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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소 치는 다니야가 말했다.
“나는 이미 밥도 지었고
우유도 짜놓았습니다.
마히 강변에서 처자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내 움막은 이엉이 덮이고
방에는 불이 켜졌습니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스승(부처님)은 대답하셨다.
“나는 성내지 않고
마음의 끈질긴 미혹(迷惑)도 벗어버렸다.
마히 강변에서 하룻밤을 쉬리라.
내 움막은 드러나고
탐욕의 불은 꺼져버렸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

<법정 역, 숫타니파타, 18-19, 이레, 1999>

신이 아이들을 보낸 이유

신이 아이들을 보낸 이유

신이 아이들을 보낸 이유는 단지 인류를 보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의 마음을 더 열게 하고 우리를 덜 이기적이게 하며 더 많은 연민과 사랑으로 우리를 채우고 우리 영혼에게 더 높은 목적을 일깨우기 위해서다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고 밝은 얼굴, 행복한 미소, 사랑스럽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다
God sent children for another purpose than merely to keep up the race- to enlarge our hearts; and to make us unselfish and full of kindly sympathies and affections; to give our souls higher aims; to call out all our faculties to extended enterprise and exertion; and to bring round our firesides bright faces, happy smiles, and loving, tender hearts. <Mary Botham Howitt>
영(Spirit)이란 무엇인가

영(Spirit)이란 무엇인가

영(Spirit)을 의식의 최상위 단계로 정의한다면, 그것은 다른 말로 진정한 신성 또는 궁극적인 존재의 근거라 할 수 있다. 깨달은 이들은 일관되게 그런 것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들(깨달은 이들)은 궁극적인 존재의 근거를 마법적인 개념이나 신화적인 용어로 표현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세계 밖에 있는, 또는 단순히 이 세계를 초월해 있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들은 궁극적인 존재의 근거를 이 세계의 ‘그러함(Suchness)’이나 ‘이러함(Thusness)’ 등으로 묘사한다. 또는 모든 것이 출현하는 자궁과 같은 공(空)으로까지 표현하기도 한다.

때로는 궁극적인 지성이나 현존하는 자각 또는 무한한 의식을 암시하는 용어로 묘사하기도 한다. 그것은 존재를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그냥 아는 존재 자체로서의 지성이며, 동시에 존재를 출현시키는 지성이다. 이 지성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참 자아이다. 그래서 앎과 존재, 또는 주체와 객체가 비이원적인 현존 상태에서 하나로 존재하는 그런 지성이다.

그것을 ‘주체(a subject)’라고 한다면, 광대하게 열려 있는 목격자(또는 주시자), 절대적인 주관성, 대상을 공평하고 동등하게 노력 없이 자발적으로 비추는 거울 같은 마음, 모든 것을 끝없이 품으면서 지금 그리고 여기에 충만하게 현존하는 큰 마음 등으로 표현해 볼 수는 있겠지만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어떠한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주체이다.

그것을 ‘존재(Being)’라는 용어로 묘사하는 경우에는 존재론적인 실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모든 개념과 느낌과 생각과 이미지에 앞서 존재하는, 그러나 존재하고 있는 단순한 느낌으로서 지금 여기에서 쉽게 접촉할 수 있는, 무엇의 그저 ‘그러함(Suchness or Is-ness)’을 의미한다.

그것을 인격적인 개념으로 묘사할 경우에는 모든 신 너머에 있는 ‘신성’, 이 순간 만물이 거기에서 출현해 나오는 ‘심연-지성(Intelligence-Abyss)’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영원하다. 여기서 영원하다는 것은 영구히 지속된다는 뜻이 아니라, 시간이 없는 현재로서 언제나 현존하고 있는 무엇이라는 뜻이다.

<켄 윌버, 통합 비전, 물병자리, 2008, pp. 153-154>

당위의 고정관념들

당위의 고정관념들

너무도 당연하여 마땅히 그래야 할 것 같은데,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 관념들이 있다. 예를 들면,

1.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

법치국가에서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가치인데, 사실 인류가 법을 만들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모든 사람이 법 앞에 평등한 적은 없다. 법은 지배계급의 통치 수단이고,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언술은 피지배계급을 기만하는 당위일 뿐이다.

2. 교회에는 신(神)이 있고, 구원이 있다.

어떤 교회에도 신은 없다. 교회에서 아무리 기도를 해도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이래, 교회도 역시 지배계급의 중요한 통치 수단이었다. 지금은  그저 사교나 비즈니스 공간일 뿐이다. 이 땅의 대형 교회들이 특히 그러하다. 그곳은 영성보다는 욕망이 지배하는 곳으로 전락했다.

3. 학교에는 배움이 있다.

학교에 배움은 없고, 훈육과 조련만 있다. 대부분의 학교는 경쟁만을 가르치고, 아이들은 시험 잘 보는 기계로 전락한다. 중고등학교는 좋은 대학을 들어가기 위한 훈련소이고, 대학은 좋은 직장을 들어가기 위한 전진기지일 뿐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학교는 지배계급이 원하는 노예들을 생산한다.

4. 병원에는 치유가 있다.

많은 병원이 환자를 비즈니스 관점에서 본다. 환자의 병을 치유하기 위한 방법을 찾기보다는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선호한다. 현대의학의 허와 실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면, 환자들은 병원의 봉이 될 수 밖에 없다.

5. 언론은 진실을 보도한다.

진실을 보도했던 언론과 기자들은 모두 도태되었다. 지금 이 나라에서 언론이라 불리는 것들 중에서 진실을 보도하는 것은 열에 하나도 안 된다. 모두들 지배계급과 권력에 빌붙어서 감시견(Watch Dog)이 아닌 경비견(Guard Dog)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이 나라의 언론은 진실을 외면하고 호도하는 개다.

원래부터 당연한 것은 없다. 그냥 거저 주어지는 것은 없다. 공짜 점심은 없다. 어떡해서든 지배계급의 노예로 살아서는 안 된다.

치유

치유

마하라지는 신이 베푸는 치유의 손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고통은 인간이 만든 것이고 그것을 종식시키는 것도 인간의 능력 범위 내에 있습니다. 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행위의 결과(업보)와 대면하게 하고, 균형을 회복하도록 요구함으로써 도와줍니다. 카르마(Karma)는 정의를 위해 작용하는 법칙입니다. 그것이 신이 베푸는 치유의 손길이지요.

<마하리지, I AM THAT>

일어날 일들은 일어나게 되어 있다. 욕망과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 그것만이 궁극의 치유일 것이다.

땅 위에 희망은 없었다

땅 위에 희망은 없었다

땅 위에 희망은 없었고, 신은 우리를 잊은 듯 했다. 어떤 이들은 신의 아들을 보았다 했지만, 다른 이들은 보지 못했다. 그가 왔다면, 그는 전에 했던 것처럼 아주 위대한 일들을 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도, 그가 한 일도 보지 못했기에 그가 왔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들은 희망을 잡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들은 그의 자비를 구하기 위해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었다. 그들은 그가 했다고 알려진 약속에 매달렸다.

<붉은 구름,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There was no hope on earth, and God seemed to have forgotten us. Some said they saw the Son of God; others did not see him. If He had come, He would do some great things as He had done before. We doubted it because we had seen neither Him nor His works. The people did not know; they did not care. They snatched at the hope. They screamed like crazy men to Him for mercy. They caught at the promise they heard He had made.

<Red Cloud, Bury my heart at Wounded Knee>

인간들이 겸손해야 하는 까닭

인간들이 겸손해야 하는 까닭

임마뉴엘 스베덴보리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아이작 뉴튼과 어깨를 나란히할 정도로 유명한 과학자였다. 그는 57세 때부터 27년간 지상과 영계를 자유자재로 오가며 천국과 지옥을 체험했고, 그것들을 방대한 기록으로 남겼다.

당대 최고의 과학자였던 그가 신을 버리고 과학을 추종하는 인간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과학은 놀라운 기적을 인류에게 가져다줄 것입니다. 그러나 두 가지만은 절대로 못합니다. 첫째 현미경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고, 둘째 싹트는 보리알 하나도 생명을 가진 것을 창조하지 못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위대한 선물, p.63>

인간유전자 염기서열을 판독해낸다는 인간의 과학이지만, 스베덴보리의 말처럼 생명을 가진 것은 짚신벌레 한마리 만들어내지 못한다. 인간의 과학으로는 알 수도 볼 수도 없는 신이기에 “신은 없다” 또는 “신은 죽었다”라고 말한다. 과학으로 볼 수 없으면 정말 없는 것인가. 인간의 과학이 그만큼 완전한 것인가.

엄청난 발전을 이룬 과학이지만, 우리 인간들이 알고 있는 것은 갠지즈강의 모래알 몇 개뿐이다. 진실로 인간들은 신 앞에, 그리고 신이 창조한 자연 앞에 겸손해야 한다. 인간들의 오만은 파멸을 불러온다. 신은 언제나 그것을 경고하지만, 인간들은 여전히 못들은 체 하거나 실제로 듣지 못한다. 그 소통 능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신(神)의 본성 그리고 인간의 본질

신(神)의 본성 그리고 인간의 본질

결국, 야보 선사의 흔적없는 삶은 나를 라마나 마하리쉬와 성철 스님에게 인도했다. 성자들의 가르침은 그 뿌리가 어느 종교에 닿아있든지 상관없이 꼭 닮아 있었다. 또한, 라마나 마하리쉬의 신에 대한 가르침은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의 정의와 다르지 않았다.

신은 형상이 없이 어디에나 있습니다.

신은 순수한 존재이며, 순수한 의식입니다.

세상은 신 안에서 그리고 신의 힘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그러나 신은 세상의 창조자가 아닙니다.
신은 결코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신은 그저 있습니다.
신에게는 의지도 욕망도 없습니다.

개별성이란 자신이 신과 같지 않다는 환영입니다.
이 환영이 사라질 때 남아 있는 것이 신입니다.

신, 구루, 참나는 동일합니다. 구루는 인간의 모습으로 있는 신입니다. 동시에 구루는 헌신자의 가슴에 있는 참나입니다.

신은 있습니다.
신은 그대 안에 있습니다.
신은 언제나 일인칭입니다.

<라마나 마하리쉬, 불멸의 의식, p. 124>

진리는 깨달은 성자들의 의해 이미 드러나 있었다. 세상은 이미 구원되어 있었다. ‘나’를 버리고 ‘참나’를 찾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라마나 마하리쉬의 가르침대로 인간의 본질은 신(神)일진데, 우리의 욕망과 카르마가 그 본질을 가리고 있다. “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은 그것에 있다.

신에 대한 가장 진보된 정의

신에 대한 가장 진보된 정의

미리내 님이 권해주신 “내 안의 참나를 만나다(Discovery of the Presence of God)”를 읽었다. 사람의 언어로 형언할 수 없는 경지가 기록되어 있었는데, 의식 수준이 낮은 나의 처지에서 그런 내용들은 이해는 고사하고 범접하기조차 쉽지 않았다. 데이비드 호킨스(David Hawkins)는 이 책을 통해 그동안 내가 품고 있던 신과 영혼과 종교와 인간에 대한 다양한 의문들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깨달음을 찾아 구도의 길을 떠나는 수많은 영혼들이 왜 가치있는지, 의식의 진화와 성장 단계가 무엇인지, 궁극으로 도달하려고 하는 지향이 무엇인지, 왜 성인들은 용서와 사랑을 한결같이 강조했는지 이 책은 주관적 경험과 객관적 사실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특히, 신의 본성을 설명해 놓은 부분은 그동안 내가 그 어떤 종교에서도 접할 수 없었던, 가장 진보된 것이었다.
  1. 신성(Divinity)은 비선형적이고 불편부당하고 시비분별이 없으며, 편파성과 취사선택하는 편애를 넘어서 있다.
  2. 신성은 변덕스럽거나 분별하지 않으며, 추정적인 인간 감정들의 한계에 종속되지 않는다. 신성한 사랑은 태양과 마찬가지로 무조건적이다. 한계는 에고의 귀결이다.
  3. 신의 정의는 신성의 전능과 전지의 자동적 귀결이다. 신은 ‘행’하거나, ‘작용’하거나, ‘원인’이 되지 않고 그저 ‘있을’ 뿐이다. 신성의 성질은 무한한 힘의 장으로서 방사되는데, 그 무한한 힘의 장에 의해 존재하는 전부는 있는, 그리고 되어 있는 ‘것’에 따라 자동적으로 정렬된다. 각각의 영혼/영은 이렇듯 고유한 운명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수준을 향해 끌려가는데, 그것은 마치 바다 속의 코르크나 전자기장 속의 쇳가루의 움직임과 같다.
  4. 신성은 낮은 힘을 훨씬 넘어서 있는 무한한 힘의 고유한 성질로 말미암아 절대적 지배권이다. 낮은 힘은 위치성과 통제의 도구이며 유한하다. 힘은 무한한 세기를 갖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힘을 구할 필요가 없는 신성한 참나로서의 힘의 근원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5. 신성의 막강함과 전적인 현존 내에서, 존재하는 전부는 스스로를 정렬시킨다. 이 조정은 영적 선택의 귀결이다. 자유는 신성한 정의에 고유하다.
  6. 의식의 무한한 장으로 표현된 신성의 전지와 전능은, 실상을 가능성의 전 단계에 걸쳐 확인해 주는 의식 연구 측정 기법으로 확인할 수 있다. 모든 생각, 행위, 결정이 시간과 장소 너머에 있는 의식의 무한한 장에 각인된다. 이 각인에 의해, 정의가 보증된다.
<데이비드 호킨스, 내 안의 참나를 만나다, pp. 152-153>
겸손한 삶, 내맡기는 삶, 그리고 사랑으로 충만한 삶, 결국 인류 역사상 모든 성인들과 스승들이 한결같이 가르쳤던 내용들이 진리였던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에게는 새로운 화두가 생겼는데, 그것은 환상으로 명명된 이 차원에서의 삶이 너무 허무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비로소 성철 스님의 법문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도 같았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려고 오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