보면 된다.

“달러모으기 운동”의 조건

“달러모으기 운동”의 조건

“잃어버린 10년을 찾아서…”

(써놓고 보니 무슨 소설 제목도 아니고) 어찌되었든 잃어버린 10년을 찾아서 한시도 쉬지않고 매진하는 리만 브라더스(이명박 & 강만수)와 한나라당, 그리고 조중동의 노고를 치하한다. 오늘 환율과 주가가 크로스되는, 일명 리만 크로스를 연출하느라 얼마나 밤잠을 설쳤겠는가. 지난 봄부터 말이지.

조금만 있으면 거의 10년 전의 한국으로 완전히 되돌아갈 것이다. 예상보다도 아주 빠르게 말이다. 환율은 거의 2000원을 넘나들고, 주식을 가볍게 1000선 아래로 내려가 주는 바로 그런 10년 전의 모습. 우리 국민들에게 아주 익숙한 그런 모습. 우리 국민들이 10년 전의 우리나라에 지독한 향수가 있었나보다. 그 향수를 즐기기 위해 다시 한 번 피눈물을 흘리게 생겼으니 어찌하면 좋을까.

미국에서부터 시작된 이번 금융위기는 적어도 우리나라를 피해가지는 않을 것이다. 왜? 우리나라는 리만 브라더스가 있지 않은가. 현대건설, BBK, 그리고 서울시까지 가는 곳마다 부도와 파탄을 몰고 다녔던 이명박과 외환위기 초래의 달인 강만수. 이 두 사람이 있는 한 우리나라는 위기를 피할 길이 없다. 한 나라에서 같은 인물이 두 번씩이나 금융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네스북이 알면 얼마나 놀랄 것인가.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을까? 이명박의 당선은 결국 대한민국의 파탄이 될 것이라는 예상은 슬프게도 적중하고야 말았다. 결국 쓰레기 언론과 한줌도 안되는 수구세력(친일과 독재의 후예)들을 제거하지 못한 그 업보를 이렇게 다시 한 번 받게 되었다.

이제서야 뭔가를 깨달은 듯한 한나라당의 몇몇 의원이란 작자들이 “달러모으기 운동”을 시작하자며 국민들의 염장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 지점에서 나는 이런 작자들이 도대체 무얼 먹고 사는지 궁금해진다. 어떤 사고를 하길래 저런 염장 만땅의 생각이 나올 수 있는지 의학적으로도 연구해 볼 가치가 있어 보인다. 아무튼 한나라당도 10년전 금모으기 운동으로 외환위기를 나름대로 극복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다. 역시 그들에게 국민은 봉이다.

나도 지갑에 100달러 짜리 지폐가 있기는 하다. 오늘도 환율이 50원이 올라, 앉은 자리에서 5000원을 벌었다. (리만 브라더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나는 다음과 같은 조건이 만족되면, 내 지갑에 있는 100달러를 기꺼이 기부하며 달러모으기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이다.

  1. 리만 브라더스의 사퇴
  2. 조중동 폐간
  3. 한나라당 해산
  4. 뉴라이트 해체 (A2 님의 제안으로부터)

이 정도 조건이면 국민들도 지난 번 금모으기 때처럼 기꺼이는 아니겠지만 달러모으기에 나서지 않겠는가.

어차피 리만 브라더스와 조중동, 그리고 한나라당이 지금처럼 정권을 잡고 있는 한, 위기를 피할 수는 없다.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즐겨야 될까? 아니 내 생각에는 우리나라, 우리 국민들이 밑바닥까지 철저히 깨져야 된다. 다시는 이런 아픔과 고통을 잊지 못하도록 뼈속 깊이 아니 국민들의 유전자에 새겨야 된다. 그래야만 저런 무리들이 권력을 다시 잡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이번 위기 속으로 들어가며 우리 국민들이 건질 수 있는 유일한 몫이다. 참으로 안타깝고 통탄스럽지만, 그 길 밖에는 없는 것 같다. 그런 기나긴 절망 속에서 다시 희망의 싹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최진실 죽음의 진실(?)

최진실 죽음의 진실(?)

최진실의 자살은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최진실을 좋아했든, 좋아하지 않았든 수많은 국민들이 어리둥절하고 당황한 것은 사실이다. 대다수 언론들은 연일 그의 죽음을 팔기에 바쁘고, 인터넷을 눈엣가시처럼 생각하는 수구 정치 집단들은 ‘최진실법’을 만들겠다고 아우성이다. 쓰레기 언론들과 수구들이 지목한 범인은 ‘인터넷 악플’이란다. 또한, 진보라고 하는 이들도 최진실 죽음에 대해 강만수가 비판받아야 한다며 일갈했다. 다들 한 여인의 자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에 여념이 없다. 참으로 인간에 대한 그리고 고인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조차 없는 인간들이다.

그렇다면 최진실은 왜 갑자기 자살을 했을까? 경찰은 충동적인 자살이라고 결론지었다. 사랑하는 두 아이까지 둔 엄마가 왜 자살 충동을 이기지 못했을까? 정말 인터넷에서 나뒹구는 쓰레기 같은 댓글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아이들까지 남기고 자살을 했을까? 자기가 사채업자라고 매도당했다 해서 그것이 억울해서 죽었을까? 그렇게 억척스럽고 똑순이 같았던 여자가, 삶의 그 많은 굴곡을 견디며 살았던 그가 이 정도의 난관을 왜 견디지 못했을까?

최진실의 죽음을 ‘인터넷 악플’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인간들은 최진실을 가장 모독하는 짓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물론, 알고도 그런다면 더 나쁜 인간들이겠지만.) 최진실이 쓰레기 악플 때문에 세상을 등질 그럴 사람이 아니다. 차리리 그 엉뚱한 소문을 퍼뜨린 자들을 찾아 법의 심판을 받게 하면 했지, 그런 사소한 일에 자신의 목숨을 버릴만한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다. 더군다나 그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아이가 있지 않은가?

경찰의 결론, 즉 충동적 자살이라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인다는 가정에서 출발하면, 최진실은 죽고 싶은 충동을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최진실이 죽었던 그 순간, 그는 이성을 잃었다는 얘기다. 어쩔 수 없었다는 얘기다. 자기의 이성으로 제어할 수 없었다는 얘기다. 왜 그랬을까?

나는 그의 우울증에 주목한다. 경찰에 따르면, 최근 6개월동안 그는 신경안정제의 복용을 늘려왔다고 한다.

최진실이 우울증을 앓았다고 하던데?
“모친에 따르면 이혼 후 몇년간 우울증으로 신경안정제를 복용해왔다고 하는데, 최근 6개월간 복용량이 조금씩 늘어났다고 하더라.”

<경찰 “최진실, 우울증으로 최근 신경안정제 복용량 늘여”>

그렇다면 신경안정제의 원리가 무엇일까? 신경안정제는 인위적으로 세로토닌이라는 물질을 증가시켜 안정을 취하게 해준다. 세로토닌은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는 호르몬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신경안정제들이 세로토닌은 증가시켜 주지만, 지나친 세로토닌의 증가로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을 감소시킨다는데 있다. 도파민은 행복을 느끼게하는 호르몬이다. 때문에 최근의 한 연구보고에 따르면 신경안정제의 장기 복용은 오히려 우울증이나 자살충동을 높일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Many depressed patients do not improve with Selective Serotonin Reuptake Inhibitor (SSRI) Antidepressants, such as Prozac, Paxil or Zoloft. Prozac and Paxil only increase serotonin and norepinephrine activity. When serotonin is increased above normal levels with medication, the brain downregulates dopamine production. Dopamine downregulation explains why some patients become suicidal on “antidepressants.”

<Antidepressants Can Increase Depression, Impulsivity and Suicide Risk by Decreasing Dopamine, Reuters>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세로토닌이 정상적인 수준보다 (인위적으로) 높게 되면, 인간의 뇌는 도파민의 생산을 줄여버린다. 이 때문에 신경안정제를 복용하는 환자들이 오히려 자살 충동을 이기지 못할 수 있다. 최진실은 이혼 이후 복용하던 신경안정제의 양을 최근 6개월동안 지속적으로 늘려왔다. 더군다나 사건 당일에는 촬영 후에 속이 상해 술을 많이 마신 것으로 나타났다. 신경안정제를 장기 복용하는 환자가 지나친 알코올을 섭취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약효가 지나치게 증폭될 수 있다. 지나치게 높은 수준의 세로토닌 증가로 도파민의 수준이 너무 낮아졌고, 최진실은 자신의 자살충동을 이성으로 제어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최근 몇 년간 자살을 했던 여자 연예인들을 보면, 대부분 공통적으로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그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신경안정제를 복용하고 있었다.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한 약의 복용이 오히려 자살 충동을 억제할 수 없는 지경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이들의 죽음은 ‘신경안정제’의 과다복용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전에도 얘기했듯이, 우울증을 치료하는 약들이 그리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이성으로 제어할 수 없는 자살충동까지 불러일으킨다면, 이런 약들에 대한 처방과 복용은 정말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광우병 위험이 제기될 때, 과학을 들이밀던 인간들이 지금 최진실의 자살에 대해서는 ‘최진실법’을 운운하며 인터넷 통제를 하려 하고 있다. 이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고인의 죽음까지도 이용하는 그런 인간들이다. 정말 귀신은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왜 엉뚱한 사람들만 데려가는가.

배우는 사람이 아니다?

배우는 사람이 아니다?

영화판에서 잔뼈가 굵은 한 제작자는 배우(俳優)라는 말을 풀어쓰면서, 한자로 배우를 나타내는 배(俳)는 사람인(人)과 아닐비(非)가 합쳐진 낱말로 “배우는 사람이 아니지만 아주 뛰어난 사람”이라는 엉뚱한 정의를 내렸다. 그는 이어서 배우들은 이성보다는 감성에 주로 의존한 삶을 살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에 비해 감수성이 아주 예민할 뿐더러 때로는 즉자적이고, 때로는 엇나간 모습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배우들은 영화나 연극 혹은 TV 연속극에서 늘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서의 연기를 해야 하는 직업을 가졌기에 때로는 진짜 자기가 누구인지 헷갈릴 때도 있을 것이다. 진짜 연기를 잘하는 배우들은 자기를 버리고 실제로 감독이나 연출자의 지휘에 몸을 맡겨버린다. 그리고, 그 작품을 촬영하는 동안에는 자기가 아닌 그 작품 속의 인물로 살아간다고 한다. 영화 밀양에서 신애를 연기한 전도연이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 작품이 끝나고도 본래의 자기로 돌아오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실제로 주홍글씨 촬영을 마친 이은주는 자살했다. 물론, 그 죽음이 영화 때문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에서 나오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배우든, 가수든 우리가 흔히 속된 말로 “딴따라”라고 부르는 광대들은 그들의 예술과 창작으로 관객들을 즐겁게 그리고 행복하게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삶은 순탄치 않다. 아니 행복하고 바른 광대들은 더이상 광대라고 부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생의 밑바닥까지 부딪혀 보지 않고는, 그 쓰디쓴 인생의 절망을 맛보지 않고는 제대로된 광대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들의 천형이라면 천형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길을 간다.

한때 이 시대 최고의 우상이었던 최진실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배우로서, 연기자로서, 그리고 광고모델로서 꽤나 성공한 축에 들지만 그의 삶은 순탄치만은 않았던 것 같다. 견뎌야했던 것들과 견딜 수 없던 것들 속에서 그는 수없이 방황했을 것이고, 그 롤러코스터 같은 삶의 끝은 그에게 너무도 갑자기 그리고 어이없게 닥쳐버렸을 것이다. 슬픔은 엄마를 그렇게 보내버린 두 아이의 몫으로 오롯이 남아버렸다. 그에게 주어진 삶이 그만큼이라는데 누굴 탓할 것인가.

최진실의 죽음은 그가 너무 유명한 스타이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 있지만, 실제 우리나라에서는 하루에 35명이 넘는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있다. 삶은 유명 배우에게도, 생활고에 시달리는 서민들에게도, 돈이 너무 많아 주체할 수 없는 재벌 회장에게도 그렇게 견디기 힘들고 팍팍한 것임을, 그리하여 붓다는 삶은 고(苦)라고 말씀하셨는지도 모른다.

비루하고, 고통스럽고, 쓸쓸하지만, 삶은 또 그렇게 지속된다. 스스로 세상을 등질 수 밖에 없었던 모든 이들의 명복을 빈다. 다음 생은 부디 편안하기를 그리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다 행복하기를…

원래 세금은 아랫것들이나 내는 것이었다

원래 세금은 아랫것들이나 내는 것이었다

고부군수 조병갑을 아는가? 동학농민혁명의 근원지였던 고부의 그 유명한 탐관오리 조병갑. 그는 만석보를 쌓으면서 그 일을 한 농민과 일꾼들에게 품삯을 주지 않고, 그 만석보의 물을 이용하는 농민들에게 엄청난 수세를 거두었다. 농민들은 일년 내내 일을 하고도 가난에 허덕이며 끼니 걱정을 하는데도 그들은 무지막지한 세금을 거두어 갔다. 묵은 황무지를 백성들에게 무상으로 갈아 먹으라고 해놓고는 추수 때가 되면 또 세금을 거두어갔다. 조병갑 애비의 공덕비를 세우겠다고 세금을 거두고, 대동미를 거두면 그 쌀을 하품으로 우겨서 그 이익을 몽땅 챙겼다.

조선시대 내놓으라하는 탐관오리가 어디 조병갑 뿐이었던가. 양반들은 세금도 면제였고, 군역도 면제였다. 오로지 힘없는 백성들만이 임금과 나라를 위해 일을 하고, 세금을 내고, 군역의 의무를 다했다. 한마디로 양반을 제외한 백성들만이 봉이었다. 동학농민혁명처럼 때때로 그 폭정에 항거하여 민란을 일으켜보기도 했지만, 엄청난 탄압을 받고 역적으로 몰려 참수되기 일쑤였다. 그것이 우리네 백성들이 살던 고단한 삶이었다.

“백성들만이 봉”인 그 유구한 전통은 봉건제가 사라지고 민주공화국이 들어서고도 6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서민의 아들들은 예외없이 군대를 가야했고, 1원이라도 탈세를 했다가는 국세청의 조사를 받아야했다. 주류 특권층들은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군역을 피했고, 설령 탈세가 걸려 법의 심판을 받았다해도 금방 사면복권되었다.

그 유구한 전통에 딱 한 번 금이 간 적이 있었는데, 2005년 그러니까 지금부터 3년전 쯤 참여정부가 종부세를 만들었을 때였다. 우리나라 부유층 상위 2% 정도에 종합부동산세를 물린 것이다. 난리가 났다. 백성 수탈이라는 수천 년의 전통을 자랑하던 이 땅에 처음으로 잘사는 사람들은 세금을 더 내라고 하니, 주류들은 꼭지가 돌았다. 수구신문들은 연일 세금폭탄이라고 맞섰고, 위헌이니 뭐니 지랄을 했다. 집 한채도 없는 어리석은 백성들은 종부세 대상자도 아니면서 세금폭탄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주류들은 종부세 대상자가 서민이라고 우겨댔다.

참여정부의 임기가 끝나고 정권이 바뀌자 이들은 종부세를 폐지하기 위해 안달했다. 국방의 의무도 다하지 않은 자가, 수백억의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 의료보험료를 만몇천원 내던 자가, 위장전입을 밥먹듯이 하던 자가, 자식들 위장취업을 시켰던 자가 대통령이 되자 대놓고 종부세를 없애겠다고 공헌했다. 종부세가 폐지되면 그 대통령이라는 자는 공직자 중에서 가장 많은 종부세 감면 혜택을 본단다.

이것이 반만년 역사를 가졌다는 한반도에 있는 아주 조그마한 나라, 대한민국의 특권 주류층의 모습이다. 세금폭탄, 징벌적 과세, 위헌을 운운하며 “단 한 명이라도 피해를 입으면 바로잡는 것”이 시장경제체제에서 심판의 할 일이란다. 단 한 명이라도 피해를 입으면 바로잡겠단다. 그리고 종부세 폐지로 줄어든 세수는 재산세를 올려 공평 과세할 것이란다. 참으로 자비롭고 공정한 대통령 아닌가, 2% 특권층 주류들에게는.

“그래, 세금은 원래 아랫것들, 상것들이나 내던 거였으니까” 이렇게 자위하며 씁쓸한 웃음을 지을 밖에. 예수가 왜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신지 알 것도 같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는 그런 부자들이 다 예수를 믿고 장로가 되고 교인이 된단다.

참으로 아스트랄한 세상에 살고 있다.

한겨레신문의 살리에리 증후군

한겨레신문의 살리에리 증후군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는 19세기초 유명한 음악가 중 하나였다. 모짜르트만 없었다면 그는 비엔나에서 가장 뛰어난 음악가로 대접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살리에리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천재인 모짜르트를 능가할 수 없었다. 그는 모짜르트 때문에 열등감과 자괴감을 가지고 살았다. 그리하여 그는 모짜르트에게 늘 시기와 질투를 느꼈고, 모짜르트가 하는 일을 사사건건 방해했다.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면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과정들이 잘 묘사되어 있다. 후에 사람들은 모짜르트와 살리에리의 관계를 바탕으로, 주위의 뛰어난 천재 때문에 극복할 수 없는 열등감, 시기, 질투를 느끼는 것을 “살리에리 증후군”이라고 불렀다.

자칭 진보정론지 한겨레신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만든 “민주주의2.0″이란 웹사이트가 영 불편한 모양이다. 한겨레는 “전직 대통령 토론 웹사이트 개설 유감”이라는 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그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전직 대통령이라고 해서 표현의 자유를 제한할 수는 없다. 노 전 대통령 말대로, 민주주의에 긴요한 시민 토론을 활성화하기 위해 애쓴다면 그걸 탓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전직 대통령이 직접 토론사이트를 개설해 운영하는 건, 민주주의 발전에 도움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불필요한 논란을 확산시키며 정치적 ‘반목과 대립’만 심화시킬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전직 대통령 토론 웹사이트 개설 유감”, 한겨레>

노무현 전 대통령이 토론사이트를 만들어 운영해 보겠다고 한 것은 그가 퇴임하기 이전에 이미 세워둔 계획이었다. 그가 퇴임을 해서 “민주주의2.0″이라는 사이트를 만들고 있었다는 것은 정치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사이트가 개설되자마자 한겨레신문이 “전직 대통령의 정치 재개” 운운하며 새삼스럽게 유감이라는 사설을 날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조중동이나 한나라당이 노무현의 행보를 주시하면서 민주주의2.0에 대해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런데 조중동이나 한나라당과 정치적 이해 관계가 사뭇 다른 (다르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한겨레가 노무현이 만든 토론사이트를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여러 가지 해석을 내놓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엔 한겨레는 노무현에 대한 살리에리 증후군을 앓고 있는 것 같다. 아니, 한겨레 뿐만 아니고, 민노당이나 최장집, 손호철, 김근태 등 이른바 얼치기 진보들도 마찬가지로 노무현에 대한 살리에리 증후군이 있다. 그동안 이들이 보인 행보를 보면, 조중동보다도 노무현에게 더 적개심을 보인 것이 사실이다.

노무현은 아는 바와 같이 운동권 내에서도 비주류에 불과했다.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고 민주세력의 중심이 되는 것이 이들은 내심 못마땅한 것이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진보 세력이 오합지졸이 되어 있는 상황에서 노무현의 민주주의2.0은 이들의 위기의식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이 진보와 민주의 중심이어야 하는데, “퇴임한 (고졸 출신의) 전직 대통령 따위가 어찌 그 자리를 넘보려고 하는가”하는 그 같쟎은 엘리트들의 우월의식이 노무현 살리에리 증후군의 본모습이다.

진정으로 이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자들이라면 전직 대통령의 토론사이트 개설을 “열렬히” 환영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이트가 잘되도록 물심양면으로 협조하고 지원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민주주의 발전은 부수적인 문제고 그것보다 노무현이 그 중심이 되는 것이 싫은 것이다. 만약, 김근태가 이런 사이트를 내놓았다면 한겨레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사설과 머릿기사를 동원해 그 사이트를 선전하기에 여념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무당은 아니지만, 이런 것은 척보면 안다.

그런데, 문제는 김근태나 최장집이나 한겨레나 소위 그 잘난 엘리트 진보들은 노무현보다도 앞서서 이런 생각을 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실은 그들이 불쌍한 것이다. 노무현보다 앞서고 싶은데 늘 뒤떨어지는 그들. 노무현보다 다들 좋은 학교 나왔는데, 언제나 여론은 노무현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시기와 열등감. 전형적 살리에리 증후군이다.

무능한 한겨레신문의 삽질 중 전형적인 예를 하나 보자. 네이버가 포탈로서 지금과 같은 지위를 누리고 있는 그 중심에는 지식in이라는 서비스가 있다. 사실 그 아이디어는 한겨레신문이 2000년에 내놓은 “디비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디비딕은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덜떨어진 잘난 진보들은 어느날 갑자기 그 서비스를 유료화해서 그 잘나가던 서비스를 말아먹고 만다. 결국 디비딕은 엠파스로 팔렸고, 네이버는 그 서비스를 흉내내어 지금과 같은 성공에 이르고 있다.

마케터 님이 지적한대로 한겨레나 소위 엘리트 진보들의 시기심 가득한 무능을 더이상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해야 한다. 인터넷을 기반한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야 하고, 새로운 언론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 중심은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노무현이어야 한다. 왜? 그가 진보 세력 중에서 가장 영리하고 능력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노회한 살리에리 같은 한겨레에서 우리의 희망을 찾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나를 부끄럽게 만든 편지 한 통

나를 부끄럽게 만든 편지 한 통

작년부터 마음에 조금 여유가 생겨 다른 이들에게 매달 조금씩 기부를 하기 시작했다. 아프리카에 사는 어린 아이들 2명과 우리나라의 중학생 2명에게 용돈을 조금씩 보낸다. 그것을 신청할 때는 조금 신경을 썼었고, 내가 후원하는 아이들의 사진이 왔을 때는 조금 흥분도 했었다. 그런데, 그 이후부터는 신용카드에서 매달 꼬박꼬박 자동 이체가 되기 때문에 나의 기부 행위를 내가 인지하기도 쉽지 않았다. 한마디로 자주 잊고 있었다는 얘기다.

오늘 내가 후원을 하는 아이의 어머니로부터 편지가 왔다. 가을날의 따사로운 햇살과 같이 잔잔하면서도 평온한 그 편지가 나를 부끄럽게 했다. 그 편지에는 온 가족의 일상이 다소곳이 묻어 있었다.

조금 나은 곳으로 이사를 했다는 얘기, 아이들이 새로 이사간 집을 좋아해서 친구를 데려왔다는 얘기, 텃밭에 채소를 심었다는 얘기, 그리고 아이들이 커나가는 얘기, 둘째가 가정 형편 때문에 대학을 포기하고 취업을 했다는 얘기, 막내는 누나들 때문에 여자에 대한 대한 환상이 깨져 여자친구가 없다는 얘기, 그런 이야기들이 정갈하게 적혀 있었다. 간간히 가슴이 멍하기도 하고, 뭉클하기도 했다.

그 편지는 나를 한없이 행복하고 만들었고, 나를 한없이 부끄럽게 만들었다. 한달에 몇 만원되지 않는 후원금을 낸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그런 편지를 받을 자격이 있을까? 내가 그 아이를 매일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후원금은 자동으로 이체되는데 내가 그런 행복과 사랑이 담긴 편지를 감당할 자격이 있을까?

그 아이의 어머니는 이렇게 편지를 맺고 있었다.

여기까지 많은 도움을 주셔서 (저희 가족들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제게 많은 용기와 힘을 주셨네요. 앞으로도 더 노력해 열심히 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많은 도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보잘것 없는 그 후원이 민망했다. 나야말로 그 아이의 어머니로부터 엄청난 행복과 감동을 받은 것 아닌가. 그 어머니의 편지는 나에게 삶의 가치와 행복의 가치를 다시 한번 일깨워 주었다.

남을 돕는다는 것,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 감사할 줄 알고 용서할 줄 안다는 것. 그것만큼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없다. 오늘 나는 그 한 통의 편지로 무한히 행복했고, 무한히 감사했고, 그리고 무한히 부끄러웠다.

그 아이가 어머니의 바람대로 건강하고 행복한 아이로 커나가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