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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gory: Thoughts

시간에 대하여

시간에 대하여

사람이 만들어낸 가장 강력한 환상 중 하나는 바로 “시간”이다. 이 시간이라는 관념은 너무나 자연스러워 거의 모든 사람이 과거, 현재, 미래가 존재하는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흐르는 강물과 같은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와 미래라는 관념은 사람들의 머리 속에만 존재한다.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현재라는 순간만이 존재할 뿐이다.

싯다르타가 그에게 물었다. “당신도 그 비밀, 그러니까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비밀을 강물로부터 배웠습니까?”
“그래요, 싯다르타.” 바주데바가 대답했다.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강물은 어디에서나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강의 원천에서나, 강 어귀에서나, 폭포에서나, 나루터에서나, 시냇물의 여울에서나, 바다에서나, 산에서나, 도처에서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강에는 현재만이 있을 뿐, 과거라는 그림자도, 미래라는 그림자도 없다, 바로 이런 것이지요?”
“바로 그렇습니다.” 싯다르타가 말했다. “그리고 그것을 배웠을 때 나는 나의 인생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나의 인생도 한 줄기 강물이었습니다. 소년 싯다르타는 장년 싯다르타와 노년 싯다르타로부터 단지 그림자에 의하여 분리되어 있을 뿐, 진짜 현실에 의하여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싯타르타의 전생들도 결코 과거의 일이 아니었으며, 싯타르타의 죽음이나 범천에로의 회귀도 결코 미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아무것도 없었으며,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현존하는 것이며, 모든 것은 본질과 현재를 지니고 있습니다.”
싯다르타는 무아지경에 빠져 황홀한 상태로 말하였으니, 이러한 깨달음이 그를 그토록 기쁘게 하였던 것이다. 아, 일체의 번뇌의 근원이 시간 아니고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자신을 괴롭히는 것도, 두려워하는 것도 그 근원은 모두 시간 아니고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그렇다면 인간이 그 시간이라는 것을 극복하는 즉시, 인간이 그 시간이라는 것을 없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즉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힘겨운 일과 모든 적대감이 제거되고 극복되는 것이 아닌가?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민음사, pp. 157-158>

적절한 최고임금은 얼마인가

적절한 최고임금은 얼마인가

지난 해 우리나라 최저임금이 한 시간에 5210원이었다. 이것을 월급으로 계산하면 108만8890원(월 209시간)이 된다. 물론 최저임금도 못 받는 사람이 수두룩하지만, 법에서 규정한 임금으로 계산하면 연봉 1300만원 정도가 2014년의 최저임금이었다.

2014년에 제일 돈을 많이 번 대기업 등기임원은 삼성전자 신종균 사장인데, 연봉 146억원을 받았다. 삼성전자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회사고 돈을 많이 버는 회사이긴 하지만, 일반 서민들의 입장에서 146억이라는 숫자는 전혀 현실감이 없다. 최저임금의 무려 1100배가 넘는 액수니까.

그렇다면 재벌총수들은 어떤가. 이들은 아주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라 대부분 등기임원에서 빠져 2014년의 연봉 공개 대상이 아니었다. 2013년 SK 최태원 회장이 감옥에 있으면서도 301억원을 받았다. 최저임금의 무려 2000배가 넘는 어마어마한 액수다. 죄를 지어 구속이 되었는데도 회사에서 300억원이 넘는 돈을 받았다는 사실이 과연 실제 있을 수 있는 일인지 믿기 어려웠다.

우리나라 재벌 총수나 대기업 사장들은 최저임금의 수천 배가 넘는 돈을 연봉으로 받고 있다. 이런 극단적 불균형과 양극화는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한다. 1%도 안 되는 소수의 집단이 사회 전체의 부를 거의 모두 차지하는 이런 현실은 부도덕하고, 지속가능하지 않다.

지나치게 많은 돈은 사람들을 병들게 한다. 우리나라 재벌들 치고 형제 간에 싸움을 하지 않는 집안이 없다. 그들이 벌이는 골육상잔의 막장 드라마를 볼라치면, 인간이라는 종족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 상상하기 쉽지 않다.

그렇다면 양극화를 해소하고 사회시스템을 건강하게 유지하며 사람들을 타락시키기 않을 만큼의 최고임금은 어느 정도일까?

경영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에 따르면, 한 조직의 최고임금은 최저임금의 20배를 넘지 말아야 한다. 20배를 넘게 되면, 종업원들의 분노와 사기 저하가 회사에 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I have often advised managers that a 20-to-one salary ratio is the limit beyond which they cannot go if they don’t want resentment and falling morale to hit their companies.”

<What’s the right ratio for CEO-to-worker pay?, Washington Post>

실제로 홀푸드(Whole Foods)라는 회사는 최고경영자의 임금을 회사 평균 임금의 19배 정도로 제한하고 있다. 드러커의 20:1 원칙을 준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정책이 회사를 발전시키고 종업원들의 사기를 높여 더 좋은 회사로 만든다.

2015년 우리나라 최저임금은 시급 5580원이고, 연봉으로 따지면 1400만원 정도다. 따라서, 이것을 기준으로 드러커의 원칙에 따라 계산하면 바람직한 최고임금은 2억 8천만원 정도라고 볼 수 있다.

최저임금과 최고임금을 연동시키면, 최고경영자들이 최저임금 인상에 지금처럼 인색하지 않을 것이다. 양극화를 줄일 수 있고, 건강한 경제 시스템을 유지할 수 있다.

과연 피터 드러커는 경영학의 아버지라 불릴만하다.

우리나라 지배계급의 뿌리

우리나라 지배계급의 뿌리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70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생긴 지 67년이 되었다. 1987년 형식적 민주화를 이룩한 지 30년 가까이 되었지만, 아직도 이 나라는 봉건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나라를 지배하는 권력자들은 가깝게는 군부독재와 친일파에 줄을 대고 있고, 멀게는 조선 후기 노론 세력에 뿌리를 두고 있다. 노론은 조선 숙종 이후 300년 간, 이 땅에서 단 한 번도 권력을 놓아본 적이 없다고 볼 수 있다. 노론의 후예들이 친일파로 살아남고, 그 친일파들은 해방 이후에도 이 땅에서 숙청되지 않고 권력을 움켜쥐고 있다. 정치 권력뿐만 아니라 경제, 문화, 언론, 사법, 행정, 학계 할 것 없이 우리 사회 거의 모든 분야의 권력을 노론의 후예들, 친일파의 후예들이 잡고 있다고 보면 된다.

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는 수구도 아니고, 보수도 아니고, 진보는 더더욱 아니다. 그들을 규정할 수 있는 단 한마디는 바로 “기회주의”다. 그들은 권력을 잡고 생존하기 위해서 무한변신이 가능한 카멜레온 같은 자들이다. 그들은 친일파도 될 수 있고, 친미주의자도 될 수 있으며, 필요하다면 공산주의자도 될 수 있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가리지 않는다.

이 나라 지배계급의 뿌리는 300년 전의 노론이었고, 노론의 영수는 송시열이다. 송시열은 “송자”라고 칭송되는 성현의 반열에까지 오른 이유가 바로 그 노론의 후예들이 여전히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기회주의자가 아니었지만, 철저히 사대부계급의 이익과 당파의 이익을 위해 한 평생을 살았다. 그에게는 나라도, 국왕도, 백성도 뒷전이었다. 그의 학문은 주자로 시작해 주자로 끝났는데, 그 주자학은 사대부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다.

한때 송시열의 제자였던 윤증의 편지를 보면 그의 인물됨을 짐작할 수 있다. 이 편지를 본 송시열은 크게 화를 내며, “나를 죽일 자는 바로 윤증”이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문하(송시열)께서는 한결같이 주자를 종주로 하고 사업은 대의에 두었으나, 자신에게 찬동하는 자는 친밀하게 대하고 바른 말로 뜻을 어기는 자는 화를 당하니 이 때문에 문하의 큰 이름이 온 세상을 덮지만 진실한 덕은 안으로 병듭니다. 굳세다는 것은 자신을 이기는 것을 말함인데 문하는 힘으로 남을 복종시키는 것을 굳세다고 하니 이는 참된 굳셈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문하의 위력을 두려워해서 복종하는 것이지 덕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니 이는 완연한 부귀가의 모습일 뿐 유학자의 기상이 없습니다.

<이덕일,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p.336>

이 나라 지배 권력의 뿌리를 알려면 송시열과 노론을 알아야 한다. 그들이 이 땅을 지배한 지 300년이 넘었다. 이 나라는 표면적으로는 민주 국가가 되었지만, 여전히 봉건적 계급 사회를 내포하고 있다. 지배계급은 모든 상부구조를 동원하여 끊임없이 노예들을 만들어내고 있으나, 그 노예들은 자신이 노예인지 모른다. 그리하여 이 지배구조는 별일 없이 지속되고 있다.

을미년 여름, 여전히 안녕하신가

을미년 여름, 여전히 안녕하신가

을미년 여름은 너무 일찍 시작됐다. 봄인가 했더니 순식간에 여름이 되었다. 봄은 갈수록 짧아지고, 여름의 시작은 점점 일러졌다.

날이 가물었다. 지난 겨울부터 제대로 된 비가 오지 않았다. 논바닥이 갈라지고, 농심이 타들어갔다. 4대강에는 물이 넘쳐도, 그 물을 농사에 사용할 수 없었다. 4대강 사업을 하면 가뭄과 홍수를 막을 수 있다고 한 그 자들의 말은 모두 거짓이었다.

날이 가물고, 역병이 돌았다. 정부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아니 그들은 전염을 억제하고 역병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역병은 나날이 번져 나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격리되고 몇몇은 죽어나갔다. 민심은 흉흉해지고 경기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늘 경제타령을 했지만, 경제는 나아지지 않았다. 예전에 대통령을 경포대라 욕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때의 경제는 지금보다 훨씬 좋았다. 어떤 사람들은 외환위기 때보다도 더 어렵다고 했다. 정부의 관심은 오로지 집값이었다. 집값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정부는 빚을 내서 집을 사라고 했다. 그것이 유일한 경제 정책이었다. 이자율은 계속 떨어지고 사람들의 빚은 늘어 갔다. 경제는 백척간두였다.

세월호 침몰로 진도 앞바다에서 수백명의 사람이 죽었다. 1년하고도 2개월이 지난 지금, 그 죄없는 어린 학생들과 시민들이 왜 죽어야만 했는지 아무도 몰랐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았고, 진실을 밝히려 하지 않았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여전히 길에서 울었고, 억울한 원혼들은 구천을 맴돌았다.

“그래서 대통령 될라구 하는 거 아녜요, 지금. ㅎㅎㅎ” 그 여자는 이렇게 말하고 51.6%의 득표로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2년 6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예상보다 견딜만 하신지, 여전히 안녕하신지 궁금할 따름이다.

당신의 아들딸은 세월호를 타지 않았기에 괜찮고, 당신의 가족들은 메르스에 걸리지 않아 괜찮고, 당신은 집을 사기 위해 빚을 내지 않았으니 괜찮고, 당신은 농사짓는 농부가 아니니까 괜찮다고? 그렇다면 계속 안녕하시길 진심으로 바란다.

을미년 여름은 비도 오지 않고, 사정없이 더울 것 같다.

기회주의자의 특징

기회주의자의 특징

기회주의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우선 그들은 부끄러움을 모른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은 사람으로서 지녀야 할 기본 품성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는 말이다. 사람과 짐승을 가르는 기준 중 하나가 바로 ‘부끄러움을 아느냐 모르느냐’인데, 기회주의자는 부끄러움을 모르기 때문에 짐승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기회주의자는 부끄러움을 모를 뿐 아니라 끝없는 탐욕으로 뭉쳐있어 짐승보다 못할 때가 더 많다.

기회주의자는 겉과 속이 다르고, 말과 행동이 다르다. 겉으로는 예의 바르고 화려한 언어로 얘기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겉모습이나 말과는 사뭇 거리가 있다. 기회주의자가 겉으로 내세우는 명분은 공허하다. 그것이 행동으로 뒷받침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회주의자는 항상 눈앞의 이익을 좇는다. 그들에게 의(義)를 바라는 것은 나무 위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것보다 어렵다.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들은 역사의 평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역사라는 것도 힘만 있으면 언제든 왜곡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이런 기회주의자들이 거의 늘 성공한다는 것이고, 지배계층의 모든 부문을 기회주의자들이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회에서 성공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더 약삭빠른 기회주의자가 된다는 뜻이다. 지금 이 나라에서 힘깨나 쓴다는 자들 중 열의 아홉은 기회주의자다. 기회주의자가 지배하는 사회는 희망이 없다.

새정치연합이라는 정당의 내분도 결국은 기회주의자들과의 싸움으로 보면 된다. 이 나라의 기회주의자들이 극도로 혐오하고 저주하는 사람이 노무현이다. 기회주의자들이 노무현을 죽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가 남긴 정신은 없애지 못했다.

여야를 막론하고 ‘친노패권’ 운운하는 자는 100% 기회주의자고, 그들이야말로 마땅히 사라져야 할 족속들이다.

p.s. 기회주의자는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그들은 무책임하다. 마땅히 자기가 져야 할 책임도 아랫사람들에게 전가한다. 유체이탈 화법의 달인들은 전형적인 기회주의자다.

기회주의자는 무책임할 뿐만 아니라 극도로 무능하다. 특히, 다른 사람을 위한 일에 있어서는 거의 젬병이다. 이들은 다른 사람을 위한다는 개념 자체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짓말에는 매우 능하며 자기의 이익을 좇는 일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기회주의자는 공직을 맡아서는 절대 안 되지만, 이들은 기를 쓰고 공직을 얻으려 한다. 공직에 딸린 책임은 나 몰라라 하면서, 그 권력만을 탐하기 때문이며, 그 권력을 이용해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면서 사리사욕을 채운다. 그들이 기회주의자다.

p.s. 이 글이 당신을 불편하게 한다면, 당신은 기회주의자일 가능성이 높다. 거울을 한 번 보면서 깊이 성찰하기 바란다.

공감과 울림을 주는 말들

공감과 울림을 주는 말들

1. 채현국 선생이 며칠 전 진주에서 강연을 하셨다. 그는 “시시한 삶만이 확실하게 행복한 삶“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강연을 마쳤다.
“소박한 마음만 회복하면 된다, 삶 자체는 기적이다, 독을 어떻게 빼어내느냐는 문제다. 삶의 기적이 우리로 하여금 발효가 되고, 아름답고 좋은 포도주가 되게 할 것이다. 모른다는 생각부터 하면 된다. 모르는 게 아니고 안 하는 것이다. 소박한 마음을 회복하면 훌륭한 삶이 된다. 자기 자신을 예쁘게 봐주는 것부터 하면 된다.” <“노인 봐주지 말라는 말은 젊은이들 속지 말라는 뜻”, 오마이뉴스>
글로벌 리더가 되겠다는 우리 아이들이 한 번쯤 되새겨볼 귀한 말씀이다. 리더보다는 확실히 평범한 민초가 훨씬 행복하다. 물론, 기회주의자인 리더가 되겠다면 또 다른 얘기지만 말이다. 2. 호주 아시안컵 결승전을 마치고 슈틸리케 감독은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다수 선수들이 학교에서 축구를 배운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선수들에게 승리하는 법을 가르칠 뿐 축구를 즐기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슈틸리케 일문일답 “우리 선수들 자랑스러워해도 됩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축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교육 전체의 문제다. 우리나라 교육은 언제부터인가 본질을 가르치지 않고 항상 (짧은 기간 안에) 어떻게 성공할 것인가만을 가르친다. 어떻게 하면 문제를 잘 풀고, 어떻게 하면 시험을 잘 볼 수 있는지를 가르친다. 우리나라 교육은 어떻게 하든 다른 친구들과의 경쟁에서 이겨,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을 잡고 출세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사실 이것은 교육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민망하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교육이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한 정글 시스템 안에서 아무 죄도 없는 아이들이 꿈을 잃고 삶의 목표도 없이 공부하는 기계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국가와 부모들이 작당하여 아이들을 인질로 만든 추악하고 불행한 비극이고, 소수 몇몇을 제외하고 거의 대다수 국민들을 노예로 만드는 것이다. 이 땅의 기성세대들은 슈틸리케 감독의 일침을 깊이 새겨야할 것이다.
리더의 역할

리더의 역할

호주 아시안컵에 출전하고 있는 축구 국가대표팀이 결승에 올랐다. 지난 해 여름 브라질 월드컵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어서, 국민들도 놀라고 선수들도 놀라고 있다. 단지 달라진 것이라고는 대표팀 감독이 홍명보에서 슈틸리케로 바뀐 것인데, 슈틸리케가 대표팀을 맡은 것은 불과 몇 달 되지 않는다. 현대 축구는 점점 감독의 스포츠가 되어가는지도 모르겠다.

예전에도 얘기했듯이, 리더의 기본은 조직 구성원과 신뢰를 쌓는 것이고 그러기 위한 가장 원초적 조건은 기회주의자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본 조건을 만족한, 즉 기회주의자가 아닌 리더가 성공적인 목표 달성을 위해 해야 할 역할은 무엇일까?

리더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훌륭하고 유능한 구성원을 선발하는 것이다.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Good to Great)>라는 경영 베스트셀러를 쓴 짐 콜린스(Jim Collins)에 따르면, 위대한 기업의 리더들이 하는 일은 직무에 가장 적합한 사람을 중용하는 것이다.

축구 감독이 운동장에서 직접 공을 차지는 않는다. 기업의 사장이 실무를 하지는 않는다. 이들의 역할 중 핵심은 가장 적합하고 유능한 사람을 선발하여 일을 맡기는 것이다. 그러면 그 조직은 저절로 굴러가게 되어 있고, 훌륭한 성과를 낼 수 있다. 그러므로 리더는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리더가 훌륭하고 유능한 사람들로 팀을 구성했다면 이미 80%는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리더가 비전과 목표를 제시하고 동기 부여로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하는 것은 크게 신경쓸 필요가 없는 부차적인 일이다. 그것은 훌륭한 팀원들이 알아서 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20%는 팀원들이 자기의 기량과 실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장(場)을 마련하고 외부의 압력이나 간섭으로부터 보호해주는 것이다.

슈틸리케가 대표팀을 맡은지 다섯 달도 채 되지 않았지만, 그는 이미 리더로서 성공하고 있다. 학연, 지연이 아닌 단지 축구 실력으로 대표 선수들을 선발하고 있으며, 그들이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고 있다. 이런 팀에서 선수들은 스스로 동기 부여하고 최선을 다해 훈련과 경기에 임한다. 팀의 분위기도 점점 끈끈해지고 있다.

축구뿐만이 아니라 국가의 운영도 마찬가지다. 현 정부가 성공할 수 없는 이유는 대통령의 인사와 용인술을 보면 알 수 있다. 제대로된 인사를 할 수 없는 리더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안타깝게도 이 나라의 국민들은 훌륭한 리더를 선택하지 못했고, 지금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아직도 뭐가 문제인지를 모르는 국민들이 많다는 것이다.

무지도 지나치면 죄가 된다.

‘표현의 자유’는 제한될 수 있는가

‘표현의 자유’는 제한될 수 있는가

민주주의 국가에서 ‘표현의 자유’는 국민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다. 따라서 일반적인 경우에 표현의 자유는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표현의 자유가 제한된 나라치고 제대로된 민주주의를 하는 나라는 없다. 그렇다면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어야 하는 경우도 있을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역사적) 가해자들이 여전히 강자이거나 지배계급으로 군림하고 있을 때, 그들이 주장하는 표현의 자유는 어느 정도 제한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독일인들은 유대인들을 비하하거나 조롱하면 안 된다. 아무리 표현의 자유가 허락된 독일이지만, 그것은 금기이다. 600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히틀러와 나치의 만행을 잊지 않는다면 말이다. 유대인들도 팔레스타인들을 비하하거나 조롱하면 안 된다. 나치가 유대인에 대해 가해자였듯, 이스라엘의 유대인들도 팔레스타인들에 대해 가해자들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백인들도 흑인들에 대해 제한 없는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면 안 된다. 그들은 아직도 갚아야할 빚이 적지 않다. <샤를리 엡도(Charlie Hebdo)>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무리 표현의 자유가 기본 권리라 하더라도, 기독교를 근간으로 하는 서방의 언론들은 이슬람교를 모욕해서는 안 된다. 현대 역사를 살펴 보면, 미국과 유럽의 강대국들은 많은 이슬람 국가들에 대해 가해자들이였다. (이러한 이유로 알카이다의 테러가 정당화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가해자들이 피해자들에 대해 언급할 때는 예의를 갖추어야 하며 피해자의 입장을 배려해야 한다. 자신의 ‘표현의 자유’를 먼저 주장하기 전에, 그 표현으로 상대방이 상처받지 않을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 그것은 결코 자기 검열이 아닌 인간에 대한 기본 예의이다. 거의 무제한에 가까운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은 (역사적) 피해자들과 사회의 약자들이다. 이들은 지배계급에 대해 표현의 자유를 마음껏 누려도 된다. 그들의 표현들이 해학이 넘치고 정곡을 찌를 때, 그것은 조롱도 모욕도 아닌 풍자가 된다. 따라서 풍자는 피해자들과 약자들의 전유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덧. 데이비드 호킨스는 표현의 자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표현의 자유는 생각의 자유와 관점 표현의 자유를 뜻하는 것이지, 감정과 유치한 행동의 과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데이비드 호킨스, 현대인의 의식 지도, 판미동, p. 157>
풍자와 신성모독의 충돌

풍자와 신성모독의 충돌

2015년 새해 벽두를 강타한 것은 프랑스 주간지 <샤를리 엡도(Charlie Hebdo)>에 대한 테러였다. <샤를리 엡도>는 모든 권위주의에 반대한다는 기치를 내세우면서 수년 전부터 이슬람교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무함마드를 노골적으로 ‘풍자’하는 만평을 게재했다. 이러한 만평은 전세계 무슬림들의 거센 저항을 불러 일으켰고, 만평가들은 끊임없는 살해 또는 테러 위협에 시달렸다.

<샤를리 엡도>의 편집장 스테판 샤르보니에르는

“나는 보복이 두렵지 않다. 나는 아이도, 아내도, 차도, 신용도 없다. 약간의 허세를 보태자면, 나는 무릎꿇고 사느니 선 채로 죽겠다.”

라며 무슬림들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자신들의 ‘표현의 자유’를 지켜나가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2015년 1월 7일, 무슬림 무장 괴한 2명에게 살해된다.

<샤를리 엡도>의 만평가들은 무함마드를 포르노 배우로 묘사하며 풍자(또는 조롱)하는 것을 ‘표현의 자유’라 여겼고, 과격파 무슬림들은 ‘신성모독’으로 받아 들였다. 무슬림들은 예언자 무함마드뿐만 아니라 인간을 형상화하는 자체를 금기시하는 전통이 있다. 그런 무슬림들에게 <샤를리 엡도>는 포르노 배우로 묘사된 무함마드를 선사했다.

<샤를리 엡도>와 과격파 무슬림들은 양립할 수도 있는 ‘표현의 자유’와 ‘상대 종교 존중’이라는 두 개의 가치를 양립할 수 없도록 만들었고, 그 결과는 공멸이었다. 프랑스 사람들에게는 ‘표현의 자유’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 무슬림들에게는 죽음을 불사할 수는 있는 ‘치욕’이 되었다.

‘표현의 자유’라는 깃발 아래에서는 상대방을 모독해도 괜찮은 것인가? 아무리 신성불가침이라지만, 무함마드를 발가벗겨 놓은 것이 12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죽일만한 엄청난 범죄인가?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인들은 무슬림들을 규탄할 것이고, 무슬림들은 테러를 자행한 범인들을 순교자로 칭송할 것이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예수나 공자의 황금률 밖에는 없어 보인다. ‘표현의 자유’와 ‘신성모독’을 논하기 전에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태도는 바로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대접해 주길 바라는 대로 다른 사람을 대접하는 것”이다.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받아들여져야 하는 진리이다.

조현아가 배우지 못한 단 한 가지

조현아가 배우지 못한 단 한 가지

대한항공 전 부사장 조현아땅콩회항 사건으로 ‘슈퍼갑질’ 논란의 한복판에 섰고, 기어이 구속까지 되었다. 재벌 집 맏딸로 태어나 미국의 유명 대학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젊은 나이에 대한항공 부사장 자리까지 올랐던 그가 배우지 못한 것이 단 한 가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예수와 공자가 가르친 황금률이다.

예수는 황금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다른 사람이 너희에게 해 주었으면 하는 대로, 너희가 다른 사람들에게 모두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내용이다.

Do to others whatever you would like them to do to you. This is the essence of all that is taught in the law and the prophets.

<마태복음 7:12>

공자도 제자가 평생토록 실천할 만한 단 한 가지를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서(恕)로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다.”

子曰 其恕乎 己所不欲 勿施於人

<논어 위령공:23>

이것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자 태도이다. 안타깝게도 조현아를 비롯한 이 땅의 수많은 갑(甲)들은 이 원칙을 배우지 못했거나 잊어 버렸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이상적인 세상은 갑을 관계가 아예 존재하지 않은 사회이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사회가 쉽게 올 것 같지 않다. 갑을 관계가 존재하더라도 이 땅의 갑들이 예수나 공자가 가르친 황금률을 기억하고 실천한다면, 우리는 지금보다는 훨씬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조현아가 감옥에서 배워야 할 단 한 가지는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대접해 주길 바라는 대로 다른 사람을 대접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