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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청춘

그거 알아요. 마음은 늙지 않는다는 걸. 나이가 들면 몸은 늙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아요. 일흔이 넘은 노인들도 언제나 마음은 이십대라고 하잖아요. 그게 빈 말이 아니예요. 세월의 가르침을 잘 간직한 사람들의 마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넓어지고 깊어질 뿐, 늙지는 않아요.

청춘은 물리적인 나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예요.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거예요. 마음이 늙지 않는 사람들은 언제나 청춘으로 남을 수 있어요. 모든 건 깨달음과 선택이고, 그리고 그 선택을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달린 거예요.

세상은 탐욕과 공포로 사람들을 지배하려 하지만, 지혜로운 이들은 그것들로부터 벗어나서 늘 청춘을 누려요.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단지 깨닫지 못할 뿐이지요. 회색신사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여유를 가져야 해요. 시간이라는 관념은 환상이고, 바쁘다고 생각하는 것은 회색신사들에게 길들여진 걸 의미해요.

마음은 늙지 않고, 세상에 바쁜 일은 없어요. 욕심을 버리고 순간순간을 즐기기 바라요. 그러면 아무런 걱정이 없지요. 우리들은 언제나 청춘인 걸요.

Youth is not a time of life; it is a state of mind; it is not a matter of rosy cheeks, red lips and supple knees; it is a matter of the will, a quality of the imagination, a vigor of the emotions; it is the freshness of the deep springs of life.

Youth means a temperamental predominance of courage over timidity of the appetite, for adventure over the love of ease. This often exists in a man of sixty more than a body of twenty. Nobody grows old merely by a number of years. We grow old by deserting our ideals.

Years may wrinkle the skin, but to give up enthusiasm wrinkles the soul. Worry, fear, self-distrust bows the heart and turns the spirit back to dust.

Whether sixty or sixteen, there is in every human being’s heart the lure of wonder, the unfailing child-like appetite of what’s next, and the joy of the game of living. In the center of your heart and my heart there is a wireless station; so long as it receives messages of beauty, hope, cheer, courage and power from men and from the Infinite, so long are you young.

When the aerials are down, and your spirit is covered with snows of cynicism and the ice of pessimism, then you are grown old, even at twenty, but as long as your aerials are up, to catch the waves of optimism, there is hope you may die young at eighty.

<Samuel Ullman, Youth>

청춘이란 인생의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이다. 장밋빛 볼, 붉은 입술, 부드러운 무릎이 아니라 씩씩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오르는 열정이다. 청춘은 인생이란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신선함이다.

청춘이란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한 삶을 뿌리치는 모험심이다. 때로는 스무살 청년보다 예순살 노인이 더 젊을 수 있다. 나이 먹는 것만으로 사람은 늙지 않는다. 꿈과 희망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는다.

세월은 피부에 주름살을 늘게 하지만, 열정을 잃으면 영혼에 주름이 진다. 고뇌, 공포, 실망에 의해서 기력은 땅을 기고 정신은 먼지가 된다.

예순이든 열여섯이든 인간의 가슴에는 경이로움에 끌리는 마음, 어린이처럼 미지에 대한 탐구심, 인생에 대한 즐거움과 환희가 있다. 우리 모두의 가슴속엔 마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우체국이 있다. 다른 사람과 하느님으로부터 아름다움, 희망, 기쁨, 용기, 힘의 영감을 받는 한, 그대는 젊다.

영감의 교류가 끊기고 영혼이 비난의 눈에 덮여 슬픔과 탄식의 얼음 속에 갇힐 때 스무 살이라도 인간은 늙는다. 고개를 들고 희망의 물결을 붙잡는 한 여든 살이라도 인간은 청춘으로 남는다.

<사무엘 울만, 청춘>

사려니 숲

사려니 숲

사려니 숲에
갔었지

사각거리는 붉은 송이 밟으며
안개가 스며드는 길을 따라
숲으로 들어갔지

사방은 고요하고
숲은 침묵에 잠겨 있었지
졸참나무, 서어나무, 때죽나무 무성한 숲 속
노루 한 마리
시간과 함께 침묵 속에 멈춰 있었지

그곳은
차마 사람의 발길이 닿지 말아야 했을
완전한 세상
속세로부터 이어지던 숲길이
점점 사라지고 말았지

사려니 숲에 다시
갈 수 없었지

<소요유, 2013년 7월>

어제도 사막 모래언덕을 넘었구나 싶은 날
내 말을 가만히 웃으며 들어주는 이와
오래 걷고 싶은 길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보다 다섯 배 열 배나 큰 나무들이
몇 시간씩 우리를 가려주는 길
종처럼 생긴 때죽나무 꽃들이
오리 십리 줄지어 서서
조그맣고 짙은 향기의 종소리를 울리는 길
이제 그만 초록으로 돌아오라고 우리를 부르는
산길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것들을 주체하기 어려운 날
마음도 건천이 된 지 오래인 날
쏟아진 빗줄기가 순식간에 천미천 같은 개울을 이루고
우리도 환호작약하며 물줄기를 따라가는 질
나도 그대도 단풍드는 날이 오리라는 걸
받아들이게 하는 가을 서어나무 길
길을 끊어 놓은 폭설이
오늘 하루의 속도를 늦추게 해준 걸
고맙게 받아들인 삼나무 숲길
문득 짐을 싸서 그곳으로 가고 싶은
길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한라산 중간산
신역(神域)으로 뻗어 있는 사려니 숲길 같은

<도종환, 사려니 숲길>

나무의 시

나무의 시

나무에 대한 시를 쓰려면 먼저
눈을 감고
나무가 되어야지
너의 전생애가 나무처럼 흔들려야지
해질녘 나무의 노래를
나무 위에 날아와 앉는
세상의 모든 새를
너 자신처럼 느껴야지
네가 외로울 때마다
이 세상 어딘가에
너의 나무가 서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지
그리하여 외로움이 너의 그림자만큼 길어질 때
해질녘 너의 그림자가 그 나무에 가 닿을 때
넌 비로소 나무에 대해 말해야지
그러나 언제나 삶에 대해 말해야지
그 어떤 것도 말고

<류시화, 나무의 시>

이 시는 류시화가 아들 미륵이에게 주는 시였는데, 아내는 이 시를 읽으며 내가 생각난다고 했다. 아내는 나를 아들처럼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전생애가 흔들릴 때, 내가 외로울 때, 이 세상 어딘가에 (아니 정확히 얘기하면 내 옆에) 서 있는 나무가 바로 아내다. 항상 고맙고 사랑하는 나의 나무가 아내다. 나도 그의 나무가 될 수 있을까.

9월이 간다

9월이 간다

시인은 9월에 대해 이렇게 읖조렸다.

9월이 오면 강물이 들판을 금빛으로 만들 듯이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사람과 더불어 우리도 다른 이들에게 남겨 둘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고.

따뜻하고 아름다운 시인의 바람과는 달리 9월은 슬픔과 분노와 아쉬움만을 남긴 채 가버렸다. 일년 중 가장 풍성한 때인 한가위가 있었음에도 9월은 도무지 신명도 즐거움도 없이 그렇게 가버렸다.

추석 전 날, 아이들을 위해 늘 노심초사 봉사하던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이 사악한 검찰 집단에 의해 구속되었다. 추석이 지나자마자 7개 저축은행들이 영업 정지를 당했고, 그 저축은행에 돈을 예금한 서민들은 넋을 잃고 말았다. 추악한 권력 비리의 흔적들이 곳곳에서 감지되었다. 민노당과 참여당의 진보 통합 노력이 좌절되었다. 지난 몇 달 동안 꿈꿔왔던 대중적 통합 진보 정당의 출현이 불발된 것이다. 이정희 대표와 유시민 대표가 안쓰러웠다.

따지고 보면, 사람들의 희망이 속시원하게 실현된 적이 있었던가? 어쩌면 그런 바람과 희망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는 실현될 수 없을지도 모를 일이다. 실현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런 바람들은 아름다운 것이고, 인간들은 늘 그런 바람과 희망이 실현되길 기도하는지도 모른다.

그대
구월이 오면
구월의 강가에 나가
강물이 여물어 가는 소리를 듣는지요
뒤 따르는 강물이 앞서가는 강물에게
가만히 등을 토닥이며 밀어주면
앞서가는 강물이 알았다는 듯
한 번 더 몸을 뒤척이며
물결로 출렁 걸음을 옮기는 것을
그 때 강둑 위로
지아비가 끌고 지어미가 미는 손수레가 머무는
인간의 마음을 향해 가는 노을

그대
구월의 강가에서 생각하는지요
강물이 저희끼리만 속삭이며
바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젖은 손이 닿는 곳마다
골고루 숨결을 나누어 주는 것을
그리하여
들꽃들이 피어나 가을이 아름다워지고
우리 사랑도 강물처럼 익어가는 것을

그대
사랑이란
어찌 우리 둘만의 사랑이겠는지요
그대가 바라보는 강물이
구월 들판을 금빛으로 만들고 가듯이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사람과 더불어 몸을 부비며
우리도 모르는 남에게 남겨 줄
그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을
구월이 오면
구월의 강가에 나가
우리가 따뜻한 피로 흐르는 강물이 되어
세상을 적셔야 하는 것을

<안도현, 구월이 오면>

9월이 가고, 10월이 온다.

들풀처럼 살라

들풀처럼 살라

시간은 존재하는가? 흔히 과거, 현재, 미래라 불리는, 강물처럼 흐르는 시간은 존재하는가? 시간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가장 자연스럽고 강력한 관념 중 하나다. 지구 상에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시간이란 관념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생명체들은 시간을 사는 것이 아니고, 순간을 살뿐이다.

인간들이 던지는 궁극의 질문들,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등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해결되기를 기다리며 인간들 주위를 맴돌았다. 깨달은 몇몇은 실마리를 남긴 채 지구별을 떠났고, 남겨진 자들은 여전히 무지의 어둠 속에서 헤맸다. 남겨진 자들에게 삶은 버거운 짐이었다.

예수가 태어난 지 2011년째 되는 해. 2011은 지극히 인위적이고 아무런 의미 없는 숫자이지만, 인간들은 또다시 지속되는 삶 속에 궁극의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살 것인가.”

들풀처럼 살라
마음 가득 바람이 부는
무한 허공의 세상
맨 몸으로 눕고
맨 몸으로 일어서라
함께 있되 홀로 존재하라
과거를 기억하지 말고
미래를 갈망하지 말고
오직 현재에 머물라
언제나 빈 마음으로 남으라
슬픔은 슬픔대로 오게 하고
기쁨은 기쁨대로 가게 하라
그리고는 침묵하라
다만 무언의 언어로
노래 부르라
언제나 들풀처럼
무소유한 영혼으로 남으라

<류시화, 들풀>

산과 들에 있는 풀과 나무와 바위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보여주지만, 인간들은 그것을 보려 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질문만 던질 뿐, 보이는 것을 보지 않는다.

법정 스님이 이 지구별을 떠나시기 전에 남기신 말씀.

삶을 마치 소유물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소멸을 두려워한다.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모두가 한때일 뿐,
그러나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내일을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이미 오늘을 제대로 살고 있지 않다는 증거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것은
생에 집착하고 삶을 소유로 여기기 때문이다.

生에 대한 집착과 소유의 관념에서 놓여날 수 있다면
엄연한 우주 질서 앞에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정답은 이미 수천 년 전부터 명확하게 제시되었다. 다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여전히 묻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리석음이 원죄라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빈둥거릴 때 읽으면 좋은 시

빈둥거릴 때 읽으면 좋은 시

6일이나 되는 추석 연휴 내내 한없이 빈둥거렸다. 사놓기만 하고 읽지 않았던 책이나 읽어보자고 계획 아닌 계획을 세웠지만, 그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하루 세끼 꼬박꼬박 찾아먹고, 평소에 자지않던 낮잠도 실컷 잤는데, 밤에는 여전히 잠이 쏟아졌다. 체중은 하루가 다르게 늘었고, 운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 하루는 딸아이를 데리고 집 근처 뒷산을 다녀왔으며, 하루는 고궁에 나갔다 하릴없이 쏘다닌 것이 전부였다.

정현종의 <시간의 게으름>을 읽고 행복했다. 6일이 살과 같이 흘렀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야 했다.

나, 시간은,
돈과 권력과 기계들이 맞물려
미친 듯이 가속을 해온 한은
실은 게으르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런 속도의 나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보면
그건 오히려 게으름이었다는 말씀이지요)

마음은 잠들고 돈만 깨어 있습니다.
권력욕 로봇들은 만사를 그르칩니다.
자동차를 부지런히 닦았으나
마음을 닦지는 않았습니다.
인터넷에 뻔질나게 들어갔지만
제 마음속에 들어가보지는 않았습니다.

나 없이는 아무것도
있을 수가 없으니
시간이 없는 사람들은 실은
자기 자신이 없습니다.

돈과 권력과 기계가 나를 다 먹어버리니
당신은 어디 있습니까?

나, 시간은 원래 자연입니다.
내 생리를 너무 왜곡하지 말아주세요.
나는 천천히 꽃 피고 천천히
나무 자라고 오래 오래 보석 됩니다.
나를 ‘소비’하지만 마시고
내 느린 솜씨에 찬탄도 좀 보내주세요.

<정현종, 시간의 게으름>
기자와 똥꼬치마

기자와 똥꼬치마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언론이라고 인정받을만한 주간지인 <시사IN>의 기자, 고재열 씨가 지하철 계단에서 아주 짧은 치마(그는 똥꼬치마라고 했다)를 입은 여자를 뒤따르다 느낀 불쾌함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다가 곤경에 처했다. 많은 비난들이 쏟아졌고, 급기야 그는 그 글에 대한 사과문을 게재했다.

고재열 기자가 올린 “지하철 똥꼬치마에 대한 단상”이라는 글을 읽고, 남자인 나도 무척 당황했다. 아무리 본인의 짜증이 머리 끝까지 뻗쳤다 하더라도 그런 식의 글을 올린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그 글을 읽고 내가 받은 느낌은 마치 이명박의 “마사지걸” 발언이나 “기생” 농담을 듣는 기분이었다. 그 글에는 여성 비하와 폭력적 표현이 넘쳤다. 본인도 밝혔지만, 무의식 중에 고재열 기자의 마초 근성이 반영된 글이었는지도 모른다.

오늘 고재열 기자와 트위터로 대화를 나는 마법사 님의 글을 보다가 고재열 기자의 “똥꼬치마” 글이 실수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고재열 기자가 트위터에 올린 짧은 글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었다.

좌파는 섹시한 것을 섹시하다고 하지 못하고, 꼴불견을 꼴불견이라고 하지 못하는 것인가 봅니다. 댓글이 장난이 아니네요.

나는 개인적으로 고재열 기자를 모르기 때문에 그가 좌파인지 수구 꼴통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올린 “똥꼬치마” 글이 좌파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그가 자신의 실수 혹은 잘못을 뉘우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는 이유는 그의 장황한 사과문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진정으로 잘못을 뉘우치는 사람은 그렇게 장황하게 꼬치꼬치 변명을 늘어놓지 않는다.

마법사 님의 말대로 그는 적어도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더 깊은 성찰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정치적 이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며, 인간의 기본 품성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이념을 떠나 성숙하지 못한 남자들이 흔히 여성을 적대시하거나 비하하는 것을 종종 목격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아직 철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과 생명의 기원이 여성임을 깨달을 때 그들은 비로소 아름다운 어른이 될 수 있다.

남자들은
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
비로소 자신 속에서 으르렁거리던 짐승과
결별한다.
딸의 아랫도리를 바라보며
신이 나오는 길을 알게 된다.
아기가 나오는 곳이
바로 신이 나오는 곳임을 깨닫고
문득 부끄러워 얼굴 붉힌다.
딸에게 뽀뽀를 하며
자신의 수염이 때로 독가시였음도 안다.
남자들은
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
비로소 자신 속에서 으르렁거리던 짐승과
화해한다.
아름다운 어른이 된다.

<문정희, 남자를 위하여>

철모르는 남자들이 자신 속의 짐승과 결별하고 아름다운 어른이 되길 바란다.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 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 바닥 썩는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흐르는 강은 슬픔을 위로하고 노동을 어루만졌다. 스스로 깊어가는 강에 삽을 씻으며 절망으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담배 한 대 피우며 흐르는 강으로부터 위안을 얻었다해도 고단한 삶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자연과 하나되면서 노동의 피로를 잊을 수 있었고 슬픔을 씻을 수 있었다.

이제 강은 아무도 위로해주지 못할 것이다. 수많은 삽과 포크레인이 강을 짓이길 것이며, 수십개의 댐은 강물을 가두어 버릴 것이다. 강변은 콘크리트로 뒤덮일 것이고, 그 위에 썰렁한 자전거 도로만이 덩그러니 놓여질 것이다. 강은 인간의 탐욕으로 그렇게 질식해 죽어갈 것이다. 강이 죽어갈수록 인간들의 병은 깊어질 것이다. 자연은 더 이상 인간을 위로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정희성의 <저문 강에 삽을 씻고> 같은 아름다운 시는 더 이상 불려지지 않을 것이다.

자연은 그들의 탐욕을 저주할 것이며, 나도 그들의 탐욕을 저주할 것이다.


출처 : “진짜 강변 걸어봐요, 4대강사업 하고픈가” – 오마이뉴스

이 아름다운 강변의 갈대를 어찌한단 말인가.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

아무리 사랑하고 아껴주는 남녀지간이라도 싸울 때는 싸워야 한다. 아주 가끔 가다 평생 부부싸움 한 번 하지 않았다는 불가사의한 부부들을 만나곤 하는데, 나의 경험을 비춰 보았을 때 그들의 증언은 너무나 초현실적이어서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몇 십년 간 같이 살을 맞대고 산 부부라도 가끔 말다툼을 하는데, 그런 것조차 없다면 그 부부들은 이미 성인의 경지에 다다른 사람들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새해 들어서 나의 사랑하는 아내가 딱 한 번 나를 열받게 했는데, 사실 지나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닌 일이었지만, 아내가 나를 열받게 하는 순간을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러자 아내는 나를 “밴댕이”라 놀려댄다. 대개의 여자들이 남자들을 비아냥거릴 때 가장 자주 쓰는 말 중의 하나가 이 “밴댕이 소갈딱지”인데, 이것도 여자들이 남자들을 틀짓는 전형적인 스테레오 타입 중 하나이다.

남자는 대체로 아량이 넓어야 하고, 이해심도 많아야하고, 대범해야 한다는 일종의 선입견 때문에 많은 남자들이 여자들로부터 밴댕이라고 손가락질 당하지만, 사실 남자들 중에서 (나처럼) 꽤나 소심한 사람들이 여자 못지 않게 많다. 그 소심한 남자들은 여자들처럼 잘 삐지기도 하고, 참을성이 없으며, 사소한 일에도 열받곤 한다. 그런 남자들을 일방적으로 밴댕이라 몰아부치는 것은 그들을 너무나 억울하게 만드는 일임을 여자들은 알까?

안도현의 시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을 읽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가, 정작 분노해야 할 것에는 침묵하면서 사소한 것들을 참아내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한 연민이 느껴져 씁쓸했다.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은,
후광과 거산의 싸움에서 내가 지지했던 후광의
패배가 아니라 입시비리며 공직자 재산공개 내역이 아니라
대형 참사의 근본원인 규명이 아니라 전교조 탈퇴확인란에
내손으로 찍은 도장 빛깔이 아니라 미국이나 통일문제가
아니라 일간신문과 뉴스데스크가 아니라
아주 사소한 것들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은,

이를테면,
유경이가 색종이를 너무 헤프게 쓸 때,
옛날에는 종이가 얼마나 귀했던 줄 너 모르지?
이 한마디에 그만 샐쭉해져서 방문을 꽝 걸어 잠그고는
홀작거리는데 그때 그만 기가 차서 나는 열을 받고
민석이란 놈이 후레쉬맨 비디오에 홀딱 빠져있을 때,
이제 그만 자자 내일 유치원 가야지 달래도 보고
으름장도 놓아 보지만 아 글쎄, 이 놈이 두 눈만 껌뻑이며
미동도 하지 않을 때 나는 아비로서 말못하게 열받는 것이다

밥 먹을 때, 아내가 바쁘다는 이유로 시장을 못 갔다고
아침에 먹었던 국이 저녁상에 다시 올라왔을 때도 열받지만
어떤 날은 반찬가지수는 많은데 젓가락 댈 곳이 별로 없을 때도
열받는다 어른이 아이들도 안 하는 반찬투정하느냐고
아내가 나무랄 때도 열받고 그게 또 나의 경제력과 아내의 생활력과
어쩌고 저쩌고 생활비 문제로 옮겨오면 나는 아침부터 열받는다
나는 내가 무지무지하게 열받는 것을
겨우 이만큼 열거법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나 자신한테 열받는다
죽 한그릇 얻어 먹기 위해 긴 줄을 서 있는 아프리카 아이들처럼
열거는 궁핍의 증거이므로

헌데
열받는 일이 있어도 요즘 사람들은 잘 열받지 않는다
열받아도 열받은 표를 내려고 하지 않는다
요즘은 그것이 또한 나를 무진장 열받게 하는 것이다

<안도현,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

2년 동안 7명의 여자들을 죽였다는 어떤 싸이코패스가 잡혔는데, 인간이라는 탈을 쓰고 짐승만도 못한 짓을 저지른 그런 자에게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철거민들이 과격 시위를 한다고 하룻밤 사이 6명의 사람을 불 속에서 태워 죽게 한 어느 경찰청장과 그런 청장을 처벌하면 어떻게 법질서를 세우겠냐고 게거품을 무는 또다른 싸이코패스들에게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친일과 독재에 부역했던 그런 자들과 같은 하늘을 이고 산다는 것 자체가 나를 무척 열받게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무기력하게 블로그질이나 하고 있는 나에게 무진장 열받는 것 또한 사실이다.

왜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는데, 세상 살기가 이리 쉽지 않은 것일까? 나는 살기 어려운 세상에 또다시 열받고 만다.

혹시 우리에게 필요한 건 배트맨?

혹시 우리에게 필요한 건 배트맨?

이제서야 광야에서 백마를 타고 올 초인을 목놓아 기다리고 있는 시인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끝없는 절망의 나락 속에서 그여 그 희미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시인의 그 애타는 마음을 알 것도 같다.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육사, 광야]

영화 Dark Knight에서 고담시의 정의로운 검사 Harvey Dent는 “영웅으로 죽든지 아니면 오래 살아남아 악당이 되는 것을 보든지” 둘 중의 하나라고 얘기했다.

WAYNE: Exactly. Who appointed the Batman?
DENT: We did. All of us who stood by and let scum take control of our city.
NATASCHA: But this is a democracy, Harvey.
DENT: When their enemies were at the gate, the Romans would suspend democracy and appoint one man to protect the city. It wasn’t considered an honor. It was considered public service.
RACHEL: And the last man they asked to protect the republic was named Caesar. He never gave up that power.
DENT: Well, I guess you either die a hero or you live long enough to see yourself become the villain. Look, whoever the Batman is, he doesn’t want to spend the rest of his life doing this. How could he?

사람들의 탐욕과 무관심 속에서 태어난 야만의 시대에 우리들은 절망했다. 앞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이육사의 그토록 원했던 초인이나 Harvey가 원했던 배트맨은 과연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인가? 이 야만의 시대를 어떻게 견딜 것인가?

차라리 영화였으면, 차라리 영화였으면 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