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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gory: Thoughts

좋은 노무현은 죽은 노무현

좋은 노무현은 죽은 노무현

백인들이 인디언들의 땅을 빼앗기 위해 그들과 전쟁을 벌이면서 했던 말,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이다.”

한나라당 출신 손학규가 민주당 대표가 됨으로써 민주당은 자유선진당과 더불어 한나라당의 위성 정당이 되었다. 민주당 대표 손학규가 노무현 대통령 묘소에 가서 무릎을 꿇었지만, 그 모습에서 아무런 진심이나 감동을 엿볼 수 없었다. 죽은 노무현은 말이 없었고, 손학규는 여전히 기회주의자에 불과했다.

노무현은 한줌의 지지자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이들에게 불편한 존재였다. 재벌, 언론, 한나라당, 그리고 검찰 등으로 이루어진 이 땅의 특권 세력에게는 말할 것도 없었고, 아파트 한채 부여 잡고 집값 떨어질까봐 전전긍긍하던 소시민에 이르기까지 노무현은 성가시고 귀찮고 불편한 존재였다. 수구, 진보를 막론하고 노무현에게 집단 린치를 가했고, 그는 피할 곳이 없었다.

그의 진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는 철저히 고립되었다. 그는 한줌 밖에 되지 않는 지지자들에게도 너무 미안해했다. 그는 부끄러움을 아는 거의 유일한 정치인이었던 데다가 결벽증까지 있었던 터였다. 그는 쓸쓸히 스스로를 유폐시켜 갔다.

노무현이 죽자 세상은 그들이 원하던 지난 세월로 돌아가 버렸다. 사람들이 그렇게 싫어하고 욕하고 증오하던 그가 사라졌는데 정작 그들의 눈에서 행복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국민의 세금으로 강을 파헤치고 보를 세워 카지노배를 띄우겠다는 환상적 계획 앞에서도, 국민의 세금으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음향대포를 들여와도, 배추 한포기에 만오천원이 넘어 김장을 하기 힘들어도, 경포대라고 노무현을 비아냥대던 손학규가 민주당의 대표가 되었어도 사람들은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한미FTA에 대해 “좌파신자유주의”라고 게거품을 물던 진보들도 한-EU FTA에 대해서는 입 한번 뻥긋하지 않았다.

고은 시인이 노벨문학상 수상 가능성이 보도되면서 그가 쓴 <만인보>의 “노무현”이란 시가 회자되고 있다.

모든 것을 혼자 시작했다
처음에는 공장에 다니다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을 검정고시로 마친 뒤
사법고시도 마친 뒤

그는 항상 수줍어하며 가난한 사람 편이었다
그는 항상 쓸쓸하고 어려운 사람 편이었다
슬픔 있는 곳
아픔 있는 곳에
그가 물속에 잠겨 있다가 솟아나왔다

푸우 물 뿜어대며

그러다가 끝내 유신체제에 맞서
부산항 일대
인권의 등대가 되어
그 등대에는
마치 그가 없는 듯이 무간수 등대가 되었다
힘찬 불빛으로

어디 그뿐이던가
사람들 삐까번쩍 광(光)내는데
그는 혼자 물러서서 그늘이 되었다
헛소리마저 판치는
텐트 밑에서
술기운 따위 없는 초승달이었다
아무래도 그의 진실 때문에
정치를 할 수 없으리라

속으로
속으로 격렬한
진실 때문에

<고은, “노무현”, <만인보> 중에서>

고은 시인은 이미 13년 전에,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기 훨씬 이전에 노무현의 진실을 꿰뚫어보고 그가 정치를 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특권과 탐욕이 판을 치던 시대에 노무현은 이방인이었고, 그는 세상과 타협을 하거나 공존할 수 없었다. 이 시를 읽으면서 한없는 슬픔과 그리움이 밀려왔다.

세상은 그가 살아있을 때보다 훨씬 그를 후하게 평가할지도 모른다. 그의 가치를 새삼 깨달아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가 죽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에게 좋은 노무현은 죽은 노무현이기 때문이리라.

노무현은 참으로 쓸쓸한 사람이었고, 나는 그 쓸쓸함을 사무치게 사랑했다.

이런 것은 “저주”라 부를 만하다

이런 것은 “저주”라 부를 만하다

만약 화성 표면에서 일직선으로 된 무언가를 발견한다면, 인간들은 화성에서 생명체가 산다는 또는 살았다는 증거를 찾았다고 환호성을 지를 것이다. 자연과 우주는 일직선으로 된 무언가를 만들지 않는다. 어떤 생명체라든지, 아니면 초자연적인 존재의 의지가 들어가지 않는 한 그런 직선은 나타나지 않는다. 추석 연휴에 서울과 수도권에 물폭탄이라 부를만한 비가 쏟아졌다. 시간 당 거의 100mm의 비가 대여섯 시간 쏟아지니, 도시는 순식간에 물바다가 되었다. 기상 관측 이후 100여년만에 처음으로 광화문과 청계천 일대가 침수되었다. 이런 폭우를 가져온 비구름은 서울을 정확하게 조준한 폭탄처럼 보였다.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그런 구름이 아니었다. 무언가의 의지가 포함된 듯한 그런 구름이었다. 초자연적인 현상이라 할만했다. 이런 현상을 전문 용어로 “저주”라 부른다. 이 구름 사진을 보면서 나는 문수 스님을 떠올렸다. 왜 그랬을까? 추석 연휴 첫날부터 방송에 나와 찌질거리는 자가 있었고, 광화문과 청계천, 그리고 수도권에는 물폭탄이 떨어졌다. 하지만 정작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서민들만이 폭우의 피해자가 되었다. 풍성하고 즐거운 한가위가 아니라, 잊지 못할 슬픈 한가위가 되어버렸다.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는 세상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는 세상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오늘 11월에 열리는 G20 정상회담의 경제적 가치를 24조 6천억으로 예상했다고 한다. 단 이틀간 열리는 회의의 수출 증대 효과가 22조라니 아무리 야바위 세상이라고 하지만, 이건 좀 심한 것 아닌가. 도대체 어떤 근거로 이틀 동안의 회의를 통해 경제성장률을 2% 끌어올리고 일자리를 11만 2천개를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G20 회의를 일주일만 하면 1년 경제성장률을 모두 달성하고도 남는다는 말인데, 뻥을 쳐도 좀 적당히 쳐야 되지 않을까?

김연아의 동계올림픽 금메달 가치는 5조 2천억원이었고, 남아공 월드컵 16강의 가치는 10조 2천억원이었단다.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 세상이다. 그 환산 과정이란 것도 너무나 자의적이어서 초등학생조차 믿기 어려운 것인데도 기어이 돈으로 바꾸고 보자는 세상이다. 예수나 붓다의 가르침도 헌금의 액수로 측정하는 세상이니 무엇을 더 말하랴.

결국 인간들이란 마지막 나무가 사라진 뒤에야 돈을 먹고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족속들이다. 그 전까지는 끊임없이 부자 되기를 기도하고 대박나기를 기원하는 탐욕의 세월을 보낼 것이다. 필요 이상의 지나친 부는 축복이 아닌 재앙이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인간들의 자해는 계속될 것이다.

안타깝지만 어쩌겠는가. 예수나 붓다도 구원하지 못한 세상인 것을.

한겨레가 부른 “놈현”이라는 애칭

한겨레가 부른 “놈현”이라는 애칭

2주 전쯤 한겨레신문은 “DJ 유훈통치와 놈현 관장사를 넘어라“라는 글을 올렸고,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정론지를 추구하는 언론이 서거한 전직 대통령을 두고 “놈현”, “관장사” 같은 표현을 쓸 수 있는지 분노했다. 비판이 거세지자 한겨레는 편집국장 성한용의 명의로 사과문을 올린다. 성한용이라는 자가 한겨레 편집국장으로 있는지 나는 이때 처음 알았으며, 성한용이라면 능히 “놈현”이라는 표현을 쓰고도 남을 작자임을 진작에 알고 있었다. 그들이 어쩔 수 없이 내놓은 사과문에는 어떠한 진심도 발견할 수 없었다. 나는 한겨레에 대한 기대를 진작에 접은 터라 분노하지 않았고, 그에 대한 글을 쓸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 필화사건은 월드컵에 묻혀버렸고, 그런대로 마무리가 되는 듯 했는데, 한겨레는 꽤나 속히 뒤틀렸던 모양이다. 한겨레는 오늘 “놈현”을 “놈현”이라고 불렀는데 뭐가 잘못이냐, 오히려 사과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다라는 식의 칼럼을 올렸다. 이 칼럼을 쓴 언론인 김선주는 자신은 “놈현”을 노무현의 애칭으로 부른다고 했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이 여자도 성한용과 한통속임을 고백했다.

그러나 때때로 나는 ‘놈현’이라고도 말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하하는 쪽에서 놈 자와 현 자를 합해서 악의적으로 만든 말이라 할지라도 그런 것을 따지지 않았다. 나 나름의 애칭일 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불편하고 길고 어감상 매끄럽지 않다. 이명박 대통령도 ‘명바기’ 혹은 ‘이명바기’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김선주, 말조심 글조심 … 어렵네]

이런 글은 한마디로 개같은 글이다. 아니 개만도 못한 글이다. 반노들이 만들어낸 악의적인 말이라고 해놓고도 따지지 않는단다. 나름대로 애칭이라고 버젓이 일간지 지면에 써갈긴다. 김선주는 더 나아가 “놈현 관장사”라는 제목이 정곡을 찌르는 적절한 제목이었다고 말한다.

재론되는 것을 어느 쪽도 원하지 않겠지만 나로선 이 사건의 발단에서 마무리까지가 적절했다고 볼 수 없다. 그 기사를 읽었을 때 이런 반응을 전혀 예상치 못했다. ‘정곡을 찔렀네…제목 잘 뽑았네’ 했던 것이 첫 느낌이었다.

요즘 한겨레는 비판하는 많은 사람들은 한겨레를 “한걸레”라고 얘기한다. 나도 한겨레에 대한 비판 글을 많이 썼지만, 한번도 한겨레를 “한걸레”라고 표현한 적은 없다. “한걸레”라는 것이 결코 명칭이나 애칭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겨레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고, 이제는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넜다.

지난 20여년간 진보 진영의 정론지라는 타이틀을 독점해 놓고, 그들은 아무런 성과도 업적도 내놓지 못하고 오로지 조중동 따라하기만을 반복한다. 그들의 오만과 독선, 그리고 치졸함은 조중동 못지 않다. “놈현 관장사”라는 제목을 붙이고 성한용과 그 일당들은 얼마나 낄낄거렸을까. 그들의 비아냥 섞인 미소가 눈에 선하다.

그들은 노무현의 죽음을 “관장사”로 비하했다. 그런데 정작 노무현의 죽음을 팔아먹기 바쁜 족속들은 오마이뉴스나 한겨레 같은 자칭 진보 정론지들이었다. 한국 현대 정치사에 가장 위대한 인물의 죽음을 그들은 “놈현 관장사”로 표현했다.

참여정부 시절 성한용과 그 일당들의 분탕질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현직에 있을 때도 그들은 끝없이 노무현을 조롱했고, 노무현이 죽고 나서도 그들의 비하와 저주는 그칠 줄 몰랐다. 끝없는 횡설수설과 궤변도 그들의 위선을 감추지는 못했다.

김선주는 박정희는 “박통”으로 부를 수 있지만, 노무현은 “노통”이라고 부를 수 없고 어쩔 수 없이 “놈현” 또는 “노무혀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단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영어 이니셜이 아니라면 ‘박통’처럼 부르기 쉽고 적절한 이니셜을 이번에 문제를 제기한 쪽에서 마련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으면 바보라고 할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이 ‘놈현’ 혹은 ‘노무혀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으니까.

영어 이니셜이 맘에 들지 않는다면서도 그들은 김대중 대통령을 DJ라고 부르고, 이명박을 MB라 부른다. 김대중을 때중이라고 부른 적도 이명박을 쥐박이라고 부른 적도 없지만, 노무현에 대해서는 “놈현”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는 개만도 못한 족속들. 그들은 여전히 스스로 진보 정론지임을 자처한다.

이제 한겨레에 대해서는 분노할 필요도 비판하거나 비난할 필요도 없다. 분노나 비판이나 비난은 어느 정도 관심과 애정이 있을 때나 가능한 것이다. 그들이 짖어대면 그냥 개만도 못한 족속들이 짖어대는구나 하고 무시해 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다가 그들은 그냥 제 풀에 지쳐 사라질 것이다.

우리나라의 유일한 정론지는 이제 “딴지일보” 하나 남았다. 주간지로는 “시사인” 정도일 것이고.

<덧붙임>

참여정부 시절 한겨레의 분탕질을 정리한다. 아래 글들은 한겨레를 읽고 열받아 쓴 글들이다. 이제는 더이상 열받을 일도 없을 것이다.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경기를 제대로 망치는 방법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경기를 제대로 망치는 방법

아르헨티나와 우리나라의 축구 경기에서 우리나라의 승리를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르헨티나는 이겨야 본전이고, 우리나라는 져도 잃을 것이 없는 경기였다.

허정무는 정말 창의력이 뛰어난 감독이다.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경기에서 굳이 잃을 것을 만들어내는 그의 놀라운 창의력에는 스티브 잡스조차 박수를 칠 만하다. 그는 경기 시작부터 선수들이 정상적으로 뛸 수 없게 철저히 거세시키는 전술을 펼쳤다. 그리스 전에서 펄펄 날던 선수들은 온데간데 없이 모두 사라졌다. 같은 선수들을 데리고 이렇게 180도 다른 경기를 만들어내는 허정무의 능력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이번 경기에서 무려 5골이나 났어도 어느 하나 제대로 된 골이 없었다. 모두가 버벅대다가 나온 골이었기에 4대1 대승을 거둔 아르헨티나도 개운하지 않을 것 같다.

북한과 브라질의 경기도 이 경기와 마찬가지로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는 경기였다. 아무도 북한이 브라질을 이기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결과는 예상대로 2대1 브라질의 승리였지만, 북한은 그 경기에서 너무나 많은 자신감을 얻었고,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으며, 정신력의 측면에서는 오히려 브라질을 압도했다고 볼 수 있다. 더군다나 그 경기에서 나온 3골은 모두가 아름다운 골이었고, 골키퍼가 어쩔 수 없는 골다운 골이었다.

우리 선수들은 질 때 지더라도 정상적인 경기를 했어야 했다. 아르헨티나는 메시를 제외하고 그다지 강하다고 생각되지 않는 팀이었다. 물론, 경기는 상대적인 것이라 한국이 정상적인 경기를 하지 않으니 그들의 움직임이 정상적으로 나올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경기 결과를 떠나 이런 졸전의 책임은 100% 감독에게 있다. 감독의 잔머리와 온정주의가 어떻게 잃을 것이 없는 경기를 망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 허정무 이후의 축구 대표팀을 맡을 감독과 다른 나라 축구 감독들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경기라 할 수 있다.

축구는 운동 경기일 뿐이다. 질 때도 있고 이길 때도 있다. 하지만 질 때 지더라도, 어떻게 지느냐 그 과정이 결과 못지 않게, 아니 때로는 결과보다도 더 중요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최선을 다하고 즐긴다면 결과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북한과 브라질의 경기는 그런 것을 보여줬다.

조직을 이끄는 리더의 잘못된 판단과 의사결정은 조직을 쉽게 망칠 수 있다. 그것은 축구 경기뿐만 아니고, 기업이나 정부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것을 지난 2년간 뼈저리게 느끼고 있고, 어제 월드컵 축구 경기에서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나이지리아와의 다음 경기에서 허정무는 어떤 판단을 할까? 그의 결정이 자못 궁금해진다.

투표 전에 읽으면 좋은 글 3(+1)종 세트

투표 전에 읽으면 좋은 글 3(+1)종 세트

제가 쓴 글을 제가 자랑하고 홍보하기가 거시기하지만, 사실 저는 조급합니다. 이번 선거가 마지막 기회가 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기 때문이지요. 이번에도 저들이 승리한다면, 저들은 개헌 카드를 들고 나올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유시민, 한명숙이라는 대표 선수를 출전시키고도 저들을 막지 못한다면, 우리에겐 아니 엄밀히 얘기해서 우리 같은 서민들에겐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6월 2일 투표 전에 읽으면 좋은 글들을 소개합니다. 지난 총선이나 보선 때 쓴 글들이지만, 이번 선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되기에 한 번씩 읽어보시고 주위의 분들에게도 권해 주십시오. 뻔뻔하게 말씀드리지만, 세련되지 못한 표현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잘쓴 글들입니다.

1. 네 가진대로 찍어라

김규항 씨가 “네 이념대로 찍어라”라는 글을 쓴 적이 있는데, 그에 맞대응해서 쓴 글입니다. 이 글에서도 밝혔지만, 저는 이념을 믿는 편이 아닙니다. 이념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고, 또 수많은 변절자들을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누구한테 투표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면, 지금 본인이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둘러 보십시오. 답이 나옵니다.

2. 아직도 한나라당을 지지한다는 당신에게

한나라당은 아무나 지지할 수 있는 그런 정당이 아님을 밝힌 글입니다. 이 글은 농민이나 비정규직 노동자, 서민 등이 한나라당을 지지해서는 아무것도 나아질 게 없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주위에 노동자나 농민, 그리고 서민들이 있으면 한 번쯤 읽어보라고 권해 주십시오.

2-1. 새누리당을 찍는다는 것 (2012년 4월 11일 총선 전 추가)

한나라당이 새누리당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한나라당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렀던 온갖 못된 짓들에 대해 모른 척하고 있습니다. 새누리당의 역사를 추적해 본 글입니다. 새누리당을 지지하고 그들에게 투표한다는 것이 왜 역사적으로 죄를 짓는 일인지 살펴 본 글입니다.

3. 왜 서민들은 이명박을 지지할 수 밖에 없을까

소위 “계급 배반” 투표 행위에 대한 저의 짧은 소견입니다. 이명박과 한나라당은 소위 강부자로 일컬어지는 1% 특권층만을 위한 정책을 시행하는데, 아무 관계도 없는 서민들이 왜 한나라당을 지지할 수 밖에 없는지를 분석했습니다. 서민들이 이 글을 읽고, 저들이 만들어놓은 매트릭스로부터 깨어나오길 바랍니다.

이 글들을 읽고, 100명 아니 단 10명만이라도 투표에 참여해서 제대로된 주권을 행사한다면, 이 블로그의 존재의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이번이 마지막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겐 더 이상 노무현 대통령도, 김대중 대통령도 없습니다. 유시민, 한명숙이 나서고는 있지만 힘이 부치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직 투표만이 저들을 막을 수 있습니다. 투표만 잘하면 촛불을 들 필요도, 유모차를 끌고 나올 필요도, 지못미를 외칠 필요도 없습니다. 더 이상 눈물을 흘릴 필요도 없습니다. 마지막 희망입니다. 찍을 사람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놈이 그놈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나하고 상관없다고도 말하지 마십시오. 찍을 사람도 있고, 그놈이 그놈도 아닐 뿐더러, 분명 당신하고 밀접한 상관이 있습니다.

6월 2일, 당신의 미래를 위하여, 그리고 당신의 자식들을 위하여 제대로된 투표 한 번 합시다. 그리고 우리 환하게 웃어 봅시다. 희망을 만들어 봅시다. 우리들도 행복해질 권리가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젊은이들, 더 이상 투표를 구걸하지 않겠다

젊은이들, 더 이상 투표를 구걸하지 않겠다

며칠 전, 기차를 탔다. 기차 안에서 한 무리의 군인 아저씨들을 만났다. 군인들은 나이가 많든 적든 아저씨들로 불린다. 이 군인 아저씨들은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솜털 보송보송한 애송이들이었다. 어렸을 때, 군인 아저씨들한테 위문 편지를 쓸 때는 늠름하고 씩씩한 모습을 연상했었는데, 정작 군인 아저씨들은 나이 어린, 갓 피어난 청년들이었다.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들이 많은 중년의 나는, 동생 같기도 하고 조카 같기도 한 이 청년들을 보면 울컥해지고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그들은 꿈을 먹고 살아가야할 청춘이 있건만, 그 청춘은 온통 회색빛이다. 돌이켜보면, 우리 앞세대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것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빌어먹을 땅은 늘 그렇게 아름다웠지만, 현실은 언제나 척박했고 회색이었다.

예전에 나는 정치에 무관심한 젊은이들을 나무라기도 하고 원망하기도 하며 이런 글들을 썼었다.

대체로 좋은 글들이지만, 이런 글을 썼다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짓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 젊은이들이 꿈꾸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나는 모른다. 정의가 강물 같이 흐르는 세상을 원하는지, 아니면 그냥 자기 앞가림만 할 수 있어도 다행인 세상을 원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지방 선거가 1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 선거는 최근 10년 사이에 가장 중요한 선거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사실상 국민들이 제대로 투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 아름다운 강물을 지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고, 남북관계를 더 이상 파탄에 빠뜨리지 않고 전쟁의 위험을 줄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

더 이상 20대, 30대 젊은이들에게 투표하라고 구걸하지도, 강요하지도, 부탁하지도 않기로 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이다. 더러는 동의하지 않는 젊은이들도 있겠으나, 대체로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이번 선거는 단지 특정 정치 세력을 선택하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고, 어쩌면 우리 젊은이들의 목숨이 달려있는 선거가 되었다. 실감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이번 선거는 경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어 버렸다.

찍을 사람이 없어서, 또는 그놈이 그놈이니까, 바빠서, 나하고 무슨 상관인데 등등 젊은이들의 판단과 변명은 여러가지일 수 있겠으나, 객관적 현실은 그들의 판단이나 변명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인간이 신에게서 받은 가장 귀한 선물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바로 “자유 의지”이다. 우리의 내일은 곧 오늘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이다. 나는 젊은이들이 투표를 하든 하지 않든 그것은 그들의 자유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 자유로부터 생겨난 내일이 그들에게 오늘보다는 조금 더 살아갈 만한 시간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나는 우리 젊은이들이 지금보다 조금은 더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은 선택이다. 구걸하거나 부탁하지 않겠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은 깊이 생각해보라. 아무것도 아닌 권리 같지만, 그것이 모이고 모이면 결국 우리는 끝내 바다에 도달할 수 있을테니까.

이제 일주일 남았다.

마지막 나무가 사라진 뒤에야

마지막 나무가 사라진 뒤에야

어느 인디언 예언자는  탐욕에 눈이 먼 세상에 대해 이렇게 경고했다.

Only after the last tree has been cut down. Only after the last river has been poisoned. Only after the last fish has been caught. Only then will you find that money cannot be eaten.

[Cree Indian Prophecy]

마지막 나무가 사라진 뒤에야. 마지막 강물이 더럽혀진 뒤에야. 마지막 물고기가 잡힌 뒤에야. 그대들은 깨닫게 되리라. 사람이 돈을 먹고 살 수 없다는 것을.

[크리족 인디언 예언자]

사람들은 진정 무엇이 소중한지 알지 못한다. 그것을 잃고 나서야 그것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깨닫게 된다. 잃고 나서 깨닫게 된다면 그나마도 다행이다. 그것을 잃고 나서도 무엇을 잃었는지, 아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2009년 5월 23일, 그는 홀연히 세상을 떴다. 시간은 무심히 흘렀고, 어느덧 1년이 지났다. 몇몇 사람들은 슬퍼했지만, 많은 이들은 정작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닫지 못했다.

세상에 우연이란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저마다의 존재 이유를 가지고 있다.

정의라고는 눈꼽만치도 없는, 최소한의 상식조차도 버거워하는 땅에서 그는 단 한 번이라도 정의가 이기는 역사를 만들자고 했다. 특권과 반칙을 물리치자고 했다. 그의 말대로 그는 처음으로 정의가 승리하는 역사를 보여줬다.

몇몇에게는 감동이었고, 몇몇에게는 당황이었고, 그리고 몇몇 특권층에게는 경악이었다.

경악한 이들은 그를 죽여야 했다. 그가 만들어놓은 역사를 지워야 했다. 더 이상 이 땅에서 할 일이 남아있지 않았고, 더 이상 이 땅을 견딜 수 없을 때, 그는 홀로 세상을 떴다.

몇몇은 눈물을 흘렸고, 어떤 이들을 그를 욕하며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 세상은 가라앉았다. 희망이 사라지고 절망이 창궐했다. 나무들이 사라지고, 강이 더럽혀지기 시작했다. 거짓만이 세상을 헤쳐나가는 유일한 지혜로 군림했다.

세상에 우연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마지막으로 모든 것은 운명이라고 얘기했다.

사람들은 정의 보다는 돈을, 민주주의 보다는 특권주의를, 그리고 노무현 보다는 이명박을 선택했다. 마지막 나무가 사라진 뒤에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

1년이 지나도 나는 그의 사진을 보고, 그의 목소리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 그는 나에게 마지막 나무였고, 마지막 강물이었다. 그는 강물은 바다를 포기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마지막 강물을 잃은 나는 어떻게 바다에 가야할지 알지 못하고 울고만 있다. 마지막 강물이었던 그가 보고 싶다.

싱그럽게 푸른 5월은 가장 슬픈 계절이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행진곡

세상에서 가장 슬픈 행진곡

세상에서 가장 슬픈 행진곡을 들을 때면 비가 와야 한다. 하염없이 슬프게 비가 와야 한다. 죽어간 사람들의 영혼이 구천을 맴돌고, 그들의 한이 눈물이 되어 온 산천을 적셔야 한다.

30년이 흘렀어도 그들은 눈을 감고 안식할 수 없다. 그들을 죽인 자들은 끊임없이 그들을 조롱하고 비웃는다. 죽어서도 죽을 수 없는 사람들, 죽어서도 쉴 수 없는 사람들, 한때는 이 땅의 민주주의의 물줄기가 되었던 광주. 비만 슬프게 내린다.

일년에 단 한 번이라도 경건하게 듣고 불러야 할 그 슬픈 행진곡은 이제 “방아타령”으로 바뀌어 버렸다. 광주 망월동 묘지의 상석을 밟았던 자, 광주의 영령들 앞에서 파안대소 했던 자가 대통령이 되자 광주의 영혼들은 다시 울어야 했다. 세상은 잔인했고, 그리고 무심했다.

전태일, 광주, 그리고 노무현. 앞서 간 사람들.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이 슬픈 행진곡을 나지막히 불러주는 것뿐이다. 산 자들은 그들을 따를 것인가. 정녕 그들을 따를 것인가.

슬픈 비만 애처로이 내리고 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백기완, 님을 위한 행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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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날, 하루 빨리 없어져야 한다

스승의 날, 하루 빨리 없어져야 한다

지난 주말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스승의 날이었다. 스승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에서 스승의 날을 기념한다니, 이런 부조리한 블랙 코메디가 또 어디 있을까.

급진적 교육 사상가인 이반 일리히(Ivan Illich)는 그의 책 <학교 없는 사회(Deschooling Society)>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Universal education through schooling is not feasible. It would be no more feasible if it were attempted by means of alternative institutions built on the style of present schools. Neither new attitudes of teachers toward their pupils nor the proliferation of educational hardware or software (in classroom or bedroom), nor finally the attempt to expand the pedagogue’s responsibility until it engulfs his pupils’ lifetimes will deliver universal education. The current search for new educational funnels must be reversed into the search for their institutional inverse: educational webs which heighten the opportunity for each one to transform each moment of his living into one of learning, sharing, and caring.

학교를 통한 보편적 교육은 가능하지 않다. 보편적 교육은 현행 학교 형태 위해 세워진 어떠한 대안교육으로도 가능하지 않다. 학생에 대한 교사들의 새로운 태도, 교육적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의 보급, 학생들의 일생 동안 교사의 교육적 책임을 넓힌다고 해도 보편적 교육은 가능하지 않다.  새로운 주입식 교육울 추구하는 현행 추세를, 그 정반대의 제도 추구, 즉 개인의 삶의 모든 순간을 공부하고, 나누고, 돕는 순간으로 바꾸도록 하는 교육 네트워크로 전환해야 한다.

일리히는 제도화된 학교의 위험성을 고발했다. 그는 학교에는 교육이 없고, 교회에는 신과 종교가 없으며, 병원에는 치유가 없음을 꿰뚫어 보았다. 이러한 그의 통찰은 상당히 급진적이고 심오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2010년 한국에서는 일리히의 주장이 사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전세계적으로 교육열이 가장 높고, 대학 진학률이 가장 높은 나라이다. 한국의 부모들은 자녀 교육에 모든 것을 다 건 사람들이고, 자녀 교육에 관한 한 이들은 미쳤다. 교육이라고 해봤자 그들이 얘기하는 것은 속칭 “일류 대학 들어가기”뿐인데도 말이다.

한국은 대학 졸업장으로 계급이 분화되는 사회이다.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에 따라 인생의 출발선이 달라지고, 그들을 보는 눈이, 그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때문에 부모들은 자녀들의 대학 진학에 목숨을 걸고 있고, 초중고 교육이라는 것은 오직 일류 대학 들어가기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학교에서는 오직 경쟁만을 가르친다. 그것도 얼마나 시험 문제를 잘 푸느냐에 따른 경쟁. 학교에는 교육이 없고, 오직 훈육과 조련만이 있다. 아이들은 시험보는 기계, 문제 푸는 기계로 전락한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오직 이런 과정을 통해 이 나라가 원하는 인력들을 생산한다.

이런 과정을 우수하게 통과한 소수의 아이들은 일류 대학 졸업장을 가지고 사회 지배 계층으로 진입하게 되고, 이 경쟁에서 탈락한 대다수 아이들은 평생을 루저(Loser)로 살아가게 된다. 삶에 대한 열정도 없고, 고민도 없고, 성찰도 없이 그저 정글 같은 세상 속에서 저마다의 파편화된 삶을 영위한다.

한국의 학교들은 그런 인재(라고 부를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들을 생산한다. 대학은 졸업장을 미끼로 장사를 하고 있고, 중고등학교는 일류 대학을 가기 위해 견뎌야하는 훈련소이다.

도대체 이런 나라에서 군사부일체 운운하면서 스승의 날을 꼬박꼬박 챙기는 것을 보면, 하나의 거대한 정신병원을 보는 것 같다. 웃기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이 나라에 어떤 스승이 있을까? 아이들을 성적과 대학 진학이라는 올가미로 세뇌하는 스승들 외에 어떤 스승들이 있을까? 아이들에게 꽃 받을 자격이 있는 스승들이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 아니 이 거대한 집단 정신 이상과 집단 사기극을 알아볼 수 있는 스승이 존재하기는 한 것일까?

스승의 날은 이 땅의 스승들에게 가장 부끄러운 날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 날이 하루 빨리 없어지길 바란다. 아이들을 정신적 불구로 만드는 나라에서 스승의 날을 기념하는 것은 정말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엽기이기 때문이다.