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훈토론회에서 안철수가 사드 배치에 반대하다가 찬성으로 돌아선 이유를 이렇게 얘기했다. 이것은 안철수의 진심이다. 물론 북핵 문제를 둘러싼 외교 상황이 바뀌지는 않았다. 이 나라 기득권층을 지켜야 하는 대표 선수로서의 본인 상황이 바뀌었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드 배치를 국민 투표로 정해야 한다고 강경하게 말하던 자가 하루아침에 손바닥을 뒤집는다. “상황이 바뀌었다”라고.
상황은 끊임없이 바뀔 것이고, 안철수의 입장은 시시각각 변할 것이다. 변하지 않는 건 그가 기회주의자라는 사실뿐이다. 안철수는 이 나라 특권 지배계층의 구원투수로 낙점된 사람이다. 모든 언론이 문재인 죽이기에 앞장서면서 안철수를 띄우고 있다. 따라서 이번 대선은 겉으로는 문재인과 안철수의 대결이지만, 본질은 깨어있는 시민과 한 줌도 안 되는 기회주의 특권층의 대결이다.
이 방송이 나올 때, 세월호 선장과 선원들은 황급히 해경의 경비정으로 탈출하고 있었다. 이 방송만 아니었어도 훨씬 더 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살 수 있었다. 아니, 승객들을 제대로 안내하는 방송만 했어도 거의 모든 승객이 구조될 수 있었다. 세월호 참사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다. 뭔가 의도가 있지 않고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
국민의당 경선이 시작될 무렵, 거의 모든 언론이 안철수 띄우기에 나섰다. 공중파와 조중동, 종편뿐만 아니라 소위 진보언론이라 알려진 한경오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 모든 기득권 세력들의 이해관계가 일치한다. 어떡해서든 문재인 당선만은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예상 못했던 바는 아니지만, 그 정도가 너무 심하다. 99%의 언론이 대동단결하여 문재인 죽이기를 하고 있다. 일사분란하다. 그만큼 그들은 절박하다.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면 정말 적폐가 청산될 것이기 때문이다. 친일과 독재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 나라의 지배계급에 치명타가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초조하다.
그들은 세월호 참사 때의 선내 방송처럼 국민들의 눈과 귀를 호도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조작되고 왜곡된 여론조사로 문재인과 안철수의 양자대결을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만약 유권자들이 이런 언론에 또다시 속는다면, 이 나라는 세월호처럼 침몰할 것이고, 대다수 국민들은 영원히 지배계급의 개, 돼지로 살아갈 것이다.
촛불민심은 정권교체이고, 그것을 제대로 해낼 수 있는 사람은 문재인이다. 지금 이 나라의 언론들은 세월호의 선내 방송처럼 국민들에게 “가만히 있으라”라고 한다. 세월호 참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한국 언론은 민중의 적이다. 그들을 믿지 마라.
그룬트비에 따르면, 어린이 교육은 생동감 넘치고 자유롭고 자연스러워야 한다. 판에 박힌 듯한 학습은 지양되어야 하고, 교사의 이야기 교육과 노래하기 그리고 놀이는 대단히 중요히 다루어져야 한다. 무엇인가를 배우기 위한 선결조건은 학생들이 학교에 오는 것을 좋아해야 하고 학교에서 배우는 것을 좋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룬트비 교육사상의 핵심은 학교에는 다양한 주제들 사이에 그리고 학생과 교사 사이에, 교사와 학부모 사이에 ‘살아 숨 쉬는 상호작용’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요구되어야 할 것은 강의와 시험이 아니라 자유로운 상호 대화이다.
이명박, 박근혜 9년. 나라는 시궁창에 쳐박혔다. 모든 것은 예견된 일이었고, 그 슬픈 예견은 한치도 틀리지 않았다. 이명박은 사악하고 교묘했고, 박근혜는 무지하고 탐욕스러웠다. 불의가 판치고, 반칙과 특권이 난무하고, 불평등은 깊을대로 깊어졌다. 모든 희망이 사라지고, 절망의 깃발만 나부꼈다. 노무현, 김대중 대통령마저 세상을 떠나 아무런 버팀목이 없었다. 어둠이 깊어지고 터널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하늘은 이 나라를 버리지 않았다. 그 깊은 어둠 속에서 한줌의 빛을 보여주는 사람이 있었다. 절망의 나락 속에서 나지막이 희망의 노래를 부르는 이가 있었다. 김대중의 철학과 노무현의 원칙을 부여잡고, 자유와 민주와 평화가 넘치는 나라를 만들어보자고 외치는 사람이 있었다.
문재인! 그가 문재인이라 다행이다. 문재인이 있어 정말 다행이다.
어눌하지만 세련되고, 부드럽지만 강단있고, 잘생겼지만 순박한 사람. 정치인같지 않지만 정치를 해야만 하는 운명을 지닌 사람. 끝내 다 이루지 못한 노무현의 꿈을 이어받은 사람. 그 사람이 문재인이라 다행이다.
감히 말하지만, 문재인은 정치인 중 가장 완성된 인격을 지닌 사람이다. 그처럼 품격있는 사람이 정치를 한다는 것 자체가 하늘이 이 나라를 버리지 않았다는 증거다. 때문에 문재인을 정치판으로 불러낸 이명박이 고마울 때도 있다.
오늘 문재인이 국민과 함께 19대 대통령 선거 출마 선언을 했다. 그가 국민과 함께 세상을 바꾸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나가리라 믿는다. 그가 압도적으로 19대 대통령에 당선될 것이라 믿는다. 그가 김대중과 노무현의 뒤를 이어 민주정부 3기를 성공적으로 이끌거라 믿는다. 이 나라에 자유와 정의와 평화가 젖과 꿀처럼 흐르길 바란다.
문재인, 그가 있어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문재인의 국민이 되고 싶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본래 정치적이다. 헌재는 형식 상으로는 어떤 법률이 헌법에 위배되는지를 판결하는 곳이다. 하지만 헌법은 원칙과 틀만을 제공하기 때문에 판결은 재판관의 해석에 따르게 되어 있다. 헌재 재판관들의 헌법 해석은 그들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므로 같은 사안을 놓고도 재판관의 성향에 따라 전혀 다른 판결이 나오게 된다.
우리나라 헌재는 창의적인 상상력으로 꽤 유명한 판결을 내려 왔다. 대표적인 것이 2004년 행정수도 이전에 관한 법률이 위헌이라는 판결이다. 헌재 재판관 대다수가 관습헌법을 들먹이며 수도를 옮기려면 헌법을 고쳐야 한다고 판결했다. 성문헌법을 따르는 나라에서 헌법 조항에도 없는 사항을 어떻게 수정할 수 있을까? 사실 그들은 스스로 헌법 조항을 만들어 수도 이전을 반대했던 것이다. 그 당시 전효숙 재판관만이 유일하게 상식에 맞는 의견을 냈다.
2014년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도 마찬가지다. 이석기 전 의원을 변명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나, 그의 내란음모 혐의는 대법원에서 무죄로 판명되었다. 헌재는 대법원의 판결이 나오기 전에 1심의 판결만을 바탕으로 국민의 지지를 받은 정당을 해산한다. 그들의 정치적 색깔을 과감하게 드러낸 것이다. 이때도 김이수 재판관만이 유일하게 반대 의견을 냈다.
2008년 종부세 위헌 판결도 역사에 남을만한 것이다. 물론 헌재 재판관 대다수가 종부세 대상자였으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들은 그들의 가치관, 정치관뿐만 아니라 이해 관계에 따라서도 판결을 해왔던 것이다.
헌재 재판관들 중 몇몇은 이번 박근혜 탄핵 사건도 기각해 버리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을 것이다. 관습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왕인데, 어디 무지렁이 백성들이 왕을 쫓아내려고 한단 말인가. 기각하고 싶은데 워낙 증거가 뚜렷해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할 것이다. 이번에는 어떤 이유를 들어 탄핵을 기각하려 할까? 박근혜 뇌물죄에 대해 다툼의 여지가 있으니 탄핵은 안 된다고 할까? 특검이 박근혜를 직접 조사하지 않았으니 혐의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할까? 아니면 대통령은 왕이니까 원래 탄핵할 수 없다고 할까?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이 묶인 줄보다 좀 길 거예요. 그것뿐이오. 두목, 당신은 긴 줄 끝에 매달려 있으니까, 이리저리 다니고, 그리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 줄을 잘라 버리지 못해요. 그런 줄을 자르지 않으면……”
“언젠가는 자를 거요!”
“두목, 어려워요,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려면 당신한테는 무식이 좀 필요해요. 무식, 아시겠어요? 모든 걸 걸고 도박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머리가 힘이 세니까 항상 그 머리가 당신을 이겨 먹을 거라고요. 인간의 머리란 구멍가게 주인과 같은 거예요. 계속 장부에 적으며 계산을 해요. 얼마를 지불했고 얼마를 벌었으니까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머리란 아주 좀상스러운 소매상이지요. 가진 걸 몽땅 거는 일은 절대 없고 꼭 예비로 뭘 남겨 둬요. 머리는 줄을 자르지 않아요. 아니, 아니지! 오히려 더 단단히 매달려요, 이 잡것은! 붙잡고 있던 줄을 놓치기라도 하면 머리라는 병신은 그만 허둥지둥하다가 완전 끝장나 버려요. 그런데 사람이 이 줄을 끊어 버리지 않으면 산다는 게 무슨 맛이겠어요? 노란 카밀러 맛이지. 멀건 카밀러 차 말이오. 럼주하고는 완전 다르다고요. 럼주는 인생을 확 까뒤집어 보게 만드는데!”
오쇼 라즈니쉬가 얘기했듯이 “삶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살아야 할 신비”다. 삶은 무엇을 이루려는 목표가 아니고 경험해야 하는 과정이다. 그 순간순간의 경험이 삶이다. 오디세우스가 이타카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그의 삶은 거대한 신화를 만들어낸다. 이타카는 삶의 여정을 떠나게 하는 하나의 수단일 뿐, 그 자체로 의미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삶을 산다. 그 순간순간을 최대한으로 경험하는 것만이 유일한 삶의 방법이다.
이타카로 여행을 떠날 때
기도하라, 그 길이 모험과 배움으로 가득한
긴 여정이 되기를
라이스트리고네스와 키클롭스
분노에 찬 포세이돈의 진노를 두려워하지 말라
너의 정신이 고결하고
너의 영혼과 육체에 숭고한 감정이 깃들면
그들은 너의 길을 가로막지 못하리
네가 그들을 영혼 안에 들이지 않고
너의 영혼이 그들을 앞세우지만 않으면
라이스트리고네스와 키클롭스와 사나운 포세이돈
그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으리
기도하라, 그 길이 긴 여정이 되기를
큰 즐거움과 큰 기쁨을 안고
처음 본 항구로 들어가는
여름날 아침이 수없이 많기를
페니키아 시장에서 길을 멈추고
멋진 물건들을 사라
진주와 산호와 호박과 흑단
온갖 종류의 감각적인 향수를
가능한 한 많은 관능적인 향수를
이집트의 여러 도시들에 들러
그곳의 현자들에게 배우고 또 배우라
언제나 이타카를 마음에 두라
그곳에 도착하는 것이 너의 최종 목표이니
그러나 결코 서두르지는 마라
여행은 여러 해 계속되는 것이 좋다
그리하여 늙어서 그 섬에 도착하는 것이 더 나으니
너는 길에서 얻은 모든 것들로 이미 풍요로워져
이타카가 너를 풍요롭게 할 것이라 기대하지 않으리
이타카는 너에게 아름다운 여행을 선물했다
이타카가 없었다면 너는 길을 떠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제 이타카는 너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설령 이타카가 보잘곳없는 곳일지라도
이타카는 너를 속인 적이 없다
너는 길 위에서 경험으로 가득한 현자가 되었으니
이타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미 이해했으리라
민주당 대선 후보 안희정은 착한 도지사가 되고 싶었다. 말도 안 되는 생떼를 쓰고 어깃장을 놓는 민원인들과 대화하면서, 그는 원활한 문제 해결을 위해 민원인들의 의도를 무조건 선한 것으로 받아들이기로 작정한다. 민원인들의 선의를 진심으로 받아들이자 민원인들의 태도도 바뀌기 시작했고, 그는 소통 잘하는 도지사로서 좋은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성공을 바탕으로 그는 대선 출마를 선언했고, 그는 소신을 더욱 확장했다.
그는 “누구의 주장도 ‘선의’로 받아들이는 것이 소신”이라며 이명박의 4대강 사업과 박근혜의 재단 비리를 언급했다. 이명박과 박근혜도 처음에는 나름 열심히 잘하려고 선한 의도가 있었겠지만, 하다 보니 불법을 저지르게 되었다고 했다. 안희정은 자신의 소신을 어설프게 일반화하면서 이명박, 박근혜의 선의를 주장하다 보니 스텝이 꼬이기 시작했다. 만약 그의 주장이 옳다면, 나라를 구하겠다고 쿠데타를 자행한 박정희의 선의도 인정해야할 것이고, 광주 민주화 항쟁을 총칼로 진압한 전두환의 선의도 인정해야할 것이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정치인 안희정의 변명은 한마디로 궤변이다.
정치지도자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상대방의 의도를 선한 것으로 읽을 수 있는 관심법이 아니라 그것이 상식에 부합하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명박의 4대강 사업은 누가 뭐라 해도 상식에 맞지 않는다. “고인 물은 썩는다”는 지극히 간단한 상식을 팽개치고, 4대강에 보를 만들어 수질을 개선하고 홍수를 예방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선한 의도가 아니라 거짓말이고 사기극이다. 박근혜가 재단을 만들어 문화융성을 하겠다는 것도 다 거짓말이다. 거짓을 거짓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선의로 받아들이는 정치인은 정의와 불의를 구별할 수 있는 최소한의 판단 능력이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런 판단 능력이 없는 사람은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안희정은 누구에게나 욕을 먹지 않고 칭찬을 받으려고 하는 아이와 같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훌륭한 정치지도자는 자기의 주장을 선명히 하여 자기가 어느 편에 서 있는지를 대중들에게 알려야 한다. 모두에게 지지를 받는다는 것은 아무에게도 지지를 받지 않는 것과 같다. 중립은 이론에서나 가능한 일이고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