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 뇌는 현재 순간의 풍요로움에 모든 걸 맞춘다. 삶에 대한 고마움, 살아가며 만나는 모든 사람과 모든 것에 대한 고마움으로 가득하다. 매사에 만족하고, 정이 많고, 넉넉히 끌어안고, 한결같이 낙관적이다. 우뇌의 성격은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의 판단이 없으므로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바라본다. 현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인정한다. [중략]
오른쪽 뇌에는 현재 순간 외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으며, 매 순간이 감각들로 채워진다. 출생이나 죽음은 현재 순간에 일어난다. 기쁨의 경험 역시 현재 순간에 일어난다. 우리 자신보다 거대한 존재를 지각하고 그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경험 또한 현재 순간에 일어난다. 우뇌에서는 ‘지금 이 순간(The Moment of Now)’만이 끝없이 계속 이어진다.
<질 볼트 테일러, 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윌북, 2019, pp. 140-141>
깨달음의 핵심은 현상계가 오직 생각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인데, 오히려 생각 너머의 세계까지 생각 안으로 끌고 와 버리는 것이다. 실상계는 현상계와 다른 차원에 있기에 현상계에서의 노력으로 현상계를 벗어나 실상계에 도달하는 일은 애초 불가능한 일이다. 현상계가 실상계의 일부라는 사실을 온전히 이해함으로 이미 실상계에 있었음을 알게 되는 것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없다거나 모른다고 하는 것은 생각의 한계와 오류에서 벗어나라는 뜻이다.
<중략>
無我, 나는 없다.
지금껏 ‘나’라고 여겨왔던 것은 생각과 기억의 다발이다. 그것은 연기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일시적인 현상들을 묶어서 自性을 가진 고정된 실체로 간주한 것이다. 그러나 독립된 실체로서의 ‘나’는 없다.
無知, 오직 모를 뿐이다.
현상계는 모두 생각으로 구성된 가상현실이다. 그 현상계의 본질인 실상의 세계, 생각 너머의 세계는 체험하거나 인식할 수가 없다. 생각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 대해 뭔가를 아는 것이 있다면 이미 생각이 작동된 것이다. 텅빈 無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것 또는 저것이 있다고 인지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오직 모를 뿐이다. (생각을 통하지 않고 아는 것이 있는가를 묻는다면, 한 번의 숨을 길게 들이키고 내쉰 뒤 無知라고 대답하겠다.)
唯念, 생각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마음 밖에 한 법도 없다.)
현상계는 모두 생각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나, 우주, 가족, 사랑, 진리, 깨달음 등의 개념으로 표현되는 일체는 생각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것이어서 그 생각의 작용을 벗어난 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단어로 표현되는 모든 생각의 바깥 세계는 무념이다.
우리가 수행을 하는 이유는 우리도 부처님처럼 살아보기 위해서입니다. 부처님은 맨발에 헌 옷 하나 걸치고 나무 밑에서 자고 남의 집에서 밥을 얻어먹고 살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했지만 왕보다 행복했고, 모든 사람이 부처님을 찾아와 인생을 상담할 만큼 지혜로웠습니다.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았고 수천 대중과 함께 있어도 귀찮아하지 않았습니다. 숲에 홀로 있으면 정진하기 좋았고, 시끄러운 저자에 있으면 교화하기 좋았습니다. 먹을 것이 없으면 수행하기에 좋았고, 먹을 것이 많으면 베풀 수 있어 좋았습니다. 사람들이 비난하면 인욕행(忍辱行)하기에 좋았고, 사람들이 우러러 존경하고 따르면 법을 전하기에 좋았습니다. 부처님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괴로움이 없고 자유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붓다의 삶입니다. 이런 붓다의 삶을 본받는 것, 붓다처럼 되는 길이 바로 수행의 길입니다.
이렇게 자유롭고 행복한 사람이 되면 아무 가진 것이 없어도 비굴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부족한 줄을 알아서 참회하는 사람은 어딜 가더라도 교만하지 않습니다. 비굴하고 교만한 것을 버리고 당당하고 겸손한 삶을 사는 것, 이것이 수행자가 살아가야 할 길입니다.
인도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Mahabharata)> 3장에서 강인한 영혼인 야크사(Yaksa)가 팝다바(Papdava)의 최고령자이자 현자인 유디스티라(Yudhisthira)에게 무엇이 가장 큰 신비인지 물었다. 이에 현자는,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데도 살아 있는 자들은 자신들이 불멸의 존재인 것처럼 산다”라고 대답했는데, 이 말은 수천 년 동안 회자되었다.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먼저 마음을 하나로 모으라.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라. 다음엔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氣)로 들어라. 귀는 고작 소리를 들을 뿐이고, 마음은 고작 사물을 인식할 뿐이지만 기(氣)는 텅 비어서 무엇이든 받아들이려 기다린다. 도(道)는 오로지 빈 곳에만 있는 것. 이렇게 비움이 곧 ‘마음의 재(心齋)’니라.”
“허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사피엔스가 사용하는 언어의 가장 독특한 측면이다. 오직 호모 사피엔스만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고, 아침을 먹기도 전에 불가능한 일을 여섯 가지나 믿어버릴 수 있다는 데는 누구나 쉽게 동의할 것이다. 원숭이를 설득하여 지금 우리에게 바나나 한 개를 준다면 죽은 뒤 원숭이 천국에서 무한히 많은 바나나를 갖게 될 거라고 믿게끔 만드는 일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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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허구 덕분에 우리는 단순한 상상을 넘어서 집단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성경의 창세기, 호주 원주민의 드림타임 신화, 현대 국가의 민족주의 신화와 같은 공통의 신화들을 짜낼 수 있다. 그런 신화들 덕분에 사피엔스는 많은 숫자가 모여 유연하게 협력하는 유례없는 능력을 가질 수 있었다.
파리는 나면서부터 부모한테 버려진 채 평생 가족도 집도 없이 혼자 산다. 항상 벌, 거미, 참새 등의 위협을 받지만 남을 위협하는 일은 없고, 먹이라고는 인간 사회의 폐기물밖에 없다. 파리의 생태는 전혀 아름답지 않지만, 잔인하지 않으며 극히 조촐한, 말하자면 서민들이 사는 모습과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