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owsed by
Author: 소요유

한국 마초들의 슬픈 자화상

한국 마초들의 슬픈 자화상

군가산점 부활 움직임과 한국 스포츠계의 성폭력 사태는 얼핏 전혀 다른 사안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우리나라 마초들의 위기의식과 열등감이 스며 있다.

우선 군가산점 제도부터 살펴보자. 청와대가 이미 논평을 냈지만, 취직할 때 군필자에게 부여했던 군가산점 제도는 이미 오래전에 위헌 판결이 났던 것이다. 이것은 당연히 남녀평등과 장애인 차별 금지라는 헌법적 가치에 위배되는 것일 뿐더러,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한 수많은 예비역들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다.

병역은 우리나라 남자들에게 주어진 의무다. 의무에 대해 보상을 주장하는 것도 자존심 구기는 일이지만, 만약 군 복무에 대한 보상을 주장하려 한다면, 취업 후 군대 경력을 인정해 달라고 얘기하는 것이 사리에 맞다. 또는 국가가 부과하는 병역의 의무에 동의할 수 없다면, 모병제를 주장하고, 그것을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하라.

군대를 갔다 왔기 때문에 취업시험에 가산점을 부여해야 한다는 마초들의 논리는 그 근거가 부족하다. 취업시험에서 점수가 낮게 나오는 것은 공부를 열심히 안했거나 실력이 모자라서일 뿐이지 군대를 다녀온 것과는 별 상관이 없다. 열등감이 극에 달한 어떤 이들은 여자들에게도 똑같이 병역의 의무를 지워야 한다고 설레발을 친다. 과연 그렇게 하는 것이 남녀 평등에 맞는 것일까? 그런 주장을 할 정도로 그들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철저하게 평등주의자들이고 떳떳한가?

내가 보기에 평균적으로 우리나라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훨씬 노동의 양이 많다. 맞벌이 부부만 따져 보더라도 적게는 두 배에서 많게는 다섯 배까지 아내들이 남편들보다 훨씬 가사노동을 많이 한다. 당신들의 어머니, 당신들의 아내가 감당해야 했던 노동의 수고를 곰곰히 생각해 보라. 아니 지난 주에 있었던 설연휴를 한번 떠올려 보라. 당신들의 어머니나 아내나 며느리가 없었다면 설 명절에 차례나 제대로 지냈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정말 여자들에게 병역의 의무까지 지우고 싶은가? 그리되면 정말 대한민국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언제 당신들의 어머니나 당신들의 아내가 그 노동의 댓가를 요구한 적이 있는가? 상식이 있고, 자존심 있는 남자들이라면 이런 낯뜨거운 주장은 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스포츠계 성폭력 사태는 군가산점 제도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이것은 스포츠계의 지도자라는 자들이 “지도”라는 명목으로 지속적으로 범죄를 저질러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범죄자들이 한둘이 아니고 거의 모든 종목에서 광범위하게 저질러졌다는 것이 충격이다. 이런 파렴치한 자들이 지도자랍시고 뻔뻔하게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있는 사회 풍토에 얼마나 많은 어린 여자 선수들이 절망했겠는가?

여자 선수들을 다스리고 통제하기 위해서 그 선수들과 자야 한다고? 도대체 그들의 머리 속에는 뭐가 있는 것일까? 실력 없고, 내세울 것이라고는 X 밖에 없으니 성폭력을 저질러서라도 지배를 하겠다? 여자 선수들이 무슨 성노리개감이라도 된단 말인가. 이런 사고 방식의 근간에도 마초들의 열등의식이 여지없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합리적 이성과 실력으로 여자 선수들을 지도할 수 없는 자들이니 말이다.

한국 남자들은 성차별이나 성폭력 같은 사회 문제를 얘기할 때 여자들은 타자화하고 대상화한다. 여자들은 남자들의 적이거나 또는 남자들의 상대 개념이 아니다. 여자들은 남자들의 어머니거나 또는 남자들의 아내거나 남자들의 딸이거나 며느리인 것이다. 성차별이나 성폭력은 여자들만이 당하거나 견뎌야할 문제가 아니고, 남자들의 어머니, 아내, 딸, 며느리의 문제인 것이다. 결국 남자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문제지만, 그것은 우리 모두의 문제이고 우리 모두가 극복해 나가야 하는 것들이다.

한국 남자들의 과거의 누렸던 몹쓸 권위들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 그것들을 끝까지 지켜보겠다고 마초 근성을 드러내지 말라. 그러면 그럴수록 초라해지는 것은 남자들 스스로다. 당당한 남자로 살고 싶다면 마초 근성을 버려야 한다.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우월하지 않다.

한국 남자들이 언제나 밴댕이 소갈 딱지를 뗄 수 있을 것인가.

이명박이 치명적인 이유

이명박이 치명적인 이유

2메가 또는 2MB라 일컬어지는 이명박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치명적이고 위험하다는 사실이 이번 숭례문 화재로 다시 한 번 밝혀졌다. 현대건설 사장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가 저지른 일들을 살펴보면 묘한 일관성을 발견할 수 있다. 거의 대부분의 일들이 이명박 자신의 출세를 위해 또는 남들에게 과시하기 위해 전시성으로 기획되고 “졸속”으로 추진된다. 그 전시 효과의 단물을 모두 빨아먹고 난 후, 일이 실패하기 전에 이명박은 그 자리를 떠나버린다. 정작 책임은 다른 사람들에게 떠넘기고 말이다.

이명박이 문화재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숭례문을 졸속으로 개방한 이유는 무엇일까? 흔히 알려진대로 국보 1호 문화재를 시민의 품으로 돌려보내기 위해서? 그것은 그냥 표면적인 또는 부수적인 이유일뿐이다. 진짜 이유는 숭례문 앞에서 북치는 사진 한 장을 찍기 위해 숭례문을 “졸속”으로 개방한 것이다. 그 사진 한 장으로 자신의 치적을 쌓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자서전에 한 줄 넣기 위해서 말이다.

이명박은 애시당초 문화재를 시민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니 문화재 같은 것에 아예 관심이 없었다고 해야 정확하겠지. 하지만 숭례문 개방 이벤트가 자신의 대권가도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순간 물불을 가리지 않고 밀어붙였다. 조중동 같은 신문들은 그의 “추진력”을 칭송하고 말이다. 정말 문화재를 사랑하고 그것을 시민들의 품에 돌려보내겠다고 하는 사람은 그렇게 일을 하지 않는다. 이명박은 숭례문 개방 이벤트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청계천도 마찬가지다. 숭례문 화재와 붕괴가 TV로 생중계되고 그 잔해가 끔찍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렇게 관심을 갖고 아우성치지만, 청계천 공사로 사라진 문화재 또한 숭례문 붕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명박이 과연 청계천을 복원하고 그것을 시민들에게 돌려주는 것에 관심이 있었을까? 아니다. 이명박이 관심이 있었던 것은 “청계천 복원을 이명박이 했다”라는 사실 뿐이다. 청계천 물을 한강에서 퍼올리든, 년간 운영비가 200억원이 넘게 들든 (그 돈이 자기 돈이 아닌 바에야)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저 자신의 치적을 삼기 위해 임기 내에 겉모양만 그럴 듯하게 해치워 버린 것이다. 청계천은 대권밑천일 뿐이었다.

지금 추진하고 있는 정부조직개편안은 또 어떤가. 이명박이 정말 작고 효율적인 정부조직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나? 그렇다면 당신은 정말 순진하거나 아니면 바보거나 둘 중에 하나다. 이명박은 장관 숫자를 줄이고, 공무원 숫자를 줄였다는 사실에 집착할 뿐이다. 그 부처가 왜 필요한 것인지, 왜 통합을 해야 하는 것인지, 그 부처를 없애는 것이 왜 효율적인지 따위는 사실 안중에도 없다. 공무원 숫자를 줄였다는 업적만을 갖고 싶은 것 뿐이다. 그 일의 타당성, 부작용 등은 아예 관심 밖이기 때문에 따져볼 이유도 없다.

현대 건설이 망한 이유를 아는가? 70년대 그 잘나가던 우리나라 대표 회사, 현대건설이 망했다. 그것도 숭례문 붕괴의 경우와 아주 비슷하다. 자신의 실적을 위해 수금도 할 수 없던 이라크에서 무조건 수주를 해온 이명박 때문이었다. 정작 회사가 망할 때는 이명박은 이미 회사를 떠나고 없었고, 그 피해와 책임은 남아있던 회사 직원들과 국민들이 짊어져야 했다. 그리고 이명박은 “성공한 CEO 출신의 정치인”이란 이미지만 가져갔다.

모든 것이 이런 식이다. 앞으로 경부운하도 이럴 것이고, 교육정책도 이럴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그가 여태 벌인 일들이나 앞으로 벌일 일들이 대부분 “비가역적”이라는 데 있다. 되돌릴 수 없거나 되돌리기 너무 힘들다는 것들이다. 숭례문 붕괴가 그랬고, 청계천도 마찬가지다. 현대건설도 돌이킬 수 없고, 경부운하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명박의 살아온 인생 행적을 추적해 봤을때, 이명박은 김영삼보다도 훨씬 위험하고, 전두환, 노태우보다도 치명적이다. 대한민국은 박정희 이후 최대 난적을 만났다.

3년 후 숭례문이 복원되었을 때, 이명박은 숭례문 앞에서 또 북을 치며 사진을 찍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국보 1호를 되살려 놓은 대통령”으로 박수를 받겠지? 당신들은 또 이명박을 연호하며 박수를 치겠는가? 경제만 살리는 줄 알았더니 숭례문까지 살렸다고?

독일은 나찌의 만행을 잊지 않기 위해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그대로 놔두었다 한다. 마찬가지로 숭례문도 이명박이 물러갈 때까지 복원하면 안된다. 그 처참함을 봐야 그나마 “이명박이 치명적인 이유”를 기억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들을 너무 쉽게 잊고 있다. 숭례문의 잔해는 기억상실이 일반화된 우리들을 매일 같이 각성시킬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경부운하만은 막아야 한다. 이것은 당신들과 나의 그리고 우리 자식들의 생명이 걸린 문제이다.

숭례문 화재, 당신들은 왜 눈물 흘리는가

숭례문 화재, 당신들은 왜 눈물 흘리는가

우리나라 국보 1호 숭례문에 불이 났다. 불이 나서 2층으로 된 누각이 모두 타버리고 처참하게 붕괴되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 했다. 어떤 이들은 나라의 자존심이 무너졌다며 분통을 터트렸고, 어떤 이들은 눈물을 흘렸다.

늘 그렇듯 언론들은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친다. 초동 대처가 미흡했다느니, 소화기가 8대 밖에 없었다느니, 밤에는 관리자가 없었다느니 하면서 선정적인 보도들이 난무한다. 이런 지극히 평면적인 보도들은 책임을 다른 곳으로 전가하기에는 좋을지언정 큰 도움은 안되는 얘기들이다.

블로그계에는 좀 더 차원 높은 원인 분석이 이어졌다. 조직적 재앙시스템이라는 시스템적 분석부터 예고된 화재였다는 얘기까지. 그리고 이러한 화재의 빌미를 제공한 이명박 전 서울시장에 대한 강도 높은 비난도 있었다. 다 맞는 얘기들이다.

숭례문의 화재와 붕괴는 우리 사회의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 전임 서울시장이었던 이명박이 자신의 치적을 위해 아무 대책없이 “졸속”으로 숭례문을 개방했던 것이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의 빌미가 되었다. 전시 행정, 졸속, 난개발 등 대한민국의 “천민” 자본주의가 일구어낸 성장과 성과 위주의 개발 정책이 빚어낸 결과들이다.

숭례문이 국보 1호란 사실을 제외한다면 이러한 붕괴는 낯설지 않은 모습 아닌가. 90년대만 하더라도 삼풍백화점이 무너졌고 성수대교가 붕괴되었으며, 외환위기로 나라 경제가 결딴났다. 어디 그뿐인가. 해마다 공사 현장의 사고는 끊이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그때마다 언론들은 “인재”라고 떠들었다.

숭례문의 화재에는 “경제만 살리면 된다”면서 천하의 거짓말쟁이를 서울시장으로, 또 대통령으로 뽑아버린 우리 국민들의 수준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어디 숭례문만 그런가? 청계천은 또 어떤가. 그 숱한 문화재를 다 팽개쳐버리고 시멘트로 발라버린 그 수준 또한 숭례문의 붕괴와 다름없지 않은가.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것이다. 경부운하 만든다고 우리나라 강이란 강은 모두 유린될 것이고, 수많은 문화재가 수장되거나 버려질 것이다. 또한, 우리의 말과 글도 영어몰입교육 앞에 벼랑끝으로 내몰릴 것이다.

숭례문의 화재와 붕괴는 전조일 뿐이다. 아직 본 게임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 벌써부터 눈물을 보이면 나중에는 어떻게 감당하려 하는가.

설 연휴, 우리나라 여성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설 연휴, 우리나라 여성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설 연휴의 끝자락이다. 이번 설은 주말과 이어져 긴 연휴가 되었다. 연휴가 길면 느긋하게 쉴 수 있어 좋은 일이지만, 우리나라 기혼 여성들은 그만큼 더 힘들기도 할 것이다. 명절 때만 되면 우리나라에서 결혼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 보통 고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차례 음식 장만하랴, 손님 치르랴, 하루 세 번씩 꼬박꼬박 밥상을 차리고 설겆이를 해야 하는 대부분 한국 여성들의 명절은 참으로 고되다. 오죽하면 명절 증후군이란 말이 생겼겠는가.

요즘 젊은 부부들 중에는 남편들이 제법 집안 살림을 돕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 돕는다는 차원이다. 집안의 가사노동이 자기 일이 아니고 아내의 일이지만,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에 도와준다고 얘기한다. 우리 아버지 세대보다는 나아졌지만, 가사노동을 둘러싼 우리나라 남자들의 사고방식은 좀 더 진화해야 한다. 더군다나 아내와 맞벌이를 한다면 집안 일은 공평히 분담해야 한다. 그런 마음을 먹어도 여자들의 노동 강도를 넘어서기 힘들다.

최근 서울시에서 발표한 맞벌이 여성들의 가사노동 강도를 보면 아직도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훨씬 집안 일을 많이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시 남성 대비 여성의 임금을 비교해 보면, 06년 상반기 남성의 월평균임금은 3,127,000원, 여성은 1,888,362원으로 여성은 남성 임금의 64.1%를 받고 있는 가운데, 이 같은 임금격차의 벽은 5년 전인 02년과 별 차이가 없다.

<중략>

서울시 여성의 가정관리와 가족보살피기 등의 가사노동시간은 4시간 47분(04년 기준)으로 5년 전보다 8분 줄었고, 남성은 2시간 11분으로 5년 전보다 5분이 늘어났지만, 여전히 여성의 가사노동시간은 남성의 비해 2배나 더 높다.

[서울시 ‘직장 여성, 돈 벌면서도 가사부담 여전’, 서울시청]

이것이 서울시의 평균이기 때문에 이 정도이지, 전국 평균으로 하면 여성들의 노동 강도는 휠씬 더 증가할 것이다. 2006년 말의 경우를 보면, 맞벌이 부부 중 아내가 남편보다 평균 5배 이상 더 집안 일을 많이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에 만약 우리나라 여성들이 집단 파업이라도 하면 어찌될 것인가. 제대로 차례를 지낼 수 있는 집이 몇 집이나 될까? 이번 설에도 나는 어머니가 해 주시는 음식을 꼬박꼬박 받아먹으면서 함포고복했다. 설겆이라도 할라치면 어머니는 극구 만류하신다. (이 지점이 아내와 어머니의 세대 차이가 있는 부분이다. 아내는 나의 가사 노동을 당연한 것으로 알지만, 어머니는 아들이 집안 일 하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으신다.) 미안하고 죄송스럽다.

어떤 사람들은 이명박과 그의 인수위원회가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겠다고 하자 잘된 일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내가 보기엔 아직 시기상조다. 우리나라에서 여성들이 받는 차별이 아직도 심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어머니와 나의 아내와 나의 딸이 어떠한 차별도 받지 않고 남자들과 동등하게 살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되길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당분간 여성가족부는 존치되어야 한다.

설 연휴를 고단하게 보낸 우리나라 여성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그들의 다음 명절이 이번보다는 좀 더 나은, 좀 더 편하고 즐거운 명절이 되길 바란다.

어머니와 아내에게 늘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다. (나를 포함하여) 우리나라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많은 빚을 지면서 살고 있다.

달라이 라마에게도 용서할 수 없는 게 있을까

달라이 라마에게도 용서할 수 없는 게 있을까

달라이 라마의 <용서>를 읽었을 때, 나는 그에게 무한한 존경의 마음이 일었다. 그는 용서해야만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고, 용서는 자기 자신에게 베푸는 가장 큰 자비이자 사랑이며, 용서는 가장 큰 수행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해 그가 의미하는 바를 가슴으로 느끼지는 못하지만,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가슴이 답답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가 말한 것은 예수나 부처가 수천 년 전에 이미 가르친 것들이고, 그것을 몰라서 용서를 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내게 늘 따라다니는 화두는 “도대체 내가 과연 어디까지 용서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와 “진정한 용서란 어떤 것인가”라는 그런 문제들이었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과연 내가 그 상황에 맞닥드렸을 때 달라이 라마가 말한대로 그렇게 용서할 수 있을까? 진정으로 훌륭한 성인들은 한 번도 분노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으면서 용서할 수 있을까?

정호승의 시를 읽으면서 나는 안도할 수 있었다.

달라이 라마
당신에게도 용서할 수 없는 게 있지
용서에도 연습이 필요하다고
내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한 가지 용서하면
신은 나의 잘못을 두 가지나 용서한다고
살면서 얼마나 많이 남을 용서했느냐에 따라
신이 나를 용서한다고
불쌍한 내 귀에 아무리 속삭여도

달라이 라마
당신에게도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슬픔이 있지
용서만이 인간의 최선의 아름다움이 아닐 때가 있지
내가 내 상처의 뒷골목을 휘청거리며 걸어갈 때
내가 내 분노의 산을 헉헉거리며 올라가
기어이 절벽 아래로 뛰어내릴 때
아버지처럼 다정히 내 어깨를 감싸안고
용서하는 일보다 용서를 청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용서할 수 없으면 차라리 잊기라도 하라고
거듭거듭 말씀하셔도

달라이 라마
당신에게도 결코 용서할 수 없는 분노가 있지
히말라야의 새벽보다 먼저 일어나
설산에 홀로 뜬 초승달을 바라보며
문득 외로움에 젖을 때가 있지
야윈 부처님의 어깨에 기대어
용서보다 먼저 눈물에 젖을 때가 있지

<정호승, 용서>

나약하지만, 용서보다도 먼저 분노하고 슬퍼하고 눈물 흘리지만, 그렇게 불완전하기에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하는 것이 인간일 거라는 사실. 정호승은 그것을 일깨워 주었다.

영어를 숭배하는 나라

영어를 숭배하는 나라

우리나라가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문화유산이 무엇일까? 한가지만을 꼽으라면 나는 서슴없이 “한글”이라 말하겠다. 문자를 발명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우수한 문자를 개발한다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프로젝트이다. 나는 한때 세종대왕이나 집현전 학자들이 지구인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아마 우리보다도 훨씬 문명이 발달한 어느 별에서 내려와 우리에게 문자를 만들어주고 간 별나라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상상도 해 보았다.

한겨레 논설위원 곽병찬은 다음과 같은 짧은 칼럼에서 한글의 우수성을 얘기했다.

1997년 10월1일, 유네스코가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한 문자는? 1998년부터 2002년 말까지 유네스코는 말뿐인 언어 2900여종에 가장 적합한 문자를 찾는 연구를 했는데, 여기서 최고의 평가를 받은 문자는? 유네스코가 문맹퇴치 기여자에게 주는 상의 이름은 어떤 문자를 염두에 두고 지어졌나? 지구상 100여개의 문자 가운데 제작자 그리고 제작 원리와 이념이 정리되어 있는 유일한 문자는?

문맹률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나라에서 사용하는 문자는? 일본의 오사카시는 엑스포 기념 세계민족박물관을 지어 세계의 문자를 전시했는데, 이 가운데 ‘가장 과학적인 문자’라는 설명이 붙어 있는 문자는? 언어학 연구에서 세계 최고라는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언어학대학이 합리성, 과학성, 독창성, 실용성 등의 기준에 따라 점수를 매긴 결과 1등을 차지한 문자는?

컴퓨터 자판에서 모음은 오른손으로, 자음은 왼손으로 칠 수 있는 유일한 문자는? 이동전화의 한정된 자판을 가장 능률적으로 운용할 수 있어 디지털시대의 총아로 떠오를 문자는? 발음기관의 움직임과 작용, 음성학적 특질을 본떠 만들었으며, 음양오행의 철학적 원리와 하늘·땅·사람의 존재론적 구조를 담고 있는 문자는?

〈대지〉의 작가 펄 벅이 “세계에서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훌륭한 글자”라고 평가했고, 〈알파베타〉의 저자 존 맨은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이라고 말한 문자는? 언어학자 라이샤워 교수가 “가장 과학적인 표기체제”라고, 시카고대학의 매콜리 교수는 “10월9일이면 꼭 한국 음식을 먹으며 지낸다”며 존경심을 털어놓은 문자는? 영국 리스대학교의 제프리 샘슨 교수가, 기본글자에 획을 더해 동일 계열의 글자(ㄱ, ㄲ, ㅋ)를 만든 독창성은 어떤 문자에서도 볼 수 없다고 칭송한 문자는? 그런데, 정작 그 나라 사람들은 그 귀함과 고마움을 잘 모르는 문자는?

<곽병찬, 답: 한글, 한겨레신문>

이런 훌륭한 말과 글을 가지고 있는 나라에서 정말 눈물겹게 웃기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단군 이래 최고의 거짓말쟁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가하면, 그 자의 여자 버전이라 할 수 있는 인수위원장이라는 여자는 영어 숭배 정책을 내놓고 국민을 협박하고 기만하고 있다. 이들로 대변되는 한국의 특권층이 영어 숭배 정책을 밀어붙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지금 시점에서 영어는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켜주는 든든한 무기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영어야말로 한국의 특권층이 자신들을 일반인들과 차별화하는 수단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자녀들은 이미 어릴 때부터 미국에서 유학을 했기 때문에 다른 것을 몰라도 영어는 잘 한다. 영어가 숭배되는 나라에서 영어를 잘 하는 것은 선망의 대상이고 출세의 지름길이다. 지금 이명박, 이경숙으로 대변되는 자들은 이러한 환경을 공고히 하기 위해 영어 몰입 교육이라는 교활한 카드를 빼들었다.

물론, 이 정책이 그들의 배를 살찌우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영어 숭배 정책이 실행되면 테솔(TESOL)을 비롯한 영어 사교육 기관이 행복한 비명을 지를 것은 자명한 사실이고, 돈이 없는 일반 서민들은 영어 양극화에 눈물을 글썽일 것이다. 이쯤되면 경제 때문에 이명박을 찍었다는 서민들은 자기 손가락을 자르고 싶은 충동을 느낄지도 모른다.

어느 시대든 마찬가지다. 훈민정음을 만든 세종 때에도 그 시대 기득권층은 한글 창제에 전면적으로 반대했다. 집현전 학자 최만리를 중심으로 한글이 중국문화와 제도를 따르지 않는 것이라 이유로 반대 상소를 올린 것은 유명한 일화 아닌가. 지금도 이런 생각에 젖어 있는 일부 법조인들은 법전에 있는 용어들을 한글화하는 것에 반대하고 있다. 옛날 의사들은 라틴어로 처방전을 쓰면서 자신들을 일반인들과 차별화했고, 다른 전문직 종사자들도 자신들만이 알 수 있는 전문 용어를 거침없이 사용하면서 자신들이 특권층임을 과시했다.

영어는 하나의 의사소통 수단일 뿐이다. 그것이 필요한 사람만 하면 된다. 영어를 잘 하는 것과 국가 경쟁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영어가 하나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사용되고 있고, 국민들의 그들이 벌인 사기판에서 또다시 놀아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당하고, 또 당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우매한 민중들이 가엾고 불쌍할 뿐이다. 당신들의 민도를 높이지 않으면 당신들은 언제나 특권층의 호구로 살아갈 것이다. 금모으기나 하면서, 기름에 절은 돌멩이나 닦으면서 말이다.

이명박이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이 <무소유> 란다. 정작 그 책을 쓴 법정 스님은 그 책에 있는 “미리 쓰는 유서”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고 내생에도 다시 한반도에 태어나고 싶다. 누가 뭐라 한대도 모국어에 대한 애착 때문에 나는 이 나라를 버릴 수 없다. 다시 출가 수행자가 되어 금생에 못 다한 일들을 하고 싶다.

<법정, 미리 쓰는 유서>

법정 스님은 한국말과 글에 대한 사랑 때문에 다음 생에서도 한반도에 태어나고 싶다고 하셨다. 나는 이명박이 <무소유>를 제대로 읽었는지도 의심스럽다. 이 얼마나 눈물겨운 코메디인가. 대한민국 국민들은 5년간 자신들의 무덤을 팠다.

삶과 우주에 대한 궁극적인 물음

삶과 우주에 대한 궁극적인 물음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과 자연과 우주와 아니 모든것에 대한 궁극의 답을 원했다. 이 궁극의 문제(The Ultimate Question)를 풀기 위해 “깊은 생각(Deep Thought)”이라는 컴퓨터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깊은 생각”에게 물었다. 그 삶과 우주와 모든것에 대한 궁극적인 물음, 그것의 해답이 무엇이냐고. “깊은 생각”은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 답을 얻기 위해서는 정확히 750만년 후에 다시 오라고.

750만년이 지난 후에 사람들은 그 궁극의 물음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다시 “깊은 생각”을 찾아갔다. “깊은 생각”은 대답했다. 그 궁극의 물음에 대한 답은

Forty-Two (42).

750만년을 기다린 사람들에게 42는 만족스런 답이 아니었다. 그러자 “깊은 생각”은 이렇게 말한다.

That’s not a question. Only when you know what the actual question will you know what the answer means.

더글라스 아담스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키하이커를 위한 안내서(The Hitchhiker’s Guide to the Galaxy)>는 기발한 상상력과 황당한 설정으로 우리를 유쾌하게 만든다. 이 영화는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 보다는 조금 더 가볍고 유쾌하지만, 그 기발한 농담 속에 냉소가 배어있다.

그렇다. 문제를 정확히 아는 사람만이 답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답을 알기 위해서는 문제를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앞길이 잘 보이지 않을 때는 답을 찾으려 하지 말고, 문제가 무엇인지를 곰곰히 생각해 봐야 한다.

“깊은 생각”은 괜히 “깊은 생각”이 아니다. (“깊은 생각”에 따르면 역사상 두번 째로 위대한 컴퓨터이니 말이다.)

손학규, 변절한 기회주의자는 입을 닥쳐야

손학규, 변절한 기회주의자는 입을 닥쳐야

손학규는 한때 인권 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얼마나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했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러던 그가 영국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와 교수를 하다가 민자당에 입당하여 국회의원이 된다.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인물이 전두환이 만든 민정당의 후신인 민자당에 입당했다. 그의 배신의 세월은 공식적으로 이렇게 시작되었다.

한나라당에서 손학규는 3선 의원, 보건복지부 장관, 경기도 지사 등을 두루 거치며 보수 엘리트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한다. 한나라당이 제공하는 단물이라는 단물을 죄다 빨아먹으며, 한나라당의 수구꼴통 이미지를 탈색시키기 위한 얼굴마담 노릇을 한다. 그러던 그가 지난해 이명박, 박근혜와의 대선 후보 경선에서 승산이 없자 당을 박차고 나와 버린다. “군정의 잔당들과 개발독재시대의 잔재들이 버젓이 주인행세를 하고 있는 당”이라는 말을 남기고 한나라당을 탈당했다. 손학규의 두번 째 변절이다. 그의 말처럼 한나라당은 예나 지금이나 친일과 독재의 잔재들이 주인인 그런 당인것은 분명하지만, 그런 세력과 15년 가까이 나뒹군 손학규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렇게 한나라당을 탈당했던 손학규는 정동영이 열린우리당을 깨고 대통합민주신당을 만들자, 그곳에 입당하여 경선을 치른다. 대선 후에는 급기야 통합신당의 대표가 된다. 그리고는 또다시 노무현 대통령에게 칼을 겨눈다.

손 대표는 이날 KBS1 TV ‘18대 총선 정강정책방송연설’에 출연 “대통합민주신당은 지난 대선에서 국민들로부터 정말 따끔한 회초리를 맞았다. 아쉽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했지만 당연히 맞을 매를 맞은 것”이라고 해석한 뒤 “그저 뜬구름 잡는 얘기나 하면서 귀중한 시간을 허송세월한 대가”라고 참여정부의 지난 5년을 맹비난했다.

[손학규 “대선패배는 지난 5년 허송세월한 댓가”, 데일리서프라이즈]

지난 5년 세월을 허송한 것은 정동영, 천정배, 김한길의 대통합신당이지 참여정부가 아니다. 손학규가 몸담았던 한나라당은 외환위기를 불러와 나라를 부도사태에 직면하게 만들었고,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10년 동안 국정 발목 잡기로 세월을 보냈다. 그런 당에서 호의호식하던 자가 참여정부를 비난한다는 것은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다.

손학규가 대표가 된 대통합신당은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정당이 되었다. 목표도 없고, 동력도 없고, 지지층도 없는 그런 정당이 되어버렸다. (그런 점에서 정동영은 정계를 떠나야 한다.) 지난 대선에서 패배한 것은 정동영이지 노무현이 아니다. 정동영은 노무현을 계승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노무현도 정동영을 자신의 후계자로 여기지 않았다. 설령 정동영이 당선되었다 하더라도 그도 역시 참여정부를 손학규처럼 공격했을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손학규 같은 변절자는 정계를 떠나야 한다. 떠나기 싫다면 입이라도 다물고 있어야 한다. 터진 입이라고 함부로 얘기하면 안된다. 손학규를 대표로 총선을 치른다면 대통합신당은 몰락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자업자득이 될 것이고, 한나라당이 집권한 대한민국 역시 쇠락의 길을 걸을 것이다. 이것 역시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뽑은 국민들의 자업자득이 될 것이다.

인수위, 니들부터 영어만 써라

인수위, 니들부터 영어만 써라

이명박과 (똘)아이들의 지난 한 달간 쑈를 보면 정말 눈물이 난다. 하다하다 이젠 전 과목을 영어로 수업하겠다는 정책까지 내놓았다. 국어, 국사를 영어로 가르치겠다던 이명박의 전무후무한 공약을 진짜로 시행할 모양이다. 처음에는 이들이 그냥 무개념에다가 머리만 나쁜 족속인줄로 알았는데, 인수위의 지난 한 달간의 생쑈를 보다 보니 혹시 이들이 안드로메다에서 지구로 유배된 (혹은 지구정복을 위해 파견된) 외계인들이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영어는 그냥 많이 사용되는 외국어 중의 하나일 뿐이다.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라는 말이다. 영어를 잘 하는 것이 대한민국 모든 국민들의 인생 목표가 아니다. 영어 사교육이 그렇게 문제가 된다면 영어 시험의 비중을 낮추면 된다. 아니 영어 시험을 안보면 될 것 아닌가. 외교관이 되고 싶은 사람들, 국제적으로 사업을 하고 싶은 사람들, 외국에서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 이렇게 영어가 필요한 사람들은 자기가 필요한 만큼 영어를 공부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초등학교 때부터 전과목을 영어로 가르치겠다? 누가 가르칠 건데? 초등학교 교사들 중에 전과목을 영어로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원어민을 데려오면 된다구? 교육이 단지 영어만 배우면 끝나는 것인가? 인수위의 인간들 중에 진짜 교육에 대해 아는 인간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는지 궁금하다.

그렇게 하고 싶으면 해라.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인수위부터 영어만 써라. 회의도 영어로 하고, 기자회견도 영어로 해라. 법안도 영어로 만들고, 국회에서의 싸움도 영어로 하고, 한나라당의 당무회의도 영어로만 해라. 이명박도 영어로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부시를 만나서도 통역 쓰지 말고 영어로만 얘기해라. 이게 말이 되는 얘기인가? 나는 정말 당신들의 지능지수가 의심스럽다. 이런 정책을 내놓는 인수위의 이경숙이나 이주호 같은 이들은 정말 어느 정도 영어를 잘 하는지 몹시 궁금하다.

일제 시대 일본의 우리말 말살 정책이 오사카 태생의 이명박을 통해 이런 식으로 결실을 보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세종대왕이 통탄하실 일 아닌가.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왜 나쁠까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왜 나쁠까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Bad Samaritans, The Myth of Free Trade and the Secret History of Capitalism)]이라는 책은 아주 선명하게 신자유주의자들을 비판하고 있다. 이 책은 1980년대 이후 전세계적으로 주류가 되어 버린 신자유주의 경제학이 어떤 모순을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황당한 이데올로기로 개발도상국과 후진국들을 속이고 있는지를 풍부한 증거로써 신랄하게 반박하고 있다.

나는 이런 류의 선명한 책들을 좋아한다. 주장이 명쾌할 뿐만 아니라 그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는 수많은 논거들이 일관성이 있으며, 논리적이다. 돌려 말하지 않고 핵심을 찌르고 있고, 적당히 양다리를 걸치지 않는다. 아마 신자유주의 경제학을 주창하거나 추종하고 있는 경제학자들이 이 책에 대해 논박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이 책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마지막 3페이지에서 “개명된 이기주의에 대한 호소”를 통해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설득하자라고 주장한 대목이다. 이것은 저자 장하준의 한계를 드러내 놓은 대목이기도 하거니와 상당히 순진한 주장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그런 식의 호소로 설득될 사람들이라면 사실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진짜 나쁜 이유는 그들도 알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극단적으로 추구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계화된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근본 속성이기도 하다. 우리가 가진 한정된 자원 속에서 무한의 이윤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신자유주의의 근본 모순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의 한계는 조만간 드러날 것이고, 지능을 가진 인간들이라면 새로운 대안을 생각해낼 것이다.

문제는 그 한계에 봉착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절망 속에서 허덕일 것이냐 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더 많이 고통 받고, 절망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지지 못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단기적으로 보면 세상은 참으로 불공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