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owsed by
Category: Life

5천억으로도 살 수 없는 행복

5천억으로도 살 수 없는 행복

삼성그룹 전 회장 이건희의 아들인 이재용이 자신의 아내으로부터 5천억 재산분할을 해달라는 이혼소송을 당했다. 그의 아내가 왜 이혼소송을 제기했는지 언론들은 전하고 있지 않지만, 그 이유는 모두들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알다시피 이재용은 돈많은 아버지로부터 현금 60억을 받아서 십수년만에 1조원의 재산을 불린 장본인이다. 1조원의 재산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그는 단 16억의 증여세만을 납부했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과정에서 불법 의혹을 제기하여 소송을 했고, 법원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사실 삼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무소불휘의 권력을 가진 집단이다. 그 엄청난 금권으로 언론과 입법, 사법, 행정부를 장악하고 있다고 봐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삼성의 정치자금을 받지 않은 국회의원이나 정치인이 드물 것이고, 검찰은 정기적으로 관리(떡값)를 받고 있음이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로 드러났다. 그들의 언론 관리야 말하면 무엇하랴.

그런데 그렇게 돈이 많고 법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초법적 권력을 휘두르는 재벌 삼성의 황태자 이재용은 자신의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지는 못한 모양이다. 결혼한 지 십년이 넘었고, 자식도 둘이나 둔 상황에서 아내가 재산의 절반을 내놓으라며 소송까지 할 정도라면 그들의 결혼 생활이 어떠했는지,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미루어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어떤 사람들은 단돈 5천원을 가지고도 아내를 그리고 남편을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삼성의 이재용처럼 1조원이라는 재산을 가지고도 행복한 가정을 꾸리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돈이 너무 많으면 오히려 불행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자족할 줄 알아야 하고, 다른 사람들을 돌볼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유지해야 하고, 욕심을 버려야 한다. 행복은 나를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온다. 그리고 나눌 줄 아는 마음에서 행복은 싹트기 마련이다.

나에게는 사랑하는 아내가 있고, 너무나 예쁜 딸이 있어 나는 행복하다. 아직까지 건강을 잃지 않고 있으며, 밥은 굶지 않을 정도의 수입이 있고, 그 수입을 쪼개서 다른 이들을 도울 수 있으니 나는 행복하다.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진리다.

나도 모르는 나를 알아내는 방법

나도 모르는 나를 알아내는 방법

도아 님의 블로그에 갔다가 “엄마도 모르는 내속을 알아내는 방법”이란 글에서 알게된 ID Solution의 취향 분석. 도아 님처럼 재미로 해봤는데, 나보다 더 나를 잘 아는 듯 나의 취향을 그럴듯하게 분석해냈다. 역시나 나는 일탈적 개인주의, 아방가르드 영역으로 분류되었다.

“난 신도 믿고, 과학도 믿고, 그리고 일요일 저녁 약속이 있을 거란 것도 믿어. 하지만, 내가 이렇게 저렇게 살아야 한다는 법칙 따윈 믿지 못하겠군.” 길 그리썸(CSI 라스베가스)

이곳은 격식과 통념에서 벗어난, 지극히 개인적이고 일탈적인 비주류를 위한 곳입니다. 고답적인 창작자, 그리고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의 예술과 문화의 성역이기도 합니다.

사회적 규율과 질서를 숭상하는 엄숙주의자, 국민 정서와 사회 정화를 믿는 검열주의자,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은 당장 사라져 주시기 바랍니다.

이 영역에 속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 문화 예술 애호가. 문화 예술에 대한 평론가 수준의 심미안과 감별력을 소유했을 가능성도 있음.
  • (문화 예술 애호가가 아닐 경우) 경험과 교육에 의한 것이 아닌, 선천적인 감각을 가졌음. 진짜와 가짜, 진실과 거짓을 알아보는 타고난 감각.
  • 다듬어지지 않은 자신감과 솔직함, 진실을 존중함.
  • 극단적 개인주의, 전위적 창의력을 장려함.

[ID Solution 취향 분석, 일탈적 개인주의 아방가르드 영역]

물론 나는 평론가 수준의 심미안이나 감별력을 소유하지도 않았고, 전위적 창의력을 가지지도 않지만, 문화예술을 좋아하고 진짜와 가짜 정도는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늘 자유로와지길 원하는 비주류이다. 얽매이는 걸 싫어하고 누가 간섭하는 것을 잘 견디내지 못한다. 조직에 순응하지 못하고, 규율을 강요하는 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독단주의자, 근본주의자들은 나와 절대로 어울릴 수 없다.

나는 늘 자유롭게 노닐고 싶을 뿐이고, 소요유하고 싶을 뿐이다. 할 수만 있다면.

아이들의 가슴에 대못을 치는 세상

아이들의 가슴에 대못을 치는 세상

가르치지 않아도 아이들은 잘 자란다. 예쁘고 반듯하고 명랑하고 건강하게 자란다. 잠든 아이 머리맡에 있는 일기장을 펼쳐보다가 “내가 나비가 된다면”이라는 제목의 일기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나비가 된다면 가장 예쁜 꽃에 집을 지을 것이다. 어떻게 지을거냐면 꽃에 눕고 또다른 꽃잎을 이불로 사용할 것이다. 집을 다 완성하면 꿀을 많이 모아 친구들에게 나누어줄 것이다. 그리고 꿀벌과도 힘을 합쳐서 꿀을 모을 것이다.

여름과 가을이 지나서 겨울이 되면 그동안 꿀벌이랑 친구들과 모은 꿀들을 똑같이 나누어 가질 것이다. 친구들과 꿀벌들은 내년 봄에 다시 만날 것이다.

초등학교 1학년 딸아이가 쓴 너무나 따뜻하고 예쁜 글이다. 내가 간섭하지 않아도 아이는 이렇게 잘 자라고 있다. 대견하고 고마운 일이다.

이렇게 예쁜 아이들이 좋은 선생님들과 즐겁게 공부해야 할 학교에 탐욕에 찌들은 자들은 경찰까지 밀어넣었다. 일제고사라는 시험시간에 체험학습을 허락했다는 이유로 선생님들을 자르고, 아이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겼다. 대한민국의 “교육현장”에서 2008년 12월에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사회 곳곳이 전쟁터 아니면 공사판으로 변하고 있다. 나중에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떤 변명을 해댈 것인가? 절반의 탐욕과 절반의 무관심으로 이 야만의 권력을 우리 손으로 만들었다고 자랑할 것인가?

성탄절을 앞두고 가장 즐거워야할 아이들의 가슴에 대한민국은 대못을 치고 있다. 예수가 와서 통곡할 일이 아닌가.

너의 목소리가 들려

너의 목소리가 들려

아무리 애를 쓰고 막아보려 하는데도
너의 목소리가 들려

한 시대에 획을 긋는 음악과 노래들이 있다. 10여년 전 델리스파이스의 “챠우챠우”도 그런 노래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담백하고 냉소적인 분위기가 나를 압도한다. 냉소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비주류였고, 주변인이었다. 군더더기를 싫어했고 탐욕을 저주했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중심이 아니고 그 주변을 맴도는, 그것도 위성이 아닌 혜성이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길을 그렇게 떠나버리는, 그렇다고 딱히 갈 곳이 정해져 있지도 않은.

나에게는 인생의 목표가 없었다. 지금도 그렇고. 무엇이 되고자 하지도 않았다. 그냥 주어진 시간을 때로는 기쁘게, 때로는 힘들게 견뎌왔다. 종착역은 없었고, 운명을 개척하려 하지도 않았다. 계획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물이 흐르듯 세월에 삶을 맡겼다.

그런데도 가끔은 여유로웠고, 때로는 행복했다.

문제는 여전히 탐욕이다

문제는 여전히 탐욕이다

20세기의 위대한 영혼 간디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Earth provides enough to satisfy every man’s need, but not every man’s greed.

자연은 모든 인간의 “필요”를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지만, 모든 인간의 “탐욕”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라는 이 간결한 말은 지금 우리가 처한 경제 위기가 도대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결국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 세계화된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문제는 끝없는 탐욕의 추구에 있다. 문제의 근본 원인이 간단하게 진단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다수의 인간들은 그 탐욕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청빈하고 간소하게 사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간들뿐만 아니라 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의 행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규범이라 할 것이다. 나는 지금 시작되는 이 경제 위기 속에서 인간들이 삶의 방법을 보다 현명하게 배워나가기를 바란다. 지능이 있는 생명체라면 그렇게 진화해야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이런 피눈물나는 대가를 치루고도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에게는 미래가 없다.

인간들은 신과 자연 앞에 겸손해야하며, 욕망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하고,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모든 종교가 인간들에게 주는 가르침이다.

https://i0.wp.com/www.languageinindia.com/dec2002/gandhi1.jpg?w=640

어머니를 사로잡은 남자

어머니를 사로잡은 남자

지난 여름 은퇴를 하신 어머니는 이미 환갑을 넘기셨지만, 아직까지도 마음 가득히 동심을 품고 계신다. 그동안 고생도 많이 하셨지만, 아직 육십대라고 하기엔 너무 젊고 건강하시다. 말없이 보여주신 어머니의 삶은 내가 평생 보고 배워야할 내 인생의 교과서 같은 것이었다. 그러고보면 나는 참 운이 좋은 녀석이다. 정말 좋은 어머니를 만났고, 정말 좋은 아내를 만났으며, 정말 예쁘고 사랑스러운 딸을 만났으니 말이다. 지난 주말 어머니는 뜬금없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는 왜 젊은 애들이 연예인을 보고 ‘오빠’, ‘오빠’ 하면서 난리치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어머니도 드디어 오빠부대에 합류를 하신 것이다. 도대체 나이 육십을 넘긴 할머니 – 물론, 어머니는 할머니라고 불리기엔 너무 젊으시다 – 를 사로잡은 녀석이 누구란 말인가? 그는 연기자 김명민이었다. 어머니는 그를 처음 본 것이 “불멸의 이순신” 때였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의 표현에 따르면, 진짜 이순신보다도 더 이순신 같이 연기를 했다는 그 배우. 어머니는 김명민이 나오는 드라마를 거의 다 봤다고 하셨다. 하얀거탑의 장준혁을 거쳐 요즘 인기리에 방송되고 있는 “베토벤 바이러스”까지 그의 연기는 어머니 말씀마따나 더할나위 없이 무르익고 있었다.
꿈? 그게 어떻게 니 꿈이야? 움직이질 않는데. 그건 별이지. 하늘에 떠 있는, 가질 수도 없는, 시도조차 못하는, 쳐다만 봐야 하는 별! 누가 지금 황당무계 별나라 얘기하재? 니가 뭔갈 해야 될 거 아냐? 조금이라도 부딪치고, 애를 쓰고, 하다 못해 계획이라도 세워봐야 거기에 니 냄새든 색깔이든 발라지는 거 아냐? 그래야 니 꿈이다 말할 수 있는 거지. 아무거나 갖다 붙이면 다 니 꿈이야? 그렇게 쉬운 거면, 의사, 박사, 변호사, 판사 몽땅 다 갖다 니 꿈하지 왜? 꿈을 이루라는 소리가 아냐. 꾸기라도 해 보라는 거야. 사실 이런얘기 다 필요없어. 내가 무슨 상관 있겠어. 평생 괴로워할 건 넌데. 난 이정도 밖에 안되는 놈이구나, 꿈도 없구나, 꾸지도 못했구나, 삶에 잡아 먹혔구나. 평생 살면서 니 머리나 쥐어 뜯어봐. 죽기 직전이 되어서야 ‘지휘’? 단발마의 비명 정도 지르고 죽던지 말던지
어머니를 사로잡은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는 지금 나에게 “꿈”이란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다. 꿈이란 그냥 하늘에 있는 별이 아니라고. 무언가를 해야 그것이 나의 꿈이 될 수 있다고. 그렇다면 나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강마에. 너는 나의 어머니를 사로잡을만한 녀석임을 인정한다.
피폐해지는 블로그

피폐해지는 블로그

“티벳 사자의 서”의 저자 파드마삼바바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과거 삶을 알고 싶으면 현재 그대의 행동을 들여다보아라. 그대의 앞날을 알고 싶으면 현재 그대의 행동을 들여다보아라.

블로그의 글들이 점점 피폐해진다. 비난과 비판과 비아냥으로 가득 차 있는 글들은 내가 써놓은 것이긴 하지만 참으로 읽기 민망하다. 증오와 분노가 영혼을 피폐하게 만든다는 달라이 라마의 가르침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분노한다. 인간들의 역사가 파렴치하고 탐욕적인 자들의 농간으로 끊임없이 더럽혀져 왔다는 사실에 나는 절망한다.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려야 했고, 간디는 암살당했다. 달라이 라마는 정치적 망명을 떠나야 했으며, 김구도 저들의 총탄에 세상을 떠났다.

왜 역사는 이리도 부조리하단 말인가? 왜 사필귀정은 영화 속에서만 가능한 것일까? 왜 가난한 자들은 늘 그렇게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는가? 왜 정의로운 자들은 늘 그렇게 탄압을 받아야 하는가? 수천 년 전 예수와 부처가 고민한 문제들은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결국 인간이란 구원받을 수 없는 절망적인 존재들이란 말인가?

블로그 글들이 피폐해지는 만큼 내 영혼도 피폐해진다. 파드마삼바바의 말처럼 현재 나의 모습은 과거와 미래의 나의 모습일 것인데, 나는 그 사실이 두렵다.

따뜻하고 소박한 글들을 쓰고 싶다. 하지만 이런 바람은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원하는 것만큼이나 공허해 보인다. 그런 나의 무기력이 슬프고, 비루하고 처참한 세상이 슬프다.

어떻게 살 것인가.

배우는 사람이 아니다?

배우는 사람이 아니다?

영화판에서 잔뼈가 굵은 한 제작자는 배우(俳優)라는 말을 풀어쓰면서, 한자로 배우를 나타내는 배(俳)는 사람인(人)과 아닐비(非)가 합쳐진 낱말로 “배우는 사람이 아니지만 아주 뛰어난 사람”이라는 엉뚱한 정의를 내렸다. 그는 이어서 배우들은 이성보다는 감성에 주로 의존한 삶을 살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에 비해 감수성이 아주 예민할 뿐더러 때로는 즉자적이고, 때로는 엇나간 모습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배우들은 영화나 연극 혹은 TV 연속극에서 늘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서의 연기를 해야 하는 직업을 가졌기에 때로는 진짜 자기가 누구인지 헷갈릴 때도 있을 것이다. 진짜 연기를 잘하는 배우들은 자기를 버리고 실제로 감독이나 연출자의 지휘에 몸을 맡겨버린다. 그리고, 그 작품을 촬영하는 동안에는 자기가 아닌 그 작품 속의 인물로 살아간다고 한다. 영화 밀양에서 신애를 연기한 전도연이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 작품이 끝나고도 본래의 자기로 돌아오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실제로 주홍글씨 촬영을 마친 이은주는 자살했다. 물론, 그 죽음이 영화 때문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에서 나오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배우든, 가수든 우리가 흔히 속된 말로 “딴따라”라고 부르는 광대들은 그들의 예술과 창작으로 관객들을 즐겁게 그리고 행복하게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삶은 순탄치 않다. 아니 행복하고 바른 광대들은 더이상 광대라고 부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생의 밑바닥까지 부딪혀 보지 않고는, 그 쓰디쓴 인생의 절망을 맛보지 않고는 제대로된 광대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들의 천형이라면 천형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길을 간다. 한때 이 시대 최고의 우상이었던 최진실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배우로서, 연기자로서, 그리고 광고모델로서 꽤나 성공한 축에 들지만 그의 삶은 순탄치만은 않았던 것 같다. 견뎌야했던 것들과 견딜 수 없던 것들 속에서 그는 수없이 방황했을 것이고, 그 롤러코스터 같은 삶의 끝은 그에게 너무도 갑자기 그리고 어이없게 닥쳐버렸을 것이다. 슬픔은 엄마를 그렇게 보내버린 두 아이의 몫으로 오롯이 남아버렸다. 그에게 주어진 삶이 그만큼이라는데 누굴 탓할 것인가. 최진실의 죽음은 그가 너무 유명한 스타이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 있지만, 실제 우리나라에서는 하루에 35명이 넘는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있다. 삶은 유명 배우에게도, 생활고에 시달리는 서민들에게도, 돈이 너무 많아 주체할 수 없는 재벌 회장에게도 그렇게 견디기 힘들고 팍팍한 것임을, 그리하여 붓다는 삶은 고(苦)라고 말씀하셨는지도 모른다. 비루하고, 고통스럽고, 쓸쓸하지만, 삶은 또 그렇게 지속된다. 스스로 세상을 등질 수 밖에 없었던 모든 이들의 명복을 빈다. 다음 생은 부디 편안하기를 그리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다 행복하기를…
나를 부끄럽게 만든 편지 한 통

나를 부끄럽게 만든 편지 한 통

작년부터 마음에 조금 여유가 생겨 다른 이들에게 매달 조금씩 기부를 하기 시작했다. 아프리카에 사는 어린 아이들 2명과 우리나라의 중학생 2명에게 용돈을 조금씩 보낸다. 그것을 신청할 때는 조금 신경을 썼었고, 내가 후원하는 아이들의 사진이 왔을 때는 조금 흥분도 했었다. 그런데, 그 이후부터는 신용카드에서 매달 꼬박꼬박 자동 이체가 되기 때문에 나의 기부 행위를 내가 인지하기도 쉽지 않았다. 한마디로 자주 잊고 있었다는 얘기다.

오늘 내가 후원을 하는 아이의 어머니로부터 편지가 왔다. 가을날의 따사로운 햇살과 같이 잔잔하면서도 평온한 그 편지가 나를 부끄럽게 했다. 그 편지에는 온 가족의 일상이 다소곳이 묻어 있었다.

조금 나은 곳으로 이사를 했다는 얘기, 아이들이 새로 이사간 집을 좋아해서 친구를 데려왔다는 얘기, 텃밭에 채소를 심었다는 얘기, 그리고 아이들이 커나가는 얘기, 둘째가 가정 형편 때문에 대학을 포기하고 취업을 했다는 얘기, 막내는 누나들 때문에 여자에 대한 대한 환상이 깨져 여자친구가 없다는 얘기, 그런 이야기들이 정갈하게 적혀 있었다. 간간히 가슴이 멍하기도 하고, 뭉클하기도 했다.

그 편지는 나를 한없이 행복하고 만들었고, 나를 한없이 부끄럽게 만들었다. 한달에 몇 만원되지 않는 후원금을 낸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그런 편지를 받을 자격이 있을까? 내가 그 아이를 매일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후원금은 자동으로 이체되는데 내가 그런 행복과 사랑이 담긴 편지를 감당할 자격이 있을까?

그 아이의 어머니는 이렇게 편지를 맺고 있었다.

여기까지 많은 도움을 주셔서 (저희 가족들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제게 많은 용기와 힘을 주셨네요. 앞으로도 더 노력해 열심히 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많은 도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보잘것 없는 그 후원이 민망했다. 나야말로 그 아이의 어머니로부터 엄청난 행복과 감동을 받은 것 아닌가. 그 어머니의 편지는 나에게 삶의 가치와 행복의 가치를 다시 한번 일깨워 주었다.

남을 돕는다는 것,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 감사할 줄 알고 용서할 줄 안다는 것. 그것만큼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없다. 오늘 나는 그 한 통의 편지로 무한히 행복했고, 무한히 감사했고, 그리고 무한히 부끄러웠다.

그 아이가 어머니의 바람대로 건강하고 행복한 아이로 커나가길 기도한다.

딸아이의 이빨을 뽑아주며

딸아이의 이빨을 뽑아주며

딸아이의 이빨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조그맣고 하얀 옥수수 알갱이 같은 이빨이 흔들리니, 녀석은 몹시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시간만 나면 거울 앞에 서성거리며, 손가락으로 흔들리는 이빨을 건드려 보는 것이다.

“아빠, 이 이빨 이제 이만큼 흔들린다.”

올들어 딸아이는 여덟 개의 이빨을 뽑았다. 그리고 그 중 네 개는 큼지막한 새 이빨이 다시 나고 있다. 어떤 것은 아내가 병원에 데리고 가서 뽑아주기도 하고, 어떤 것은 집에서 실을 묶어 뽑아주기도 했다. 딸아이는 여러 개의 이빨을 뽑아봤어도 여전히 이빨을 뽑을 때면 좀 겁이 나는 모양이었다. 실을 묶으면 다시 망설이다가, 거울 앞에서 흔들어 보다가, 다시 뽑겠다고 하다가, 그렇게 몇 시간을 보내고 나면 이빨은 거의 빠져 있었다. 톡 건들기만 하면 그냥 빠질 수 있게 말이다.

이제 젖니를 갈고, 새 이를 갖기 시작한 딸아이. 요녀석을 낳은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새 이를 가져야 하는 어린이로 자랐다.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고, 셈을 배우기 시작하고, 친구가 하나 둘씩 생기면서 이제 사회가 무엇인지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딸아이를 키우면서 느끼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참 대견하다는 것이다. 밥도 잘 먹고, 무럭무럭 그리고 명랑하게 자라는 녀석이 정말 자랑스럽다. 그런데 다른 하나는 지금 딸아이의 이빨을 뽑아주는 이 순간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아쉬움이다. 녀석은 점점 자라서 사춘기를 맞을 것이고, 쾌활한 10대를 지나 싱그러운 여자로 성장할 것이다. 결혼 전의 아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면서 딸아이는 나와 아내의 품에서 떠나갈 것이다. 물론 그때가 되더라도 행복하기는 하겠지만, 지금 이 아이를 품에 안고 이빨도 뽑아주고, 머리도 감겨주고, 그리고 같이 쎄쎄쎄 하면서 놀아줄 수 있는 순간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딸아이가 크는 것이 정말 대견하면서도, 그 녀석이 너무 쉽게 자라는 것 같아 아쉬운 이 이율배반의 감정. 딸아이를 키운 부모들만이 느낄 수 있는 사랑이 아닐까.

지금도 아내에게 가끔 이런 말을 한다. “이렇게 키워서 나중에 어떻게 시집을 보내지?” 딸아이가 나중에 결혼을 한다 할때도 기쁜 마음과 서운한 마음이 교차할 것이다. 결혼식장에서 딸의 손을 사위에게 넘겨주면서 눈물을 흘릴지도 모르겠다.

딸아이의 이빨을 뽑아주면서 벌써 그런 애틋한 감정이 찾아올 거라는 것을 알아버렸다.

이발 뽑는 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