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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gory: Life

“너는 어떤 봉사를 해왔는가?”

“너는 어떤 봉사를 해왔는가?”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선택을 하게되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된다.

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 박사는 그의 자서전 <생의 수레바퀴>에서 “신이 우리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자유의지”라고 말한다. 그 자유의지에 따라 인간들은 자기의 삶을 만들어 간다. 인간들이 각자의 소명을 다하고 물리적 몸을 벗을 때, 다시 말해 인간들의 삶이 죽음을 통해 완성될 때, 물리적 몸은 소멸하지만 인간들의 영은 창조의 근원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 존재의 근원을 신이라고 하고, 하느님이라고도 하고, 붓다라고도 부르지만 결국에는 하나의 근원이다.

지상에서의 삶을 끝내고 창조의 근원 앞에서 받는 단 하나의 질문.

“너는 어떤 봉사를 해왔는가?”

이 질문에 쩔쩔매며 우물쭈물할 나를 상상해본다.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봉사를 해왔을까.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영향을 주며 살아왔을까. 이 질문 앞에서 나는 부끄럽지 않고 당당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은 자명하다. 예수나 붓다를 비롯한 인류의 수많은 성인들과 선지자들의 가르침은 단 하나, “무조건적인 사랑”이었다. 아무런 조건없이 (심지어 원수라 할지라도)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다른 이들의 아픔과 고통을 감싸주는 것, 그것만이 영원하다는 것은 진리다.

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죽음은 결코 불행이 아니라고. 죽음은 고통도 두려움도 아니라고. 죽음은 삶의 완성이자 다른 차원으로 옮겨가는 과정이라고. 마치 누에가 고치를 벗고 나비가 되는 것과 같이. 우리가 이 세상에 온 이유는 그 “무조건적인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기 위해서이고 삶의 목적은 성장하기 위해서라고.

우리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는 우리의 몸을 진짜 “나”로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몸이 죽어 소멸하면 우리도 소멸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로스 박사의 연구와 증거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가 그토록 좋아하는) “과학”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은 수많은 신비주의 스승들이 수천 년 전부터 가르쳐왔던 것들이다. 우리의 몸이 소멸한다 해도 우리의 “참나”는 소멸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진정한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진지한 해답을 찾고자하는 사람들에게 <생의 수레바퀴>는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해줄 것이다. 이 책은 죽음에 대한 나의 생각을 바꾸어 놓았고, 그만큼 나는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한없이 기뻤다.

이 책을 추천해 주신 미리내 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평범한 사람

평범한 사람

생이 거듭될수록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야 하리라. 욕망이 소멸하고 더이상 생을 반복할 이유가 사라질 때 비로소 안식할 수 있다. 그런 삶을 위해 지극히 평범하여, 흔적도 없이 스쳐가야 한다. 바람과 같이 그리고 구름과 같이.

누가 영웅이 되고자 했던가. 누가 위인이 되고 열사가 되고자 했던가. 그들은 진정으로 그런 삶을 원했을까? 지극히 평범한 삶을 원했지만, 시대를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세상이 그들을 그렇게 몰고간 것은 아닐까? 제물이 된 것은 아닐까?

오르고 또 올라가면
모두들 얘기하는 것처럼
정말 행복한 세상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나는 갈 곳이 없었네
그래서 오르고 또 올랐네
어둠을 죽이던 불빛
자꾸만 나를 오르게 했네

알다시피 나는 참 평범한 사람
조금만 더 살고 싶어 올라갔던 길
이제 나의 이름은 사라지지만
난 어차피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으니
울고 있는 내 친구여
아직까지도 슬퍼하진 말아주게
어차피 우리는 사라진다
나는 너무나 평범한
평범하게 죽어간 사람
평범한 사람

<루시드 폴, 평범한 사람>

이렇게 담백하면서도 서정적인 가락에 시대의 아픔을 녹여낼 수 있는 조윤석은 “평범한 사람”은 아닌 듯 하다. 모두들 정글같은 세상에서 자기 욕망만을 쫓는 시대에 이런 노래를 들려주는 그가 고마울 뿐이다.

그로 인해 나는 숨을 쉴 수 있었다.

예수님께 드리는 편지

예수님께 드리는 편지

아홉살 먹은 딸아이는 아직도 성탄절을 기다리며 예수님께 편지를 썼다. 그리고 그 편지를 크리스마스 트리 앞에 놓았다. 예수님이 읽어 보고 꼭 선물을 달라는 애원(또는 협박?)이었다. 편지 앞면에는 예수의 탄생 장면이 그려져 있고, 뒷면(이면)에는 예수님께 하고 싶은 말이 적혀 있었다.

예수님께!

예수님, 내일이 예수님의 생신 성탄절이에요. 예수님은 천국에 계시죠?

저는 욕심꾸러기에요. 어쩌면 선물을 받고 싶어서 이러는지도 몰라요? 그래도 용서해 주실 거죠?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계시잖아요. 용서하지 않으신다면 벌을 받을께요…

이면지를 꼭!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이 편지를 본 아빠의 마음은 급해졌다. 예수님을 거짓말장이로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성탄 전날, 많은 가게들이 일찍 문을 닫았고, 동네 장난감 가게만이 나와 같이 마음 급한 부모들로 북적거렸다.

12월 25일이 예수 탄신일이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 분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그 분은 언제나 가장 낮은 곳에 임하셨고, “사랑”과 “용서”를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사랑과 용서, 그것 이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을까?

딸아이는 정확하게 예수님의 참뜻을 알고 있었고, 그것과 더불어 한가지 더, “선물”을 바라고 있었다. 예수님은 사랑과 용서를 보여주셨고, 아빠는 선물을 마련하였다.

천국이 어린 아이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예수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아이들만 생각하면 늘 행복하다.

가을 풍경

가을 풍경

추석이 지났다. 가을 들녘은 표현 그대로 황금 물결이었다. 신은 늘 그렇게 세상을 축복했다. 연일 따사로운 햇빛과 드높은 하늘과 맑은 물로 세상을 어루만졌다. 보릿고개는 그야말로 옛말이 되고 말았다. 곡식은 차고도 넘쳤지만, 농사를 짓는 농민들은 예나 지금이나 힘에 겨웠다.

풍년이 되어도 농민들은 울상을 짓는다. 쌀값은 그들의 힘겨운 노동을 보상해 주지 못했다. 자연은 농민들을 축복했지만, 세상은 그들을 따돌렸다. 그들은 자식과 같은 벼를 갈아엎으며 눈물을 흘렸다.


© 김도균

남쪽에는 쌀이 넘쳤고, 북쪽에는 여전히 굶는 사람들이 많았다. 남는 쌀로 굶는 사람들을 먹이면 좋으련만 이념과 탐욕은 쌀을 버리고 사람을 굶어 죽게 만들었다. 짐승만도 못한 아집과 억지만이 난무했다.

성묘를 갔더니 밤나무에 밤이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시골에는 사람이 없었고, 아무도 밤을 따가지 않았다. 감나무에도 감이 지천으로 열려 있었는데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았다.

누런 곡식과 선홍색 감, 그리고 푸른 하늘이 어우러져 더할 나위 없는 풍광을 연출했다. 산은 고요했다. 바람은 선득선득 불었다. 가을 잠자리들이 산 기슭 밭을 어른거렸다. 옹달샘에는 맑은 물이 퐁퐁 솟아났다.

지구촌 곳곳에서 지진과 해일이 일었지만, 손바닥만한 한반도의 가을은 완벽했다. 바로 이런 곳을 천국이라 할 터인데, 인간들의 탐욕은 천국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었다.

[이어 글쓰기] 소원을 말해봐

[이어 글쓰기] 소원을 말해봐

아침에 민노씨 님과 트위터를 하다가 “이어 글쓰기”를 하겠다고 덜컥 약속을 해버렸다. 지난 번에도 어떤 주제에 대해서 민노씨 님이 바통을 넘겼는데, 차일피일 미루다가 그냥 잊어버렸다. 나의 게으름과 결벽은 나도 어찌할 수 없으니 민노씨 님이 이해해주리라 믿는다. 민노씨 님은 이런 일로 삐질 그런 밴댕이 같은 남자가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존경하는 김구 선생님은 “나의 소원”이라는 글에서 조선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그의 소원으로, 그것도 세 번씩이나 말씀하셨다. 내가 지금보다 나이가 더 적었을 때, 예를 들어 만약 작년에 이런 주제를 받았다면 나는 이렇게 얘기했을 것이다. (1) 조중동 폐간, (2) 정치 검찰 추방, (3) 한나라당 해산, (4) 이명박 퇴진 등등등, 이런 것이 나의 소원이라고.

지금 나의 소원을 얘기하라고 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는 것, 그것이 나의 소원입니다. 나의 욕망을 버리고 자족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나의 소원입니다. 물처럼, 바람처럼, 나무처럼 그렇게 사는 것, 그것이 나의 소원입니다. 이런 얘기조차 할 필요가 없는 상태가 되는 것, 그것이 나의 소원입니다.

자연은 스스로 완전하다. 자연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이미 완전하기 때문이다. 바람이 불고 물이 흐르고 나무가 자라고 꽃이 핀다. 그것들은 신이 내린 법칙 안에서 그렇게 자유롭고 행복하다. 법정 스님은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라고 말씀하셨지만, 인간만 제외하고 모든 것들은 행복하다.

한때는 자연의 한 부분이었던 인간들이 이제 자연에서 분리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불행하다. 그들은 욕망으로 가득차 있고,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해 매일매일 싸운다. 그 욕망이 이루어지면 또다른 욕망이 그들을 엄습한다. 그들은 영원히 채워질 수 없는 욕망에 겨워 시름한다. 인간들이 욕망을 버리고 자연으로 되돌아가지 않는 한 모든 것은 부질없을 것이다.

그나저나 궁금한 것은 과연 소녀시대가 이 소원을 들어줄까요? 민노씨 님. 😉

덧.

이어 글쓰기는 규칙이 있군요. 제가 이런 것을 해보지 않아서 서툽니다. 이번 이어 글쓰기는 추적해보니 김우재 님이 시작하신 것 같은데, 김우재 님이 다음과 같이 규칙을 적어 놓으셨네요.

간단하게 자신이 릴레이를 받은 주자와 릴레이를 전달할 주자 3명만 명기하고, 이 페이지로 트랙백을 건다. 기한은 소녀시대가 활동을 접을 때까지 하고 싶지만…7월 30일까지. 소녀시대를 사랑하고 가카를 혼내주고 싶은 블로거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을 바라며.

제 글을 보고 이어 글쓰기를 하고 싶은 분은 7월 30일까지 쓰시고,  http://heterosis.tistory.com/trackback/211 로 트랙백하시면 됩니다. 누가 하시려나? 미리내 님? 아거 님? 도아 님? 아니면 로망롤랑 님? 아니면 CeeKay 님?

노는 게 제일 좋아

노는 게 제일 좋아

딸아이와 나는 <뽀로로>를 좋아한다.  뽀로로가 귀엽고 예쁜 꼬마 펭귄이라 좋아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뽀로로의 주제곡을 들으면 엔돌핀이 마구마구 솟구쳐 오르는 기분을 느끼기 때문이다.

노는 게 제일 좋아
친구들 모여라
언제나 즐거워
개구쟁이 뽀로로

눈 덮인 숲 속 마을
꼬마 펭귄 나가신다
언제나 즐거워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생길까

뽀로로를 불러봐요
뽀롱뽀롱 뽀로로 뽀롱뽀롱 뽀로로
뽀롱뽀롱 뽀롱뽀롱
뽀롱뽀롱 뽀롱뽀롱 뽀로로

노는 게 제일 좋아
친구들 모여라
언제나 즐거워
뽀롱뽀롱 뽀롱뽀롱 뽀로로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것은 단 한가지를 제외하고 모두 쓰레기다. 그 쓰레기 아닌 단 한가지가 바로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두말 할 것 없이 천사들이다. 그들은 기쁨이고 사랑이고 빛이다. 인간들은 그렇게 완전한 아이들을 낳아놓고 서서히 불구자로 만들어 버린다. 그들에게서 놀이를 빼앗고 웃음을 빼앗고 행복을 빼앗는다. 어처구니 없지만 지금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아이들은 놀아야 하고, 아이들은 즐거워야 한다. 아이들의 머리에서는 햇볕 냄새가 나야하고, 아이들의 몸에서는 향긋한 땀냄새가 나야 한다. 아이들은 깔깔거리고 웃어야 한다.

살아보니 남는 것은 즐겁게 논 기억 밖에 없다. 어른인 나도 노는 것이 이렇게 좋은데 아이들은 더 말해 무엇할까. 신나게 놀 줄 아는 아이들이 행복한 삶을 산다. 그런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을 만든다. 그런 아이들이 가득한 세상이 바로 천국이다.

딸아이가 고무 찰흙으로 뽀로로 인형을 만들었다. 우리는 뽀로로 인형을 앞에 두고 신나게 노래하고 춤췄다.

노는 게 제일 좋아~~~

뽀로로

핵심은 그게 아니야

핵심은 그게 아니야

간밤에 국세청 직원들인지 검찰청 직원들인지 모를 검은 양복의 기관원들이 들이닥쳤다. 신분을 밝히지 않은 그들은 “감사”를 한다는 명목으로 온 집안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나도 알아볼 수 없는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초등학교 성적표부터 대학 졸업장까지 뒤져서 찾아냈다. 졸업장에 왜 내 이름이 잘못 나와있냐며 내 학번을 외워보라고 했다. 10년 전에 산 소프트웨어는 왜 샀냐고 물었고, 딸아이의 약은 어디다 쓰는 것이냐며 따졌다. 이 집구석에는 썩은 배추가 왜 이리 많냐며 지들끼리 키득거렸다.

나는 불려다니며 하나하나 해명해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들이 나를 체포하거나 기소할만한 짓 따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당당했고, 오히려 그들에게 큰소리를 치려 했지만 목소리는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 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신문지 몇 장만을 들고 그들은 떠났다.

아침이 되어 출근을 하려 하는데, 그들이 문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가방에서 수갑을 꺼내 내 손목에 채우려 했다. 나는 아무 죄도 없는데 왜 이러냐고 따져 물었다. 그들은 말했다.

“핵심은 그게 아니야. 우린 참을 수가 없었어. 넌 우릴 모욕했어.”

그들 중 제일 나이가 어려 보이는 자는 울고 있었다. 그것이 모욕을 당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미안해서였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들이 아무리 내 손목에 수갑을 채우려 해도 수갑이 닫혀지지 않았다. 손이 몹시 아팠다.

깨어보니 꿈이었다. 기분이 착잡하고 더러웠다. 노무현 대통령이 생각났다.

죄가 없는 것이 죄가 되는 세상이었다. 아무 죄가 없는 것이 그들을 모욕하는 것이기에 잡혀가는 세상이었다.

검찰이 박연차 수사를 마무리한단다. 노무현을 죽인 이후에 그들이 더 이상 이 수사를 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우리는 이런 세상에 살고 있다.

이게 정말 꿈이었으면 좋겠다.

깊고 깊은 슬픔

깊고 깊은 슬픔

슬픔이 깊고도 깊었다. 슬픔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캄캄한 심연으로 나를 침잠시켰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밥 숟가락을 들어도, 화장실 변기에 앉아도 눈물이 흘렀다. 시간이 멈췄다.

노무현이 떠났다. 내가 사랑했던 정치인, 내가 존경했던 대통령, 내가 최후의 지지자가 되겠다고 말했던 그가 떠났다. 나는 그를 지키지 못했다. 아무도 그를 지키지 못했다.

그는 역사 앞에 그렇게 홀로 서서 역사와 맞섰다. 그리고 그는 초연히 떠났다. 그가 감당했던, 그리고 감당해야할 역사의 몫이 너무도 컸다.

운명이었다. 정의를 가지고 역사와 맞서겠다던 사람의 운명이었다. 원칙과 상식으로 비루한 역사를 다시 세워보겠다던 사람이 맞닥드려야했던 운명이었다. 아무도 그의 짐을 나누어 질 수 없었다. 서럽디 서럽도록 숭고하고 위대하지만, 나는 목이 메이고 가슴이 메여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영원히 사는 길을 택했다. 그는 역사 속에서 부활하여 신화가 될 것이다. 하지만 보잘 것 없는 나는 그가 사무치게 그리워 목놓아 울 뿐이다.

이제 그의 장난기 어린 말투도, 그의 사자후 같은 연설도, 그의 잔잔하고 따뜻한 미소도 이 세상에는 없다. 그와 같은 하늘 아래에서 숨을 쉰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었는데, 이제 그가 떠났다.

그를 어떻게 놓아 드려야 할지, 그를 어떻게 떠나 보내야 할지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되었건만, 나는 여전히 그를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 생을 떠난 그가 진실로 진실로 안식하길 기도하지만, 이 부조리하고 비루하고 빌어먹을 역사는 끊임없이 그를 불러낼 것이다. 그는 죽어서도 죽지 못할 것 같아 안타깝고도 안타까울 뿐이다.

내가 사랑했던, 그리고 사랑하는 노무현 대통령 님, 다음 생에서 당신을 만난다면 그때도 잊지 않고 당신을 사랑했었노라고, 당신의 최후의 지지자였었노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부디 편히 쉬십시오. 당신이 편히 쉴 수 있는 세상이 되길 기도합니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노무현 대통령 유서 중에서>

내 삶의 비법

내 삶의 비법

우리 시대 위대한 영적 스승 중 하나인 크리슈나무르티는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삶의 비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걱정하지 않습니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나의 수준으로 이 말의 진의를 깨닫기는 무리지만, 집착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삶이 그런 것이 아닐까 짐작만 해 본다.

나는 이 말을 들으면서 아내가 떠올랐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아내와 나는 억겁의 카르마로 연결된 인연으로 이 생에서 부부의 연을 맺었고, 우리는 서로를 아끼며, 사랑하며, 존경하며 살아왔다.

지금 이 순간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내가 걱정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나의 아내 때문이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언제부턴가 내 속에 그가 들어와 있음을 알았다. 그는 멀리 있어도 내 안에 있었고, 그의 영혼과 나의 의식은 교감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지금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이제 십 년도 훨씬 지난 일이 되어버렸는데,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느 날, 아내가 내 앞에 나타났다. 아내와의 첫 만남은 다른 여자들과의 만남과는 달랐다. 그는 억겁의 인연에 따라 신이 내게 보내준 나의 분신이었다. 그때는 그 다른 느낌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이제와 생각해 보면 그로 인해 나의 삶이 완성될 것이란 일종의 계시와 같은 것이었다.

그 인연은 빗나가지 않았고, 우리는 결혼을 하여 십여 년을 부부로 지냈다. 아내는 나와의 결혼을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고, 다시 태어나도 나와 결혼한다고 말했다. 나는 아내를 내게 보내준 신과 억겁의 인연에 감사했다. 나의 영혼은 사랑으로 충만해졌다.

오늘은 아내의 생일이다.

그가 세상에 옴으로 해서 내 존재가 세상에 올 수 있었고, 그가 나에게 옴으로 해서 나의 삶은 비로소 완성되었다. 언젠가 있을지도 모르는 그의 부재에 대한 슬픔으로 눈물을 흘렸던 적이 있지만, 지금은 그 경지를 넘어선 것 같다. 설령 어떤 이유로 인해 이 생에서 그와 헤어져야 한다 해도 걱정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 내 안에 들어와 있고 우리는 언제나 같이 있기 때문에 또 다른 생에서 만날 수 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걱정하지 않는다.

내 삶의 비법은 바로 나의 아내이기 때문에.

축하해 그리고 사랑해.

착한 사람 되는 방법

착한 사람 되는 방법

사람은 누구나 착한 사람이 되려 한다. 평생 거짓말을 일삼던 사기꾼들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선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 욕망이 있다. 착한 사람이 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그야말로 착한 일을 해서 착한 사람이 되는 경우다. 이 방법은 절대적으로 착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만 그만큼 쉽지 않다. 누구나 착한 사람이 되고 싶어하지만 실제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은 드물다. 다른 하나는 상대적으로 착한 사람이 되는 방법이 있다. 이것은 상대방이 자기보다 악한 사람임을 증명하는 되는 것이다. 굳이 어렵게 착한 일을 할 필요가 없다. 단지 상대방이 나쁜 짓을 했다는 사실만 입증함으로써 자신은 선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도덕적으로 꿀릴 것이 없다”

기독교 장로인 그가 자기 자신까지, 자기 내면의 양심까지 속일 수 있다면 그는 또다른 종류의 위인이 될 것이다. 상대방이 나쁜 사람임을 증명함으로써 자기가 선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그 상대방을 적당히 잘 골라야 할 것이다.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을 속인 이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