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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대통령선거

선제타격

선제타격

북한의 전쟁 도발을 억지하기 위해 선제타격도 불사하겠다는 말은 전쟁을 막기 위해 전쟁을 먼저 시작하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얼핏 들으면 호기롭지만, 금방 말이 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대통령의 첫 번째 임무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한반도의 전쟁을 막아야 하는 것인데, 북한이 전쟁을 일으킬지 모르니 우리가 먼저 전쟁을 시작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자칭 보수라 일컫는 사람들이 너무나 쉽게 전쟁을 운운하는 이유가 그 전쟁은 남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본인이나 본인의 아들, 손자가 당장 전쟁터에 나가야 된다고 생각하면 그들도 전쟁을 함부로 지껄일 수는 없다.

국힘당의 많은 정치인들이 병역을 기피하였거나 면제받았다. 총 한 번 제대로 잡아보지 않은 사람들이 전쟁을 운운하니 가소롭기 짝이 없다.

세상에 정의로운 전쟁도, 정당화할 수 있는 전쟁도 없다. 전쟁은 가장 극악한 폭력일 뿐이다. 선제타격을 공약하는 후보는 그 한 가지만으로도 사퇴해야 마땅하다.

안철수 결산, 미완의 도전

안철수 결산, 미완의 도전

무소속 대선후보 안철수가 지난 주말 사퇴했다. 민주당 후보 문재인과의 단일화 협상이 결렬되자, 국민들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는 후보 등록을 하지 않고 물러났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사퇴를 아름다운 양보라 했고, 어떤 사람은 감동이라고 했으며, 어떤 사람은 실패라 했다. 단일화 과정은 지리멸렬했지만, 안철수는 끝내 자기가 한 약속을 지켰다. 안철수가 살기 위한 단 한 가지 선택지가 바로 사퇴였다. 하지만 아무리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 하더라도 그런 결단의 순간에 그런 선택을 하기는 쉽지 않다. 안철수 스스로 “영혼을 팔지 않았다”라고 했다지만, 그 결단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한다. 그런 선례를 남겼다는 것은 본인에게도 그리고 안철수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도 자랑거리가 될 것이다. 지난 해 가을부터 안철수는 새정치의 아이콘으로 급부상했다. 사람들은 그의 착한 성공을 보면서 그가 정치에 발을 들여놓을지, 대통령에 출마할지 많은 관심을 보였고,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출마하기도 전에 그는 여야의 유력 대선후보들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이른 바 “안철수 현상”이라 불리는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었다. 두달 전, 안철수는 드디어 대선 출마를 선언한다. 그의 출마 선언은 많은 이들에게 새정치의 희망을 주었다. 이렇게 그의 시작은 희망이었고, 그의 사퇴는 감동이었다. 하지만, 지난 두달 간의 과정은 전략 실패와 역량 부족이었다. 박근혜와 맞서기 위해서 문재인과의 단일화는 예선이나 마찬가지였는데, 그는 출마 직후부터 사퇴 직전까지 제대로된 전략과 행동을 보여주지 못했다. 문재인보다 훨씬 높던 그의 지지도는 두달 사이 많이 하락했다. 안철수는 조직이 없었기에 바람으로 승부를 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끊임없이 그 승부를 뒤로 미루었고, 결국 제대로된 승부도 하지 못한 채 사퇴하고 말았다. 안철수가 처음부터 국민경선으로 승부수를 띄웠다면, 그는 지금쯤 문재인 대신 박근혜와 대결을 벌이고 있었을 것이다. 민주당이 100만 국민경선을 하자고 한다면, 안철수는 1000만 모바일경선으로 맞받아했었다. 통크게 바람을 일으키면서 문재인보다 먼저 제안하고 민주당을 압박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못했다. 전형적인 전략의 실패와 용기 부족이었다. 이러한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그가 제대로된 캠프를 꾸리지 못했기 때문이며, 제대로된 사람들을 모으지 못했기 때문이다. 안철수 캠프에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민주당이나 새누리당에서 공천을 받지 못한 정치 낭인들이었거나, 실제 정치 경험이 전무한 교수들 또는 전문가 집단이었다. 이런 사람들 속에서 제대로된 전략이 나올 리 만무했다. 안철수는 매순간 끊임없이 계산했고, 결정을 연기했으며, 사람들에게 스트레스를 주었다. 목표는 명확하지 않았고, 색깔도 선명하지 않았으며, 적과 아군을 구별하지도 못했다. 그는 스스로를 외통수로 계속 몰아갔다. 안철수는 늘 새정치를 주장했지만, 그와 그의 캠프가 보여준 것은 전혀 새정치가 아니었다. 참담했다. 안철수가 새정치의 바람을 일으켰지만, 역설적으로 안철수는 그 새정치를 감당할만큼 역량이 되지 못했고, 준비도 부족했다. 그리하여 그의 도전은 두달만에 끝이 나고 말았다. 그가 마지막 순간에 단일화에 대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사퇴함으로써 그는 희망의 끈을 소진하지 않은 사람으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의 정치적 역량에 대해 긍정적일 수 없다. 그는 청춘의 멘토로 남는 편이 훨씬 좋았을 것이다. 나는 독심술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가 얼마나 선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지 가늠할 수 없다. 다만, 그가 보인 행동과 선택으로만 판단할 뿐이다. 설령 안철수가 사람들이 얘기하는 충만한 선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정치라는 것이 그 선한 의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가 만약 정치인으로 계속 남길 바란다면, 그는 처음부터 기본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역량과 내공을 키워야 한다. 승부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장삿꾼의 잇속을 버려야 한다. 계산하지 말고, 국민을 믿고 원칙과 상식을 부여잡고 뚜벅뚜벅 나아가야 할 것이다. 과연 안철수가 그럴 수 있을까? 그가 절실해질 수 있을까? 회의적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건투를 빈다. 많은 젊은이들에게 위로와 공감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사람을 선택하는 세 가지 기준

사람을 선택하는 세 가지 기준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 번씩 선택의 순간들을 마주한다. 물론 아주 사소한 선택들도 있고 정말 중요한 선택들도 있지만, 그러한 선택들이 모이고 모여 결국 우리의 삶을 완성한다.

이러한 선택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다. 직장에서 새로운 직원을 뽑을 때, 많은 지원자 중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배우자로서 지금 이 사람은 괜찮은가? 우리 모임의 회장은 누가 되는 것이 좋을까? 대통령 선거가 코 앞인데, 어떤 후보를 지지할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기준을 적용하여 사람을 선택해야 할까. 특히 어떤 조직이나 나라를 이끌 지도자를 선택할 때 적용할 만한 기준은 없는가.

나는 개인적으로 사람을 선택할 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기준을 가지고 판단한다. 첫째, 이 사람의 삶의 궤적이 어떠한지를 들여다 보는 것이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나타내 주는 가장 좋은 지표는 그 사람의 주요 선택들을 살펴 보는 것이다. 특히, 절박한 상황에서의 선택들은 대체로 그 사람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일제시대에 일본군 장교가 되기 위해 만주군관학교에 혈서를 쓰고 입학하였다면, 그 누구도 이 사람을 민족주의자나 독립운동가로 보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정권을 잡기 위해 군사쿠테타를 일으켰다면, 아무도 그 사람을 민주주의자로 보지 않는다. 또, 죽을 때까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헌법을 파괴하고 국민들을 탄압했다면, (정상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이라면) 그를 독재자라고 판단할 것이다. 이런 사람에 대해 어떤 사람이 나와서 이런 독재자의 공과 과를 나누어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친일과 군사독재에 부역했거나 또는 그런 행위를 옹호하는 사람이다.

두 번째 기준은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누구나 말은 쉽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자기가 한 말을 행동으로 실천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되는 사람들은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특히 공허한 얘기들을 하지 않는다. 매일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만 하고, 구체적이지 않고 뜬구름 잡는 얘기들만 하며, 증명될 수 없는 언술을 즐겨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사기꾼이거나 기회주의자일 확률이 높다.

예를 들어, 어떤 대통령 후보가 매일매일 정치혁신을 주장하고, 새로운 정치를 해야한다고 말한다고 하자. 물론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그럼 당신이 주장하는 새로운 정치가 무엇이요?”, 또는 “어떻게 할 수 있는 거요?” 라고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국민이 판단할 겁니다”라고 대답하는 후보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 사람의 인생을 통틀어 단 한 번도 정치혁신에 기여한 바가 없는 사람이 말만 이렇게 하고 돌아다닌다면 그는 가짜다. 사람은 말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행동으로 판단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 사람이 이(利)에 민첩한지 아니면 의(義)에 민첩한지를 살피는 것이다. 공자는 논어 이인편에서 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라는 말을 남겼다. 조직생활을 하다보면 어느 조직이든 자기의 이해관계를 앞세우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기회주의자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조직의 장이 되었을 때, 그 조직이 성공할 확률은 거의 없다.

예를 들어, 어떤 대통령이 퇴임 후 살 집을 짓기 위해 아들 명의로 땅을 샀다고 하자. 그리고 아들 명의의 땅을 싸게 사기 위해 경호처 지분을 비싸게 사려 했다면 아무도 이런 대통령을 정상적인 지도자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아주 조그마한 이득을 취하기 위해 자기의 아들과 자신을 위해 일했던 사람들을 피의자로 만들고 범법자로 만드는 사람을 정상적인 대통령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런 자를 대통령으로 뽑은 국민들은 행복할까, 아니면 불행할까?

이런 세 가지 기준을 적용하면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아니 참 쉽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콩이야 팥이야 얘기를 해 줘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기준을 사용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오류를 저지른다. 자기를 객관화시키기가 말처럼 쉽지 않고,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통령 선거가 40여일 앞으로 다가왔다. 아직 지지하는 후보가 없다면 이 글에서 얘기한 세 가지 기준을 가지고 선택해 보시기 바란다.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정의롭고 공정한 후보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선거에서 선택이란 일단 최악의 후보를 피하는 것이다. 건투를 빈다.

참 맑고 선한 기회주의자들

참 맑고 선한 기회주의자들

사람을 판단할 때 중요한 것 하나는 이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 궤적을 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 사람의 말과 행동이 과연 일치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안철수는 기성 정치권 특히 민주당에 정치 쇄신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새로운 정치라는 것은 여전히 모호하다. 지금 있는 민주당 지도부를 바꾸라는 것인지, 아니면 당원이 주인이 되는 정당으로 탈바꿈하라는 것인지 구체적이지 않다. 그는 이렇게 모호한 정치 쇄신을 단일화의 조건으로 내걸기도 했다. 그가 어떤 정치 쇄신을 얘기하는지 알기도 어렵지만, 설령 그것을 이해했다 하더라도 민주당이 대선 전까지 과연 쇄신을 해낼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그는 불가능한 조건을 내세우고 단일화를 말한 것이고, 그것은 곧 단일화에 별 관심이 없다는 얘기일 수도 있다. 연일 정치 쇄신을 요구하는 안철수가 어제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이었던 송호창을 자신의 선거 캠프로 맞아들였다. 그러면서 이들이 했던 말들을 보면 개그콘서트보다 웃기다.
송호창 왈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낡은 정치세력에 맡기는 건 상상할 수 없다.” 안철수 왈 “참 맑고 선한 힘이 더해졌습니다.”
도대체 뭐하자는 씨추에이션인가? 촉망받던 초선의원 송호창은 자신을 국회의원으로 공천해 준 정당을 낡은 정치세력이라 일컬으며 비수를 꽂았다. 그리고 본인은 제2의 김민새가 되고 말았다. 물론 송호창이 안철수를 지지할 수도 있고, 안철수를 위해 선거운동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송호창이 진정성을 보이기 위해서는 민주당을 탈당하고 안철수 캠프로 옮기기 전에 국회의원직을 먼저 사퇴했어야 했다. 그것이 국민들에 대한 예의이고, 그들이 말하는 새로운 정치의 시작일 수 있다. 안철수는 민주당 사무총장이었던 박선숙과 민주당 국회의원이었던 송호창을 빼내갔다. 그들이 민주당에 있으면 쇄신의 대상이고 낡은 정치 세력이지만, 민주당을 탈당하고 안철수를 지지하면 “참 맑고 선한” 사람들이 되는 것인지 자못 궁금하다. 결국 안철수 얘기하던 새로운 정치는 김민새 식 기회주의 정치였던 셈이다. 새로운 정치를 운운하려면 너희들의 기득권부터 버리는 것이 먼저 아닐까. 세상은 안철수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런 식의 기회주의적 행태로는 정치 쇄신은 커녕 정권 교체도 이룰 수 없다. 안철수가 과연 정치 개혁은 고사하고, 정권 교체에 관심이나 있는지 그것조차 의문이다.
안철수가 위험한 이유

안철수가 위험한 이유

지난 해 서울시장 선거 직전부터 갑자기 세간의 주목을 받은 안철수가 드디어 대권 도전을 선언했다. 그동안 그를 알기 위해 언론에 드러나 있는 그의 행적을 유심히 관찰했지만, 여전히 그는 모호하고 불확실하다. 그는 색깔을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회색이다. 그의 대권 도전이 희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뭔지 모를 불안감을 불러온다. 찝찝하다.

정치인이나 공인으로서 보여준 것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력 후보인 박근혜, 문재인과 충분히 겨룰만한 지지율을 보인다. 물론 이명박이 보여준 극악함의 반동으로 나타난 현상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있다.

대권 후보로서의 첫번째 행보인 현충원 참배에서 그가 가진 역사의식의 일면을 엿볼 수 있었다. 그는 박근혜, 문재인과 차별화된 전략을 보인다면서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박태준의 묘역을 참배했다. 그러면서 “역사에서 배우겠다”고 했다. 공은 공대로 계승하고 과는 과대로 바로잡겠다고 했다.

그는 지난 해 서울시장 선거 직전,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도 이런 얘기를 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역사의 물결이다, 저도 역사의식이 있는 사람이라 역사의 물결을 거스르면 안 된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그의 현충원 참배를 보면서 “그는 과연 역사의식이 있는 사람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역사의식이 있는 사람이 박정희 묘역을 참배하면서 공과를 운운하는 것일까? 정말 박정희의 공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박정희는 군부쿠데타의 주역이고, 군부독재를 18년이나 자행한 독재자다. 헌법을 유린하고, 종신집권을 위해 유신헌법을 만든 장본인이다. 그뿐인가. 일제시대에는 일본군장교가 되기 위해 일본왕에게 혈서를 썼던 자고, 해방이 되어서는 남로당의 군총책으로 활동하다 투옥이 되기도 했던 우리 현대사의 으뜸가는 기회주의자다.

도대체 박정희의 삶에서 무엇을 배우겠다고 그를 참배한단 말인가? 히틀러의 과오를 바로잡기 위해 히틀러의 묘역을 참배해야 하는가? 일본제국주의자들의 과오를 알기 위해 과연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해야 하는가? 박정희 참배는 히틀러 참배나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다름없는 행위다.

인혁당 사건으로 하룻밤에 사형당한 고인들과 유가족이 과연 박정희를 용서했는가? 아직도 장준하의 혼이 구천을 맘돌고 있는데, 어디서 박정희의 공을 운운한다 말인가.

참배는 고도의 상징을 내포한 행위다. 더군다나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들의 참배는 더욱 그렇다. 안철수의 박정희 참배는 역사의식이 있는 사람의 행위는 아니다. 대권 후보 안철수의 첫번째 행보는 낙제점이다.

12월에 대선이 치뤄질 때까지 안철수에 대해 몇 편의 글을 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글들이 정말 기우였으면 좋겠다. 착한 안철수가 정말 역사의 물결을 거스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권을 교체하기 위해 안철수가 정말 힘을 보탰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런데 더욱 궁금한 것은 그가 출마선언을 하면서 “정권교체”라는 말을 단 한 차례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안철수는 과연 역사의 물결을 거스르지 않을까? 안철수는 민중의 편일까? 안철수는 정권교체에 힘을 보탤까? 여전히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노빠는 문국현을 지지할 수 없다

노빠는 문국현을 지지할 수 없다

한 노무현 지지자가 정동영에게 표를 줄 수 밖에 없는 그 심정을 변명이란 표현으로 문국현에게 미안함을 전했다. 그는 문국현을 2007년도판 노무현으로 격상시키면서 문국현에게서 희망을 보았으나 거악인 이명박을 물리치기 위해 할 수 없이 정동영에게 투표한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노무현 지지자와 문국현 지지자는 양립할 수 없다. 정작 문국현 본인은 노무현과 참여정부를 부정하고 있으며, 노무현도 문국현을 자신의 정치적 계승자로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여 노무현을 지지하는 나는 문국현을 지지할수 없다. 더군다나 문국현을 2007년의 노무현이라고 얘기하는데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문국현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이 나라의 정통성을 짊어지고 나갈 지도자가 되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그는 우리 사회의 가장 근원적인 모순과 거악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것 같다. 왜 김대중과 노무현의 10년 민주정부가 이렇게 엄청난 성과를 내고도 이런 가시밭 길을 걸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정작 싸워야 할 상대가 무엇인지, 자신은 어느 편에 있는지 모르고 있다. 왜 노무현이 임기 말년까지 “공수처 설치”를 주장하고, “기자실 통폐합”을 하는지 문국현은 잘 모른다.

정치경력이 일천한 문국현이지만, 그는 한 번도 제대로 맞서지 않았다. 늘 계산했고, 돌아가려 했다. 노무현은 밭을 탓하지 않는 농부였지만, 문국현은 비를 내리고 땅을 만드는 신의 경지로 본인을 자리매김했다. 노무현은 국민과 함께 땀흘리고 뒹구는 농투서니였고, 문국현은 모든 문제를 자기가 해결할 수 있다는 “어디선가 나타난” 전지전능의 해결사가 되길 원했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깔끔하게 해결하는. 그에게 과연 그럴 능력이 있을까?

정치적 수세에 몰린 문국현은 급기야 넘지 말아야 할 선까지 넘어버렸다.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는 18일 “박 전 대통령의 삶에서 부정과 부패가 있었느냐, 박정희 대통령은 깨끗하게 살았다”고 말했다.

[文, ‘박정희 삶에 부정부패는 없었다’, 뉴시스]

아무리 어려워도 이런 말은 하는 것이 아니다. 립서비스라도 말이다. 박정희야말로 세계 독재사에 우뚝 솟을만한 인물이고 그의 삶이 부정과 부패로 점철되어 있는, 급기야 부하의 총에 맞아 세상을 등진 인물 아닌가. 문국현이 정말 몰라서 이런 말을 했다면 천박한 역사인식을 드러낸 것이고, 알고도 했다면 참으로 기회주의적인 것이다.

문국현은 좌우를 넘나들면서 자기가 필요한, 대중에게 다가갈만한 정책들은 다 골라냈다. 노무현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노무현에게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아무리 욕을 먹고, 대통령직을 내놔야 한다 해도 노무현에게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문국현은 그것이 이율배반적이라도 할지라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 양립시킨다. 예를 들어, FTA를 찬성하면서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것 같은. 노무현은 그런 식으로 하지 않는다.

정치인으로서 문국현은 노무현과 비교할 수 있을 만한 인물이 아니고, 아직까지 그러한 가치를 보여주지도 못했다. 더군다나 그가 참여정부를 계승할 사람도 아니니 노무현 지지자들이 문국현을 지지할 이유도 없고, 지지할 수도 없다. 더군다나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노무현 지지자가 문국현에게 표를 주는 것은 이명박을 도와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문국현을 지지한다고 하면서 이명박이 당선될까봐 할 수 없이 정동영에게 표를 던진다고 얘기하는 것은 사실 상당히 비겁한 자기 위선이자 합리화다. 이런 비판적 지지론은 87년 대선 때부터 진보 진영의 단골 손님처럼 등장했다.

자기의 세계관과 지향은 “선택”이라는 행위가 말하는 것이다. 권영길을 지지하고 싶은데 할 수 없이 노무현한테 표를 던졌다 또는 문국현을 지지하는데 어쩔 수 없이 정동영에게 표를 던졌다라는 것이야 말로 자기 변명일 뿐이다. 그런 것은 없다. 결국 세상을 바꾸는 것은 노무현을 찍었다는 행위이지, 권영길을 지지했다는 마음이 아니다. 우리 좀 담백하게 살자. 애초부터 비판적 지지라는 것은 없다.

나는 노무현 지지자이므로, 문국현을 지지할 수 없다. 노무현의 정치 철학과 정책을 계승할 세력을 선택할 것이다. 그 세력은 여전히 유시민, 한명숙, 이해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