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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널프의 죽음

스널프의 죽음

며칠 전 서울대가 만든 세계 최초의 복제 늑대 스널프가 숨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늑대 한 마리 죽은 것이 무슨 대수냐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스널프는 우리 지구별에서 처음으로 엄마 아빠 없이 태어난 늑대다. 엄마 아빠의 존재와 사랑을 몰랐던 스널프는 정말 행복하게 살았을까?

이 소식을 듣고 떠오른 사람은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이었다. 권정생 선생께서 돌아가시기 전 남기신 마지막 동화가 “랑랑별 때때롱”이다. 이 동화의 머리말에서 선생은 엄마 아빠가 없는 동물을 왜 만들어야 하냐고 되물었다. 태어날 때부터 고아였던 스널프의 마음을 사람들은 단 한 번이라도 헤아려 보았을까? 과연 사람들에게 그런 생명을 만들어낼 권리가 있는 걸까?

5백 년 전 랑랑별에 살았던 보탈이는 모든 우수한 유전자를 받아서 태어난 아이였지만, 그는 슬픔도 기쁨도 알지 못하는 아이였다. 놀 줄도 모르는 아이였다. 놀 줄을 모르는 아이는 아이가 아니다. 새달이와 마달이처럼 아이들은 땀을 뻘뻘 흘리고 놀아야 한다. 가리마에서 햇볕 냄새가 나는 아이들, 피부는 까맣지만 건강한 웃음을 잃지 않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이 많을수록 우리 사회는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가 된다.

아무리 과학 기술이 발전해도 아이들이 행복하게 놀 줄 모르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과학 기술의 발전과 경제 성장 그리고 극한의 경쟁만을 강요하는 현대 사회에서 권정생 선생의 “랑랑별 때때롱”은 행복한 세상의 가장 기초가 무엇이냐는 근본적 물음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전해준다. 많은 어른들이 이 동화를 읽고 다시 한 번 삶과 행복의 의미를 되새겨 보았으면 좋겠다.

건강하게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권하는 책

건강하게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권하는 책

사람들이 참으로 어리석은 이유 중 하나가 건강할 때는 건강의 소중함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있을 때는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지 모를 뿐더러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자신이나 아니면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병에 걸려 건강을 잃었을 때 이제 건강은 모든 것이 되어버린다. 돈도 명예도 사랑도 모두 부질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사람이 그렇게 간사하다.

나도 그렇게 어리석고 간사한 사람 중에 하나였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가 건강을 잃었을 때, 그리고 주류의학인 서양의학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건강은 병원이나 의사가 지켜주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것은 오롯이 자기 자신의 책임이었다. 병을 앓는 것도 자기 자신이고 치료를 하는 것도 자기 자신이었다. 의사들은 전문적인 지식으로 옆에서 도와줄 수는 있지만, 선택은 결국 자신의 몫이었다.

따라서 평소에도 건강에 대한 기본적인 공부를 해야 한다.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을 그렇게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을 병원에만 맡겨놓고 그 의사들의 말을 무작정 믿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서양의학의 허와 실을 깨달아야 한다. 서양의학이 무엇을 해줄 수 있고, 무엇을 해줄 수 없는지를 알아야 한다. 서양의학이 단지 여러 의학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서양의학뿐만 아니라 한의학도 있고, 자연의학도 있고, 수많은 대체의학 요법들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어떤 경우에 어떤 치유 방법을 선택할 것인지 고민하고 선택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이 될 수 밖에 없다.

몇 년 전부터 읽었던 여러 가지 건강 서적들 중 도움이 될만한 책들을 우선 추렸다.

자연 치유
이 책은 앤드류 와일이라는 의사가 쓴 책이다. 앤드류 와일은 서양의학을 전공했으면서도 그 한계를 깨닫고 여러 가지 대체의학에 눈을 돌린 몇 안되는 의사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주류의학에 너무 “병” 자체에만 관심을 갖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자연치유력”에 좀 더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서양의학과 대체의학을 좀 더 객관적인 시각에서 서술한 책이다. 건강에 대한 입문서로 강추한다.

약이 사람을 죽인다
레이 스트랜드라는 의사가 쓴 책으로,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먹는 약들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경고한 책이다. 미국 사람들의 사망 원인 중 두번째가 의약품의 오남용이라는 사실을 아는가? 이 책을 읽으면 약을 함부로 먹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제약회사들과 주류의학계의 추악한 거래에 대해서도 고발하고 있다.

병 안 걸리고 사는 법
신야 히로미라는 일본 의사가 지은 책으로 우리 몸 안에 있는 효소가 얼마나 중요한지, 어떤 식사를 해야하는지 등 건강에 대한 아주 기초적인 상식을 모아놓은 책이다.

사람을 살리는 단식 사람을 살리는 생채식 민족생활의학
이 세권의 책들은 재야 의학자 장두석 선생이 지은 책으로, 일본 니시의학과 우리나라 전통 민간의학들을 접목하여 건강하게 사는 방법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사람을 살리는 단식>은 반드시 읽어야할 책 중의 하나로 시중에 나온 단식 책 중 가장 권할만한 책이다. 단식은 칼을 대지 않는 수술이라고 할만큼 건강한 삶을 위해 중요한 방편 중 하나이다.

나는 침뜸으로 승부한다
이 책을 읽고 실제로 김남수 선생과 그의 제자들을 찾아가 뜸자리를 잡았다. 가장 경제적이고 쉽게 면역을 활성화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뜸이라고 생각한다. 일반 한의사들도 모두 알고 있는 상식이지만 그들은 이런 시술을 잘 하지 않는다.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일까? “배워서 남 주자”는 김남수 선생은 이제 우리나라에서는 뜸 시술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면허가 없다는 이유로 그는 미국으로 내쳐졌다. 참으로 잘난 나라 아닌가?

맘 놓고 병 좀 고치게 해주세요
김남수 선생이 침과 뜸의 대가라면 장병두 선생은 약의 대가다. 그는 주류의학계에서 포기한 수많은 환자들을 치유했다. 그도 역시 면허가 없다는 이유로 고발당하여 법정 싸움을 하고 있다. 수많은 환자들이 그를 애타게 찾고 있지만, 그가 무죄 판결을 받기는 어려워 보인다. 우리나라 검찰이나 사법부가 서민의 편인 적이 단 한번도 없기 때문이다. 그도 역시 김남수 선생처럼 해외로 나갈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는 서양의학의 한계를 극명하게 경험하고 있다. 집안에 암환자 한 사람 없는 집안이 없을 정도로 암이 많아졌고, 고혈압과 당뇨 같은 각종 성인병들은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 대부분이 생활의 불균형과 스트레스에서 비롯되는 것들이다. 이런 퇴행적 질환에 서양의학은 아무런 도움이 못되고 있다. 때문에 서양의학의 한계를 경험한 사람들이라면 스스로 공부하고 방법을 찾아나가야 할 것이다.

위에 소개한 책들은 전문 서적들은 아니지만, 건강과 질병에 대한 생각을 전환하는데에는 유용한 책들이다. 일단 관심을 갖게 되면 보다 깊게 공부하고 싶은 열정이 생길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건강은 자기 자신이 지켜야 한다.

가장 혁명적인 것

가장 혁명적인 것

김규항의 <예수전>을 보다가 깊이 공감하는 한 구절을 발견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예수는 정치적인 혁명가가 아니었다’는 상투적인 견해에 대해 묵상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정치적인 혁명성이 ‘주장’되는 게 아니라 지배체제에 의해 ‘증명’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겉보기엔 제아무리 혁명적이라 해도 지배체제가 별다른 위협을 느끼지 못한다면 드건 더 이상 혁명적인 게 아니다. 학술적, 문화적 차원에 머무는 혁명 이론 따위가 그렇다. 반대로 겉보기엔 그다지 혁명적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데 지배체제가 어떤 과격하고 급진적인 혁명운동보다 더 위협을 느끼고 적대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혁명적인 것이다. 예수는 비폭력주의자였고 국가권력을 접수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건 다 안다. 그런데 왜 지배체제는 폭력을 사용하고 국가권력 접수를 목표로 싸운 바라빠보다 예수에게서 더 큰 위협을 느끼는가? 예수의 정치성에 대해 말하려면 먼저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김규항, 예수전, p.248>

지배세력이 가장 위협을 느낀다면 그것은 혁명적인 것이다. 우리나라 지배세력이 가장 위협을 느끼고 두려워했던 인물은 누구일까? 나는 노무현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노무현보다도 위대하고 훌륭한 인물은 종종 있었지만, 노무현만큼 지배세력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인물은 없었다. 결국 지배세력의 공포와 열등감이 노무현을 제거하려 했고, 노무현은 자신의 목숨을 버림으로해서 그들의 시도를 원천봉쇄했다.

80년 광주가 우리나라 민주화의 젖줄이었던 시대가 있었다. 한 세대가 흐르고, 이제 노무현이 광주의 뒤를 이어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상징이 될 것이다. 광주는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었고, 노무현은 자신의 목숨까지도 버리면서 광주의 정신을 계승했다.

노무현 정부가 이념적으로는 중도보수의 길을 걸었지만, 노무현의 가치는 가장 혁명적인 것이었다. 김규항의 정의대로 지배세력을 가장 위협했고, 지배세력으로부터 끊임없는 정치적 탄압을 받았기 때문이다.

김규항은 <예수전>에서 위선자인 바리새인들을 혁명의 가장 걸림돌로 지목하면서, 노무현과 지향이 같은 세력을 바리새인으로 폄하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김규항과 같은 좌파들이 참여정부를 오히려 한나라당이나 이명박보다도 더 증오했던 것이다. 노무현을 인정하지 않았던 그들이 오히려 더 바리새인들이 아니었을까? 이 땅의 지배세력은 자칭 좌파라 하는 그들에게 어떠한 위협도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규항의 <예수전>은 예쁜 책이지만, 그의 예수에 대한 묵상과 천착은 아직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예수를 닮고자 하는 이들에게 권하는 책

예수를 닮고자 하는 이들에게 권하는 책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람 중 하나는 예수다. 그의 존재로 말미암아 인류의 역사는 예수 이전과 예수 이후로 나뉘었다. 그는 팔레스타인의 한 마굿간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세상에 왔으나, 세상은 그를 견딜 수 없었고 그를 십자가에 매달았다. 그리고 세상은 그를 신의 아들로 만들었다.

그가 광야로부터 세상에 왔을 때, 사람들은 그를 외면했다. 사람들은 그를 인정할 수 없었다. 수천 년 동안 메시아를 기다려온 사람들이었다. 인류의 구원자를 기다려온 사람들이 정작 그가 나타나자 그에게서 달아나려 했다. 사람들에게 그는 이방인이었고, 걸인이었고, 위험한 혁명가일 뿐이었다. 그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을 의미했다. 모든 욕망을 버리고,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두려웠다. 그의 가르침이 두려웠다. 진리가 두려웠다. 그래서 그를 죽여야만 했다. 십자가에 못박아서 죽여야만 했다.

그가 죽었어도 그의 가르침은 남았다. 말씀으로 남아 회자되기 시작했다. 그가 죽었어도 그의 존재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 누구도 예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를 외면하고 싶은데, 외면해야만 하는데, 그의 말씀은 주홍글씨로 남아 사람들의 가슴을 도려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의 말씀을 견딜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그의 말씀으로부터 벗어나는 법을 깨달았다. 그를 신의 아들로 올리고, 그의 말씀 중 견딜 수 있는 것만 골라 경전을 만들었으며, 그 경전에 대한 해석을 특권화했다. 간교한 사람들은 예수를 팔아 장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천 년이 흘렀다.

많은 교회들이 여전히 예수를 팔았고, 사람들은 위로를 얻으러 교회에 갔다. 예수는 신의 아들이 되었지만, 그의 가르침은 거세되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의 가르침은 간교한 사람들로 말미암아 기복으로 전락했다. 사람들은 부자가 되기 위해 예수에게 기도를 했고, 권력을 얻기 위해 교회에 갔다. 예수는 가진 자들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주 드물게 예수의 말씀을 깨닫는 이들이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영적 스승, 구도자, 신비가 등으로 불렸고, 예수의 원래 가르침을 복기하려 했다. 오쇼 라즈니쉬의 “도마 복음 강의”도 그런 시도 중 하나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려는 사람들이 아니고, 예수를 닮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읽어야할 책이다. 역자인 류시화는 책에 나타난 예수의 가르침을 이렇게 요약했다.

나를 추종하지 말고 나처럼 되라.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의 씨앗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고통을 겪는 것은 죄 때문이 아니라 무지 때문이다. 진정한 자아를 아는 것이 곧 하느님을 아는 것이며, 자아와 신성은 동일하다.

[도마 복음 강의 서문 중에서]

모든 가르침이 일관되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니.” 진리는 이미 수천년 전에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세상을 구원할 진리가 이미 전해졌음에도 사람들은 그것을 외면하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진리를 찾아 헤매고 있고, 여전히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누구든지 이 말씀들의 속뜻을 발견하는 사람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으리라.

[도마 복음 1절]

예수는 이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신에 대한 가장 진보된 정의

신에 대한 가장 진보된 정의

미리내 님이 권해주신 “내 안의 참나를 만나다(Discovery of the Presence of God)”를 읽었다.

사람의 언어로 형언할 수 없는 경지가 기록되어 있었는데, 의식 수준이 낮은 나의 처지에서 그런 내용들은 이해는 고사하고 범접하기조차 쉽지 않았다. 데이비드 호킨스(David Hawkins)는 이 책을 통해 그동안 내가 품고 있던 신과 영혼과 종교와 인간에 대한 다양한 의문들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깨달음을 찾아 구도의 길을 떠나는 수많은 영혼들이 왜 가치있는지, 의식의 진화와 성장 단계가 무엇인지, 궁극으로 도달하려고 하는 지향이 무엇인지, 왜 성인들은 용서와 사랑을 한결같이 강조했는지 이 책은 주관적 경험과 객관적 사실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특히, 신의 본성을 설명해 놓은 부분은 그동안 내가 그 어떤 종교에서도 접할 수 없었던, 가장 진보된 것이었다.

  1. 신성(Divinity)은 비선형적이고 불편부당하고 시비분별이 없으며, 편파성과 취사선택하는 편애를 넘어서 있다.
  2. 신성은 변덕스럽거나 분별하지 않으며, 추정적인 인간 감정들의 한계에 종속되지 않는다. 신성한 사랑은 태양과 마찬가지로 무조건적이다. 한계는 에고의 귀결이다.
  3. 신의 정의는 신성의 전능과 전지의 자동적 귀결이다. 신은 ‘행’하거나, ‘작용’하거나, ‘원인’이 되지 않고 그저 ‘있을’ 뿐이다. 신성의 성질은 무한한 힘의 장으로서 방사되는데, 그 무한한 힘의 장에 의해 존재하는 전부는 있는, 그리고 되어 있는 ‘것’에 따라 자동적으로 정렬된다. 각각의 영혼/영은 이렇듯 고유한 운명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수준을 향해 끌려가는데, 그것은 마치 바다 속의 코르크나 전자기장 속의 쇳가루의 움직임과 같다.
  4. 신성은 낮은 힘을 훨씬 넘어서 있는 무한한 힘의 고유한 성질로 말미암아 절대적 지배권이다. 낮은 힘은 위치성과 통제의 도구이며 유한하다. 힘은 무한한 세기를 갖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힘을 구할 필요가 없는 신성한 참나로서의 힘의 근원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5. 신성의 막강함과 전적인 현존 내에서, 존재하는 전부는 스스로를 정렬시킨다. 이 조정은 영적 선택의 귀결이다. 자유는 신성한 정의에 고유하다.
  6. 의식의 무한한 장으로 표현된 신성의 전지와 전능은, 실상을 가능성의 전 단계에 걸쳐 확인해 주는 의식 연구 측정 기법으로 확인할 수 있다. 모든 생각, 행위, 결정이 시간과 장소 너머에 있는 의식의 무한한 장에 각인된다. 이 각인에 의해, 정의가 보증된다.

<데이비드 호킨스, 내 안의 참나를 만나다, pp. 152-153>

겸손한 삶, 내맡기는 삶, 그리고 사랑으로 충만한 삶, 결국 인류 역사상 모든 성인들과 스승들이 한결같이 가르쳤던 내용들이 진리였던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에게는 새로운 화두가 생겼는데, 그것은 환상으로 명명된 이 차원에서의 삶이 너무 허무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비로소 성철 스님의 법문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도 같았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려고 오셨습니다.

딸에게 권하는 책들

딸에게 권하는 책들

초등학교 2학년이 된 딸아이가 세상에 대해 조금씩 알기 시작했다. 친구들도 많이 생기고, 학교도 재미있고, 이제는 숙제도 스스로 알아서 한다. 셈을 하고, 보고 싶은 책을 알아서 도서관에서 빌려온다. 박경리의 토지가 오세영의 그림으로 다시 탄생했는데, 그것을 빌려와서 읽기도 했다. 무슨 얘기인지 아느냐 물었더니 잘 모른다고 했다. 딸아이는 만화책을 참 좋아한다.

딸아이가 성장하는 것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으례 그렇듯이 두가지다. 하나는 참으로 대견하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참으로 아쉽다는 것. 아이가 어른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없지만, 그 푸릇푸릇하고 착한 마음을 간직하면서 좀 더 행복하고 희망찬 세계를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딸아이가 자라면서 꼭 읽었으면 하는 책들을 정리한다. 물론, 특별한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책들은 나의 주관적인 기준에 의해 선택된 것이고, 내 인생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책들이다. 딸아이가 자라면서 여기 적혀있는 책들을 읽는다면, 그의 삶이 조금은 더 풍요롭게 될 것이라 믿는다.

이 목록들은 계속 늘어날 것인데, 몇 권이나 될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순서는 큰 의미가 없다. 그냥 생각나는대로 적는 것이니 말이다.

  • 신약성경 (특히, 4복음서)
  • 장자
  • 도덕경
  • 법구경
  • 숫타니파타
  • 반야심경
  • 논어
  • 월든
  • 채근담
  • 티벳 사자의 서
  • 간디 자서전 (The Story of My Experiments With Truth)
  • 스콧 니어링 자서전 (The Making of a Radical)
  • 크로포트킨 자서전 (Memoirs of a Revolutionist)
  • 조화로운 삶 (The Good Life)
  • 전태일 평전
  •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 우리들의 하느님
  •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 어린 왕자 (Le Petit Prince)
  • 예언자 (The Prophet)
  •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무소유
  • 작은 것이 아릅답다 (Small is Beautiful)
  • 시민 불복종 (Civil Disobedience)
  • 간디의 물레
  • 부자의 그림일기
경제를 살리고 싶다면

경제를 살리고 싶다면

사서삼경 중의 하나인 대학(大學)의 마지막 구절이다.

국가를 이끌어 가면서 경제에 힘쓰는 것은 반드시 소인에게서 나온다. 소인에게 국가를 다스리게 한다면 재앙과 해악이 함께 이를 것이다. 어진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국가는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이익을 창출하지 않고 의로움을 추구함으로써 이익을 창출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長國家而務財用者, 必自小人矣. 彼爲善之, 小人之使爲國家, 菑害並至. 雖有善者, 亦無如之何矣! 此謂國不以利爲利, 以義爲利也.

수천 년 전에 씌여진 유교 경전에는 이미 21세기 한반도에서 벌어질 일들이 예언되어 있었다. 소인이 나라를 다스린다면 재앙과 해악이 닥쳐올 뿐이라는 사실이 고스란히 적혀 있다. 경제를 살리고 싶다면 의로움을 추구해야 한다. 도덕과 의가 없는 나라에 이익이 나올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왜 나쁠까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왜 나쁠까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Bad Samaritans, The Myth of Free Trade and the Secret History of Capitalism)]이라는 책은 아주 선명하게 신자유주의자들을 비판하고 있다. 이 책은 1980년대 이후 전세계적으로 주류가 되어 버린 신자유주의 경제학이 어떤 모순을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황당한 이데올로기로 개발도상국과 후진국들을 속이고 있는지를 풍부한 증거로써 신랄하게 반박하고 있다.

나는 이런 류의 선명한 책들을 좋아한다. 주장이 명쾌할 뿐만 아니라 그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는 수많은 논거들이 일관성이 있으며, 논리적이다. 돌려 말하지 않고 핵심을 찌르고 있고, 적당히 양다리를 걸치지 않는다. 아마 신자유주의 경제학을 주창하거나 추종하고 있는 경제학자들이 이 책에 대해 논박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이 책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마지막 3페이지에서 “개명된 이기주의에 대한 호소”를 통해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설득하자라고 주장한 대목이다. 이것은 저자 장하준의 한계를 드러내 놓은 대목이기도 하거니와 상당히 순진한 주장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그런 식의 호소로 설득될 사람들이라면 사실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진짜 나쁜 이유는 그들도 알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극단적으로 추구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계화된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근본 속성이기도 하다. 우리가 가진 한정된 자원 속에서 무한의 이윤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신자유주의의 근본 모순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의 한계는 조만간 드러날 것이고, 지능을 가진 인간들이라면 새로운 대안을 생각해낼 것이다.

문제는 그 한계에 봉착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절망 속에서 허덕일 것이냐 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더 많이 고통 받고, 절망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지지 못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단기적으로 보면 세상은 참으로 불공평하다.

사랑에 대해 알고 싶으면

사랑에 대해 알고 싶으면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사람과 세상을 행복하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사랑이다. 단정적으로 말하지만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신약 성경 고린도전서를 펼쳐보면 사도 바울이 사랑에 대해 적어 놓은 구절이 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동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쉽게 성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소망하며, 모든 것을 견뎌 냅니다.

[고린도전서 13:4-7]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이 구절을 읽으면 된다. 그리고 행하면 된다. 이 구절만큼 명확하게 사랑을 정의한 것을 보지 못했다.

진리는 수천년 전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명백히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너무도 단순하지만, 이 단순한 진리를 행하기는 쉽지 않다.

나를 우울하게 만든 대통령의 말

나를 우울하게 만든 대통령의 말

나는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자다. 최후의 지지자라 얘기할 만큼 골수다. 나는 그를 지켜보면서 원칙에 입각한 그의 정치 행보에 감탄하곤 한다. 지금 그가 대통령이 되어 우리나라를 이끌고 있다는 사실에 얼마나 안도했던가 그리고 얼마나 자랑스러워 했던가. 그의 말 한마디, 일거수 일투족이 나에게는 감동이었다.

그가 이라크 파병을 결정했을 때도, 그가 대연정을 제안했을 때도 그를 이해했다. 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그가 선택해야 하는 결정의 현실적 타당성에 대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오늘 대통령의 말은 처음으로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제 정치생활도 지금 20년째 접어드는데, 그동안 머리를 떠나지 않은 것이 그 전제에서 우리가 농업을 과연 방어하고 보호할 수 있는가, 그 전제가 다 맞다고 하면, 보호를 해야 하는데 과연 그것이 가능하겠나, 그 논리를 그대로 우리가 수용해도 방법이 없는 데 대해서 가장 큰 어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대로 우리가 실천할 방법이 없다. 심지어는 일본은 농지에다가 골프장을 만들게 하되 나중에 식량 비상이 생기거나 하면 다시 농지로 환원할 수 있는 조건으로 전용을 하게 하거나, 쌀 기근이 생길 때 환원한다는 조건이 있는데, 우리나라도 같은 방식을 도입할 수 있겠느냐, 그런 고민까지 갖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여러 정책을 생각해봐도 논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전통적으로 향수가 깃든 감상적 농업을 포함해서 우리 농업은 다 유지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고민이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국민과 함께하는 농·어업인 업무보고 마무리 발언 중에서]

대통령은 식량안보와 농업이 가져다 주는 환경보전과 같은 긍정적인 측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농민의 아들이었고, 젊었을 때 농사도 지어본 그리하여 농민들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그가 오늘 “방법이 없다” 라고 얘기할 때 나는 답답하고 슬펐다. 현재 세계 경제 질서와 국내 경제 상황, 그리고 농민과 농업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그가 “방법이 없다”라고 말할 때는 정말 방법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농민들에게는 마치 의사가 말기암 환자에게 “이제 6개월 남았습니다” 라고 얘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대통령에게 시한부 인생 선고를 받은 농민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던 대통령의 마음은 어땠을까.

대안은 민노당과 좌파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간단하다. 신자유주의를 거부하는 것. 그런데 대통령과 우리의 고민은 우리나라가 현재 신자유주의를 거부할 수 없는 처지에 있다는 것이다. 90년대 말 IMF 사태 이후로 선진국들과 세계무역기구 (WTO)가 주도하는 자본주의의 세계화에 우리 경제가 급속도로 흡수되었다. 이제는 이들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를 거부하고는 우리 경제를 유지시킬 수 없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나라 전체를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은 농업만을 살리기 위해 다른 것을 포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그리고 생존을 위해서 농업은 지켜져야 한다. 이 양립할 수 없는 두가지 명제는 대통령만의 고민이 될 수 없다. 농업은 우리에게 먹거리를 제공하는 가장 중요하고 기초적인 산업이다. 지금은 다른나라에서 사다 먹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만약 그것이 불가능하게 되었을때 우리는 생존할 수 없게 된다. 식량은 다른 자원이나 상품과 비교될 수 없다.

정부 차원에서 나서기 힘들다면 시민단체와 농민들, 국민들이 나서야 한다. 그 목표는 WTO 체제의 모순과 불합리성을 밝히고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국제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 WTO 체제의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제시하는 방향으로는 이 지구와 인류가 궁극적으로 생존할 수 없다는데 있다. 따라서 시간이 걸리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문제다. 왜곡된 시장을 바로잡아야 하고, 다국적 기업들의 횡포를 제어해야 한다. 거의 모든 나라의 민중들이 동참해야 풀리는 문제인 것이다.

세계화 국제 포럼에서 내놓은 “더 나은 세계는 가능하다” 라는 책은 농업문제에 대한 몇 가지 방향을 제시한다.

  1. 자립적인 식량 재배를 위한 토지 접근권은 기본적인 인권이다. 세계무역체제 또는 국제무역의 이익을 이유로 지역사회나 국가가 이런 기본권을 부인당해서는 안 된다.
  2. 소규모 토지 소유자의 농지가 고도로 집중화한 거대 기업들의 손에 넘어가는 것은 세계의 빈곤과 굶주림은 물론 환경파괴의 주된 원인이 된다.
  3. 사람들이 여전히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땅에서 일하면서 그 땅에서 나는 것으로 살아가는 곳에서는 그들이 제 자리를 지키면서 세계 시장이 아닌 자기 가족과 공동체를 위해 일할 수 있도록 돕는 정책과 인센티브가 실시돼야 한다.
  4.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 세계무역기구와 같은 국제기구의 관료들이 대규모 수출지향 단작농업을 선호하는 편향은 반대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
  5.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거리를 좁힐 수 있게 해주는 해결책이 모색되어야 한다.
  6. 지속가능한 농업을 실현하기 위한 궁극적인 해법은 수천 년간 실천돼온 것과 같은 비기업적이고 소규모인 유기농업이다.

[더 나은 세계는 가능하다, pp. 305-306]

현재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대안을 모색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 읽어봤으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고민했으면 좋겠다. 혹시 대통령께서도 안 읽어 보셨다면 한 번 읽어 보셨으면 한다.

21세기 인류 경제의 화두는 더 이상 성장이 아니다. 지속가능성 (Sustainability). 이것이 우리가 생존을 위해 고민해야 할 화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