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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법에 대한 사기

비정규직 법에 대한 사기

비정규직 법을 유예하지 않으면 수십 만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해고당할 것이라는 정부와 한나라당과 언론들의 “협박”이 과연 사실일까? 계약한지 2년이 지난 노동자들은 모두 다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라고 과연 비정규직 법에 명시되어 있을까?

나는 그것이 궁금하여 친히 국가법령정보센터에 방문하여 “비정규직 법”을 검색해 보았다. 검색결과는 없었다. 비정규직 법이라는 이름의 법안은 없었다.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노동부 소관 법령들 중에서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 있었다. 그러니까 언론들이 얘기하는 비정규직 법이 바로 이 법안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 법은 비정규직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하기 위한 법이 아니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당하는 차별을 어느 정도 해소해 보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제1조 (목적) 이 법은 기간제근로자 및 단시간근로자에 대한 불합리한 차별을 시정하고 기간제근로자 및 단시간근로자의 근로조건 보호를 강화함으로써 노동시장의 건전한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이 법의 목적 자체는 아주 훌륭했다. 같은 업종에 종사하고 같은 일을 하더라도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만으로 당하는 차별은 당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명박 정권이나 한나라당 그리고 대다수 언론들이 법을 유예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협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법의 4조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제4조 (기간제근로자의 사용)
①사용자는 2년을 초과하지 아니하는 범위 안에서(기간제 근로계약의 반복갱신 등의 경우에는 그 계속근로한 총기간이 2년을 초과하지 아니하는 범위 안에서) 기간제근로자를 사용할 수 있다. 다만,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2년을 초과하여 기간제근로자로 사용할 수 있다.
1. 사업의 완료 또는 특정한 업무의 완성에 필요한 기간을 정한 경우
2. 휴직·파견 등으로 결원이 발생하여 당해 근로자가 복귀할 때까지 그 업무를 대신할 필요가 있는 경우
3. 근로자가 학업, 직업훈련 등을 이수함에 따라 그 이수에 필요한 기간을 정한 경우
4. 「고령자고용촉진법」 제2조제1호의 고령자와 근로계약을 체결하는 경우
5. 전문적 지식·기술의 활용이 필요한 경우와 정부의 복지정책·실업대책 등에 따라 일자리를 제공하는 경우로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경우
6. 그 밖에 제1호 내지 제5호에 준하는 합리적인 사유가 있는 경우로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경우

②사용자가 제1항 단서의 사유가 없거나 소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2년을 초과하여 기간제근로자로 사용하는 경우에는 그 기간제근로자는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계약을 체결한 근로자로 본다.

이 법에 따르면 되도록이면 비정규직 노동자를 2년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사용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4조 1항에는 2년을 초과하여 비정규직 노동자를 사용할 수 있는 경우를 나열하고 있다. 따라서 모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2년이 지났다고 해서 해고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자를 2년 이상 사용했다고 해서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는 규정도 없다.

문제는 4조 2항의 경우인데, 특별한 사유없이 2년을 초과하여 비정규직 노동자를 사용하는 경우는 비정규직이라 할지라도 기간이 정함이 없는 근로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본다라고 되어 있다. 한마디로 정규직은 아니지만, 함부로 해고할 수는 없는 것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를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자본가들을 대변하고 있는 한나라당이나 언론들이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정규직은 아니지만 함부로 자를 수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의무적으로 2년된 모든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2년이 초과된 비정규직 노동자는 함부로 잘라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지금 한나라당이나 언론이 얼마나 추잡한 사기를 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더군다나 사기업도 아닌 정부기관과 공기업이 앞장서서 비정규직을 해고한다고 하니 정말 이들이 얼마나 서민(鼠民)을 위해 일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악어의 눈물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전형적인 경우라 하겠다.

결론은 이렇다. 이 법의 목적과 취지는 전혀 문제가 없을 뿐더러 이 법에는 2년이 초과된 비정규직을 전원 정규직으로 전환하라고 명시되어 있지 않다. 이 법 때문에 2년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자른다는 자들은 사람이라고 보기 힘들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이 법은 큰 문제가 없다. 이 법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용 안정을 위해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해둔 것뿐이다. 지금 이명박과 한나라당은 그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받아드릴 수 없다고 법을 유예하자고 협박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노동자들 중에서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들 중에서 향후 어떤 선거에서든지 한나라당에 투표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사람이 아니다.

2년만에 세상은 얼마나 좋아졌을까

2년만에 세상은 얼마나 좋아졌을까

2007년 6월 27일 노무현 대통령 청주 육거리 시장 방문.

그로부터 2년 후…

2009년6월 25일 이명박 대통령 서울 이문동 시장 방문.

단 2년만에 세상은 이렇게 좋아졌다. 이명박을 찍고 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졌을까?

나는 진심으로 그들이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깨닫게 되길 바란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가슴 속 깊이, 아니 뼛 속 깊이 새기길 바란다. 그것만이 이 시대가 준 단 한가지 긍정적인 가르침을 받아드리는 것이리라.

누가 정치 보복이라 하는가

누가 정치 보복이라 하는가

노무현은 “사람 사는 세상”을 꿈꿨다. 탐욕과 이기주의와 무관심이 판치는 세상에서 그는 “사람 사는 세상”을 꿈꿨다. 그것은 애초부터 실현 불가능한 꿈이었고, 불온한 꿈이었다. 그는 정의를 얘기했고, 상식과 원칙을 부르짖었다.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다. 그의 출신성분을 들먹였고, 그의 말투를 조롱했다.

그가 대통령이 되었던 것은 기적이었거나 아니면 신이 이 땅에 주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주류들은 당황했지만,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노무현은 그들에게 너무나 위험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그에게 열광했던 사람들도 그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사면초가였다.

그는 단 한 순간도 타협하지 않았다. 사방이 적이었고 지지자가 떠나갔지만, 그는 단 한 순간도 굴복하지 않았고, 그가 부여잡은 가치를 포기하지 않았다. 마치 그렇게 살아야만 되는 숙명을 지니고 태어난 사람처럼 말이다. 그는 그 숱한 고난과 역경 그리고 온갖 방해와 비난을 물리치고 성공적으로 대통령의 임무를 마치지만, 사람들은 그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았다. 노무현의 시대가 이 천박한 땅에서 얼마나 감사해야 할 역사인지를 알지 못했다. 어리석고 어리석었다.

사람들은 그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했다. 그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있을 때는 알지 못했다. 어리석고 탐욕에 찌든 이들이 야만의 권력을 탄생시켰다. 그 야만의 권력과 쓰레기 언론들이 협잡하여 노무현을 죽였다. 그것은 정치 보복이 아니고 살인이었다. 노무현을 인정하지 않은 자들이, 아니 인정할 수 없었던 자들이 노무현을 죽였다.

그들의 무능력과 열등감이 검찰과 언론이라는 후안무치한 권력을 등에 업고 노무현을 죽였다. 그들은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사악했다. 죄의식도 부끄러움도 몰랐다. 짐승만도 못한 자들이란 바로 그런 자들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누가 감히 정치 보복이라 하는가. 그것은 백번을 양보해도 “포괄”적 살인이었다.

한때 진보라 불렸던 몇몇 신문들은 노무현이 죽자 그를 팔아 장사 밑천을 삼았다. 물론 이들도 노무현 죽이기에 가담한 공범이었다.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알리바이만을 만들려고 했다. 간악했다.

이제 그가 세상을 떠나자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다. 있을 때는 그의 소중함을 제대로 모르던 사람들도 슬퍼했고 미안해했다. 부질없는 일이다. 노무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 땅에 더 이상 노무현은 없다. 아무리 슬퍼하고 눈물을 흘려도 노무현은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신은 그렇게 공평했다. 노무현이라는 걸출하고 위대한 인물을 내려 주었는데도 그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고마워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을 보냈다. 그리고 신은 노무현을 다시 거두어갔다.

이제 이 나라는 그 어리석음과 탐욕과 이기심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를 것이다. 아니, 노무현이 물러난 다음부터 이미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노무현은 그의 말처럼 정치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는 이 나라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너무 과분한 사람이었다.

그가 너무 보고 싶다.

예수도 울고 갈 이명박의 힘에 놀라다

예수도 울고 갈 이명박의 힘에 놀라다

지난 대선을 앞둔 2007년 12월, 재야세력과 종교단체들은 부패세력의 집권을 저지해야 한다며 비상시국회의를 결성하고 민주세력의 단일화를 요구했었다. 비상시국회의를 주도했던 인물 중 하나가 바로 황석영이었고, 그는 선언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우리 국민이 거짓말쟁이 지도자, 부패 지도자에게 국정을 농단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임을 굳게 믿는다. 우리는 보다 나은 삶을 바라는 국민의 열망을 모아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려는 대다수 국민의 의지를 모아 이 몰상식한 선거판을 바로잡을 것이다. 이에 우리는 부패한 정치세력, 위장과 거짓말을 반복하는 정치세력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부패정치세력 집권저지와 민주대연합을 위한 비상시국회의’의 결성을 선언하는 바이다. [“단일화 안하면 거짓 민주화세력 규정”, 오마이뉴스]
비상시국회의의 황석영이 언급한 부패한 정치세력은 바로 한나라당의 후보 이명박이었다. 그때 시국선언문을 낭독한 황석영의 모습에서 자못 숙연함이 느껴진다. 출처 : “단일화 안하면 거짓 민주화세력 규정” – 오마이뉴스 그로부터 1년 6개월이 흘렀다. 부패세력의 집권을 저지하겠다고 하던 황석영이 그 부패세력과 손을 잡고 부패세력의 성공을 위해 큰틀에서 협력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명박과 함께 우즈베키스탄으로 날아가 비단길의 옛 중심지 사마르칸트에서 멋진 사진을 한장 박아주셨다. 자신의 집권저지에 앞장섰던 인물을 끌어들인 이명박에게는 분명 뭔가가 있다. 이명박의 삶의 궤적으로 보았을 때 한 나라의 대통령은 커녕 면사무소 서기도 되기 어려운, 아니 되어서는 안되는 인물이지만, 이 자는 사람들의 탐욕을 자극하고 꿰뚫어보고 그것을 발현하도록 하는 능력이 있다. 주가 5000 시대, 747 공약 등 말도 안되는 사기를 쳤지만, 결국 아파트 한채 뜯어먹고 살겠다는 국민들의 탐욕을 일깨워 대통령이 되었다. 황석영에게도 문화부 장관 또는 노벨상 수상 지원 등의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들을 했을 것이다. 물론 그 약속이 지켜진다는 보장은 없다. 이명박에게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회한 황석영의 탐욕과 위선이 번득이는 이명박의 본능에 걸린 것이겠지만, 결과적으로 황석영은 그동안 자기의 재능과 위선으로 쌓아올린 업적을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이명박과 손을 잡은 이들의 말로를 황석영은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명박의 비서였던 김유찬, 동업자였던 김경준, 이명박에게 기도를 해주었다던 추부길, 그리고 이명박과 호형호제한다는 천신일까지. 이제 황석영도 그들과 유사한 말로를 따를 것이다. 예수도 자기가 반석이라는 이름을 붙혀준 수제자 베드로에게 새벽 닭이 울기 전 세 번의 배신을 당했다. 예수를 따르겠다는 기독교의 장로인 이명박은 자기를 앞장서 반대했던 인물을 자기 편으로 끌어드렸다. 이명박의 힘이 참으로 놀라워 보이긴 하다. 결과적으로 이명박과 황석영은 서로 반대의 길을 걸어왔지만, 결국 하나의 지향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황석영의 속내를 까발려준 이명박에게 처음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이명박이 아니었으면 황석영의 위선에 속아 아직도 그의 책을 뒤적이고 있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황석영이 노벨상을 타게 된다면, 그것은 죽은 노벨이 다시 살아서 다이나마이트를 터뜨릴 일이다.
부처님 오신날, 비가 내렸다

부처님 오신날, 비가 내렸다

부처님 오신날 비가 내렸다. 붓다의 가르침처럼 하염없이 비가 내렸다. 비는 대지를 적시고, 나무를 적시고, 내 방 창문을 무시로 두드리며 흘렀다. 그 비를 타고 붓다의 자비가 나에게도 흘렀다. 마치 어머니의 자궁 안에 있는 것처럼 고요와 평화가 나를 감쌌다. 적막했고 편안했다.

부처님 오신날 내리는 비가 나를 충만하게 하였다. 자연은 그렇게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었다. 자연이 바로 붓다였다. 부족한 것도 넘치는 것도 없었다. 필요한 것도 없었고, 욕망도 없었고, 탐욕도 없었다. 봄이 되면 새 잎이 돋고 꽃이 피고 비가 내렸다. 자연은 그렇게 스스로 존재했다.

인간들은 언제나 갈구했다. 어떤 이들은 물질을 갈구했으며, 어떤 이들은 진리에 목말라했다. 부질없었다. 모든 것은 이미 존재했고 충족되어 있었다. 인간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인간들의 원죄는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무지. 인간들은 스스로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삶의 고통은 그 무지에서 시작되었다.

욕망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길은 욕망을 버리는 것이었다. 원한은 복수에 의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버리고 비울 때만이 인간들은 자유로울 수 있었다. 인간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붓다가 오신지 2500여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인간들은 어리석었고 고통에서 몸부림쳤다.

그리하여 부처님 오신날 비가 내렸다. 무지로부터 생긴 고통을 알리기 위해 비가 내렸다. 무지하기에 죄를 짓는 인간들은 그 무지를 깨닫게 되면 용서받을 수 있었다. 진리는 단순했지만, 깨닫기는 어려웠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려고 오셨습니다.

모든 것은 본래부터 완벽했다. 그것이 신의 본성이었고, 자연의 본성이었다. 부처님 오신날 내린 비는 그것을 깨우쳐 주었다.

전직 대통령 예우법

전직 대통령 예우법

기억을 더듬어보면 작년에 이런 일이 있었다. 새로 정권을 잡은 자들은 컴퓨터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모르는 컴맹이었다. 청와대에 들어가서도 정보시스템에 어떻게 접속하는지 알 수 없는 자들이었다. 평생을 삽질로 살았던 자들이 21세기 정보기술 시대에 적응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부도덕은 기본이고, 그들은 무능했다. 열등감이 뼈에 사무쳤다. 그들은 무능과 열등을 숨기기 위한 간교한 잔머리를 굴렸다. 이른바 ‘대통령 기록물 유출 사건’이다. 노무현이 생산해낸 수백 만 건의 기록물을 봉하마을로 가져갔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물론, 그때도 검찰과 언론을 앞세웠다. 법으로 규정된 전직 대통령 노무현의 열람 권한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들은 어떻게 협박을 하면 상대를 굴복시킬 수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일제 시대부터 전해온 비법이었다. 노무현의 수족들을 하나둘씩 수사 선상에 올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지시대로 움직인 사람들을 처벌하겠다고 나서는 상황에서 노무현은 더 버틸 수 없었다. 그때 노무현은 이런 편지를 쓴다.

모두 나의 지시로 비롯된 일이니 설사 법적 절차에 들어가더라도 내가 감당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미 퇴직한 비서관, 행정관 7~8명을 고발하겠다고 하는 마당이니 내가 어떻게 더 버티겠습니까? 내 지시를 따랐던, 힘없는 사람들이 어떤 고초를 당할지 알 수 없는 마당이니 더 버틸 수가 없습니다.

이명박 대통령님, 모두 내가 지시해서 생겨난 일입니다. 나에게 책임을 묻되, 힘없는 실무자들을 희생양으로 삼는 일은 없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록은 국가기록원에 돌려 드리겠습니다.

“전직 대통령을 예우하는 문화 하나만큼은 전통을 확실히 세우겠다.” 이명박 대통령 스스로 먼저 꺼낸 말입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한 끝에 답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한 번도 아니고 만날 때마다, 전화할 때마다 거듭 다짐으로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에는 자존심이 좀 상하기도 했으나 진심으로 받아들이면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은근히 기대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 말씀을 믿고 저번에 전화를 드렸습니다. “보도를 보고 비로소 알았다”고 했습니다. 이 때도 전직 대통령 문화를 말했습니다. 그리고 부속실장을 통해 연락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선처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연락이 없어서 다시 전화를 드렸습니다. 이번에는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몇 차례를 미루고 미루고 하더니 결국 ‘담당 수석이 설명 드릴 것이다’라는 부속실장의 전갈만 받았습니다. 우리 쪽 수석비서관을 했던 사람이 담당 수석과 여러 차례 통화를 시도해 보았지만 역시 통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노무현, 이명박 대통령께 드리는 편지>

편지에 따르면 이명박이 먼저 꺼낸 말이 “전직 대통령을 예우하는 문화 하나만큼은 확실히 세우겠다”는 것이었단다. 그것도 만날 때마다, 전화할 때마다 거듭해서 말했단다. 상대방의 자존심이 상할 정도로 말이다.

노무현이 기록물을 반환하고 나서 이 사건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마치 노무현이 국가 기밀을 모두 빼돌린양 짖어대던 언론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다물었다. 노무현의 수족들을 고발하겠다고 으르렁대던 검찰도 이 사건을 어떻게 마무리했는지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때도 노무현을 직접 조사하겠다고 했고, 노무현은 그렇다면 내가 검찰에 나가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검찰은 아무 말이 없었다.

이것이 그들의 전직 대통령 예우법이었다.

그 이후, 검찰과 국세청은 노무현과 그 주변을 이잡듯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궐선거 일정에 부합하도록 어제 노무현을 검찰로 불렀다. 노무현이 돈을 받았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상관없었다. 노무현의 부인과 조카 사위가 돈을 받았다는데 그 돈이 뇌물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정황이 그렇다고 얘기할 뿐이었다. 검찰은 노무현과 관련해서는 ‘정황’과 ‘상식’과 ‘포괄’을 들이댔다. 물증은 없었다. 개의치 않았다.

노무현을 검찰청으로 불러 모욕을 주고, ‘쇼’를 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노무현은 “면목이 없다”고 했다. 그것은 노무현이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기 때문에 한 말이 아니었다. 노무현은 결벽증이 있는 사람이다. 이런 상황에 휘말리는 빌미를 미리 차단하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이었다. 한달 내내 검찰과 언론을 통하여 3족을 멸해야하느니, 패가망신을 시킨다느니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노무현을 모욕주고 협박했다. 심지어 대통령의 특수활동비까지 뒤졌다.

이것이 그들의 전직 대통령 예우법이었다.

노무현이 현직에 있었을 때, 선거에 관련된 말 한마디 했다고 대통령을 탄핵한 자들이었다. 정말 그들이 노무현이 뇌물을 받았다는 물증을 확보했다면 그들은 사전구속영장을 발부받아 노무현을 수갑 채워 서울로 압송했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한 것으로 보았을 때, 그들이 확보한 증거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박연차를 겁박하여 얻어낸 진술뿐이었다.

노무현을 구속시키는 것은 고사하고 기소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들도 그런 것은 상관하지 않는다. 어차피 입을 쓱 닦아버리면 그만일 뿐이다. 한 일주일만 지나면 사람들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기억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다만 노무현이 검찰 조사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노무현을 전두환, 노태우 급으로 전락시켰다고 환호작약할 것이다.

“전직 대통령을 예우하는 문화 하나만큼은 전통을 확실히 세우겠다.”

이명박이 세운 이 확실한 전통이 이명박을 비켜가지는 않을 것 같다.

노무현이 봉하마을에서 안식하길 진심으로 바라지만, 역사는 그를 가만 놔두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는 진실을 가슴에 담고 최초로 승리한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그가 물러났어도 그는 여전히 유효하고 여전히 위험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그의 얼굴을 보면, 그리고 그의 이름을 부르면 자꾸 눈물이 날 것 같다. 도대체 그가 감당해야할 몫이 얼마나 더 남아있을까? 왜 역사는 그의 안식을 허락하지 않는 것일까? 왜 나같은 놈은 그를 놓지 못하는 것일까? 얼마나 그를 더 부여잡아야 하는 것일까?

노무현은 자기를 놓아달라고, 자기를 버려달라고 말했다.

이상 더 노무현은 여러분이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미 민주주의, 진보, 정의, 이런 말을 할 자격을 잃어버렸습니다.

저는 이미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수렁에 함께 빠져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

노무현이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될 수 없다면 과연 누가 그 상징이 될 수 있을까? 노무현이 떠나간 자리를 누가 메울 수 있을까? 그를 버리려고 해도, 뿌리치려 해도 왜 그는 또다시 내 마음을 사로잡는 것일까?

노무현 자신이 원하는 바는 아니겠지만, 그의 지지자들과 그의 반대자들은 끊임없이 그를 불러내고 또 불러낼 것이다. 그것이 그의 숙명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가슴에 단심을 품고, 진실을 부여잡고, 역사에 당당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숙명. 죽어도 죽지 않는 사람들의 숙명.

그의 안식과 평안을 위해 기도한다. 그가 짊어져야할 숙명에 그리고 그와 같은 시대를 호흡했다는 사실에 감사할 따름이다.

어찌하면 노무현을 버릴 수 있을까

어찌하면 노무현을 버릴 수 있을까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 어느 시대든 그렇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익을 추구한다. “부자되게 해 주세요”, “경제를 살려 주세요” 하면서 눈 앞에 이익에 전전긍긍한다. 오늘날 이러한 세태는 극에 달했다. 부자들은 더 부자가 되고 싶어하고, 가난한 사람들도 대부분 부자가 되고 싶어한다. 그러한 사람들 앞에서 “정의”를 말하고, “도덕”을 말하고, “상식”을 말하면 조롱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그러한 것들이 밥먹여주냐고 하면서.

노무현과 같은 사람은 늘 분란을 일으킨다. 그는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 가치의 중요함을 깨달은 소수는 열성 지지자가 되었고, 가치가 밥먹여주냐며 비웃는 사람들은 그를 증오한다. 특히, 기득권층에게 노무현과 같은 이들은 위험하고 치명적이다. 그의 말하는 방식과 행동 방식이 기득권층이 지배하는 사회구조를 뒤흔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무현과 같은 이들은 죽어야하고, 없어져야 할 존재들이다. 그래야 기득권층이 지배하는 사회가 편안해진다.

가치를 추구한 정치인이 드물긴 했지만, 더러 존재했다. 그러나 그들은 거의 다 위와 같은 이유로 암살당하거나 거세되었다. 노무현이 가치를 추구한 최초의 정치인은 아니지만, 가치를 추구한 정치인이면서 최초로 성공한 정치인이 되었다. 이것은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를 살펴보아도 몇 안되는 드문 경우였다. 이 나라의 기득권층은 불안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래서 노무현은 죽어야했다.

노무현은 친일과 군부독재의 후예들로 이루어진 기득권층뿐만 아니라 소위 진보좌파라 불리는 민주 운동권 진영에게도 참으로 불편한 존재였다. 노무현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후에도 같은 당 내부에서 노무현 끌어내리기가 공공연히 자행되었다. 대통령은 커녕 후보조차 되어서는 안되는 존재였다. 노무현은 어느 진영에게나 환영받지 못하는 비주류였다.

문제는 아무도 노무현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노무현 지지자들이야 그렇다쳐도, 노무현을 증오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들도 노무현에게 무관심할 수 없었다. 중간지대가 존재하지 않았다. 노무현은 대통령이 되어서도 순탄할 수 없었다. 언론들은 연일 노무현을 깍아내렸고, 노무현 욕하기가 국민스포츠가 되었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그에게 등을 돌렸고, 국회는 그를 탄핵했다. 그것은 가치를 추구한 자가 성공을 했기에 치루어야하는 댓가였다.

위기에 처할 때마다 노무현은 계산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그랬듯이 진실을 말했고, 정면돌파를 시도했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는 마법같이 성공했다. 반대자들에게 그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고, 그는 더욱더 없어져야할 존재가 되었다.

누군가가 그랬다. 삶에는 지름길이 없다고. 인생은 에둘러가는 것이 아니라고. 노무현의 삶은 그것을 또렷히 보여주었다. 그는 실패와 실패를 거듭했고, 수많은 위기에 쳐했었지만 그 난관을 헤쳐나갔다. 기적이었고 마법이었다. 노무현은 그 수많은 난관을 피하거나 돌아가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맞섰고, 절대 꼼수나 잔머리를 쓰지 않았다. 그것이 노무현의 힘이었고, 노무현의 가치였다.

노무현의 대통령 선거 출마 연설을 기억하는가?

제 어머니가 제게 남겨주었던 제 가훈은, ‘야 이놈아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바람부는대로 물결치는대로 눈치보며 살아라’. 80년대 시위하다가 감옥간 우리의 정의롭고 혈기넘치는 우리 젊은 아이들에게 그 어머니들이 간곡히 간곡히 타일렀던 그들의 가훈 역시 ‘야 이놈아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고만둬라, 너는 뒤로 빠져라’. 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우리의 육백년의 역사, 이 역사를 청산해야 합니다. 권력에 맞서서 당당하게 권력을 한번 쟁취해본 우리의 역사가 이루어져야만이 이제 비로소 우리의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얘기할수 있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설수 있는 역사를 만들수 있다.

노무현이 있었기에 노무현이 승리했기에 우리들은 떳떳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쓸 수 있었다. 그는 역사 앞에 당당하고자 했고, 그렇게 살았던 정치인이다. 저런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저런 울림은 아무나 줄 수 있는게 아니다.

노무현이 돈을 받았다 한다. 가치를 말하고 가치를 위해 산 사람이라면 돈 10억에 그 가치를 팔지는 않는다. 진짜 부정부패를 하는 자들이라면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같이 한다. 단돈 10억에 자기가 추구했던 삶을 버리지는 않는다. 누가 나한테 10억을 줄테니 한나라당을 지지하라고 한다면 나는 그 돈을 받을 것인가? 나는 받지 않는다. 나같은 필부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노무현 같은 인물이 그러하겠는가.

물론 이런 일이 없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이번 사건으로 노무현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노무현과 검찰의 주장이 맞설 때, 누구를 더 신뢰할 것인가. 노무현과 언론 중 누구를 더 신뢰하는가. 노무현과 한나라당 또는 이명박 중 누구를 더 신뢰하는가. 답은 명약관화한 것이다. 설령 현행법 상 불법의 소지가 있다 한다면 그 응분의 댓가를 치루면 된다. 만에 하나 검찰이 노무현을 구속시키더라도 그들은 노무현을 죽일 수 없다.

노무현이 추구했던 가치, 노무현이라는 존재가 주는 의미가 퇴색하지 않는 한 노무현에 대한 지지를 접을 생각은 없다. 언젠가도 얘기했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이 노무현을 버린다면, 또 그래야 한다면 나는 그 마지막 사람이 될 것이다. 역사에 가정이 없다지만 만약 우리 현대 정치사에 노무현이 없다고 생각해보라. 너무 공허하지 않겠는가.

노무현을 버릴 수 있는 때는 정의가 강물처럼 흘러 노무현을 찾지 않고도 또는 노무현의 가치가 아무 의미가 없을 정도의 세상이 되었을 때이다. 그때까지 노무현은 여전히 유효하고 여전히 위대한 정치인일 것이다.

노무현 지지자들에게 한마디 덧붙이자면 일희일비하지 말고, 노무현이 돌을 맞을 때 그 옆에서 같이 돌을 맞으면 될 것이다. 분노할 필요도 없다. 노무현을 죽이고자 한 화살이 결국은 다 저들에게 되돌아갈 것이기에 걱정을 할 필요도 없다. 의연하게 그를 믿고 지켜보면 된다.

조선일보 추종자들에게 바치는 노래

조선일보 추종자들에게 바치는 노래

신문을 발행한다고 해서 모두 “언론”이라고 생각하면 그건 오해다. 조선일보가 자칭 “일등 신문”이라 떠든다고 해서 조선일보를 가장 좋은 언론이라고 여긴다면 그 사람은 1% 특권층에 속하든지, 그 특권층에 속하고 싶어 안달이든지, 그도 저도 아니면 대개 무뇌아라 불릴 정도로 분별력이 없는 사람이다.

조선일보는 언론이 아니다. 조선일보는 정치집단이다. 그것도 친일과 독재, 극우와 반공을 밑천 삼아 돈벌이를 하는 수구 정치 집단이며, 천민 매판 자본이다. 일제 시대에는 친일을 했고, 군부 독재 시대에는 독재에 앞장서서 부역을 한 집단이 형식적 민주주의가 도래하자 “언론 자유”의 과실을 앞장 서서 누린다. 자신들의 이익과 이해관계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거짓과 왜곡은 기본이다.

파렴치하고 몰상식하지만, 더욱 나쁜 것은 이들이 몰라서 이런 짓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이 거짓과 왜곡인줄 알면서도 아무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돈을 벌 수만 있다면, 권력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한다.

이런 조선일보의 본질을 알지 못하고, 또는 외면하면서, 편집이 어떠느니, 종이 질이 어떠느니 하면서 애독자인척 추종하는 자들은 조선일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옛말에 유유상종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들 속에 조선일보와 같은 파렴치함과 위선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그런 신문을 아무 꺼리낌없이 볼 수 있는 것이다.

루시드 폴의 조윤석이 “미선이” 라는 밴드 활동을 할 때 부른 “치질” 이라는 노래가 있다. 이런 노래는 조선일보 추종자들이 한 번쯤 들어볼 필요가 있다. 이 노래를 듣는다고 그들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혹시 본인의 “치질”이 어디에서 왔는지 추측해볼 수는 있지 않을까.

매일 아침처럼 문 밖에 놓인 신문을 들고
무슨일이 있었나 살펴보려 변기에 앉았네
볼일이 끝날 무렵 다 떨어진 휴지걸이 위로
황당하게 비친 내 모습 불쌍하게 웃네

한장 찢어서 곱게 구겨 부드럽게 만들고
찝찝하긴 하지만 그런대로 대충 처리를 했네
며칠이 지나고 조금 아프긴 했지만 설마라도
내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네

휴지보다 못한 너희들 종이 사지 않겠어
아무리 급해도 닦지 않겠어 쓰지 않겠어

너희들의 거짓말 듣지 않겠어 믿지 않겠어
단돈 300원도 주지 않겠어 보지 않겠어

<미선이, 치질>

덧. 이 글은 민노씨 님의 언어의 투명성: 내가 조선일보를 비판하는 이유라는 글에 대해 트랙백을 보내기 위해 쓴 글인데, 정작 트랙백은 가지 않아 뜬금없는 글이 되어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덧. 민노씨 님의 블로그와 트랙백이 되지 않는군요. 왜 그럴까요?

MB는 MBC가 맡는다

MB는 MBC가 맡는다

지금으로부터 35년 전 박정희의 유신 군사독재가 한창일 때,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통해 독재와 투쟁을 시작한다. 이에 놀란 박정희 정권은 동아일보에 대해 광고탄압을 자행하고, 150여명이나 되는 기자와 PD, 그리고 아나운서들이 해직을 당한다. 이른바 동아투위의 시작이다. 결국 제정신을 가진 언론인들은 그때 거의 다 거세되었고, 언론에 암흑기가 도래했지만, 해직 언론인들은 재야에서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88년 한겨레신문의 창간을 주도한 이들도 이들 해직 언론인들이었고, 지난 30여년간 언론 자유와 언론 운동을 이끄는 정신적인 힘은 거의 대부분 동아투위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명박이 정권을 잡자 언론 상황은 롤러코스터를 타듯 35년 전으로 급회귀해버렸다. 이명박과 박정희를 차이는 투표로 정권을 잡았는가 아니면 군부 쿠데타로 잡았는가의 차이 뿐이었다. 부도덕하고 탐욕스럽기는 매일반이었지만, 거짓말하기는 이명박이 오히려 원조 독재 박정희를 능가한다. 지금은 35년 전과 똑같은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명박이 들어서자마자 한 짓은 KBS와 YTN 사장을 자기 심복으로 교체하는 일이었다. 혁명을 하든, 쿠데타를 하든 맨 처음 해야할 일이 방송국 장악인 것을 이명박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명박의 당선은 극우언론들의 사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기에 정통성 유지는 군부독재 정권처럼 쉽지 않은 일이었다. 참여정부 때는 KBS 사장을 정연주라는 인물이 맡고 있었는데, 정연주 역시 동아투위 출신이었다. 정연주 사장 하에서 KBS는 신뢰도 1위의 언론으로 거듭났었다. 그러나 사장이 바뀌자마자 이들은 정권의 나팔수로 급격히 변신한다. 이제 남은 것은 MBC뿐인데, 이명박 정권은 허울좋은 민영화를 통해 MBC를 극우언론이나 재벌들의 먹이감으로 준비하고 있다. 지금 국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미디어 관련 법안이 바로 MBC를 조중동에게 넘기기 위한 사전준비인 것이다. 이명박은 자신의 당선과 정권 유지의 일등공신인 조중동을 나몰라라할 수 입장이 아니기에 어떤 무리수를 쓰든지간에 MBC를 조중동에게 넘기려 하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종이 신문의 몰락은 명약관화한 것이고, 조중동이 지금과 같은 언론권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상파 방송을 잡아야하는 상황이다. 이명박의 이런 음모에 언론노조가 정면으로 대응하고 나섰다. 특히 MBC의 젊은 노조원들이 이명박의 음모를 전세계에 고발하기 시작했다. 35년 전, 동아투위 선배들이 비장하게 자유언론실천을 선언했다고 하면, 이들 MBC 노조원들은 패기있고, 발랄하게 이명박과의 투쟁을 선언한 것이다. 이명박과 언론노조, 특히 MBC 노조와의 싸움은 단순히 방송국 하나를 민영화하느냐 마느냐의 차원이 아니다. 과연 이 나라가 정상적인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 더 나아서는 이 나라가 숨을 쉴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원인 것이다.
그 이름도 왜색창연한 이명박(아키히로)을 사람들은 MB라 부른다. MB의 언론장악 음모에 MBC가 나섰다. 이 싸움은 친일과 독재세력과의 싸움이고, 반민주주의와의 싸움이고, 비상식과의 싸움이다. 사필귀정이라 했지만, 결코 쉽지 않은 싸움이다. MBC 노조원들을 믿고, 그들을 지지한다. 당신들 앞에는 동아투위 선배들이 있고, 당신들 뒤에는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국민들이 있다. 타협하거나 물러서서는 안되고, 끝까지 싸워야 할 것이다. 그것이 당신들과 우리들이 살 수 있는 길이다. MBC가 마지막 희망이 되고 있다.
투표 안한 20대들, 지금 행복한가

투표 안한 20대들, 지금 행복한가

작년 4월 총선 전에, 우리나라 20대들의 투표 참여 의사를 보도한 기사를 보고 나는 크게 실망하여 “20대를 위한 나라가 없는 이유” 라는 글을 쓴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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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대 총선 연령별 투표율

실제 20대 유권자와 30대 초반의 유권자들은 50~60대에 비해 절반도 안되게 투표에 참여했다. 총선의 결과는 한나라당의 압승으로 끝났고, 자유선진당과 친박연대를 합해 수구 세력이 3분의 2의 의석을 가져가 버렸다. 지난 1년을 돌이켜보면, 이들 20~30대 젊은이들의 정치적 무관심이 이 나라를 어떤 꼴로 만들었는지, 게다가 그 결과로 이들 젊은이들은 정말 행복해졌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청년들을 위한 일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번듯한 대학을 나와도 취직을 하기가 너무 힘들어졌다. 이명박은 청년 인턴제, 공기업 초임 월급 30% 삭감 등의 눈가리고 아웅 하는 정책을 들이밀었다. 청년 인턴이 도대체 뭐하는 정책인지 그 인턴을 직접 뽑아야하는 몇몇 기관들의 담당자들한테 물어보니, 6개월 정도 인턴이라는 명목하에 임시직으로 젊은이들을 고용하여 허드렛일을 시키고 용돈을 쥐어주는 것이라 했다. 그럼 6개월이 지나면 어떻게 되냐니까, 대부분은 그만 두어야 한단다. 청년 실업이 너무 늘어 나니 실업률이라는 통계를 낮추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내놓은 정책이다. 6개월이 지나면? 나몰라라 하는 정책이다.

일자리를 나누기 위해 신입사원들의 첫 월급을 10~30% 정도 깍는 것도 마찬가지다. 일자리를 나눌려면 고용 시간을 단축하는 것이 우선이고, 월급을 깎을려면 사장을 비롯한 임원들과 고위직 간부들부터 솔선수범을 보여야 할텐데, 결국 사회적 약자인 청년들이 밥이 되었다.

경제 위기가 어쩌느니 하면서 언론들이 설레발을 쳐도 가진 자들은 이 위기 속에서도 배를 불릴 것이고, 결국 힘없는 사람들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은 위기의 쓰나미에 쓸려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가진 자들을 위해 세금을 깍아주고, 없는 사람들은 위한 복지는 축소시키는 세력들. 이러한 세력들이 언론과 입법, 사법, 행정부를 장악하고 있고, 그로 인해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우리 젊은이들이 가장 많은 피해를 보고 있다.

기성 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그들에게 너무 미안하기도 하지만, 그들 또한 민주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젊은이들의 정치적 무관심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 뼈저리게 느껴야 한다. 국민들이 쓰레기 언론에 속고, 사기꾼들에게 속고, 정치에 무관심하게 되면 20대를 위한 나라 뿐만 아니라 1%의 특권층을 제외한 모든 국민을 위한 나라가 없게 되는 것이다.

경제보다도 중요한 것은 정치이고, 정치보다 중요한 것은 도덕이다. 잘 살기를 바랄 것이 아니고, 바르게 살기를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 결과만을 중시할 것이 아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과정이 합당한지, 공평한지를 따져야 한다. 청년들을 위한 나라는 청년들의 참여에 의해, 노동자들을 위한 나라는 노동자들에 의해 만들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청년들이 살아있는 나라는 아무리 힘들어도 망하지 않는다. 청년들의 살아있는 눈빛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